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58화
드래곤 로드가 잠든 신전의 앞은 레드 드래곤의 취향답지 않게 우거진 꽃밭이 존재한다.
꽃 하나하나가 정말로 보기 힘든 꽃으로 어지간한 정성이 없으면 꽃을 피우는 것조차 불가능하기로 유명한 꽃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런 꽃밭의 중앙에 한 사내가 대자로 뻗은 채 쓰러져 있었다.
그의 이름은 골드 드래곤 장로, 카이스.
현재 오크 부족마을을 습격했다가 금우궁 타우르스에게 잡혀버린 골드 드래곤 카이나의 오빠였던 타락용 측의 최연소 장로였다.
“끄응…… 여긴 어디…….”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징징 울리는 두통을 호소하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왜 이곳에 쓰러진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나는 것이라곤…….
“핫! 인간! 인간이 이곳에 있다니!”
경악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그가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그의 의지를 배반했고, 꼴사납게 다시 바닥에 쓰러지게 만들었다.
“컥…… 망할…….”
짧게 중얼거린 그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용의 둥지에 인간이라니. 기가 막히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대체 누가 자신을 기절시켰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이럴 게 아니군. 어서 돌아가서 인간에 대해 알려야겠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동족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운 좋은 인간이구나. 그 자리에서 지워버리려 했거늘. 기절만 하지 않았어도…….”
그는 자신을 기절시킨 게 다름 아닌 그 인간이라는 사실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를 어찌하려던 순간 다른 요인이 자신을 기절시킨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카이스입니다. 들리십니까?”
천천히 걸어 나가며 통신 아티펙트를 가동시킨 그가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성룡급 드래곤들 중 일부를 향해 자신의 의견을 남겼다.
“이곳에서 인간을 발견했습니다. 그를 발견하면 바로 신변을 구속해두세요. 온건파 겁쟁이들을 몰아넣기에 좋을 테니.”
[카이스 장로님? 그게 무슨…….]
“따지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세요. 알겠습니까?”
[예? 아아…… 예 알겠습니다. 한데 인간이 저항을 하면 어찌합니까?]
“어쩌긴 뭘 어째요. 고작 인간인데. 그냥 파리 잡듯이 때려잡는다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대신 흔적은 남겨놓으세요. 가루로 만들어버리면 온건파 겁쟁이들을 압박할 수단이 사라지는 것이니.”
[예 알겠습니다.]
그는 좀 전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인간에게 반응도 못할 속도로 당했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해내지도, 인지하지도 못했다.
* * *
용의 둥지에 있는 인간의 존재.
온건파 쪽 드래곤들도 한차례 경악한 바 있지만 그건 개혁파, 즉 타락용들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시선이 모여드는 것을 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이것들은 다른 건 하나도 모르면서 그놈의 동족인지 아닌지는 참 구분을 잘해요.”
내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것일까.
타락용 세력의 드래곤들이 내게 다가오며 소리쳤다.
“어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이곳에 인간을 들이다니. 온건파도 드디어 미쳐버린 것인가?”
“그는…….”
오팔 장로와 카이저 장로가 이를 악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또한 나의 존재는 아직 해답이 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온건파는 규율을 중시하는 세력. 당연히 용의 둥지에 인간을 데려오는 엄청난 짓을 반대하는 입장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에 온건파 쪽 드래곤들이 우물쭈물 말을 못 하고 있자 나는 괜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적우적…….
더 맛나게 그들이 준비해놓은 파티 음식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거 맛있네요. 연회라면서 다들 안 먹고 뭐 합니까.”
…….
고요한 침묵이 일었다.
애초에 이곳의 음식이나 먹자고 모인 이들이 아니다.
시초용을 향한 제사를 위해 휴전까지 했던 이들이지만 결과적으로 온건파와 개혁파는 전쟁을 치르는 중. 당연히 당장이라도 씹어먹어 버리고 싶은 적이나 다름없다.
조금이라도 불씨가 튀면 사실 바로 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긴 했다.
그그그그그극.
“감히…… 감히 인간이…….”
이윽고 한 드래곤이 천천히 기세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사파이어와 논쟁을 벌였던 드래곤이었다.
그는 드래곤 특유의 피어를 사정없이 발산하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커다란 키를 자랑이라도 하듯 접근하며 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온건파도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 인간을 감히 이곳에 들이다니. 이래놓고 전통을 따졌던 건가 쓰레기들.”
