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947화 (947/1,559)

제 947화

현재 드래곤 중 운신이 가능한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세 명의 장로와 깨어나지 않은 로드.

그리고 전투가 가능한 나이가 꽤 찬 드래곤 일곱. 그 외에 어린 헤츨링이나 갓 성룡이 된 어린아이들이 대다수.

그 수를 합쳐도 30이 채 되지 않는다.

본래 드래곤의 수는 50이 훌쩍 넘었다.

드래곤들이 잠들기 전 수가 줄어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그들이 무리하게 수를 늘린 결과가 고작 50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드래곤은 알라시스 대륙. 즉 티오니스 대륙의 오른쪽 끝에 펼쳐진 대해를 지나 나오는 거대한 땅덩어리에 대부분 모여 살았다.

전성기의 드래곤은 무려 100마리가 넘었고, 그들 중 8서클에 도달한 드래곤은 그리 많지 않다지만 인간의 기준에선 경악스러운 경지와 용언 마법을 다루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대륙의 중재자라는 입장인 만큼 그들은 대륙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고 저들끼리 살아가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과거 어떤 이유로 인해 드래곤 사이에서 내분이 발생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의견충돌로 인한 전쟁.

수많은 드래곤이 죽고 다쳤고, 급기야 로드가 잠들면서 대부분의 드래곤은 새끼들을 보호할 힘을 기르기 위해 대부분 동면에 들어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고.

어떤 일을 계기로 모두가 깨어난 것이다.

문제는 조화를 중시하는 현 드래곤들과 다르게 내분을 일으킨 과격파도 깨어났다는 사실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드래곤들이 흩어진 뒤 떠나려던 사파이어를 블루드래곤의 장로, 마린이 붙잡았다.

“사파이어.”

“왜요 아버지.”

퉁명스레 답하는 사파이어를 보며 푸른 머리칼의 중년이 조용히 물었다.

“지금부터 루델라이트 녀석의 위치를 찾거라.”

“그거야 하던 일 아닙니까. 안 그래도 그놈 찾으려고 레어를 찾아갔는데 이미 유희를 떠나고 난 후라.”

“그놈이 어디 갔는지 가장 잘 찾을 드래곤이 너뿐이다. 잊지 마라. 종족의 명운이 걸려있으니.”

그 말에 사파이어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전부 그놈만 찾는다.

그 괴짜가 뭐가 좋다고.

“아버지. 근데 정말로 그 빨갱이 놈을 의식의 신관으로 세워야 합니까? 그놈 성질머리 아시잖아요. 미친놈인 거.”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사파이어. 의식의 신관으로서 왜 그놈이 선정된 건지는 아느냐.”

마린의 물음에 사파이어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놈의 운명이다.”

“그럼 의식을 진행하면요?”

“음?”

“그놈 어떻게 되냐고요.”

사파이어의 물음에 그는 조용히 답했다.

“자신의 드래곤 하트를 용의 잔에 담는 의식이다. 지금까지 해온 의식과는 달라.”

즉,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그를 찾아라. 그에겐 절대 사실을 말하지 말고. 이번 일은 안타깝지만, 종족의 명운이 걸렸다. 우리의 힘으론 타락용 놈들을 어찌할 수가 없어. 타락용의 힘은 우리 상상 이상으로 강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 제 아버지를 보며 사파이어는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결국, 힘이 약해서 변명하는 거잖습니까.“

“네게 방법이 있느냐?”

그 물음에 사파이어는 문득 자신이 봤던 그 인간을 떠올렸다.

안하무인에 후안무치한 괴물 같은 인간.

그라면…….

‘아니 무슨 생각을 하나. 그가 강하다고 해도 장로급 드래곤 분들만큼 강한 것도 아닐 텐데.’

그가 사용한 브레스는 조금 이질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품 안에서 작은 보석을 꺼내 들었다. 다름 아닌 루델라이트가 가진 보석과 연동된 보석이었다.

악우이며 매번 만나면 죽어라 싸우긴 하지만. 이렇게 죽게 두는 건 그리 내키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네.”

