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38화
회랑에 소속된 영웅은 회랑에 소속됨으로써 얻은 힘을 이용해 주기적으로 어떤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이 기억으로 이루어진 어떤 생명체일 수도, 또 어떤 물건일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오딘이 내게 건네준 초월의 종언, 그리고 내 전용무기가 된 신창 롱기누스나 신궁 브류나크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초월의 종언이나 브류나크와 다르게 롱기누스는 재료가 되는 헬릭시윰을 구현한 것이지만.
“쿠억…… 컥…….”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수르트는 내 앞에 검은 묵빛의 금속괴를 내려놓았다.
“벌써요?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니 그칼 거 같아서 미리 준비해놓고 있었다 아이가. 얼른 가지고 가삐라.”
지친 얼굴로 그가 주저앉은 채 말했다.
“더 없어요?”
“읎다!!”
“아쉽네. 어쨌든 헬릭시윰 고마워요. 그럼 화로 좀 빌릴게요.”
“아니. 니 내 미궁에 가 있는 거 아니었나.”
“맞죠?”
“거기 드가라. 거기 화로도 쓸만하니께.”
“뭐하러 귀찮게 거기 화로를 씁니까. 그냥 여기서 만들어서 가져가면 되지.”
내 말에 그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니. 롱기누스 만들고 거기서 구현할 때 바로 꺼낼 수 있드나?”
그의 물음에 나는 탄성을 흘렸다.
이제 와서 권능의 일부를 내가 가지고 있기에 아공간의 물건을 주기적으로 현신시킬 수 있다지만 굳이 그런 피곤한 일을 하는 건 그리 좋지 않다.
완성된 것과 괴로 존재하는 것을 현신시키는 건 그만큼 차이가 크니 말이다.
“그라고 말이다.”
그가 천천히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동시에 내 뒤로 균열이 일어난다.
“누구 염장 지르나! 얼른 가삐라!”
퍼억!!
그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나를 걷어차 균열 속으로 던져버렸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한 번만 더 헬릭시윰 요구하면 니 죽고 내 죽는 기다 알긋나!”
“뭐, 참고할게요.”
잔뜩 열 받은 그를 보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 * *
살리반 황제는 팔란 제국 내의 반란의 사후처리를 위해 먼저 돌아간 듯 보였다.
그 외에 다수의 인원이 죽고 다치거나 빠져서 분위기가 뒤숭숭했지만, 작업실에서 작업하고 있는 할파스 경과 그의 조수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망치를 두드리고 있었다.
“음…… 남 작업하는데 들어가서 불협화음 내긴 그런데.”
“뭘 찾으십니까?”
“아뇨. 손이 좀 심심해서. 망치라도 두드릴까 하고요.”
“아. 그런 거라면 저쪽에 있는 빈 작업장을 이용하시는 건 어떨는지요.”
한 기사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반쯤 지하에 파묻힌 낡은 작업실이 보였다.
“뭐…… 잘 모르는 제가 봐도 저긴 상태가 별로 좋…….”
“딱 좋네요.”
수르트도 저 지하에서 작업하다가 작업실의 위치를 바꾼 것 같은데 차라리 잘되었다.
있을 거 다 있고, 반쯤 땅에 묻힌 곳이라면 방해도 덜 받겠지.
“아빠! 뭐하시는 거예요?”
“우리 딸 줄 검을 만들어줄게.”
내 말에 에반젤린이 눈을 반짝였다.
“안 부서지는 거로.”
헬릭시윰의 최대강점은 막대한 내구성이다.
반대로 단점은 그것 말곤 없다는 점과 한번 가공하다 실패하면 재가공이 영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엄청난 문제가 있지만 그런 건 처음부터 계산하고 있었다.
“후우…….”
차갑게 식은 화덕을 보며 짧게 숨을 들이켠 나는 마법처리가 된 장작을 던져 넣은 뒤 불을 피웠다.
과거와 다르게 정교하고 강력하며 정순한 화염을 일으키는 건 이제 그리 어려운 요소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초고열의 화염이 피워 올려진다.
헬릭시윰은 한번 화염에 녹았다가 식어버리면 화염에 절대 내성을 지닌다.
즉.
한번 식는 순간 이놈의 장비는 가공이 불가능해진다는 소리다.
초고열의 상태에서 모양을 잡고 내부를 다듬고 날까지 세워야 한다는 소리였다.
