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34화
“네?”
“마나가 흐르는 게 보여?”
“우웅…….”
내 물음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골렘을 노려보았다.
“마나가 흐르는 게 보이냐니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데이비 왕자님?”
사람이 눈으로 전기가 흐르는걸 볼 수 있는가.
가능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퍼지는 마나가 아닌 세부적으로 세밀하게 흐르는 마나를 보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시력에 마나를 강하게 퍼뜨려 정밀하게 조절할 필요가 있다.
티오니스의 기사들이 마나를 다루는 방식과 천중원의 무림인들이 마나를 다루는 방식은 상당히 다른 축에 속한다.
둘 중 어느 쪽이 우위다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걸 고안한 놈은 천중원의 마나를 다루는 방식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지간한 마법사나 기사도 할 수 없지만. 내게서 무공도 배운 에반젤린은 할 수 있는 방식.
그렇기에 그녀가 보지 못하는 건 말이 되지 않으리라.
“파란 물줄기…….”
“흐름 중에 퍼지는 구간이 있을 거야. 전부 봉해버려, 아빠가 가르쳐준 점혈을 응용하면 돼. 할 수 있지?”
“그게 무슨?! 설마 저 내부에 숨겨진 마나의 흐름 자체가 육안으로 보인단 말입니까?!”
경악하는 기사들을 무시한 채 에반젤린을 조용히 바라봐주자 그녀가 해맑게 웃어보였다.
“네!”
잔뜩 의욕이 들어간 대답을 하며 그녀가 빠르게 골렘에게 뛰어들었다.
“위험합니다! 익스퍼터 혼자서 단신으로 돌격하면!”
서걱!! 쩌저저저적!!
거대한 골렘의 머리까지 점프한 그녀의 눈이 한차례 반짝거림과 동시에 그녀가 마치 검무를 추듯 회전하며 골렘을 섬광처럼 훑고는 지상에 내려섰다.
그녀를 공격하던 골렘이 부서진 것은 아니었다.
수차례 찌르고 베었음에도 상처하나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겉보기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왔음에도 그들은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처는 없는데.
골렘이 마치 줄 끊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멈춰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 신호로 알리듯 에반젤린은 기사들이 방어하고 있는 골렘의 뒤를 점하듯 높이 점프해 순식간에 섬광이 되어 골렘들을 난자했고 이내 대부분의 골렘들이 마치 동력이 끊긴 것처럼 굳어버렸다.
“이게 무슨?!”
경악한 기사들의 중얼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에반젤린은 총총걸음으로 내게 뛰어와 해맑게 웃어보였다.
“아빠 나 잘했어요?”
“그래. 잘했어.”
“데이비 왕자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검기로 부수기도 쉽지 않다.
소드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로도 잘 잘리지 않는 마법처리가 된 스톤골렘이 너무 허무하게 멈춰버리자 믿을 수가 없다는 모습들이었다.
“마나의 흐름을 잠시 끊어놨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안 움직이겠죠.”
“한데 왜 골렘이 추가적으로 나오지 않는 겁니까?”
간다브가 눈을 번뜩이며 내게 매달리듯 물어왔다.
“어떤 경우건 직접 제어하는 게 아니면 조건이 걸려요. 제가 볼 때 골렘이 추가되는 조건은 앞서 활성화된 골렘들의 핵에서 나오는 마나 파장이 모두 침묵했을 때.”
대상의 몸에 흐르는 마나를 감지하고 거기에 충격을 가해 동력을 끊어버린다.
메인 동력은 멀쩡하지만, 그 힘이 흘러가는 통로가 충격을 받아 동결되었다는 소리였다.
즉. 에반젤린이 저놈들을 전신 마비로 만들어버렸기에 죽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더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점혈 방식을 손가락이 아닌 검으로 해낸 것이다.
홍단이를 이용하면 부숴버리는 거야 쉬운 일이지만 에반젤린에게 연습할 대상이 된다면 굳이 부술 이유가 없었다.
골렘의 공격에 대비해 잔뜩 긴장하고 있던 이들은 한 명이 추가됨으로써 뭐가 상황이 역변해버리자 쉬이 믿기지가 않는 듯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침묵하는 거대 석문에 다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처음과 다르게 문은 고요하게 침묵했다.
“봐요. 더 나오지 않죠?”
“…….”
“정말…… 대단하군요. 세상에 천재들만이 볼 수 있다는 마나의 흐름을 보다니…….”
정확히는 체질이지만 노력하면 가능한 게 이런 영역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기사나 마법사들은 모를 뿐이다.
