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77화
“무슨 뜻인지. 이해했지?”
“에이리아에게 덤터기를 씌워 이 사건을 토스한 큰 놈이 있다는 거지. 그것도 강력계 형사에게 압박을 넣을 정도의 수준을 가진.”
“그 사람은?”
“직접 만나봤어, 정말 한 성깔하는 형사님이라더라. 민간인이 쓸데없이 나서서 위험을 자초하지 말라고 입을 다무는 걸 설득하느라 진땀 좀 뺐어.”
“그러니 하지 말라는 데도 혼자 파고들다가 정직 당했겠지.”
타협 없이 범죄를 소탕하는 형사.
잘 보긴 힘들어도 분명히 존재한다.
“일단 확실한 건 적어도 강력계 형사 하나를 말 한마디로 정직 시켜버리고 에이리아가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의 메신저 어플을 조작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 뿐.”
“그놈들은?”
“그놈들?”
“에이리아와 만났던 그 집단 폭행범들, 애초에 이 일은 그놈들이 벌인 짓 아니야? 그럼 그놈들과 그놈들 뒤에 누가 있는지 털어보면 나오겠지.”
그 말에 일리나가 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네게 도움을 요청한 거야.”
그녀가 내게 말했다.
“전말은 내가 캘게. 에이리아만 찾아줘. 본래 페르 언니가 네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일인데 말이야.”
그녀가 내 손을 바라본다.
“페르 언니가 마법을 캐스팅 중에 네게 스태프를 빼앗겨서 마나 역류가 일어났거든.”
그 말에 나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는 괜찮다고 하는데…… 그때 광범위 지역을 탐색하고 있던 터라 부하가 많이 걸렸을 거야.”
타이밍 진짜…….
페르세르크는 8서클 급의 마법사지만 나와는 엄연히 다르다.
한차례 강제 환골탈태를 거치긴 했다 할지라도 그녀가 8서클 마법사라는 건 변치 않는다.
인지를 초월하고 상식의 위로 올라서기엔 부족한 경지.
도시 한두 개 범위의 대규모 탐색 마법을 발현하다가 그 마법의 주체인 스태프를 내가 소환해버렸다면, 그녀는 매개체를 잃고 폭주하는 마법을 맨몸으로 억눌렀을 가능성이 높다.
스태프라는 것은 마법의 보조.
중요한 작업에서 보조 장비가 갑자기 사라지면 마법은 당연 폭주할 수밖에 없다.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어떤 일로든 악영향이 영역 전체에 퍼졌으리라.
이를테면…….
“마나 중독 같은 거…….”
“응.”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러니까. 네가 해줘야지? 에이리아만 찾아주면 나머지는 내가 할게.”
가볍게 내 뺨을 잡고 입맞춤을 해준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한 시간이면 되지? 30분 내로 해주면 저거 입어줄게.”
그녀가 한 쪽에 비치된 옆트임이 확실한 차이나 드레스를 가리켰다.
빨개진 얼굴로 내 시선을 피하는 그녀였다.
“그…… 벌써 몇 주째 같이 못 있었잖아?”
“10분 내로 갔다 올게.”
눈을 부릅뜬 내가 페르세르크를 보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대 하 고싶은 대로 해. 본녀도 많이 보고 싶었으니. 이번 여행이 끝나면 당분간 그대의 어깨를 빌릴 것이야.”
* * *
과거 그랬던 것처럼 몸을 작게 만들어 내 곁에 있겠다는 뜻이다.
에이리아는 내가 그녀를 추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차단시키고 움직였다.
그녀의 내면에 있던 본성은 에이리아의 성격과 다르게 굉장히 거침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를 찾는 것이라면 내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시작하자.”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간으로부터 벌써 3분이 흘렀다.
나는 허공에 손을 뻗어 올렸다.
흔적을 지운 에이리아가 나타날 장소를 찾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제비야. 나와라.”
내 말에 주변의 바람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동시에 엄청나게 집약된 바람의 결정체.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소환하네.]
“널 소환할 일이 없어야 좋은 거 아니냐?”
[부정은 안 할게. 다른 정령과 다르게 나는 인간계가 별로 재미없거든.]
“에이리아를 찾을 거야. 이 도시부터 시작하자”
부산은 한때 몬스터의 공습 때문에 수도 이전을 한 뒤로 서울 수복 후 서울과 동시에 업무를 추진하고 있는 대도시.
페르세르크가 마지막으로 그녀의 흔적을 찾은 게 이도시라면, 분명 이곳에 있다.
[사람 하나 찾는다고? 너 그게 쉬워 보이냐?]
“다른 인간은 몰라도 에이리아는 가능해. 너희들이 총애하는 이잖아?”
에이리아는 별도의 노력 없이도 중급 정령사에 이른 경력이 있다.
그게 그녀의 재능이라고 했을 때, 과연 정령사의 재능은 무엇인가.
바로 정령의 사랑을 받는 것.
“반대로 이곳 사람들은 정령의 축복을 많이 받지 못하지?”
그 말대로였다.
이제야 정령과 접촉하기 시작한 상황에 사랑을 받아봐야 얼마나 받겠는가.
