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33화
263. 수르트가 숨긴 그곳
박살 났다는 한마디에 살리반 황제도, 드워프도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 이게 무슨 소리요! 부러졌다니! 검이 부러졌다니!”
“에반젤린의 검술을 봐주던 중 에반젤린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파열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공간에서 상자를 꺼내 열어주자 그가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검이었던 것. 즉 검 조각들을 보며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저 부러진 것이라면 마법 검이 아닌 이상 다시 제련해 이어붙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작은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져 버리면 수리도 할 수 없다.
아무리 검이라는 게 소모품식 무기가 많다지만 수천 년이 흘러도 멀쩡한 칼디라스 같은 신검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냥 소모품이라 생각할 순 없다.
눈앞에 있는 드워프는 자신이 벼린 검이 그런 칼디라스처럼 수천 년이 지나도 멀쩡할 그런 검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그의 생각은 일부는 들어맞았다.
그가 만든 검은 보통 검 이상으로 오랫동안 그 강대한 힘을 잃지 않을 테니까.
어지간한 오러에도 버틸 것이고, 이도 잘 나가지 않고 혈액에 의해 검이 무뎌지는 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재료가 보통이 아닌데 당연한 일이렷다.
“말도 안 돼!! 그게 어떤 검인데!! 그걸 어떻게 만들었는데!!”
비명을 지르며 내 멱살을 잡고 탈탈 흔들어 대는 그는 당장이라도 통곡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내가 만든 그 검이 불완전했단 말인가…… 그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창문으로 뛰어 내려버리는 그를 내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자 살리반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버려 두세요. 늘 저러는 영감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슬쩍 돌려 창밖으로 뛰어 내려버린 그를 보자 미리 기다렸다는 듯 몇몇 인간과 드워프가 푹신한 매트를 준비해놓고 뛰어내린 그를 받은 뒤 포승줄로 꽁꽁 묶어 끌고 가는 게 보였다.
“…….”
“그나저나 무기가 박살 났다니 그건 좀 의외군요. 에반젤린 양이 무기를 그렇게 험하게 다룰 거라곤 생각을 못 했는데 말입니다.”
“험하게 다뤘다기보단 검이 너무 약하네요.”
“하하…… 그 정도 국보급 검이 약하면 다음엔 신검이라도 가져와야 할까요.”
“에반젤린의 힘이 조금 독특한 편이라서요.”
“한데. 무슨 일로 다시 찾아오신 겁니까? 단순히 검이 부러졌다고 말하러 오시기엔 꽤 먼 거리일 텐데요.”
어차피 선물 받았으니 검을 베는 용도로 쓰건 장식용으로 쓰건 혹은 불쏘시개로 쓰건 그건 에반젤린의 자유다. 이렇게 검이 부러졌다고 찾아올 이유가 없다는 소리였다.
“수르트의 미궁을 돌파하는 것 말입니다. 제가 도와드리죠.”
“예? 아아…….”
“뭐, 검도 부러졌으니 물리는 것도 안될 테고. 관심도 가네요.”
처음부터 불량품을 줬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미스릴 검 자체는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문제는 성장한 에반젤린의 기운이 검에 담기엔 너무 흉포하다는 게 문제일 뿐.
사실은 무조건 그 안에 있는걸 확인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제가 말씀드린 사항은 변경되지 않아요. 왕자.”
“비공식적인 접근이기에 라운 왕국이 공식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건 없다는 말씀이시죠.”
“예.”
“뭐, 두어 개 정도만 챙기면 됩니다.”
그게 횡령죄로 묶인다면 묶일 순 있지만 언뜻 보면 말장난에 가깝다.
팔란 제국이 도움을 요청한 건 라운 왕국이 아닌 데이비 올 라운 그 한 명이었으니까.
단순 의뢰라고 치부하면 정치적으로 묶어가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팔란 제국 내의 사유재산을 어떻게든 땡겨온 셈이니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였다.
“팔란 제국 내부에서 개별적으로 조사하다가 결국 저를 부른 이유는 자체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겠죠?”
“사실 관련 귀족들 사이에서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안 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데 내가 뭘 요구할지 어떻게 알고 도움을 청하겠는가.
본래라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그럼에도 요청한 것은.”
“인명피해가 막심합니다. 이 이상 제국의 인재들이 희생당하는걸 볼 수 없었을 뿐입니다.”
“제가 거기서 큰 걸 요구하면 어쩌시게요.”
“딱 하나만 약속해주시면 됩니다.”
“하나?”
“다른 건 몰라도 수르트의 역작은 저희에게 넘겨주십시오.”
거기 역작이라고 할만한 게 있나.
