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50화
“아…… 이런…… 뿔이 튀어나왔나? 아니 아니지! 꼬맹아! 너…….”
륀느를 보며 루델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한 번만 더 륀느를 꼬맹이라 부르면 응징을 가할 것을 명시. 륀느가 어리게 보는 것을 낮게 평가.”
“쥐방울만 한.”
투쾅!!!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륀느의 미사일 드롭킥이 그를 향해 꽂힌다.
“커헉?!”
비명을 지르며 처박힌 그가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이 무슨…….”
“륀느. 초월종족 세피로스. 육신의 나이는 1만 년이 넘었다고 명시.”
“이…… 일만 년?!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럼 완전 할머…….”
스릉…….
“흡?!”
섬뜩한 힘이 서린 황금빛의 창이 겨눠진다.
“륀느. 정신 연식은 아직 파릇파릇하다고 명시. 할머니라 부르는 것을 낮게 평가.”
아니 어쩌라고!!
폴리모프한 드래곤의 육신을 이리 날려버릴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륀느의 행동에 루델은 대체 이 영지. 뭐 하는 곳인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두려움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생소한 연구 소재. 사탕을 줄 테니 따라와 주지 않을래?”
“밀피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따라와.”
“네. 로드.”
“로드라 부르지 말고 조교님이라 부르라고!”
드래곤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뱀파이어 로드에 하프이면서 용족조차 파악할 수 없는 심장을 지닌 상급 뱀파이어.
그 외에 그 보기 힘들다는 다크엘프까지 영지 곳곳에 숨어있는 게 보였다.
아이나와 함께하던 다크 엘프들이 모여든 것이지만 대체 이 영지는 뭐하는 곳인가 궁금해지던 찰나였다.
그리고, 그를 가장 경악하게 한 것은.
“여긴 물자창고인가?”
끼이이이이익…….
뀨?
새하얀 몸에. 새하얀 근육. 덤벨을 든 채 땀 냄새를 풍기며 쇠질을 하고 있는…….
끼익…… 쿵.
“못 본 걸 로 하자.”
아무래도 유희 차원에서 찾아왔던 이 영지는 자신이 아는 인간의 영지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달랐다.
* * *
“저…… 그 토끼…… 뭡니까?”
온몸을 부르르 떨며 루델라이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뱀파이어 로드니 고대 생명체이니 많은 것을 봤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을 정도로 두려움을 품게 만든다.
“토끼?”
“그 물자 창고에서 정신 나간 쇠질을 하고 있는 그…….”
“아아. 보팔레빗?”
내가 피식 웃었다.
거헤궁 켄서에게 한번 당했다곤 하지만 녀석의 본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계인 타르타로스 지하산맥 너머의 땅에서 다시 힘을 되찾은 녀석들은 늘 그렇듯 이곳으로 몰려왔고 이내 영지에 눌러 앉아버렸다.
덕분에 하인스 아카데미의 시험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것도 봤습니다. 세상에. 아카데미 학생들이 일정 이상 학년에 오르면 정령의 축복을 준다고요? 그것도 정령계에서? 이게 가능합니까?”
“거 말이 좀 많다?”
“아니 말 나온 김에 다합시다! 그땐 드래곤인 거 들킬까 봐 입 다물고 있었는데 이 영지 대체 뭡니까 예?!”
아무리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지 않았나.
그의 말뜻은 그러했다.
“하. 놀라는 제가 어처구니가 없네요.”
“뭘 복잡하게 생각해. 그냥 그러려니 해. 아참. 따라와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루델을 데리고 지하 작업실로 내려간 나는 넓은 작업실의 한켠에 놓인 무구들을 보고 입을 쩍 벌리는 그를 보았다.
“미친…… 저게 뭐야.”
묵빛의 십자가. 거대한 해머. 활. 그 외에 정체불명의 방울 달린 가지와 부채.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무기들이다.
에반젤린이 가지고 있는 트와일라잇만 해도 엄청난 파장을 만들어낸다 생각하여 그녀가 죽으면 회수하려 했었다고 했던가. 뭐 중재자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긴 하다.
그런데 그런 게 하나도 아니고 몇 개나 있으니. 그도 기가 막히는 모양이었다.
“뭘 놀라고 그래. 몇 개는 여기 없어.”
그렇게 말하며 검의 상태로 돌아가 있는 홍단이와 청단이를 올리자 그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착! 때렸다.
“와씨! 진짜 저건 더하네…… 대체 뭐야. 이건 마검입니까?”
“마검과 비슷하긴 하지만 악한 검은 아니야. 오히려 귀여운 검이지.”
그 말에 루델이 침묵했다.