* * *

루델라이트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유희를 핑계로 이곳에 와서 눌러 앉아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역시 저 검은 위험해 보이는데.”

에반젤린이 수련을 위해 휘두르고 있는 칠흑의 검을 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단순히 말해서 드래곤이라는 것을 들키면 야단나는 상황이지만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극한의 스릴을 즐기는 변태.

루델라이트는 동족들에게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즐기는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 또한 존재했다.

악마 같은 데이비에게 빼앗긴 보물의 회수.

그리고, 이들이 수명을 다하고 죽었을 때. 에반젤린의 검인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당장은 힘들었다.

하지만 드래곤에게 있어서 인간보다 뛰어난 점이 존재하니 바로 수명이었다.

그의 환심을 사 그의 곁에서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만 버티면.

그 후엔 조용히 그것들을 회수할 수 있다.

“인간은 오래 살아봐야 100년 정도밖에 못살아. 하지만 그 검은 위험하지.”

이런게 세상에 나돌다간 어마어마한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건 역시 중재자의 입장에서 그냥 둘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이 영지는 참 재밌는 것들이 많았다.

신기한 발명품이 많았고 그 외에도 그의 흥미를 돋게 하는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이상하리만치 에반젤린의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심과는 다른 무언가.

어째서일까. 마치 동족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루델.”

“네. 아가씨.”

“배 안 고파?”

에반젤린이 땀을 닦으며 천천히 다가와 묻자 그는 쓰게 웃어보였다.

“그러네요. 뱃가죽이 등에 붙을 것 같아요.”

“헤헤. 그럼 도시락 먹자 도시락!”

그녀는 익숙한 듯 나무 아래에 놓아둔 바구니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귀엽게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루델은 이곳이 마음에 들어?”

“음…… 그렇네요. 제법 마음에 들어요.”

“용병 생활은 어땠어?”

“뭐…… 새삼스러울 게 있나요. 보통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모험하고 그랬죠.”

“와아…….”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보며 루델라이트는 피식 웃어버렸다.

이 어린 인간은 모험이라는 단어에 굉장한 환상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어린 나이치고 그녀가 뽑아내는 오러 블레이드는 그녀가 상상 이상의 강자라는 것을 알려주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세상이 마냥 녹록하진 않으리라.

“난 말야. 언젠가 용사가 될거야. 레이나 님의 뒤를 이어서.”

“용사라…… 그렇군요.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아빠는 말이야. 귀찮다고 하시지만, 세상을 몇 번이고 구했다?”

“저하께서 말입니까?”

“응! 있지, 루델은 물에 소중한 사람이 둘이 빠졌을 때 한 명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굴 구할 거야?”

물에 빠진다고 죽나? 아아. 인간은 숨을 쉬지 못하면 단시간에 죽는구나.

그 생각을 하며 루델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정말 어려운 문제네요.”

“아빠는 그렇게 말했어. 고민할 게 뭐 있냐고.”

그 말에 루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상황이건 소중한 두 사람이라면 한쪽을 구하고 한족을 버린다는 생각을 하긴 쉽지 않을 텐데.

그런 상념을 빠져나오게 만드는 에반젤린의 웃긴 흉내가 눈에 담겼다.

가슴을 펴고 몇 번의 헛기침을 한 에반젤린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깔며 흉내 냈다.

“힘 놔뒀다가 스튜 해 먹을 거냐? 둘 다 구하면 되지 고민을 왜 해.”

그 말에 루델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동생과 너, 둘 중에 하나를 골라라.]

[죽기 싫어요…… 죽기 싫다고요.]

[그렇다면 심장은 그곳에 담겠다.]

싸늘한 시선. 그리고 자신을 보며 울부짖던 어떤 이.

“루델?”

“…….”

“루델? 왜 그래?”

“아…… 아닙니다. 아가씨.”

쓰게 웃어 보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실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응? 응! 그래!”

해맑게 웃는 에반젤린을 보며 쓰게 웃어 보인 그가 돌아섰다.

“이상하네…….”