“골렘을 순식간에 막은 건 좋습니다만…… 이 문은 어찌해야 할까요.”
“힌트는 없었습니까?”
“실은 처음 이 던전에 진입했을 때 문을 강제로 부수면 내부가 매몰되어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을 거라는 경고문은 본 적이 있습니다.”
용의주도하긴.
나는 기묘한 마나의 파장이 느껴지는 문에 손을 올려놓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양반이 대체 뭘 숨기려고 이렇게 한 것일까.
힌트 하나 없는 문이지만 나는 그 문양을 조용히 살펴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문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문이 옅게 공명하기 시작한다.
6개월간 팔란 제국 최고의 조사원들이 끙끙대며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그게 단번에 풀릴 리 없다고 생각하는지 몇몇은 굴러들어온 돌인 내 행동을 그리 고깝게 보지 않았다.
대부분 젊은 마법사들로 치기 어린 마법사들이었다.
자신들과 나이도 비슷한데 대륙에서 워낙에 유명하니 질투심이 솟기라도 한 것일까.
그들은 내가 들리지 않게 속삭인다고 조용히 저들끼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게 그렇게 손으로 짚는다고 되는 게 아닌데.”
“장로님들이 6개월 동안 고생한 게 그렇게 손만 짚는다고 열릴 리가 없지.”
“어허! 이놈들 조용히 하거라.”
간다브 경이 내게 들리지 않게 꾸짖지만 그들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간다브 경. 솔직히 이건 그라도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을까요?”
“맞아요. 솔직히 저는 폐하께서 그를 너무 고평가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하고…….”
“쯧쯧. 질투심에 눈이 멀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다. 데이비 왕자는 마법적인 면에서 대현자 헬리슨 발레스티아 님도 경외하는 분이시다. 나이가 비슷해 보인다고 상대를 깔보는 못된 버릇은 당장 뜯어고치거라.”
“쳇. 하지만 이번 건 마무리해도 안될 겁니다.”
“이봐. 볼슨. 내 장담하는데 저렇게 한참 있다가 돌아설걸? 은화 20개를 걸지.”
“나도 20개.”
“킥킥. 솔직히 누가 반대쪽에 걸겠어. 나도 30개. 아니 70개 걸지.”
지들끼리 돈을 거는 그 대화가 안 들린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품 안에서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살리반 황제에게 건네주었다.
그도 저들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저 멍청한 것들이…… 팔란 제국을 대표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왕자.”
“아닙니다. 그보다 폐하. 저도 저기 돈이나 걸어봅시다.”
“예?”
“저는…….”
그그그그그극!!!
“2분 내로 열린다에 전부 걸죠.”
그 말과 함께 마법사들의 얼굴에 얼이 빠졌다.
그럴 수밖에.
그동안 고생고생해서 그들이 열어 보려 갖은 수단을 써왔는데 안 열리던 문이. 내가 잡자마자 몇 분 만에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절대 불가능하다며 일단 부정하고 보던 저 치기 어린놈들이 불쌍하긴 하지만…….
그건 저놈들 사정이고.
쿠웅!!!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 크흠.
“이…… 이게 무슨?!”
간다브는 이제는 황홀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왕자님! 부디 제게 어떻게 여신 건지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천일야장 수르트가 마나를 무기에 담는 대단한 사람인 건 맞겠죠.”
“예? 그게 무슨 소리…….”
“근데 그 양반이 직접 마나를 마법사만큼 다루느냐 하면 그건 아닐 거라는 겁니다.”
그 말에 그가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워낙에 고도의 마법 트릭이 걸려 있어서 마법적인 처리가 끝나야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들이었다.
“그럼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야장이 혼자서 이곳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마나를 직접 다뤄서 문을 여는 방식은 아닐 겁니다.”
그 말에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 점은 저희도 이미 조사를 해본 바로…….”
“누구도 들이지 못하면서 마나를 쓰지 못하는 수르트도 가볍게 열 수 있는 방식.”
내 말에 그가 떨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조건을 분석하신 거군요. 그럼 대체 정답이 뭐였습니까?!”
“몰라요.”
“예?”
간다브 경이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냥 마나를 동화시켜서 쑤셔 박아 분석하고 강제로 제어한 것뿐입니다.”
마치 해답을 맞춘 것처럼 인식하도록.
…….
그의 표정에 얼이 빠진다.
“가, 강제로 해제했다고요?”
“네.”
“그…… 그럼 방금 설명은 도대체 왜…….”
그의 의문에 나는 간단하게 답하며 걸어 들어갔다.
