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70화
은은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거대한 공동.
그 공동의 중앙엔 검푸른 갑각같은 비늘을 두른 세 쌍의 날개를 지닌 용이 낮게 울며 침묵했다.
[위대하신 분께서 어찌 이곳까지.]
묵빛의 마법사 복장에 제 머리보다 큰 커다란 챙이 달린 마법사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는 금발의 외눈을 가진 소녀, 오딘은 조용히 드래곤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타락용의 왕. 새로운 로드.
바로 군주가 바로 그였다.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으로 드래곤의 뺨을 건드렸다.
딱딱하면서 어색한 마치 인형이 쓰다듬는 것 같은 손길이었지만 거대한 드래곤은 마치 말 잘 듣는 애완동물마냥 그녀에게 숙인 머리를 들지 않았다.
콰아앙!!! 쾅!!
그때 저 멀리서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진다.
[침입자가 온 것 같습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군주의 말에 오딘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군주의 설명이 없어도 알만큼 바깥에선 엄청난 폭음으로 가득했다.
[감히 당신과의 대면을 방해한 자를 지금 당장 처리하고 싶사오니 허락을.]
그 말에 오딘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지근거리에서 퍼져나가며 누군가가 난입했다.
* * *
교섭 따윈 없었다.
한번 시작된 공세에 자비 같은 것을 부여할 이유 따위도 없다.
내가 일으킨 언데드 드래곤은 기존의 언데드 드래곤이 가지는 힘을 아득히 넘어서 주변을 지옥도로 만들고 있었다.
공격에 의해 육신이 망가져도 강제로 재생시키며, 출력 이상의 화력을 내며 브레스를 쏘아댔다.
언데드 드래곤에게 저항하다 죽은 개혁파의 드래곤들은 모두가 예외 없이 내 손에 의해 부활하듯 되살아났다.
이곳에 군주가 있다.
오딘의 영향을 받은 그놈을 만나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것을 방해하는 놈은 단 한 놈도 그냥 둘 생각이 없었다.
콰앙!!!
거대한 동굴의 안쪽, 군주의 것으로 추정되는 특이한 힘이 점차 짙어진다.
살아남은 드래곤들은 필사적으로 내 접근을 막으려 애썼으나 내게서 또다시 대량의 사령 마나를 먹어치운 언데드 드래곤들은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 그들을 물어뜯고 찢어발겼다.
이윽고 나는 거대한 통로에 진입했다.
대부분의 개혁파 드래곤들은 몰살당했고 이제 남은 건 극소수.
이 외에도 다른 장소에 개혁파 드래곤들이 다수 남아있는 것 같긴 하지만 어차피 내게 중요한 것은 군주의 소재이지 그들의 말살이 아니었다.
막는 놈만 철저히 부수고 지나갈 뿐.
콰앙!!
그때 나보다 먼저 정리를 위해 떠났던 언데드 드래곤 두어 마리가 완전히 곤죽이 된 채 내 쪽으로 퉁겨져 왔다.
자체회복을 넘어서는 공격력에 노출된 것이다.
싸늘하게 드래곤이었던 것을 바라보던 나는 곧 어두운 통로 너머에서 붉은 비늘을 지닌 드래곤 한 마리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놈은 자신의 팔로 방금까지 수많은 드래곤들을 공격했던 장로급 언데드 드래곤의 머리를 뽑아 들고 찢겨 나간 목 부분을 질질 끌며 다가왔다.
이놈은 좀 다르네.
[이곳을 찾아오다니 간도 크구나. 인간.]
조용히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를 차갑게 올려다본다.
“넌 군주가 아닌데?”
[군주께선 현재 바쁘신 몸. 네깟놈이 함부로 알현을 요청해도 될 분이 아니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뒤쪽으로 난 긴 통로에서 언데드 드래곤 두어 마리가 섬광처럼 날아들어 그를 공격했다.
콰아앙!! 쾅!!
드래곤은 마법의 종주. 당연히 마법의 힘을 사용하는 존재이지만 그는 마법보다는 육체파에 가까운지 맨몸으로 덤벼들어 언데드 드래곤들과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뿌드드득!! 콰직!!
순식간에 덤벼든 성룡급 언데드 드래곤 두 마리가 갈기갈기 찢긴 채 튕겨 나갔다.
[고작 이게 네 전부였다면 후회하게 해주지.]
“다시 묻는다. 군주 어딨어.”
[군주…… 군주라…… 그래 군주를 만나고 싶다면.]
요쉬 대륙의 드래곤의 모습을 지닌 레드 드래곤이 전신에 폭발적인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 수준은 이곳까지 와서 만난 장로급이나 성룡급과는 격이 달랐다.
[요쉬 대륙의 드래곤 로드인 이 몸의 공격에서 살아남아봐라!]
그 말과 함께 놈의 앞발이 지면에 내리꽂혔고.
쩌엉!!
무형의 충격파가 칼날처럼 터져나가며 내게 날아들었다.
거대한 강풍에 코트 자락이 흩날리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다만 그냥 바람은 아니었다.