돌아선 그가 쓰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드래곤도 아니고 성룡이 된 지 꽤 된 그가 이런 가벼운 실수를 저지를 줄이야.

“이상하게 그 인간들 앞에선 제어가 잘 안 되네.”

보통 드래곤이 유희를 할 땐 자신이 짠 설정에 충실하게 된다.

하지만 에반젤린이나 데이비의 곁에 있으면 간혹 그런 설정들이 부서지고 자꾸 본래 심정이 터져 나올 때가 많다.

“마법서 정리나 해야겠군.”

본래라면 재미가 있어서 에반젤린의 곁에 붙어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 때문에 괜스레 혼란스러워져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다 나가주세요.”

고요한 도서관에 들어선 그가 중얼거린다.

물론, 도서관엔 애초에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고요한 도서관의 끝자락에 앉은 그는 복잡한 심경으로 마법서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왜 그래. 표정이 죽상이야.”

그때. 그의 곁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빙구아나 아냐.”

“닥쳐.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가만 안 둔다 경고했을 텐데?”

“됐고.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유희 중에 찾아와서 강짜를 부리는 건 매너가 아닐 텐데?”

“후…… 때가 어느 때인데 유희질인지…….”

“남이사.”

“장로회의에서 결정이 났다. 네가 의식의 신관으로 뽑혔어.”

그 말에 그가 움찔거렸다.

“그래? 잘됐네.”

“그나저나 넌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이곳 공기가 영 심상찮던데.”

“너도 잘 아는 인간이 있는 곳이야.”

그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아는 인간?”

“그래. 데이비 올 라운.”

쿠당탕!!!

벌떡 일어난 그가 눈을 부릅떴다.

“너…… 너 이 미친! 그 괴물 같은 인간 옆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너 설마…… 그 인간에게 용언 마법을 전수해준 건 아니겠지?!”

어쩐지! 아무리 봐도 인간이 용언 마법을 사용하는 건 이상하다.

그렇다면 역시 이놈이 용언 마법을 알려준 것인가.

“내가 용언 마법을 알려줬다고 해도 그 인간이 그런 힘을 낼 거 같아?”

“그건 그렇네…….”

“됐고. 알았으니 돌아가. 너 이번에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 그 인간 드래곤만 보면 심장 적출하려고 안달 난 인간이야.”

루델라이트의 경고에 사파이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는?”

“나도 마찬가지지. 그래서 안 들키게 하려고.”

보통 유희가 발각되면 드래곤은 일대를 소거하고 떠난다.

하지만 지금은 소거고 나발이고 본인이 지워지게 생겼다.

“그러는 너는 왜 여기 있는데.”

“스릴 있잖아.”

“미친놈…….”

제 목숨 저당잡고 스릴을 즐기는 놈은 이놈뿐이리라.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가 루델라이트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야. 도망가라.”

“뭐?”

“여기가 문제가 아니야. 장로들이 널 발견하는 건 한순간일 거다. 그렇게 되면 넌 신관이 되겠지.”

“그게 뭐.”

“미친놈아. 너 죽는다고.”

“…….”

“잔에 네 심장이 담기는 순간 넌 죽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돼?”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루델라이트는 고요하게 침묵했다.

“그래. 벌써 그때가 온 거라 이거지…….”

“야? 제 목숨 최고로 아끼던 니가 무슨 일로?”

“아냐. 내 목숨은 소중하지.”

그렇게 말한 그가 쓰게 웃었다.

“그런데 용언의 약속을 깰 정도는 아니야.”

적어도, 광룡은 되지 말아야지.

“용언의 약속……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별거 아니야. 오래전에 용언의 약속으로 종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신관으로서 내 목숨을 바치겠다. 그렇게 약속한 것뿐이야.”

“루델라이트 너!”

“어서 가. 데이비 그 인간, 눈치가 빨라서 널 금방 알아낼 거다. 나야 잘 숨기고 있으니 절대 들킬 일 없다만.”

“…….”

그 말에 사파이어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혀를 차며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사이가 안 좋으며 툭하면 서로 죽이려 달려들던 앙숙이다.

