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31화
쿠우웅!!!
대여섯 발의 신의 중지 손가락이 적중하고 거대한 빛에 휩싸인 그녀가 그 빛에 완전히 집어 삼켜졌다.
그녀가 나를 피해 공작을 벌인 것은 제법 좋은 판단이기도 했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정확히는.
내가 죽이기도 전에 사라졌다.
대신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새하얀 빛으로 된 거대한 무언가였다.
“화신이 다 죽으니까 급해졌나?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의 수모를 겪을 텐데.”
내가 그놈들을 찾아가 원천봉쇄하기 쉽지 않듯 저놈들도 일정 힘 이상 이 세상에 간섭하기 쉽지 않다.
당연히 공짜는 없다고 저렇게 현신까지 하는 건 끝장을 보겠다는 뜻 같은데.
파스스스스…….
이윽고 거대한 백색의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 천칭궁의 현신체가 나를 바라본다.
“꽤 중요했나 보네.”
제 몸 깎아 먹으면서까지 그녀를 살린 걸 보면.
20여 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체구. 제 몸보다 거대한 날개와 두 개의 팔.
두 개의 새의 다리.
새와 다르게 인간이 새의 가면을 쓴듯한 형태.
천칭궁의 형태는 저런 형태였던 모양이었다.
일전에 오딘에게서 받은 석판을 해석해서 알아낸바 놈의 본 형태가 저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프리아 여신의 천칭.
공평함과 공정함을 관장하는 별자리.
신성력을 다루는 존재.
사실상 가장 내게 협조적이지 않을까 생각되는 존재였으나 이놈은 최악의 형태로 나와 접촉했다.
그녀를 데리고 내게서 벗어나려 드는 천칭궁 리브라를 향해 내가 손을 뻗는다.
동시에 놈의 전신에서도 밀리아와 격이 다른 신성 마법이 펼쳐진다.
힘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본체가 힘을 사용한다는 점, 그리고 신성력을 넘어 신력이 섞인 힘으로 신성 마법을 발현한다는 점에서 장난치는 건 물 건너간 셈이다.
나와 싸우기보다는 밀리아를 데리고 도망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밀리아를 이대로 살려 보내면 반드시 추가 피해자가 나온다.
복수에 미쳐버린 그녀는 내게 해가 되는 것이라면 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도 서슴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이대로 보낼 순 없는 노릇이다.
“체크메이트를 쳤으면 이겨야지 놓치는 게 무슨 개쪽이야.”
[디스펠]
쩌적!! 쩡!!
나를 향해 날아드는 빛의 기둥 중 대다수가 바스러지듯 흩어지지만 몇 가닥은 남아 내게 날아들었다.
전부 디스펠하기엔 상대의 격도 높았다는 뜻이리라.
스리슬쩍 피해내며 내가 파고들었다.
홍단이와 청단이가 순식간에 융합되듯 모여들며 긴 장검으로 변했다.
당연히 내 접근을 막기 위해 수차례의 성화포가 날아들었지만.
[거헤궁 권능]
[반탄]
충격을 역으로 되돌려주는 힘. 게자리 거헤궁 켄서의 힘을 먹어치웠던 나는 이것을 자주 방어 용도로 사용하곤 했다.
다만 본래 거헤궁의 반탄은 물리 힘을 튕겨내는 정도였지만 포식의 권능으로 뒤섞이며 내게 맞게 변질된 반탄은 지속시간은 본래 권능보다 짧아도 마법 계통 또한 충격을 튕겨내는 습성을 지녔다.
설마 신성 마법까지 튕겨낼 줄 몰랐는지 녀석이 거대한 빛의 날개를 펄럭이며 내게서 급히 벗어나려 한다.
거 체크메이트 뜻을 전혀 모르시네.
[마령검 82초식]
스스슷…….
콰득!!
하지만 내 공격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빛덩어리가 순식간에 터지듯 퍼져나가더니 거대한 황소 인간의 형태로 변했고.
