제 927화
사이비들이 노린 가문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이러스와 크리아스 등등 직접적인 프리아 여신 이외에 다른 신을 모시는 가문.
즉. 이놈들의 목표는 프리아 여신을 모시는 신실한 신자들이 아닌 다른 신을 모시는 가문이다.
문제는 사이러스와 크리아스를 포함해 현재 대륙에 있는 대다수의 이교가 프리아 교단의 공식 승인을 받고 인정받은 하나의 종교라는 점이다.
프리아 여신이 태초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신을 모시는 건 개개인의 자유.
그렇기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강하게 억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사이비들은 오로지 프리아 여신 유일신 설을 내세우며 닥치는 대로 이교들을 이단으로 간주.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너무 많은 국가에서 항의가 들어와서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성국을 대표해 현재 나와 동행하고 있는 이단 심문관 힐데스노바의 표정은 반 죽음 상이었다.
그녀는 엄연히 현장파였다.
자리에 앉아 서류를 논하고 타국과 외교를 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세상에…… 차라리 몸이 고된 이단심문회 쪽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터지다니…….”
“시간을 벌긴 힘든가?”
“당장 답변을 안 내놓으면 전쟁이라도 불사할 기세입니다…….”
불화가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
“너무 많은 피가 흘렀으니까요. 성국 공인의 의지가 아니라 할지라도 타국의 이들을 설득할 증거가 부족하니까요.”
“그래서. 얼마나 시간 벌어줄 수 있습니까.”
“길어야 이틀입니다.”
“도움이 안 되네.”
그 말에 힐데스노바가 시선을 피했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상대도 이것을 노린 것 일터다.
한번 분쟁이 시작되면 그때부턴 걷잡을 수 없어질 테니 말이다.
“너무 촉박한데…….”
“시간이 필요해요?”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이닥쳤다.
“교수님.”
앨리스 대주교.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헙! 앨리스 대주교님! 저, 저는 이단심문회 정교 3군단 지, 집행관!”
“소개는 됐어요. 어차피 저는 입적을 아카데미로 옮겨서 이렇게 격식을 받을 입장이 아니니.”
“하…… 하지만!”
“정교 심문회는 언제나 당당해야 합니다. 아닌가요?”
싸늘한 앨리스의 말에 그녀가 움찔거렸다.
“죄송합니다. 평소 존경하던 분을 봬서 저도 모르게…….”
힐데스노바의 말에 앨리스 교수가 고개를 돌렸다.
옅게 붉어진 뺨을 보니 상당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하셨죠.”
“그렇죠. 분쟁이 발생하기 전에 그놈들 싸그리 박멸해야 하는 건 사실이니까.”
담담한 내 말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참 눈치가 빠르다.
“처음부터 저를 염두에 두신 거였네요.”
“편한 대로 생각하세요.”
“나흘, 그 정도 시간을 벌어 드리겠습니다. 가능합니까?”
“충분합니다.”
앨리스와 내 대화에 힐데스노바가 눈을 크게 떴다.
“저, 두 분 무슨 말씀이신지…… 핫! 설마?!”
놀란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 나흘 만에 저들을 잡으실 거란 말씀이십니까?!”
“그런데요?”
“어떻게요?!”
“어떻게긴요. 잘.”
내 대답에 힐데스의 시선이 앨리스에게 향했다.
“제게 묻지 마세요. 전 시간을 벌어다 줄 뿐이니. 그 후의 일은 왕자님이 하실 일이고.”
“그 이상 바라진 않습니다. 교수님.”
“그거면 됐어요.”
내 대답에 힐데스노바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하다못해 저들이 이단심문회와 비슷할 뿐 다른 존재라는 것만 입증하면 대륙의 불화를 효율적으로 잠재울 수 있을 텐데…….”
“아마 그건 힘들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등을 돌렸다.
앨리스 대주교가 나서서 시간을 벌어준다면 그 안에 잡을 수 있다. 용병들에게 의뢰도 맡겨놨겠다. 하나하나 팔다리 잘근잘근 씹어먹고 마지막에 머리통을 뽑아버리리라.
“힘들다니요?”