특히 레드와 블루 드래곤은 놀라울 정도로 상성이 좋지 않은 탓에 주로 싸우곤 해왔으니까.

하지만 그는 정작 중요한 때에 찾아와서 장로들의 결정을 뒤집고 도망치라 말했다.

“새끼…… 쓸데없이 오지랖 부리긴.”

쓰게 웃으며 그는 자신의 심장 부분에 손을 올렸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비록 그게 역겨워 마지않는 장로들의 결정이었다 할지라도.

그때였다.

“루델! 루델 있어?”

멀리서 자신을 찾는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도서관 밖을 나섰다.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응! 혹시 바빠?”

“아뇨. 뭐…… 그리 바쁘진 않습니다만.”

“잘됐다! 그럼 나랑 영지 밖으로 좀 같이 가줄 수 있어?”

너무 해맑은 그 미소에 루델은 문득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에게선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든다.

마치 동족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인간을 볼 때와는 조금 다른 무언가가 계속해서 그를 간지럽혔다.

“알겠습니다. 어떤 일이죠?”

“영지에서 조금 나가면 황무지가 있는데. 그 황무지에 갑각선인장 열매가 맺혔나 봐! 꼭 가지러 가고 싶은데 아빠가 갈 거면 루델과 함께 가라고 해서.”

그 말에 루델은 쓰게 웃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신용하는 건지.

종족 내에서도 자신을 신용하는 드래곤이 많지 않았던 점을 생각하면 씁쓸함이 몰려왔다.

미물이라 여긴 인간보다 못한 작자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빙그레 웃었다.

“네. 아가씨.”

그렇게 에반젤린을 따라 영지 바깥으로 나간 루델라이트는 넓게 펼쳐진 평원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자 보이기 시작하는 황무지를 보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기이하네. 자연경관인데 묘한 힘이 감돌아.’

사실 하인스 영지에 깔린 지하 유적에서 고대 마나를 방출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기묘한 곳이라는 생각만 들 뿐.

오랜 시간 살아왔지만, 이 영지는 기존의 알던 세상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엘프나 드워프가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인간의 영지 자체도 기가 막히지만 말이다.

“앗! 열렸다!”

그때 앞서 폴짝폴짝 뛰어가던 에반젤린이 눈을 반짝이며 거대한 선인장에 난 열매를 집어 들었다.

“와아…… 정말 잘 익었어! 이거 끝내주는 재료가 될거야.”

에반젤린은 마법사이기도 했다.

기쁨을 숨기지 않은 채 열매를 따 자루에 담던 그녀를 보며 루델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가씨! 가시에 찔리시면 안 됩니다!”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동생을 챙기듯 그는 자신도 모르게 뛰어가 그녀를 뒤에서 도왔다.

그런 그의 행동을 아주 기뻐하며 웃는 에반젤린을 보다 보니 쓸데없는 생각은 버려둔 채 폭소하며 그녀를 따랐다.

자신이 왜 폭소하며 즐거워하는지 이해도 못 하고 말이다.

“후아…… 많이 땄어! 정말 고마워 루델!”

“아닙니다. 아가씨. 아가씨가 즐거워하시는 걸 보니 저도 기쁘네요.”

“하아…… 이제 돌아갈까? 아빠가 걱정하실 거야.”

“네. 그렇게 해…….”

자신이 왜 즐거워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때였다.

“응? 저게 뭐지?”

하늘에서 보랏빛의 마법진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 수는 하나에서 둘, 셋 넷 여덟 늘어났고, 이제 열 개가 남는 마법진들이 일렁이며 그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아…….”

에반젤린의 입에서 속내 모를 탄성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마법진이 찢어지며 거대한 빙산이 날카로운 끝을 겨누고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가씨!!!”

황급히 몸을 던져 에반젤린을 끌어안고 범위에서 벗어난 그가 이를 악물었다.

“끄아아아아악!!!”

피하긴 했지만, 그의 다리에 거대한 빙산의 파편이 박혀버린 것이다.

‘크으으으!!’

폴리모프한 자신에게 이렇게 지독한 고통을 안겨주는 마법이 있던가.