당황한 듯 주춤거리는 천칭궁 리브라의 목을 잡아 그 자리에서 힘으로 꺾어버린 것이다.
파스스스스스…….
저항할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스러져 사라지는 리브라. 그리고 그런 리브라를 끝장내버린 빛으로 만들어진 황소 인간을 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금우궁 타우르스.”
그동안 안 보이더니 어디서 제법 힘이 늘어났다.
리브라의 목을 꺾어 비튼 타우르스는 조용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목구비가 없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나는 검을 거둬버렸다.
“…….”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이 나를 향해 손을 뻗더니 대뜸 한 손으로 따봉을 날리고는 다시 흩어지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뭐야 쟤.”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제 동족에게 살해당해버린 리브라의 빛이 꺼진다.
놈의 위치는 파악할 수 없지만, 밤하늘만 봐도 천칭자리의 별이 한둘씩 힘을 잃어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놈이 가지고 있던 힘이 세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나는 본능적으로 그 힘을 향해 손을 뻗은 후 포식의 특성을 사용했다.
거헤궁의 절삭과 반탄도 제법이지만 리브라의 천칭도 상당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금우궁 타우르스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거대한 폭발의 여파.
그리고 그 여파의 중앙에서 쓰러진 채 입자화되듯 바스러지고 있는 밀리아의 모습이었다.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 천칭궁이 그녀를 데려가지 못했다.
게다가 천칭궁이 보내주던 힘조차 사라졌으니 일반인의 힘으로 치명상을 견딜 순 없었으리라.
“오…… 라…… 버니…….”
쓰러진 채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은 그녀가 천천히 침묵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그저 지켜만 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막대한 힘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줄 수단이 사라진 탓에 그녀의 생명력이 서서히 분해되면서 영혼까지 갈기갈기 찢겨 흩어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남은 것은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뿐이었다.
“죽은 겁니까?”
이윽고 정리가 끝났는지 이단심문회 집행관 힐데스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
“이 한 명 때문에 대체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긴 건지…….”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겉보기엔 아직 어린 소녀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거병 하나를 들고 수많은 기사와 인간들을 학살해왔다.
“잔당은?”
“당신의 지휘대로 철저하게 몰아붙여서 모조리 섬멸했습니다. 살려둬 본들…… 그들의 미래는 좋지 않을 테니까요.”
굉장히 잔혹하기 그지없던 과거의 이단심문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생포하는 게 너희에게 이득일 텐데?”
“이단 심판은 엄연히 죄를 뒤집어쓰는 겁니다. 저희라고 좋아서 사람을 베고 죽이는 게 아니에요.”
“많이 변했네.”
“당신 때문에 많이 바뀌었죠.”
“그 생각을 유지하는 게 좋을 거야. 뭐든 과하면 안 좋거든.”
이단심문회건 눈앞의 시신이건.
결국, 과해서 끝이 좋지 않아진 것이니까.
“고생하셨습니다. 이단의 시신은 저희 쪽에서 수습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아마 저렇게 끌려간 밀리아를 포함한 리브라의 화신들은 모두 시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미래는 좋지 않을 것이다.
그들 손에 죽어간 이들이 너무도 많았으니 말이다.
잘 쳐 줘봐야 공적으로 처형하고 그 목을 효수하는 정도.
시신을 처형하는 게 무슨 이유가 있냐 묻는다면 부관참시와 다를 게 없다.
“읏……/”
“부상?”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저항이 거세서……/”
힐데스는 자신의 팔에 생긴 큰 상처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가만히 있어.”
담담하게 말하며 그녀의 팔을 걷어붙이자 그녀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허둥지둥거렸다.
하지만 곧 내 손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빛이 그녀의 상처를 치료하자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상위 회복마법…… 후유증도 남지 않겠군요.”
“운 좋은 줄 알아. 조금만 늦었으면 신경이 다 상해서 팔을 못 썼을 거다.”