있건 없건 그 안에서 내가 바라는 건 역작 같은 게 아니었다. 그가 그토록 숨기고 싶어 한 것일 뿐.
“뭐. 알겠습니다. 다만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그걸로 문제가 터지지 않기를 바라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아주자 그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천일야장 수르트가 대체 뭘 숨겨놨기에 이렇게까지 과격한 함정을 설치했는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 *
수르트의 미궁이 발견된 곳은 대륙의 중앙호수의 인근이었다.
괜한 논란이 될 수 있기에 조사대원은 소수 정예로 준비된 모습이었다.
다수의 학자와 마법사. 그리고 대장장이들이 호수 인근의 작은 동굴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아빠! 던전이에요?”
“그래. 던전이네.”
겉보기엔 자연동굴이다. 하지만 그 내부는 조금 달랐다.
던전의 위치가 애매하게 틈 사이에 있는 것은 아무래도 근방을 거닐던 사람들이 우연찮게 발견한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응? 어린애? 누구야 대체 이런 곳에 어린애를 데려온 게.”
“쉿 말조심해. 괜히 경칠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터라 누구인지 알아보지는 못하는 듯 팔란 제국의 기사들과 학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정지. 이 이상 들어가시면 곤란합니다. 소속을 밝혀주십시오.”
이윽고 던전 입구 쪽으로 향하는 나를 보며 기사 하나가 다가와 헬버드로 막아섰다.
“소속이라. 이걸 보여주면 된다고 하던데.”
내가 품 안에서 작은 미스릴 패하나를 건네주자 심드렁하게 패를 확인하던 그가 눈을 부릅떴다.
“헙! 화…… 황족의 인증패! 실례했습니다. 명령은 전달받았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성자님.”
“수고하세요.”
잔뜩 경직된 얼굴로 외친 기사를 뒤로한 채 던전 입구로 들어가려 하자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륙의 성자? 세상에. 겉보기엔 정말로 마나가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군…….”
“그 곁에 있는 아가씨는…… 호오, 대단한데? 저렇게 어린데 벌써 익스퍼트라고?”
“저 정도면 우리 황녀저하와 비슷한 수준이 아닌가.”
“세상에…… 저 나이에 저런 마나를 가지는 게 가능한 건가…….”
내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에반젤린은 익스퍼터 최상급. 혹은 마스터의 벽을 넘기 직전이다.
게다가 그녀의 종족 특성 때문인지 그 힘이 몇 배로 더 흉포하게 퍼져나오는 터라 사람들이 제대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던전의 내부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손이 탔다는 흔적은 확실히 남아있었다.
살리반 황제가 기를 쓰고 이 수르트의 미궁을 공략하려는 이유는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이 미궁 안에 수르트의 역작 중 하나가 잠들어있다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의 진짜 역작이라고 해봐야 신검이나 태초의 섬광. 혹은 홍단이 청단이의 원형이 전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 어서 오세요. 왕자.”
“황제께서 여기서 있으면 정사는 누가 봅니까?”
“상황만 확인하고 바로 돌아갈 참입니다. 우선 인사하시지요. 여기 황실 마법사장 간다브 경입니다.”
“대현자께서 그토록 극찬하시던 마나의 길을 지배하는 분을 뵈어 영광입니다. 6서클의 간다브라 합니다.”
“데이비 올 라운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간다브 경. 이쪽은 제 여식인 에반젤린 올 라운입니다.”
내 소개에 멀뚱멀뚱 주변을 보던 에반젤린이 조심스레 양손으로 로브 자락을 잡으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에반젤린 올 라운이에요!”
“허허 정말 쾌활한 공녀님이시군요. 아 아직 왕자께서 20세가 되지 않아서 아직 공녀님은 아니신가요?”
“뭐 칭호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내 말에 간다브는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데이비 왕자님. 혹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제 연구실에 한 번 초대해도 되겠습니까? 마나의 길을 지배하시는 분께 꼭 자문을 구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크흠! 간다브 경. 사담은 나중에 하도록 하지요.”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흥분해서.”
그가 껄껄 웃어보였다.
“그리고. 이쪽이 학회장인 아인츠 백작. 그리고 이분은 이미 만나 보셨지요? 황실 수석 야장이신 할파스 님입니다.”
그가 수염이 길고 두꺼운 드워프를 내게 소개했다.
그와는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에반젤린이 부숴 먹은 미스릴 검을 벼려낸 장인이 바로 그였으니까.
“흥!”
그는 자신의 검을 박살 낸 원흉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내게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할파스 경.”
“끄응…… 할파스요.”