당연히 일반적인 마법은 불가능하다.

다만 본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라면…… 가능하다.

이를테면…….

드래곤처럼.

스르륵…….

“루델!! 루델 괜찮아?!”

황급히 일어나 그녀가 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루델은 도저히 괜찮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끔찍한 냉기와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 기괴한 마법진 때문에 들어가기 곤란했는데 잘됐네.”

이윽고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형형색색의 머리색을 지닌 젊은 남녀들이었다.

그 수는 다섯.

붉은 머리가 둘, 푸른 머리가 하나. 금발이 하나. 흑발이 하나.

겉 외견은 20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미남미녀들이었다.

“이야…… 루델라이트.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비웃음이 서린 얼굴로 푸른 머리의 청년이 낄낄거렸다.

“끄윽…… 카, 카르마…….”

“오랜만이야.”

“이게 무슨…… 이봐요! 지금 저 마법은 당신들이 사용한 건가요?!”

쓰러진 루델을 부축한 채 에반젤린이 급히 소리치자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응? 미물이 하나 섞여 있네.”

“같이 지워버려. 우리에 비해 인간은 하나둘 죽어도 전혀 문제없으니까. 태생부터 급이 다르다 이 말이야.”

흑발의 소녀가 차갑게 일갈하자 카르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저 루델라이트 놈 빌빌거리고 있는걸 보니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라서.”

낄낄 웃는 그가 물었다.

“이 정도 마법에도 상처를 입다니 너…… 설마 폴리모프를 하면서 마법도 봉인해버렸냐?”

“…….”

“하하하하! 진짜야? 너 진짜 걸작이구나?!”

“닥쳐 카르마!”

으르렁대는 루델을 보며 그가 낄낄 웃었다.

“그래…… 넌 예전부터 참 재수 없었지. 겁쟁이 위선자 새끼. 제 동생이 죽을 때도 목숨 아까워서 나서지도 못한 병신.”

“…….”

“이봐 아가씨. 내가 재밌는 이야기를 해줄까?”

“뭐죠?”

루델을 뒤로 숨기며 에반젤린이 칠흑의 검을 빼 들었다.

“호오…… 저 검은 심상찮은데?”

“조심해. 안 좋은 느낌이 드는 검이야. 쓸데없이 베이지 말고 루델만 죽여. 일이 커지면 장로께서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남이사 신경 끄시고. 이봐 아가씨. 우리가 누군지 알아?”

“당신들…… 인간이 아니군요.”

에반젤린이 낮게 중얼거렸다.

척 봐도 인간이 아닌 기세를 내뿜고 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맞아. 우린 인간이 아니야.”

그 말과 함께 카르마의 눈이 세로로 찢어지며 막대한 피어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읏…….”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피어에 에반젤린이 이를 악물었다.

종족 면에서 에반젤린이 월등한 건 사실이지만 에반젤린은 아직 헤츨링에 불과했다.

“호오…… 마스터급 인간이라 이건가? 재밌네. 피어를 맞고도 멀쩡한 걸 보니.”

“쟤. 내가 데려가도 돼? 가디언으로 만들면 꽤 쓸만할 거 같아. 예쁘장하기도 하고.”

음침해 보이는 붉은 머리 남성의 말에 카르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던가. 그전에 우리 규약대로 재미 좀 보자고.”

“당신들…….”

“네가 보기에. 이제 우리가 누군지 알 거 같나?”

그 물음에 에반젤린은 조용히 대답했다.

저 정도인데 모를 수가 없다.

그녀와 친숙하지만 조금 다른 기운이었으니까.

“드래곤…….”

“오오. 아가씨 눈치가 빠른데? 그런데…… 왜 고개를 숙이지 않지? 하찮은 벌레 따위가.”

쿠우웅!!

“으윽…….”

굳이 드래곤이라는 걸 밝히면서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루델이 눈을 부릅떴다. 카르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한 것이다.

“하지 마…….”

그의 동공이 쉴 새 없이 떨린다.