“그렇게 은퇴하면 그것도 나름 명예군요.”
“정신 나갔지 그냥.”
내 말에 그녀는 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만. 천칭궁의 힘이 이런 거라면 몬스터는 대체 어떻게 불러온 거지? 아니. 그놈들이 부른 게 맞나?
* * *
천칭궁 리브라의 힘을 빌려 대륙에 혼란을 일으켰던 이들이 소탕되었다.
각국에서는 이번 사태의 주동자가 모두 잡혔다는 사실에 시선을 끌어모았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이 긴장된 분위기를 억지로 중재하고 있던 앨리스 대주교 덕분에 큰 문제가 생기진 않았지만 이제 사후처리 문제로 여러 복잡한 일이 남아있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성국이었다.
어떤 이유로던 프리아 여신의 신성 마법을 사용한 그들이다.
그 탓에 프리아 여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금이 갈 수밖에 없는 사건.
그렇기에 성국에서는 직접 가해자가 아닐지라도 피해자에게 보상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헤헤 고마워요오. 교황께서도 꼭 좀 전해달라고 했어요오.”
말끝을 늘어뜨리는 맹한 소녀의 말에 나는 중앙 회의장을 빠져나오는 바리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바리스는 이제 국외 문제에 관해서도 크리아네스 국왕을 대신해서 참석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국왕 자리를 물려줄 준비를 한 것이다.
물론 이 사태의 원인에는 그들이 내게 원한을 품었다는 사실이 존재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애써 숨겼다.
그것을 알리는 순간 별자리에 대한 것도 까발려질 것이고 내 쪽에도 상당히 시끄러울 수밖에 없으니까.
만약 이 일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땐 돌이킬 수 없는 문제로 번질 테니 나로선 입을 다무는 게 최선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페르세르크는 괜한 우려를 표현했지만, 그것을 구태여 내게 언급하진 않았다.
그 일에 관해선 마치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언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일 이후 복잡한 마음이 든 페르세르크와 일리나는 에이리아와 다리안을 데리고 지구로 놀러 가버렸다.
굳이 다른 세상을 내버려 두고 지구로 자주 가는 이유는 지구의 문명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가능하면 타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는 간편한 문을 만들면 좋겠는데.
지금으로선 차원의 벽을 열 수 있는 건 나 하나가 전부이니 당분간은 불편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 받았던 차원 열쇠는 이미 소용을 다 했고 지금에 와서 문을 여는 건 오로지 내 신격으로 이루어진 권능이 전부였다.
천칭궁 리브라 이후 별자리들에 대한 소식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 일 이후 나는 혹여나 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귀찮더라도 석판을 해석하는 데에 신경을 쏟았다.
애초에 석판을 빠르게 해석했었다면 이렇게 복잡한 일이 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쉽지 않네…….”
쓰고 있었던 투명한 뿔테안경을 툭! 내려놓으며 나는 석판에 쓰여진 문자를 옮겨적은 종이들을 바라보았다.
며칠간 방이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종이를 써 내려갔다.
모조리 다른 방식으로 해석을 시도한 결과였다.
막상 각 잡고 해석을 시작했는데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누가 알기라도 했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오기를 불태우게 만든 셈이다.
하지만 오기가 붙는다고 해결했으면 이미 해석하고도 남았으리라.
“이게 다 머리만 써서 그래. 망할, 페르가 지구로 냉큼 튀어버린 게 이것 때문이었나.”
안 되겠다 싶어 벌떡 일어난 내가 눈을 부릅떴다. 뭐든 다른 곳에 집중할 게 있다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울 자신이 듬뿍 솟았다.
지금까지 해석한 건 12궁의 이름뿐이었다.
[보병궁 아퀘리스] [쌍어궁 피시즈] [백양궁 에리즈.] [금우궁 타우르스] [쌍자궁 제미니] [거헤궁 켄서] [사자궁 레오] [처녀궁 비르고] [천칭궁 리브라] [천갈궁 스콜피오] [인마궁 세지테리우스] [마갈궁 캐프티콘]
지구에서도 익히 알려진 황도 12궁.