“그냥 그런 구조였다고요. 열 수 있다면, 굳이 정답에 맞춰서 열 필요는 없죠.”
내 말에 간다브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미궁을 만든 이는 무려 7서클 마법사입니다. 왕자님.”
“네. 알아요.”
“아신다고요?”
“네. 7서클밖에 안 되니까 이렇게 푸는 거지 8서클만 돼도 이렇게 날로 해제 못 합니다.”
내 대답에 그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정신 차리세요. 간다브 경. 대륙 최고 마법사 수준인 7서클 마법사를 두고 ‘밖에’라고 표현하는 인간은 저 인간뿐일 겁니다. 얼른 더 들어가 보죠.”
그 마음 안다며 살리반 황제가 간다브 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 예예…….”
* * *
언제 어디서 함정이 나오고 적이 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데이비는 마치 이곳을 아는 것처럼 너무 느긋하게 진행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지나가면서 함정이 있는 부분을 콕 짚어 피하라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하며 지나갔다.
그동안 어떤 방식으로도 이렇게 빠르고 쉽게 복도를 진행한 바가 없다.
하지만 데이비 올 라운 단 한 명이 끼이면서 모든 게 변해버렸다.
그렇게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복도를 모두 지나쳤을 때.
조사대는 거대한 석상이 문을 지키고 있는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고요한 문은 좀 전 길을 막던 거대한 문과 흡사했지만 조금 달랐다.
이번엔 거대한 새 가면의 석상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락받지 못한 침입자여. 그대가 천일야장 수르트임을 입증하라.]
“그게 무슨…….”
데이비가 일정 거리까지 오기가 무섭게 석상이 천천히 움직이며 말한다.
이에 학회장 아인츠 백작이 눈을 찡그리며 석상에게 물었다.
그러자 석상은 다시금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허락받지 못한 침입자여. 그대가 천일야장 수르트임을 입증하라.]
“틀리면?”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리라.”
석상의 대답에 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럼 문제나 말해봐.”
[문제다. 천일 야장 수르트의 어릴 적 이름은 무엇인가.]
그 말에 주변에서 술렁임이 들려온다.
모를 수밖에. 수르트는 수르트다.
하지만 수르트의 어릴 적 이름을 묻는데 수르트라고 답했다간 문제가 터질 것 같았다.
[대답하라. 대답하지 못하겠다면 물러가라. 도망치는 자는 잡지 않을지니.]
거대한 창을 든 새 머리의 석상의 말에 간다브가 학회장 아인츠 백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자료 조사가 필요하겠군요. 천일야장에게 다른 이름이 있었다니 이건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학회장 아인츠가 깔끔하게 모른다고 선언해버렸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폐하. 우선은 조사대를 잠시 물려야 할듯하옵니다. 신이 최대한 빠르게…….”
-헤파이스.
그때였다.
가만히 석상을 바라보던 데이비가 입을 열었다.
[……다음 문제. 천일야장의 첫 여인은 누구…….]
-페니실리아 백작가의 독녀. 루시드 페니실리아. 자세하게 설명해줘? 첫눈에 반해서 대뜸 찾아가서 추파 던지다가 시원하게 따귀를 맞았고. 정확히 98번의 구애 끝에 수르트에게 질려버린 페니실리아 백작 영애가 그에게서 도주했다.
[도…… 도주했다는 말은 틀렸…….]
“야. 사기 지치마. 깃털 뽑아서 튀겨버리기 전에.”
[…….]
“다른 이야기도 해줘?”
그 말에 모두가 다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
“너, 인공자아구나? 7서클 마법사치고는 제법이네.”
데이비의 말에 석상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우와! 우리 아빠 짱 멋있어!”
사실이 어떻건 에반젤린은 그저 즐거운 표정이다.
[지나가라!]
“저…… 정답이라고? 정말로?!”
이건 마치…….
그가 살았던 인생을 지켜본 이가 아니면 맞출 수 없는 문제가 아니던가.
오래전에 소실된 정보나 사실 하나를 찾고 증명하기 위해서 수많은 연구와 조사를 병행해야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모조리 생략되어버렸다.
그런데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불러온 데이비라는 인간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을 리 없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으로 내놓았다.
결국, 석상은 문을 천천히 열어주었다.
하지만 두 짝의 문중 한쪽만 열어주었다.
[그대들이 원하는 야장의 보물은 이 안에 있을지니.]
그것을 보며 데이비가 차갑게 비웃음을 던졌다.
“그래.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고.”
석상은 데이비가 한 말의 뜻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