“별건 아니고, 네가 할 일은 이거야.”
그렇게 말하며 내가 거대한 천을 걷어냈다.
그러자 천 안으로 거대한 드래곤의 사체의 일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블랙 드래곤의 비늘…… 바로 카르엘라의 몸 일부였다.
“이거 해체할 거거든.”
“지금 저보고 동족을 해체하라고요?”
“너 죽이려고 한 놈인데 무슨 상관이야.”
“그건 그렇네요.”
일반적인 동족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카르엘라를 포함한 타락용들은 용의 의무를 저버린 존재들이다.
같은 드래곤 취급해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런데 드래곤의 사체로 대체 뭘 하려고요.”
“글쎄. 따로 생각해둔 건 없는데. 에반젤린의 검에 힘을 좀 더 실어주려고.”
“안 그래도 신검급의 검을 더 강화하겠다고요?”
“보통 무기는 +12강이 국룰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게 있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해체나 해. 다른 건 지금 당장 필요 없고 드래곤 하트 정도만.”
트와일라잇 같은 검에 드래곤 하트가 사실 크게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의문을 품기를 잠시 내가 답했다.
“적출한 뒤에 묵힐 거야. 워낙에 특수한 소재라 시간 정령 알타이르의 힘으로 가속화 할 수 있으니까.
“시간의 정령은 또 뭔데요…….”
“고룡급은 돼야 그래도 쓸만하지.”
이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는 듯 묵묵히 따라와 사체를 잘라내기 시작하는 루델이었다.
“근데 말이다. 타락용이니 뭐니 하는 건 뭐냐.”
그 물음에 루델은 잠시 침묵했다.
“종족의 수치입니다. 타종족에게 알릴만한 건 아니에요.”
오래 살아온 드래곤이지만 내게는 꼬박꼬박 존대를 해왔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아무리 봐도 그냥 인간이라고 하기엔 미심쩍은 게 너무 많다는 모양이었다.
“말해봐. 얼마 전에 네 친구가 찾아와서 죽네 사네 헛소리를 하더니.”
“그것까지 들었습니까?!”
“들으라고 해놓고 못 들으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닌가?”
“아니 아무리 귀가 밝아도 그렇지…….”
“에반젤린의 곁에 널 내가 왜 놔두는 걸 허락했는데. 안전한지 확인도 안 하고 그냥 붙여놨을까.”
이쯤 되니 오한이 돋는지 그가 부르르 떨었다.
“쯧…… 별거 아닙니다. 오래전 내분이 있었어요. 지켜보는 것으로 중재하자는 온건파와 문제가 되는 생명체를 힘으로 찍어누르고 지배하여 조화를 이루자는 과격파의 싸움이요.”
“너는?”
“저는 온건파 출신입니다만. 그 당시에 문제가 많았어요. 특히 과격파에 많은 드래곤들이 몰려서 힘 싸움에서 밀렸죠.”
루델이 한 이야기는 그러했다.
싸움에서 밀린 드래곤들은 루델의 동생 루비라이트의 심장에 시초용의 흔적이 있는 것을 이용. 의식을 이용해 그들을 모두 잠들게 했다고.
문제는 그 영향으로 온건파 드래곤도 대부분 잠들어버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다 이건가? 그래서 온건파 드래곤은 로드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마당에 다시 의식을 진행하려 하고.”
“예.”
“거기에 희생될 두 번째 제물이 너다?”
이게 온건파가 할 짓인가?
하지만 타락용이라 해도 최대한 유혈사태를 적게 끝내기 위해 선택한 것이라면 나는 거기에 대고 뭐라 할 자격은 없다.
“그래. 그런 거라 이거지.”
“때문에 저는 이곳에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할지 모릅니다.”
“의식을 진행해야 하니까?”
“그게 약속이었으니까요.”
그런 놈이 뭐하러 살려고 그 발버둥을 쳤나 몰라.
“물론, 당장은 아닙니다. 아마 꽤 시간이 있겠지요.”
“그래.”
담담하게 답하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푹 자다가 이제 와서 난동이라니. 은퇴한 입장에서 굳이 내가 나설 이유는 없어 보였다.
물론, 별자리 관련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복잡해지겠지만 블루드래곤 놈이 자신들은 아니라 했으니 별자리 쪽이겠지.
별자리는 조용한 편이고, 드래곤의 내분 따윈 내 알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갈 땐 말이라도 하고 가라.”
“예.”
그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한낱 인간이라 불렀지만 에반젤린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는 에반젤린을 깍듯이 모셨고, 그녀의 아빠인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 * *
의식의 진행은 못 해도 10년은 더 잡아야 했다.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타락용들의 움직임이 빨랐다.