그것과 동일한 이름이다.
하지만 이들을 총괄하는 별의 수호자도 존재했다.
[중앙성 조디악]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이것만 알아내는 데에 며칠 밤낮을 새서 해석해냈다.
빌어먹을 난이도의 언어가 아닐 수 없다.
애초에 편히 쓰고자 만들어진 언어가 아닌 언어 자체에 힘이 서린 문자니 당연한 일이다.
정작 알아낸 건 없고 네임드만 싸그리 알아냈다. 그러니 점점 짜증만 치솟을 뿐이었다.
한번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하는데 문자만 보면 토가 나온다.
그래도 내가 누구던가. 데이비 올 라운이다. 빌어먹을 그 회랑의 영웅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 제자.
내게 포기는 없다.
“저하. 팔란 제국의 황제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어요. 기한은 일주일…….”
덜컹!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코트를 걸친다.
“저하?”
“그래. 부른다는데 가봐야지. 암.”
절대 포기하고 도망치는 게 아니다.
* * *
“솔직히 일주일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바로 찾아오실 줄 몰랐네요.”
“때마침 한가했습니다.”
“한가해요? 제가 듣기로는 왕자께선 연구 때문에 바쁘시다고…….”
“한가합니다. 황제 폐하.”
“……아, 예.”
내 단호한 대답에 그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사실 석판 해석에 지쳐서 도망쳤다곤 말 못 한다.
“쿡…… 서부왕국의 명국에서 들여온 차입니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녹차랑 비슷한데. 제법 괜찮네요.”
“녹차?”
“그런 게 있습니다. 그보다 그냥 일로 부른 건 아닌 거 같은데요.”
“아 그게 말입니다. 그냥…… 일리나가 잘 있는지 궁금해서요.”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대충 으쓱여 보였다.
“부인 셋 전부 다 절 버리고 도망가버렸습니다.”
페르세르크. 내가 석판 해석을 도와달라고 할까 봐 냉큼 도망가버렸지.
처음엔 그냥 놀러 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얼마 가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신의 언어로 이루어진 고어를 해석하다 보면 머리에 스팀이 팍팍 치솟는 건 거의 정해진 수순이었으니 말이다.
“에반젤린 공녀는 차가 마음에 드십니까?”
“네에. 정말 멋진 향이에요. 좋은 차를 대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내 곁에 앉은 에반젤린이 예쁘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살리반이 만족스러운 듯 아주 옅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실은 에반젤린 양에게 줄 선물이 있습니다.”
에반젤린에게? 갑자기?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자 그가 고갯짓했다.
그러자 고풍스러운 문이 열리며 팔란 제국의 시종장이 정중한 자세로 들어와 손에 들려진 커다란 상자를 내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선물입니다. 에반젤린 공녀. 한번 열어보시겠습니까? 가급적이면 바로 확인해주었으면 좋겠군요.”
“선물이요? 우웅…….”
에반젤린이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고 상자를 개봉했다.
그러자 그 안에 휘황찬란한 빛을 머금은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그것을 본 에반젤린이 눈을 반짝였다.
“예쁘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눈을 반짝거리며 기뻐하는 에반젤린의 반응에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그냥 주는 거 아니죠?”
일국의 황제가. 갑자기 나를 불러놓고 에반젤린에게 귀한 검을 선물로 준다?
그와 내가 마냥 막역한 사이라면 몰라도 살리반 황제와 내가 그렇게 허울 없는 사이가 아니라는 건 그도 나도 아는 사실이다.
서로 같은 목적 아래에 협력하는 사이일 뿐 이렇게 갑자기 선물하고 하하 호호 웃으며 떠드는 사이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검을 선물해준다?
척 봐도 굉장히 귀해 보이는 검인데?
내 시선에 살리반 황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