“입 조심해라! 네놈의 잣대로 판단하라 허한 적이 없다!”
사파이어의 외침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걸 왜 네가 정하는지 모르겠군. 죽고 싶지 않으면 빠져라. 사파이어.”
싸늘하게 몰아붙인 그가 천천히 나를 바라본다.
“인간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둘 이상. 하나는 드래곤도 인간도 아닌 기괴한 잡종이구나.”
륀느를 향해 잡종이라 말하자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약골 도마뱀. 매우 머리가 나쁘다 분석.”
“뭐라?”
안 그래도 차갑던 분위기가 더욱 싸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물러나라. 그 인간은 내 손님으로써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장로의 손님이라도 이곳은 드래곤 이외에 들어올 수 없는 성역이오. 비록 진영은 다르지만 마린 장로. 어릴 때 당신을 존경해왔건만. 노망이라도 들었나 보군.”
“닥쳐라. 핏덩이 같은 놈.”
마린 장로의 분노가 곧 유형화된 기세가 되어 그의 힘을 짓누른다.
내가 동결시킨 마나는 아주 잠깐이었다.
그렇기에 현재로선 그들이 마나를 쓰는 데엔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며, 마나를 동결시킨 게 일개 개인의 힘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퍽 보기 우습군. 온건파 겁쟁이들이 이런 짓까지 저지르고 있었다니. 이것은 군주께 보고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군.”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네놈들과 어떤 이유에서건 명분 놀음을 할 생각 따윈 없으니.”
마린 장로의 대답에 드래곤들은 연회고 뭐고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으르렁 대기 시작했다.
“물러나라. 이 이상 접근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
이윽고 루델과 사파이어가 나와 에반젤린의 앞을 막아서며 개혁파 드래곤들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뭘 하건 네놈의 허락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 허락을 받을 이유는 없지. 우리는 같은 동족이지만 적이니까.”
그가 천천히 다가와 내 멱살을 잡았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내 육신 전체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감히 성역인 용의 둥지에 동족이 아닌 존재가 들어와 있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를 헤치고 싶으면 나부터 죽여야 할 것이다.”
사파이어의 싸늘한 말에 개혁파 쪽의 분위기가 더욱 싸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당장 물러나라. 펠리우스.”
“막고 싶으면 막아보시지.”
콰앙!!!
그 말과 함께 펠리우스라 불린 드래곤과 사파이어의 육신이 부딪혔다.
서로 힘겨루기를 하듯 노려보던 그들은 더 이상 말릴 수 없는 듯 보였다.
에반젤린의 앞에서 쓸데없이 싸우지 말라고 마나까지 동결시켰건만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좋다. 덤벼라. 그를 해치겠다면 나를 꺾어야 할 거다.”
“흥!”
“고작 인간을 죽이겠다고 힘을 개방하다니 쪽팔린 줄 알아라.”
큰 사태를 막기 위해 사파이어가 그를 향해 빈정거렸지만 그게 역효과가 난 듯 보였다.
“네놈이 대신 죽어주겠다면야 순서만 다를 뿐 나야 상관없다.”
사파이어의 싸늘한 일갈에 펠리우스의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용족들은 의외로 호전적이다.
특히 블루와 레드 일족은 유별날 정도로 앙숙인 경우가 많다.
* * *
이 상황을 예상한 이가 있기나 할까.
당장이라도 싸움을 준비하는 개혁파 성룡급 드래곤인 펠리우스와 사파이어의 싸움을 지켜보는 이들의 표정은 천차만별이었다.
온건파 측에선 걱정과 복잡한 심경이. 개혁파 측에선 이 상황에 대한 어이없음과 펠리우스가 당장이라도 사파이어를 찢어발길 것이라 예상치 않는 자들이 대다수였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마나의 양이나 서클이 전투력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에반젤린. 누가 이길 거 같니?”
“으응…… 잘 모르겠어요. 둘 다 대단한 거 같은데…….”
태생이 대단해도 아직 에반젤린에겐 어려운 대상들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콰앙!!
이윽고 두 드래곤의 격전이 시작되었다.
본체 현신을 하지는 않았지만, 폴리모프 상태로 각기 무기를 들고 마법을 난사하는 그들의 위력은 아무리 썩어도 준치라고 어지간한 고위마법사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험악했다.
쾅!! 쾅!!