“둘 다 같은 계통이니까. 뿌리가 같고 사용방식만 다르지 결국 같습니다. 파고들면 다른 게 보이기야 하겠지만…… 그걸 증거로 채택해서 보여주기엔 너무 미약해요. 말장난에 가까운 짓이니까.”
간단히 말해서 식칼을 들고 고기를 찌르던가 썰던 가에 대한 차이다.
결국, 결과는 달라도 이걸로 성국의 결백을 입증할 순 없었다.
“그게 무슨?!”
“그러니까 적이 나쁜 놈이다 입증할 게 아니라. 성국에서 책임지고 이놈들이 범인이니 처벌합니다 라고 공표하는 게 더 유익할 겁니다.”
당황한 힐데스노바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내가 웬만해선 기도 메타 잘 안 하는데.”
씁쓸하게 웃으며 나는 이번 사태를 정리한 서류들을 스윽 훑었다.
이놈들의 행동반경은 두 가지다.
무자비한 이단심판과. 나와 관련된 이의 습격.
지금으로선 그들에게 이단이나 다름없는 요시아 한 명을 공격한 게 전부.
솔직히 말해서 저쪽이 선공을 가지고 저쪽이 숨어서 움직이는 한 이쪽에서는 무조건 대응하는 식의 반응밖에 해줄 수가 없다.
머리가 좋은 여자다.
단순히 힘과 복수에 미친 인물인 줄 알았는데 굉장히 영리하게 치고빠지기를 잘하고 있다.
그탓에 나는 이미 다수의 왕국에 있는 이교 가문의 참사를 제때에 막지 못했다.
반신이나 돼서 이런 거 하나 해결 못 하고.
내가 저들에 대해 잘 모르고, 그들이 나를 조사해왔다는 것에서 이런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새삼 반성해야 할 일이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놈들.
단순히 광신도기질 때문에 이교도를 이단으로 몰아 심판하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직감도 직감이지만. 그들의 힘이 이질적일 정도로 너무 강하다.
별자리의 힘을 부여받은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천칭궁은 거헤궁처럼 막대한 힘을 보유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즉.
현재 날뛰고 있는 사이비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힘을 끌어다 쓰고 있다.
‘왜 심판하는 영혼을 찢어놓는 거지?’
이단심판의 방식이 다른 것을 제외하면 뿌리는 같다.
즉 이들이 사용하는 신성 마법은 내가 아는 그 심판계통의 마법이 맞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영혼을 이렇게 갈기갈기 찢는다는 건 굉장히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굳이 하나도 남김없이 찢어발겼다?
단순히 악행의 정도를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마치…….
영혼을 찢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조용히 생각하던 내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가만, 이것 봐라?
나는 습격을 당한 이들의 역학 조사서를 보던 중 씨익 웃어보였다.
이들에게 또 하나의 공통점이 보였다.
모두 참사를 겪기 전 자신들의 신을 모시는 제사나 의식을 진행했다는 점이었다.
사이비들이 노린 대상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말이다.
어떤 이들은 사이러스를 모시는 의식을 진행했고, 어떤 귀족가문은 크리아스의 성야제를 치렀다.
어떤 이는 세례를 받았고, 어떤 이는 주기 집회에 참석해 대규모 예배를 했다.
모시는 신이 모두 같진 않지만, 이들 모두 살해당하기 전 각 종교의 의식이나 제사를 진행했다는 게 확실히 보였다.
“그래. 거기서 힘을 얻은 거라 이 말이지.”
천칭궁은 본체의 힘도 약한 괴이쩍은 별자리.
그만큼 화신들이 힘을 얻는 방식도 굉장히 이질적이고 독특하기 그지없다.
내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 * *
앨리스 대주교와 약속한 나흘 중 사흘이 흘렀다.
“사흘이 지났어요! 왜 아무것도 안 하시는 거예요!”
나를 찾아온 힐데스노바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성국은 나와 신뢰 관계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어느 정도 손을 잡고 있는 편이다.
게다가 이번 사태의 경중이 워낙에 무거운 터라 성국에서는 내가 도와주기를 바라는 눈치이기도 했다.
물론 그 대가가 싸진 않겠지만 이쪽에서도 돕겠다 입장을 표명한 바 있기에 그들은 이번 사태의 해명 전권을 내게 맡긴 편이기도 했다.