예상보다 그들의 잠은 더 빨리 깨어버렸고 더욱 빠르게 온건파 드래곤들을 척살하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로드를 죽이기 위해 움직인다.
“대체 어떻게 이놈들이…….”
드래곤 장로들이 침음성이 섞인 탄식을 흘렸다.
“이상합니다. 그들이 로드께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나 의식에 관한 것까지 모두 꿰고 있다니요.”
타락용 측에선 이미 로드가 부재중이라는 것을 알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며 의식의 신관으로 루델라이트가 선정되었다는 것조차 알고 있었다.
그 사실도 정찰을 하던 성룡급 드래곤 둘이 치명상을 입어가며 어렵게 구해온 정보였다.
반대로 저들은 정보를 너무 쉽게 손에 넣고 있다.
블루드래곤 장로 마린의 제의에 다른 두 장로인 블랙 드래곤 오팔과 그린 드래곤 카이저가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그 말은 우리 내부에 배신자라도 있다는 뜻이오. 장로?”
“지금 상황에선 유추해볼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타락용과 저희들을 구분할 방법은 사실상 없으니까요.”
“그렇겠지.”
오팔이 쓰게 중얼거렸다.
“괜히 문제가 발생하면 곤란하건만…… 전력은 턱없이 부족하니…….”
“안 그래도 타락용 쪽에서 한차례 모습을 드러냈었다고 합니다.”
“모습을 드러내?”
“성룡급 드래곤 다섯이 움직였다더군요. 한 인간의 국가에서 모습을 드러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들이 인간 세상에 숨어들었을 가능성은 없소?”
“배제할 순 없겠지요.”
오팔과 마린이 한숨을 내쉬는 와중에 그린 드래곤인 카이저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럴 때가 아니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소. 로드께선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계시지.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의식을 거행할 준비를 해야 하오”
“하지만. 장로.”
“더 늦다간 전멸을 피할 수 없을 거요. 그렇게 되면 중재는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겠지. 그것이 그놈들이 바라는 게 아닌가!”
카이저의 말에 오팔과 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선 루델라이트를 용의 거처로 데려와야겠군요. 타락용이 그들을 노리고 있는걸 알아낸 이상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으니.”
오팔의 말에 마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이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아낼 수가 없다는 것인데…….”
“그 점은 문제 삼지 않아도 될듯하오. 마린 장로. 그대의 아들이 루델과 친분이 있지 않았소.”
“사파이어가 말입니까?”
블루드래곤 사파이어를 언급하자 마린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루델라이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않겠소.”
“하지만 녀석은 지금 이곳에 없…….”
“아, 걱정 마시오. 그는 이미 내가 불러들였으니.”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거대한 문이 열리며 복잡한 표정의 사파이어가 걸어들어왔다.
“장로님들을 뵙습니다.”
“어서 오라. 블루 일족의 아이여.”
“예. 장로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거짓 없이 대답할 수 있겠느냐?”
“예.”
“하면, 용언의 맹세를 해야지.”
그린 드래곤 장로의 말에 블랙 드래곤 장로 오팔이 덧붙였다.
동시에 모두가 흠칫 놀란다.
“오팔 장로! 그 무슨?!”
“지금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소. 장난으로 할 이야기가 아니지.”
그렇게 말한 그가 사파이어를 바라본다.
“맹세하라.”
“…….”
“이보시오 장로!!”
“어허! 나는 사파이어에게 말하고 있소! 마린 장로!”
“용언의 맹세는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잘못 대답했다간 그 자리에서 광룡이…….”
우우우웅…….
“맹세…… 하겠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사파이어가 답했다.
“사파이어!!”
“그래. 그의 위치를 알고 있느냐?”
블랙 드래곤 장로, 오팔의 물음에 사파이어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전에 하나만 확인해주십시오. 오팔 장로님.”
“말하라. 타락용들이 루델을 노리는 게 확실합니까?”
“정황상 그럴 것이다.”
“이곳으로 데려오면 그는 당분간 안전합니까?”
“그렇겠지. 우리가 지킬 테니.”
“그는…… 동부대륙의 라운 왕국. 하인스라는 곳에 있습니다.”
“하인스?”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드래곤 브레스를 사용한 인간이 있는 영지입니다.”
그가 주먹이 터질 것처럼 강하게 쥐며 어렵게 대답했다.
“사파이어…….”
그런 사파이어를 보며 마린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그때 마린의 머릿속으로 사파이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일전에 제가 말씀드린 인간. 기억하시지요. 그 인간과 한번 만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루델 놈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싸워 이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의 밀언에 마린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