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56화
드래곤의 본산.
산속의 동굴임에도 동굴 내부는 마치 대낮처럼 환했다.
게다가 건축물이나 구조물 중 일부는 바위가 아닌 새하얀 대리석으로 마치 신전처럼 깎아져 있었다.
“이곳은 드래곤의 도시라고도 불립니다. 본래엔 드래곤 로드의 레어와 마주한 영역이지요.”
마린 장로의 살가운 태도에 오팔 장로와 카이저 장로는 기괴한 장면을 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와…… 예쁘다…….”
앞서 걸어가는 세 장로와 그들을 호위하듯 걸어가는 성룡급 드래곤 다섯. 그 뒤로 루델과 사파이어가 뒤따르고 있고, 멀리서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년 소녀들이 숨어서 상황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 인간이 어째서 이곳에 왔는가 하는 의아함이 서린 표정들 제각각이었다.
“아가씨. 혹시 모르니 절대 제 곁에서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이곳은 보기와 다르게 미로 같은 곳이니까 한번 잘못하면 길을 잃기에 십상이니까요.”
“흐응…… 예뻐.”
“네?”
“엄청 예뻐 이곳.”
“원하신다면 언젠가 이곳에서 지내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감히 고대용이 머물겠다는데 누가 거부한단 말인가.
그것도 고대용을 신처럼 떠받드는 현 드래곤들이 있는 마당에.
에반젤린의 곁에 붙어 자잘한 설명을 하던 루델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사파이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사파이어.”
그때 골드 일족의 한 여성이 조심스레 사파이어에게 다가왔다.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린 장로님이 혹시 돌아버리신 거야?”
“아니야 이년아. 그리고 오빠라 부르라고 했지.”
“몇 년 일찍 태어나면 오빤가? 돌았나 봄,”
“어휴 저 이상한 말투 진짜.”
성룡급 드래곤들은 사실 좀 의아해 보였다.
반대로 장로들은 상당히 화가 난 듯 보였다.
이윽고 거대한 원탁이 있는 곳에 도달한 오팔 장로는 드래곤 로드의 바로 옆자리에 착석하며 말했다.
“앉으시오.”
싸늘한 말투에 마린 장로와 카이저 장로, 다른 모든 이들이 자리에 앉았다.
“그래. 우리를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게요. 마린 장로. 아무리 장로라도 이번 일은 도가 지나쳤으니!”
건수 잡히면 물어 뜯어버리겠다는 듯 그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그 전에 로드께선 어떠하시오.”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소.”
“좋지 않군.”
“말 돌리지 마시오!”
오팔의 외침에 마린이 조용히 말했다.
“이전 타락용 세력에서 몰래 빠져나와 독단적으로 루델을 습격한 이들을 기억하시오?”
“그렇소.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전투의 흔적은 없었다고 했었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죽었소.”
그 말에 주변에서 술렁임이 커진다.
“죽었다? 어떤 전투 흔적도 없었을 텐데? 그 말에 확신을 담을 수 있소? 거짓은 용납할 수…….”
“죽은 게 확실하오. 그들의 드래곤 하트를 모두 확인했으니.”
그 말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즉. 그들 다섯 드래곤 모두가 흔적도 없이 일거에 당해버렸다는 뜻이었다.
“그럴 수가…… 대체 누가…… 루델 네놈 설마. 금제를 푼 것이냐?!”
“바른대로 말해주게 루델. 자네인가?”
“저는 아닙니다. 다른 드래곤은 몰라도 카르엘라는 제가 금제를 풀어도 쉬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카르엘라.
그 이름의 무게에 오팔과 카이저가 침묵했다.
“그럼 대체 누가…….”
“그것은 바로 이분이외다.”
마린 장로가 존칭을 사용해 내게 말했다.
“인간이? 말이 된다 보시오?! 한낱 인간이! 그것도 마나 한 줌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 지금 성룡급 드래곤 다섯에 카르엘라까지 순식간에 처리했다 말하는 것인가! 거짓도 적당히 처야 믿지!”
오팔의 분노에 마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 또한 처음엔 그리 생각했소. 하지만 하인스 영지에 우리가 상상 못 한 엄청난 전력이 웅크리고 있더군.”
“전력?”
“그렇소. 성룡급 드래곤 다섯 정도는 우습게 찍어누를 정도로 강대한 존재가. 거짓은 없소.”
거짓이 없다는 말에 오팔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저 말이 사실인가 인간?”