그런데 앨리스가 약속한 대로 벌어준 시간 나흘 중 사흘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갈 수밖에.
“지금 상황…… 모르시는 거 아니죠?”
“잘 압니다.”
“그런데 왜 이러고 계신 건가요?!”
“…….”
“아,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해서. 저도 답답해서 그래요. 성국에서 당신과 이야기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성국은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당신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고요.”
그녀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매달렸다.
“나흘이라구요! 안 그래도 꼬리도 안 잡히는 그놈들을 잡는데 고작 나흘밖에 없는데 지금 사흘째 아무것도 안 하고 계시잖아요.”
“그렇죠?”
“당신을 돕고 지원하기 위해 이단심문회 3개 군단과 성기사 1개 사단이 당신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모두가 신성력을 발현한 이들, 그 수만 무려 500이 넘는다.
급기야 그녀가 내게 매달린다.
“제발 도와주세요. 성자님! 이대로 가다간 대륙 내에 더없는 분쟁이 발생할 거에요.”
첫날은 하늘을 보며 느긋하게 놀았고, 두 번째 날은 에반젤린의 검술과 마법을 가르쳐주느라 하루를 잡아먹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참다못한 힐데스노바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에이리아를 품 안에 가두듯 안은 채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뜨개질을 하는 것을 구경했다.
보통이라면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게 맞지만 반대로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뜨개질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좀 알겠어요?”
“어, 어렵긴 하네.”
“헤헤. 조금만 더해보면 익숙해지실 거에요.”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귀를 쫑긋거리자 귀의 끝이 닿은 내 턱이 간지럽혀진다.
“성. 자. 님!”
“귀 떨어진다.”
“지금 이럴 때가!”
덜컥!!
그때 문이 열리며 시종장 베르닐이 나를 찾아 왔다.
“저하.”
“어떻게 됐어?”
“저하의 생각대로입니다. 저하께서 의뢰하셨던 용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좋아.”
동시에 내가 뜨개질하던 것을 내려놓고 에이리아에게서 떨어졌다.
“데이비 오라버니?”
“미안. 뜨개질은 다음에 또 하자.”
“기도할게요. 언니들이 무사하기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할 거야.”
곱게 웃으며 내게 다가온 그녀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녀를 조용히 안아주자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내 뺨에 제 입을 맞췄다.
“맛있는 쿠키를 준비해둘게요.”
“기대할게.”
사흘.
나흘 중에 사흘을 잡아먹었다.
그런 만큼 밥값은 해야지.
“힐데스노바 집행관”
“예……예?”
“슬슬 움직이자.”
“하루밖에 안 남았는데요?”
“그러니까.”
내 미소에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북부왕국의 거대한 숲.
고대 유적지가 많이 분포한 이 숲은 자연의 기운이 강한 곳이기도 하다.
철컥!!
고풍스러운 성기사단의 갑주를 입은 남녀가 도열해있다.
그리고, 그렇게 도열한 남녀의 앞에 단발을 한 한 소녀가 바위 위로 올라섰다.
“신께서 함께하사 우리의 앞에 심판이 있기를.”
“심판이 있기를!”
소녀는 조용히, 그리고 경건하게 기도를 읊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마가 있으매. 그 마를 벌할 불길을 일으키시옵고.”
“고통과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들을 위해 단죄의 칼날을 내리시옵소서.”
“아아, 나의 주여. 나의 증오와 분노, 원망을 들으시옵소서.”
모두가 입을 모아 기도를 읊기 시작했다.
동시에 전원의 육신에 새하얀 신성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심판의 업을 이루고 지옥으로 떨어질지라도.”
“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이 몸 불살라 이뤄내겠나이다.”
“당신이 내린 사명을 위하여. 멈추지 않고 다시 불길을 피워올릴지니.”
“그 화염은 말을 불태우고, 우리의 증오를 집어 삼켜주시옵소서.”
조용한 기도와 함께 증오의 굴레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침묵한다.
“다들 알 겁니다.”
그녀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이단들이 이곳에 있는 유적에서 대규모 의식을 진행한다는 것을요.”
모두가 침묵했다.
“이단을 처단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며 최종 목표로 향하는 길 중 하나입니다. 이번에도 힘을 보충하지 못하면 저희는 본래 목적을 이뤄낼 수 없습니다.”