뒤이어 합류한 언데드 드래곤 두어 마리가 저항도 못 한 채 토막 나버렸기 때문이었다.
단일 드래곤으로써 벌써 저놈이 처리한 언데드 드래곤이 몇 마리이던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봐서 알고 있다. 전력을 다해 내게 덤벼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테니.]
폭발적인 위압을 뽐내며 그의 전신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폴리모프와는 다른, 압축에 가까운 형태.
일반적인 폴리모프와의 다른 점이라면, 그 힘의 역량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드래곤의 폴리모프는 자기 페널티에 가깝다.
본래의 육신을 억눌러 인간의 형상을 취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뿔이 돋아난 거구의 반룡은 육체가 작아졌음에도 그 힘은 더욱 증가했다.
이윽고 인간과 크기가 비슷한 반룡의 형태로 변한 그가 거대한 용아검을 내게 겨누었다.
“네게 원한은 없지만. 이쪽도 사정이라는 게 있다.”
“살고 싶으면 비켜.”
나는 그가 아닌 그의 뒤편에 있는 석실의 문을 바라보며 홍단이를 뽑아 들고 청단이와 합쳤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초단이의 의지가 나타나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말리려 하지만 나는 차갑게 문을 응시할 뿐이다.
[네놈은 인간이나 인간과는 다르구나. 초월자. 그래. 말만 번지르르한 초월자가 아닌 진짜 초월자. 그게 네놈의 정체구나.]
나에 대해 제법 완벽하게 파악한 그가 검에 폭발적인 화기를 둘렀다.
내 몸체만 한 대검의 날을 하늘로 향하게 한 채 검 끝을 내게 겨눈 그의 전신으로 붉은 화염이 일렁이듯 모여들었다.
그리고, 잠시의 텀이 흐른 후 그가 나를 향해 폭발적인 기세로 파고들었다.
“초단아.”
-아버지…….
“아빠 말 좀 들어라.”
조용한 목소리에 초단이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동시에 그녀의 형체가 흐릿하게 사라졌고 이내 검에서 청적색의 기류가 터질 것처럼 흘러나왔다.
[마령검 80초]
[필사즉생 필생즉사]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오,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나의 검이 곧 하늘이니. 창공에 화선지를 펼쳐 그림을 그리리다.]
마치 검기 살아있는 것처럼, 거칠게 꺾이며 그를 향해 퍼져나갔다.
내가 만들어낸 검기를 본 그가 눈을 잠시 부릅떴지만 이내 환희에 가까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것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기꺼워하는 듯한…….
그의 용아검에 둘린 화염이 검기와 순식간에 충돌하며 어마어마한 여파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두 힘은 상쇄되지 않았다.
마령검의 꺾인 검기가 그의 화기를 먹어치우며 모조리 베어버린 것이다.
그의 힘은 막대한 수준에 있었지만, 초단이라는 변수를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그 해답이었다.
콰아아앙!!
거대한 여파가 사라졌을 때 나는 저 멀리 요쉬 대륙의 드래곤 로드가 지키고 있던 문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 *
터벅…… 터벅…….
좀 전까지 무언가가 있었다는 흔적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요쉬 대륙의 드래곤 로드, 이름도 듣지 못한 거구의 사내가 제 목숨을 내어가면서 막아냈다고 하기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흔적도 없다.
마법, 정령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이곳에는 어떤 방해꾼도 없었기에 천천히 걸어들어온 나는 드래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도달해 바닥에 손을 쓸었다.
역시 어떤 흔적도 없다.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못 건졌다고.”
타락용이 죄다 쓸려나간 이상 타락용 군주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
놈이 금기를 범한 것도 아니고, 중요한 세계의 균형을 건드린 것도 아니니 사실상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이놈을 잡아야 하는데 말이야.
그때였다.
조용히 침묵하던 초단이가 모습을 드러내며 청적색으로 물든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내 옆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상한데요?
“이상해?”
-군주라는 드래곤이 자신이 있었던 흔적을 지울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 말에 내가 움찔했다.
생각해보니 이상하네. 어디로 도망갔는지에 대한 흔적을 지울 순 있어도 굳이 자신이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까지 모두 지울 필요가 있었을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는 위화감은 들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말이 되지 않는다.
뭔가 숨겼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먹어라.]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은 뒤 조용히 뇌까렸다.
그러자 내 손끝을 타고 뻗어져 나온 거대한 무형의 무언가가 주변의 공기를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약간 기이한 점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나는 초단이의 검신을 휘둘러 그 끈을 잘라냈다.
화아아아아악!!!
동시에 좀 전까지 아무 흔적도 없던 내부에 어떤 흔적이 남기 시작한다.
지울 시간도 없었기에 급히 빠져나갔을 경우 가능한 상황.
내가 끊어버린 끈이 사라지며 나타난 흔적은 두 가지였다.
어디론가 사라진 타락용 군주의 흔적과…….
“하…… 진짜 아니기를 바랐는데.”