“내가 무슨 말을 하건 그리 곱게 받아들이진 못하는 거 같은데.”
“이놈이!!”
“어쩌시게 한판 하자고? 누군 변덕으로 도와준 것뿐인데 말이야, 아까부터 자꾸 투덜거리는 게 짜증 나는데 드래곤들은 하나같이 은원관계도 제멋대로인 종족인가?”
“이…… 이이이!!”
오팔 장로가 다시 마나를 끌어 올리려는 순간 내가 펼쳐둔 손을 살짝 오므렸다.
“그만!! 아직 이야기 안 끝났소.”
마린 장로의 외침에 오팔이 다시 이를 악물며 물러났다.
“그래. 고작 그것이나 알리자고 이곳에 저들을 데려왔는가.”
“본론은 지금부터요. 타락용의 종주, 군주가 깨어난 것 같소. 그리고,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는 게 확실한 것 같소. 그들은 우리의 동선과 움직임. 목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니”
그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뭐라? 그, 그게 사실이오?!”
카이저 장로가 눈을 부릅뜨며 묻다 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리 판단하게 된 이유에는 카르엘라의 부활 때문이오.”
부활.
아무리 잘난 드래곤이라도 사망한 드래곤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카르엘라의 드래곤 하트에 군주의 권능이 있었소, 방심하고 있던 차에 그의 권능에 당했지. 나를 포함해 루델과 사파이어의 마나를 모조리 빼앗기고 카르엘라가 영지 내에서 부활했소이다.”
장로급에 성룡급 둘의 마나를 빼앗았다는 말은 절대 가벼울 수가 없었다.
“한데 어떻게…….”
“거기서…….”
이어서 설명하려던 찰나였다.
콰아아앙!!
저 멀리서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진다.
이에 모두의 시선이 움직인 찰나.
갑자기 주변을 짓누르는 막대한 마나에 모두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이 마나는…….”
“골드 드래곤 카드키엘…….”
한때 로드를 모시던 장로였으나. 내전이 발생했을 때 군주의 편에 붙어 수많은 드래곤을 도륙 냈던 드래곤.
그 존재가 다수의 성룡과 장로급 드래곤들을 이끌고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빌어먹을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오팔이 벌떡 이러 마나를 일으켰다.
동시에 카이저 장로와 마린 장로도 그를 따랐고 다섯 성룡급 드래곤들도 그들을 따라 용의 둥지를 찾아온 적들과 대치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이곳에 남게 된 나는 루델이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이야기는 잠시 파투난 것 같은데. 기왕 온 김에 이곳 구경이나 하자고.”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따라왔다고 말은 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네가 한마디만 하면 전쟁을 끝내줄 수 있다.”
내 말에 루델이 침묵했다.
이상하리만치 그는 인간과의 관계에 선을 긋는 느낌이 든다.
에반젤린 때와는 달랐다.
왜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사파이어가 일어났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 저들을 상대하러 가겠다. 루델. 넌 절대로 이곳에서 나오지 마라.”
“…….”
순식간에 블링크를 사용해 사라지는 그를 보며 루델이 조용히 말했다.
“저…… 아가씨.”
“응?”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저들이 찾아온 건 아마 싸움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 겁니다.”
그 말에 에반젤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륀느. 따라가 봐.”
내 말에 륀느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작게 벌렸다.
이에 한숨을 내쉰 나는 지구에서 사두었던 초콜릿을 꺼내 포장지를 찢은 뒤 그녀의 입에 밀어 넣듯 꽂아주었다.
“으므므므 으으므므므”
뭐라뭐라 말하지만 초콜릿을 오물거리던 륀느가 조용히 사라졌다.
* * *
용의 둥지. 혹은 드래곤의 도시라 불리는 로드의 레어.
보통의 레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크기의 공간을 단시간에 다 둘러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루델라이트는 간단하게 주변이 탁 트인 공간을 안내해주었다.
“대리석이 많네.”
“어머니가 대리석을 많이 좋아하셨거든요.”
새하얀 신전 같은 건축물들을 보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드래곤의 취향이야 꼭 보석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네 어머니가 드래곤 로드라고?”
“예.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굉장한 힘을 지니고 계셨기에 다른 장로들을 제치고 곧바로 로드가 되신 케이스입니다.”
“로드가 되었다라.”
“어머니도 저와 같거든요.”
심장에 시초용의 흔적을 지닌 드래곤.
다른 말로 하면 고대룡의 힘을 물려받은 아주 극소수의 드래곤이라는 소리였다.