미친 소리일 수도 있지만, 이놈의 헬릭시윰 괴는 그렇기에 절대적으로 단단한 금속이기도 했다.
그러니 보통 담금질의 방식. 달구고 익힌 뒤 물에 넣어 식힌다는 공정 과정을 모조리 버려야 한다.
“잘 봐둬. 언젠가 아빠가 가르쳐줄 테니까.”
“와아…… 네!”
내가 작업하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신기한 듯 화로를 구경하는 그녀였다.
그전에 방해는 못 하게 해야지.
[8서클]
[공간 마법]
[커스텀 스페이스]
우웅!!
진입을 틀어막고 마법적인 방어도 완벽하게 만든다.
화르르륵…….
그리고는 필요한 장비들만 먼지를 털어낸 뒤 집어 들었다.
헬릭시윰의 장점이자 단점.
그 마지막.
가공 가능시간이 매우 짧다는 것.
그리고 여러 요소를 뒤섞어 완성되는 순간 그 무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신창 롱기누스는 무게가 수십 킬로그램이지만 처음 그놈을 가공하기 전 사용한 괴는 고작해야 10킬로그램 정도였다.
파스스스스…….
빠르게 열을 올리는 화염 속에 집게를 집어 헬림시윰 괴를 밀어 넣은 뒤 마나를 흩뿌렸다.
화르르륵!!
동시에 붉은 화염이 푸른색으로 일변하며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빠르게 가열되기 시작하는 화로 때문에 작업실 전체가 후끈거리지만 나도 에반젤린도 열기에 굉장한 내성이 있기에 그것을 티 내진 않았다.
헬릭시윰 괴가 열에 노출되어 점점 붉게 변해가는 동안 나는 수르트에게서 받은 두 번째 재료. 드래곤 하트의 파편을 절구에 넣고 곱게 빻았다.
뭐. 말이 드래곤의 심장이지 드래곤 하트의 힘을 응축시킨 돌에 지나지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후 곱게 빻은 가루를 탁상 위에 올려놓은 뒤 마법을 발현했다.
에반젤린은 고대룡. 인간과 다르기에 검에 쓸데없는 작업을 하는 것보다 그녀의 힘을 증폭시켜주는 드래곤의 힘이 더 잘 어울릴 것이다.
검인만큼 괜히 무게를 늘려서 좋을 게 없으니까.
에반젤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검은 어떤 종류일까.
나는 길고 얇은 환검을 주로 사용하지만, 에반젤린은 그것과는 잘 맞지 않을 때 가 있다.
검의 형태로 만들까. 도의 형태로 만들까. 그 크기를 키워야 할까.
짧은 시간에 많은 고민이 오갔다.
괴가 완전히 달구어지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다.
이후 마법진과 함께 연동되는 드래곤 하트 조각이 빛을 뿜기 시작하자 나는 아공간에서 꺼낸 종이에 빠르게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에반젤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검.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검이니 그녀의 모든 조건에 최대한 맞게 만들어야 한다.
너무 투박해도. 쓸데없이 화려해도 안 되는 깔끔하면서 심플하고 강한 것으로.
“에반젤린. 어떤 검을 가지고 싶어?”
내 물음에 그녀는 입을 오물거리다가 손뼉을 쳤다.
“엄마가 가진 칼디라스 같은 큰 칼이 가지고 싶어요!”
큰 칼이라.
보관에 용이하려면 신검처럼 변이 기능도 추가해야겠네.
이후 나는 마법진에 마나를 살짝 변형시켜 밀어 넣은 뒤 빠르게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길이는 약 1미터 50센티 정도 에반젤린의 키를 생각하면 꽤 긴 검이다.
너비는 대충 10센티 정도로.
깔끔하면서도 심플한 붉은 장식이 가미된 칠흑의 검으로.
언 듯 보면 마검같지만 상관없었다.
헬릭시윰 자체가 워낙에 검은 금속이니까.
한번 생각이 정리되자 그 작업속도가 더욱 빨라진다.
엄청난 속도로 마음에 드는 대검의 그림을 만들어낸 내가 그녀에게 도면을 보여주었다.
“이런 모습 어때?”
유려한 형태의 가드와 폼멜이 장식된 대검을 보며 에반젤린이 탄성을 흘리며 손뼉을 쳤다.