그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두려워 하지 마세요. 데이비 올 라운은 서부대륙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니 이단을 처단하고 힘을 얻는 과정에서 그 누가 방해해도 우리의 적수는 되지 못합니다.”
그녀가 도끼를 높이 들어 올렸다.
“비록 이 일이 끝나고 우리가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멈추지 말고 나아가세요.”
그렇게 선언한 그녀가 말한다.
“진입하겠습니다.”
함정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없다면, 그 누가 와도 자신들을 막을 수 없으리라.
분대별로 나뉜 심판자들이 빠르게 숲속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소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이번 일이 끝나면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지겠지.”
그녀의 눈이 증오와 살기로 번뜩였다.
“하지만 그것은 너 또한 마찬가지다. 데이비 올 라운. 네가 먼저 지옥에 떨어지건, 우리가 먼저 지옥에 떨어지건. 결국은 순서의 차이일 뿐.”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가 도끼를 높이 들어 올렸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막대한 신성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성국의 대신관, 교황조차 이뤄낼 수 없는 초고위의 신성 마법이 그녀를 필두로 사방에 흩어진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 위로 금빛의 천칭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빠르게 진입하는 검은 사제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은발의 소녀가 스태프 초월의 종언을 가볍게 틀어쥐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그들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잘도 숨어다녔구나.”
“적?! 어떻게 이곳에?!”
그들의 외침과 동시에 마나를 끌어 올린 은발의 소녀. 페르세르크는 희고 고운 손가락을 하늘 높이 가리키듯 들어 올렸다.
화르르륵!!
동시에 그녀의 손끝을 타고 새파란 화염구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데이비가 그대들 때문에 괴로워했음이니. 그 원인이 어찌하였건 그대들을 절망케 만든 업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일 터.”
어떤 사정이 있건 데이비가 저들의 가족을 죽인 건 사실이다.
데이비는 그 사실을 괴로워했다.
죽인 이가 어떤 인간이었건 이들에겐 소중한 가족이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더욱 화가 난다.
“그렇기에 본녀는 그대들을 더욱이 용서할 수가 없음이니.”
[8서클 화염계]
[프로메테우스]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게다.”
“고위 마법?! 방비하세요!!”
그 말과 함께 페르세르크의 푸른 화염이 폭격하듯 그들을 향해 떨어졌다.
* * *
넓은 지도. 그리고 그 위로 놓인 흰색과 검은색의 말이 보인다.
“선공은 너희들이 가져갔지. 기꺼이 흑마를 내어주마.”
지도에서 옅은 빛과 함께 검은 체스 말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한다.
반면 데이비의 앞에 놓인 백색의 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숲에 발을 들인 시점부터 너희들은 함정에 빠진 거다. 그리고,”
함정임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사흘 동안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시시각각 움직이는 검은 체스 말들을 보며 데이비는 차가운 미소를 띄웠다.
그의 눈이 붉은 안광이 마치 드라이아이스의 연기처럼 일렁거렸다.
상대는 모종의 힘을 이용한다. 생명력만큼은 엄청난 요시아를 한번 죽일 정도였으니까.
그렇기에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존재를 제하고 일리나나 페르세르크. 혹은 그 외에 다른 이들만 보내는 건 굉장히 위험한 짓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선택을 내렸다.
그들이 무언가 비장의 한 수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10위계 초월 신성 마법]
데이비의 손끝을 타고 막대한 신성력이 쏟아져 나오면 상상도 못 할 정교함의 신성 마법이 펼쳐진다.
“언젠가 너와 나 둘 다 언젠가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나는 지금이 아니야.
차갑게 웃어 보인 데이비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백색 말의 [퀸]을 끼웠다.
그리고.
천천히 들어 올린 뒤 거침없이 지도의 한쪽에 말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치이잉!!!
동시에 말과 지도가 마주한 부분에서 새하얀 빛이 일렁였고, 마치 전자 회로판의 전선처럼 빠르게 지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네가 내 손바닥 위에 있는지. 내가 네 손바닥 위에 있는지는 까보면 알겠지.”
상대가 보이지 않는 기이한 체스판의 말들이 데이비의 손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스 한판 둬보자고.”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유적을 중심으로 한 숲속으로 대규모의 인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