푸른 불꽃을 피워 올리며 펠리우스를 향해 맹공을 펼치는 사피어는 드래곤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입증하듯 보통 인간과는 격이 다른 마법을 보여주며 적을 압박했다.
하지만 막대한 마법 세례 속에서도 펠리우스는 느긋하게 공격들을 막아내며 스산하게 웃었다.
“륀느. 어디에 걸래?”
“펠리우스라는 도마뱀에 걸겠다고 판단해.”
“어이 인간!!”
너무 태평한 대화를 들은 것일까.
여성 드래곤 하나가 내 곁으로 다가오며 세로로 찢어진 동공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네놈 때문에 일이 아주 복잡하게 돌아가는구나. 어찌할 거냐!”
그녀의 외침에 나는 담담하게 고갯짓했다.
“어쩌긴 알아서 하겠지.”
콰앙!! 쾅!!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펠리우스와 사파이어의 싸움을 지켜보며 루델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만. 그는 마린 장로님의 초대를 받고 온 거다. 이 이상 그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라.”
“그걸 말이라고 해? 안 그래도 불리한 상황에!! 이렇게 되면 저들은 우리를 칠 명분을 얻은 것이라고!”
“언제부터 명분 따졌나. 그리고, 그 점은 신경 쓰지 마. 마린 장로님도 생각이 있으시니까.”
콰아앙!!
격렬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두 드래곤은 맹렬하게 마법을 쏘아 보내며 서로를 공격했다.
그러면서도 절대 광역 마법으로 주변에 여파가 퍼지지 않게 조절했다.
물론, 둘 다 대단한 드래곤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커헉!!”
“푸하하하하하!! 내가 언제까지고 네가 알던 존재라 착각하는 거냐? 이제 네깟놈은 내 상대가 못 된다 사파이어. 군주님께 은혜를 받은 나를 네깟놈이 무슨 수로 이기겠다고.”
애석하게도 나와 륀느의 안목은 정확했다.
사파이어와 펠리우스의 힘은 엇비슷하지만, 펠리우스는 모종의 한 수를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승패를 순식간에 가르는 지표가 되어버렸다.
“아니…….”
“사파이어가!”
온건파 드래곤들은 경악한 모습들이었다.
아마 사파이어가 이렇게 쉽게 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크흐…… 크흐흐흐흐. 약해빠진 놈. 약자는 약자답게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라. 힘이 없는 놈이 내세울 수 있는 발언은 그 어디에도 없다!”
퍼억!! 퍽!!
“쿨럭…… 컥…….”
쓰러진 사파이어가 펠리우스에게 걷어차이며 고통스런 신음을 냈다.
저항해야 하건만. 어째서인지 압도적인 실력 차로 인해 그가 힘을 제대로 내비치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사파이어를 짓밟던 게 질려버렸는지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자. 이제 내가 이겼으니 저 인간의 목숨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
드래곤들이 자기 자신의 힘을 내걸고 싸웠다.
온건파건 개혁파건 용족의 전통에 따라 그들은 나를 더 이상 보호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저하. 쓸데없는 싸움에 휘말릴 필요 없습니다. 제가 돌려보내겠습니다.”
“됐어.”
담담하게 루델의 제안을 거부한 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기게도 나를 제거하려 드는 펠리우스의 행동에 온건파도 더 이상 나서려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니 애초에 사파이어나 마린 장로, 루델을 제외한 온건파 드래곤도 이곳에 인간인 내가 들어와 있는 게 마땅찮았을 테니까.
굳이 목숨을 걸고 나설 이유는 없다고 판단한 듯 보였다.
“머…… 멈춰라. 펠리우스.”
“으잉? 패배한 개새끼가 뭐라 지껄이는 거냐.”
퍼억!!
쓰러진 사파이어를 다시 한 차례 걷어차지만, 사파이어는 펠리우스의 다리를 놓지 않았다.
“이 이상 일이 커지는걸 두고 볼 수 없다…… 난 아직 쓰러지지 않았어.”
“닥쳐라. 패배자. 용족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의 물음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륀느. 가서 치워라. 저거.”
그렇게 말한 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에 륀느가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나 사파이어와 펠리우스가 싸우던 곳으로 내려갔다.
“응? 이 쥐방울만 한 잡종은 뭐냐? 뭐, 가디언이라도 되나 보지?”
“마음대로 생각해라 도마뱀.”
“도마뱀이라고? 이 미친 인간이 감히!!”