아트렐리아 대륙의 마법사. 오딘, 그리고 정체 모를 누군가의 흔적이었다.
이에 나는 망설임 없이 허공에 양손을 뻗었고.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뭐가 됐건, 오딘 그녀와 직접 대면해봐야 할 것 같았다.
본래엔 타락용을 쫓으려 했으나.
오딘의 흔적을 찾아버린 이상 그는 이제 관심 밖의 일.
나는 오딘의 흔적이 향한 곳을 찾기 위해 강제로 차원을 찢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런, 아직 당신은 나를 만날 자격이 안 됩니다.]
누군가의 여유로운 목소리와 함께…….
오딘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법이 나를 튕겨냈다.
“…….”
[안달하지 않아도 언젠가 때가 되면 자연스레 만나게 될 겁니다.]
마치 통보하는 듯한 말투.
이에 내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걸렸다.
“내가 살면서 한가지는 확실히 알겠는데.”
내 앞에서 자격, 때를 운운한 새끼 치고 곱게 보내준 놈이 없다는 것이다.
내 손에 신격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본인이 아닌 그 의지를 남겨 놓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딘과 관련된 놈에 대한 단서를 찾았으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공동을 벗어났고, 이내 완전히 무너진 잔해더미를 맨손으로 뽑아내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 처박힌 반룡.
머리에 뿔이 돋아난 드래고니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내를 한 손으로 끌어냈다.
“죽은척하지 말고 일어나.”
요쉬 대륙의 드래곤 로드.
그는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놈이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오딘이 왜 여기 있었는지.
게다가.
이놈은 타락용과 다르게 많은 것을 알면서도. 상당히 이들에게 비협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헉?! 무슨?!”
내 회복마법에 그가 크게 피를 울컥 토했다.
그의 상처는 심각했으나 나는 당장 목숨줄만 붙여놓았다.
“네 이름은?”
내 물음에 지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 내 목숨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괴물 같은 놈. 네게 할 말은 없다. 죽여라.”
“누구 마음대로.”
그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린 내가 환하게 웃는다.
“니가 아는 거 싸그리 털어내기 전까지 넌 못 죽어.”
내 말에 그가 마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젠장…… 잘못 걸렸군.”
“너도 어차피 저놈들과 그리 사이는 좋아 보이지 않던데.”
내 물음에 그가 조용히 붉은 눈동자로 나를 직시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 괴물 같은 마법사로 인해 금제가…….”
콰득!!!
“커억?!”
무형의 힘이 그의 내면으로 파고든다.
검은 그림자 같은 그것은 이내 그의 전신을 돌아다니며 그의 몸에 펼쳐진 검은 마나의 흔적을 씹어 삼켜버렸다.
하나라도 놓치면 그는 죽겠지만 금제를 건 것이 오딘이라면.
나는 세상 유일하게 그것을 파훼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거는 금제들은 전부 한가지 공통점이 있어. 다른 놈들에겐 알려주진 않았지만 넌 알아둬.]
수백 년 전. 회랑에서 오딘이 내게 마법을 가르쳐주다가 했던 말이 정확하게 떠올랐다.
물론, 그걸 안다고 이렇게 쉽게 금제를 해제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포식의 권능과 그녀가 알려준 특징. 열쇠를 알고 있는 나는 보통의 마법사가 거는 금제를 푸는 것보다 쉽게 그녀의 금제를 풀어버렸다.
“어?”
자신의 금제가 사라져버린 것을 깨달은 요쉬 대륙의 드래곤 로드가 벙찐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됐나? 협력할 거면 말하고, 입을 다물겠다면 다시 저 안에 처박아줄게. 선택해.”
내 말에 그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감히 드래곤 로드에게 이렇게 오만하게 구는 인간은 처음 보는군.”
“요즘 도마뱀 로드는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할 거야 말 거야.”
내 눈동자에 고대룡 이클립스의 용언 마나가 서리며 일순간 빛으로 파충류의 눈동자 같은 흔적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에 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본다.
“너…… 대체…….”
“대답부터.”
짜증스런 내 말투에 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확인해보지. 만약 금제가 사라진 게 맞다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네게 알려주겠다.”
역시. 충돌 직전 그의 표정을 보고 검로를 강제로 꺾어 목숨줄만 붙여놓은 게 정답이었다.
자기가 죽기를 바라는 드래곤의 경우는 하나뿐이니까.
자신의 이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여야 할 때. 자존심이 바닥 끝까지 내몰려서 극도의 수치를 느끼고 있을 때.
“끄악! 빌어먹을 온몸이 쑤시는군…… 살다 살다 그렇게 흉포한 검기는 처음 본다 인간!”
끙끙 앓는 그를 뒤로한 채 걸어 나가며 나는 오딘이 금제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뒤이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해냈다.
완전 기억능력은 때론 나를 괴롭게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때보다 최고의 체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말이야, 약속은 함부로 하지 마. 영원히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뭐라고 했어요?]
[닥쳐! 묻지 마! 알려고 들면 태워 버리는 수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