“드래곤은 말이야. 유희 중에 정체가 탄로 나면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유희를 끝내야 해. 그리고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워야 하지. 그게 불가능하면 본인이 죽어야 하고, 그게 드래곤이 스스로 건 약속이다.”

“그래서요?”

“그럼 여기서 질문. 위대한 용족인 이 몸이 왜 4서클밖에 안 되는 인간을 이렇게 잘 알고 있고, 그를 습격하러 온 걸까?”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루델이 황급히 소리쳤다.

본인 스스로 왜 그런 건지 이해도 못 하면서 그는 필사적으로 소리 질렀다.

지금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다.

어째서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못되면 조지는 거지라는 생각을 해왔던 그 자신이 왜 이리 필사적으로 된 것일까.

그런 걸 생각할 틈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저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안돼!!”

그가 순식간에 화염 마법을 일으키며 카르마를 향해 화염구를 내던졌다.

콰아앙!!!

그렇게 날아간 화염구가 그들을 맞춘다.

“어…… 어어?! 루델?!”

“아가씨!! 따라오세요!! 제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소드마스터라도 드래곤에겐 안 돼요! 지금은 도망치셔야 합니다!”

다행이라면 드래곤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점이었다.

아직까진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이를 악물었다.

안돼…… 지금은 안돼. 에반젤린 아가씨에게 내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며 에반젤린의 팔을 잡아당기며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그가 품 안에서 신호탄을 꺼냈다.

이걸 본 데이비 왕자가 온다면. 그들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강하다 해도 전투가 가능한 상위 성룡급 드래곤 다섯을 상대로는 쉽지 않으리라.

그래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에반젤린을 보고 있으면 자꾸 누군가가 떠올랐으니 말이다.

본인이 아님에도. 이번만큼은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습격자가 녹록할 리가 없었다.

연기 속에서 새파란 냉기의 창들이 일순간 날아들었고.

이내 루델의 팔과 다리 그리고 복부를 꿰뚫어버렸다.

“루델!”

“커헉!! 쿨럭…….”

바닥에 쓰러진 그가 비틀거렸다.

“이 개같은 빨갱이가. 내 몸에 마법을 쏴?”

잔뜩 화가 난 카르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순식간에 블링크 마법으로 접촉해온 그가 루델의 머리를 낚아채려던 그 순간.

[중검]

[산맥 쪼개기]

서걱!!

막대한 중량이 서린 검은 검기가 카르마의 팔을 날려버렸다.

“이 이상 못가요! 루델을 해치겠다면 저를 넘어서야 할거에요!”

에반젤린의 외침에 카르마가 비틀거렸다.

잘릴 리 없는 팔이 잘려나갔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이 빌어먹을 하찮은 인간이…….”

쿠우우웅!!!

동시에 어마어마한 냉기가 퍼져나가며 카르마의 눈이 푸르게 번뜩였고, 이내 그의 신형이 거대한 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짓밟아 으깨주마. 그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고블린들의 먹이로 주겠다!!]

어마어마한 피어가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쓰러져 있던 루델이 인상을 찡그렸다.

신호탄이 박살 났다.

이제 그녀를 지킬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하지만 그녀를 지키기 위해선…… 유희를 끝내고 현신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유희는 그것으로 끝.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대로 가다간 에반젤린이 그에게 당할 판국.

이를 악문 채 그가 중얼거렸다.

“아가씨…… 물에 빠진 소중한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고 할 때…….”

“…….”

“둘 다 구하면 된다 하셨죠. 그게 진짜 용사라는 가상의 존재라고.”

그 말에 에반젤린이 눈을 부릅떴다.

“루델?”

“죄송합니다. 전 역시 둘 다 구하는 건 못하나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말과 함께 루델의 몸에서 마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만난 시간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정이 들려고 해도 너무 적은 시간이다.

하지만.

“이전에 한 번 잃었지. 두 번은 잃지 않는다.”

고작 유희인데. 어차피 역할극일 뿐인데.

이상하게 에반젤린의 곁에 있으면 감정 제어가 잘되지 않는다.

마치 동족, 아니 위대한 시초용의 석상 앞에 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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