다른 말로 하면 오래전 멸종해 사라진 고대룡은 그 핏줄을 모두 잃지 않고 현 드래곤에게 아주 천천히 미약하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루델 오빠!”
그때였다.
저 멀리서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던 작은 소년 소녀들이 보였다.
아름다우면서도 활발한 드레스나 모험가 복장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은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다가왔다.
“너희들도 깨어났구나.”
“네. 그런데 정말 인간이에요?”
그 물음에 에반젤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헤츨링은 레어 밖으로 못 나가니까요. 인간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일 겁니다.”
“아하”
“이봐. 인간. 이름을 밝혀라. 나는 레드 일족의 카카라고 한다.”
그때 레드 일족의 소년이 에반젤린에게 다가와 거만하게 말했다.
“응? 난 에반젤린이야.”
“흐…… 흐흥…… 그렇구나. 인간은 정말 예쁘구나.”
레드 일족의 소년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뭐 혹시 내가 성룡이 되면 레어에 와서 가디언이 되지 않을 테냐?”
“멍청이 카카. 인간은 오래 못 살아. 우리가 성룡이 될 즈음엔 죽을걸?”
“끄응…….”
블루 일족의 소녀가 타박하자 카카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헤헤 웃는 에반젤린을 바라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쳇!”
그때 골드일족의 한 꼬마 소녀가 조심스레 내 옷자락을 잡는다.
“이…… 인간.”
“음?”
“아까 그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 나도 줄 수 있어?”
어린 소녀. 겉보기에도 굉장히 어린 것으로 보아 갓 폴리모프를 배운 아이가 틀림없어 보였다.
드래곤은 100여 년 정도 살고 나면 보통 용언 마법으로 폴리모프를 배우니 말이다.
물론, 일반 인간이 폴리모프를 사용하는 것과 다르게 굉장히 쉽게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초콜릿?”
“응.”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골드 일족의 소녀의 말에 나는 아공간에서 과자와 초콜릿. 그리고. 대망의 음료수를 꺼냈다.
“와아 많아! 이건 뭐야 인간?”
골드일족의 소녀가 부스럭거리는 과자 봉지를 만지작거리다가 대망의 음료수 바로 콜라를 집어 들고 물었다.
“콜라라는 거야.”
내 대답에 그녀는 신기한 듯 그것을 보다가 그것을 천천히 입에 물었다.
“으응…… 안 나와.”
“뚜껑을 열어야지.”
이에 내가 그것을 빼낸 뒤 뚜껑을 따주자 푸식! 하는 소리와 함께 탄산의 소리가 들린다.
“와아…….”
“마셔볼래?”
내가 종이컵에 콜라를 담아 건네주자 소녀는 조용히 그것을 노려보았다.
“도…… 독이 있는 건 아니지?”
“독 같은 건 없어. 먹어봐.”
내 말에 소녀는 루델의 눈치를 살폈고 루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에 소녀는 곧 콜라를 마셨고 이내 눈을 콱 찡그렸다.
“으! 뭔가 마구 튀어!”
콜라의 탄산은 처음 마시는 이에겐 굉장히 생소할 수밖에 없다.
허둥지둥거리던 소녀는 울상을 지은 채 콜라를 노려보았다.
“뭐야 이거?!”
“맛있을걸?”
내 물음에 소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시 콜라를 마셨다.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콜라를 한 모금 다시 마신 그녀였다.
그리고.
“와아…….”
이내 탄성을 흘렸다.
톡 쏘는 탄산 아래에 단맛. 자꾸 먹고 싶게 만들어주는 맛에 금발 소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소녀는 말없이 콜라를 순식간에 들이켰고 이내 내게 잔을 내밀었다.
“한잔 더 줘!”
“그럼 주세요. 해봐.”
“주…… 주세요!”
캬. 이놈의 카페인은 정말 마성의 아이템이로구나.
순식간에 입맛을 사로잡아버린 모습에 절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귀여운 아이의 순진무구한 행동을 보고 있자면 홍단이 청단이나 이제 아장아장 걸어 다니기 시작하는 다리안이 떠오른다.
괜히 훈훈해지는 느낌이라 그것을 더 따라주니 금발 소녀는 누가 빼앗아 갈까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루니아 치사해! 나도 먹을래!!”
이윽고 다른 아이들도 달려들어 콜라를 달라고 아우성을 피우기 시작하자 나는 조용히 잔을 몇 개 더 꺼내 하나씩 건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