그가 마지못해 손을 내밀자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반갑습니다. 할파스 경. 안 그래도 골고다 장로님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으잉?! 그 노망난 영감탱이가 아직도 살아있었수?”
그가 진심으로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흐음…… 헌데. 그 양반은 왜 오지 않은 게요?”
“골고다 장로께서는 다른 작업에 몰두하고 계셔서 말이죠. 야장기술에 대한 문제는 제가 직접 나설 겁니다.”
“왕자가 말이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돌아보았다.
“흐음…… 어차피 내가 다 하면 되니 상관없겠지.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방해하면 용서하지 않을게요.”
“하하. 그러지요.”
그의 말투는 굉장히 거칠고 공격적이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실력이 어떻든 그에 대해 골고다 장로와 동생인 골다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영감탱이 말이오? 어우 말도 마시오. 성질이 얼마나 고약한지.]
[다만. 그렇다고 해도 그 실력은 진짜일 겝니다. 물론, 은사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겠지만. 그의 야장술에 대한 집념과 열정은 드워프 모두가 존경하고 있소.]
[다만 실력이 없는 이가 함부로 작업하는 것에 대해 광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노친네요.]
단순히 누구를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모쪼록 문제없이 해결하도록 하지요.”
“흥!”
다시 콧방귀를 뀐 그가 이내 에반젤린을 스윽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뜯어보듯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말했다.
“그래. 내 검을 부숴 먹은 아가씨가 이 아가씨요?”
“앗! 죄…… 죄송해요. 제가 미숙해서…….”
“기사들 말을 들어보니 익스퍼터라던데. 이 일이 끝나면 팔란 제국에 머무르시게. 새로 하나 만들어줄 테니.”
그의 말에 에반젤린이 허둥지둥거렸다.
“앗…… 괘…… 괜찮아요. 아빠가 하나 만들어주신다고…….”
“으잉? 아빠라면…… 성자를 말하는 겐가? 흐음…… 잔말 말고 기다리시게! 초보가 만든 것보다는 훨씬 더 좋은 것을 만들어줄 테니!”
그는 반론 따윈 듣지 않겠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버렸다.
“성격이 조금 괴팍하긴 하지만 이해해주세요. 그는 과거에 안 좋은 사고를 당한 경험이 있어서.”
보통 드워프 사이에선 내가 어떤 인간인지 소문이 퍼져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어디 산에서 막 내려오기라도 한 건지 전혀 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확실히 골고다 장로도 그를 못 본 지 십수 년은 되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물론 이 일은 드워프를 제외하곤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기도 했다.
발광석을 치워 올리며 조사대원을 뒤따라 한참을 그렇게 걸어 내려갔을까.
이미 몇 차례 돌파를 했는지 열린 문을 지나 들어갔을 때 나는 거대한 석실 너머에 있는 문을 볼 수 있었다.
“앞에 3개의 관문을 돌파하는데 너무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시간도 몇 년이 걸렸구요.”
그의 말에 나는 거대한 석벽으로 이루어진 벽면을 볼 수 있었다.
수르트가 만들었다고 하기엔 조금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다. 다른 이가 같이 작업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깁니다. 이곳에서 조사대가 무려 6개월을 소모했습니다.”
6개월이라.
그 말에 나는 조용히 석벽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석벽에 손을 들이밀었다.
“자…… 잠깐!!”
이에 조사대원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그그그그그그그극!!!!
거대한 문에서 큰 소리가 들리며 벽면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젠장! 다들 경계 준비!! 쉴더들이 전방을 막고 마법사가 타격을 준비하라!”
기사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제정신이오?! 아무거나 함부로 만지다니!”
몇몇이 기겁하며 소리 질렀지만 나는 담담하게 벽면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쿵!!!
이윽고 벽면이 갈라지며 빛을 머금은 거대한 스톤골렘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톤골렘? 보아하니 알고 계신 모양이던데. 이미 몇 차례 나타났던 겁니까?”
“그렇습니다. 닥치는 대로 침입자를 배제하고 박살 난 골렘들은 마법적인 힘에 의해 다시 모여들어 재생하지요. 문제는 그 골렘을 희생을 치러 막아낸다 해도 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살리반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마법이 가미된 스톤골렘이라면 이들이 이렇게 애를 먹을 것도 없었다.
하지만 피해를 감수하며 저것들을 처리해도 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이만한 마법이 유지되기 위해선 엄청난 촉매나 그에 준하는 마법진이 기반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분하게도 제 지식으론 이 벽면의 마법을 어찌할 방법이 없더군요.”
간다브 경의 말에 나는 눈을 감았다.
“계속해서 부활한다라…….”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에반젤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