“좋아요! 너무 예뻐!”
“그래? 그럼 이렇게 가자.”
대검의 형태인 만큼 마령검의 사용에는 조금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검을 아예 분리하게…….
아니, 아니지. 이건 아니지.
짧게 고개를 저은 나는 드래곤 하트 파편이 충분히 마나를 머금자 그 위에 촉매액을 부어 잠기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푸르게 타오르는 화로의 장막을 걷어내고 헬릭시윰 괴를 꺼냈다.
한번 가공에 실패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극도의 정신 집중이 필요했다.
“후웁…… 에반젤린. 이제 그 어떤 상황이 와도 아빠를 건드리면 안 돼.”
“네에.”
신기한 듯 멀찍이 앉아 지켜보는 그녀를 뒤로한 채 내가 괴를 모루에 올리고 망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카앙!!!
청명한 소리와 함께 망치가 괴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검의 완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3시간 정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 * *
“하아…… 하아…… 완성했다!!”
“세상에! 이런 역작을 내가 보게 될 줄이야!”
할파스를 필두로 한 팔란 제국의 황실 야장들은 할파스의 손에 쥐어진 긴 롱소드를 보며 모두가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역대급 완성품. 이전에 만든 미스릴 검과 재료는 같지만, 그 결과물은 그 미스릴 검 이상으로 대단한 작품이 나왔다.
가히 국보로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검.
그 검이 만들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이전에 만든 미스릴제 검이 수련 도중에 박살 나버렸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할파스가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서지지 않고 더 튼튼한 검을 만들고자 그 후로부터 계속해서 고민해온 그가 드디어 하나의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자! 어서 제단으로!”
마지막 관문. 완성된 검을 올려놓는 것으로 충분하다.
완성된 롱소드에 자신감이 붙은 야장들은 할파스를 필두로 작업실에서 빠져나왔고 이내 수많은 이들의 기대 어린 표정을 뒤로한 채 제단에 미스릴 롱소드를 올려놓았다.
우우웅!!
동시에 어떤 빛이 롱소드를 감싸기 시작한다.
최고의 기술. 최고의 역량.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이 검이라면 신검까진 아니라도 반드시 수르트에게 닿았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할파스였다.
곧 문이 열릴 것이다.
하지만.
우우우웅…….
이내 빛이 꺼지며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으잉?”
“이게 무슨?!”
경악한 이들이 후다닥 달려간다.
동시에 벽면에 새겨진 문구가 다시 변했다.
“세상에…….”
그 모습에 급히 달려온 학회장 아인츠 백작이 문구를 읽어내리며 굳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숙한 검은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
청천벽력같은 소리.
그 소리에 할파스는 멍한 얼굴로 제단 위에 놓인 롱소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악을 쓰듯 소리 질렀다.
“이게 어찌 미숙한 검이란 말인가!! 내 역량을! 내 재능을! 내 모든 시간을 모조리 쏟아부어 만들었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지…… 진정하세요. 할파스 경!”
난동을 부리는 할파스의 외침에 기사와 제자들이 그를 붙잡아 진정시키지만, 그는 피눈물이 흐르는 심정을 토로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제단이 맛이 갔구나! 이보다 좋은 검은 만들어질 수 없다! 어디 나와보라 그래! 이 검은 모두의 염원이 담겼다! 반드시 수르트에게 닿을 수 있는 필생의 역…….”
카앙…… 캉!!
그때. 흥분한 야장들을 침묵시키는 어떤 소리가 아주 청명하게. 아주 깨끗하게 공동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할파스는 부들부들 떨던 손을 꽉 쥔 채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소리가 난 곳은 반쯤 파묻힌 낡은 작업실이었다.
이런게 또 있었나? 의아한 심정을 숨긴 채 천천히 걸어간 그는 곧이어 환하게 빛나는 내부를 보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스승님?”
“할파스 경?”
뒤이어 소리가 난 곳으로 다가온 야장들과 마법사들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
좀 전까지 격노하며 소리치던 할파스는 입을 조금 벌린 채 그저 묵묵히 작업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불꽃과 소리가 너무 아름답다…….”
야장의 공정 방식은 실용적이어야 한다. 겉멋이 드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극도로 실용적이면서. 극도로 고난도에.
너무도 아름다운 불꽃을 튀기는 작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