그 말에 펠리우스의 전신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는 이내 차갑게 실소했다.
“하. 그래. 뭐. 인간은 약해빠졌으니 골렘 같은 걸 내세워서 뒤에 숨는 것밖에 못 하겠지. 하지만 사파이어와의 싸움에서 이겼고 나는 네놈의 목숨을 취할 권한을 얻었다. 저 골렘이 어떻든 간에 네놈은 죽은 목숨이야.”
그렇게 말하며 륀느를 향해 다가간 그가 킥킥 웃었다.
“그나저나 꽤 재밌는 생명체군. 골렘 같은데 생명체와 흡사해. 저놈을 죽이고 이건 내가 회수해야겠군.”
그렇게 말하며 그가 륀느를 향해 어떤 긴장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뻗었다.
애초에 륀느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고 자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의 지대한 착각이었다.
스스스슥.
륀느의 무표정한 눈동자가 그를 바라본다.
동시에 륀느의 손에 황금빛 창이 소환되었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펠리우스의 미간을 향해 창을 찔러넣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륀느의 창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마린 장로가 순식간에 난입해 륀느의 창과 그녀를 향해 덤벼들던 펠리우스를 막아선 것이다.
둘의 싸움을 강제로 중재시킨 마린 장로가 묵직한 피어를 뿜어냈다.
뭔가 결심을 내린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나의 손님이다. 장로의 권한을 발동한 이상 그는 용족에 대등한 손님. 따라서 휴전을 신청한 상황에서 그를 해친다면 휴전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
그 말에 주변이 침묵했다.
마린 장로가 타락용 장로들을 노려보며 소리치자 그들은 말없이 나와 마린 장로를 노려보다 비웃음을 던졌다.
“마린 장로도 노망이 들었군. 그래. 장로의 권한. 좋지. 휴전한 입장에서 어느 정도 인정은 해줘야겠지. 펠리우스. 놀이는 되었다. 우린 당장 싸우러 온 게 아니니 그쯤 해둬라.”
타락용 장로의 말에도 펠리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륀느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륀느를 노려보는 펠리우스를 보며 내가 천천히 륀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돌아와 륀느.”
그 말에 륀느는 좀 전 그와 충돌하기 직전까지 갔던 상황을 잊은 듯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며 내게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륀느와 에반젤린을 데리고 드래곤들의 뜨거운 시선을 무시한 채 나가버렸다.
드래곤들의 입장이야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나저나…….
“적당히 했어야지.”
* * *
륀느와 데이비가 떠나가고 개혁파 드래곤들은 흥이 깨졌다는 듯 물러났다.
장로가 자신의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권한을 발동하여 인간을 동등한 손님으로 데려왔다.
비록 적이지만 휴전상황에서 드래곤과 동등한 입장의 손님을 공격해서 휴전을 박살 낼 순 없었다.
당연히 손님으로 납득하는 드래곤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대면 휴전을 깨어진다.
그렇기에 타락용들은 물러난 것이다.
반면 온건파 드래곤들은 마린 장로가 대체 왜 이런 선택까지 내려가며 인간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혼란스러운 입장이었다.
그중 가장 혼란스러운 건 오팔 장로와 카이저 장로였다.
“노친네. 노망이 든 게요?”
“후우…… 나는 모르겠군. 하지만 규율은 규율.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여 잠시 물러나겠소. 하지만 오래 머무르게 두지 마시오. 당장 쫓아내라 이 말이외다.”
그렇게 말하며 오팔 장로가 떠나가고 카이저도 떠나갔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식어버린 탓에 온건파 드래곤들도 긴장을 풀며 물러난다.
이후 남은 것은 가만히 굳어있던 펠리우스와 사파이어. 그리고 마린 장로를 포함한 두어 명의 드래곤뿐이었다.
“그런데 저놈은 뭐 하는 거야.”
정작 인간은 떠나갔건만 펠리우스가 어째서인지 어떤 반론도, 반박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에 펠리우스의 상태를 본 드래곤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어렸다.
오만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레드 드래곤 펠리우스가…….
완전히 굳어버린 얼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봐. 네놈과 같이 온 놈들은 다 돌아갔다. 이 이상 소란피우지 말고 꺼져.”
이에 한 드래곤이 다가가 그를 건드린 순간.
털썩…….
펠리우스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잉?”
이에 드래곤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그는 마치 두려움에 빠진 것처럼 한참 동안 중얼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