[정령 마나. 많이 들거다.]
“하기나 해. 얼마든지 써도 좋다.”
본래 정령사라면 불가능한 수준의 힘까지.
에이리아가 쫓는 놈은 일리나가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 에이리아는 직접 내가 찾아 말릴 필요가 있다.
부디 그녀의 손에는 피가 묻지 않기를.
휘이이이이잉!!
옅은 바람이 내 주변을 감싼다.
[정교한 탐색. 시작한다. 이 정도로 정교한 탐색이라면 엄청난 힘이 소모될 거다.]
상상 이상의 엄청난 정령 마나가 빨려나가기 시작하자 나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천천히 신궁 브류나크를 꺼내 장궁의 형태로 바꾸었다.
[찾았다.]
그렇게 약 30초.
나는 정령안으로 바뀐 한쪽 눈을 번뜩이며 활시위를 당겼다.
“조심 좀 하라니까.”
[신궁]
[현사]
쩌어엉!!!
간단한 기교가 서린 화살이 활시위를 떠난다.
빛으로 된 화살은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맹렬한 속도로 날았고, 이내 어딘가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우웅!!!!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강렬한 빛과 함께 사라진다.
툭…….
이후 나는 도시를 내려다보던 초고층 빌딩에서 가볍게 한발 내딛으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이잉!!!!!
엄청난 소음을 내며 공기 저항이 나를 감싼다.
“꺄아아아아악!!”
나를 발견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나는 추락하지 않았다.
“가자.”
내 말과 함께 주변의 바람이 모여들었고, 이내 거대한 녹빛의 새가 되어 나를 태운 뒤 무수한 빛의 꼬리를 남긴 채 날아올랐다.
“커헉…… 컥…….”
에이리아를 노리던 각성자들이 한 치에 피를 뿌리며 쓰러진다.
팔에 상처를 입은 에이리아는 숨을 헐떡거리며 쓰러진 이들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누가…….”
“꼴이 그게 뭐야.”
놀란 듯 그녀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넌…….”
휘리리릭.
순식간에 그녀에게 다가간 내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읍?!”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주춤거리기가 무섭게 나는 그녀의 인격이 역전되기 시작한 것을 보고 가볍게 마나를 불어넣었다.
스르르륵 소리와 함께 그녀는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쓰러진다.
그녀가 뭔가를 알고 있겠지만.
또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든 놈들을 직접 처리해버리고 싶지만.
그건 내가 아닌, 가장 열받았을 일리나에게 맡기도록 하자.
쓰러진 시신들을 스윽 훑었다.
에이리아를 습격했던 이들은 내 기억에도 없는 인간들이었다.
각성자가 많으니 내가 알던 지구와는 이제 사는 세계가 다르다.
한국도 마냥 치안 안전 국가는 아니라는 소리겠지.
다만 이만한 수를 동원할 정도면 꽤 거물이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 * *
오딘이 장벽을 쳐 차원의 틈을 막은 상황에서 내가 그녀가 있는 아트렐리아로 떠나기 위해선 셋 이상의 별자리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게 협조적인 별자리는 총 둘이었다.
어딜 싸돌아다니는 건지 모를 금우궁 타우르스, 그리고 사자자리 레오.
하지만 이 둘만 가지곤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찰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생존한 또 하나의 별자리가 나를 찾아왔다.
사자자리와 함께 오딘의 제압에서 벗어난 별자리가 말이다.
지구에서 나와 접촉한 별자리, 인마궁 세제테리우스는 부산에 지어진 초고층 빌딩의 옥상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편으로 걸어가며 내가 묻는다.
“넌 왜 인간의 모습이지?”
“음? 본래 하던 일이 있는 거 아니었나?”
“그건 일리나에게 맡겼다. 우선 네 이야기부터 하지. 왜 굳이 이곳에 있는지.”
그가 천갈궁과 비슷한 육신을 가지고 있다면 스파이의 가능성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부딪쳐봐야 뭐라도 나올 상황이었다.
마법적인 면에서 오딘은 나와는 격이 다른 상위의 위치.
내가 그녀와 정면으로 싸워 이길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많지도 않다.
내 물음에 그는 조용히 나를 보다 빌딩의 아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존재의 의의는 조디악의 각성 시 전쟁을 벌이는 것. 패배한 별자리는 다시 빛을 잃고 잠들며. 살아남은 별자리는 다음대의 조디악이 된다.”
“…….”
“그것은 우리가 태어난 이유이며 영원히 이어져야 할 굴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와서 둘이나 죽인 나를 어찌해보겠다고?”
“아니. 나는 네 방식을 나쁘지 않게 생각한다.”
그가 짧게 말했다.
“우리를 제압하려 했던 권능을 지닌 마법사가 있는 곳은 막대한 마법 장벽으로 막혀 있다. 어떤 방식으로도 넘어갈 수 없지. 하지만.”
그가 손에 어떤 힘을 피워 올렸다.
“내가 돕는다면 가능하다. 사자자리는 이미 너를 만났을 것이고, 나는 이곳으로 떨어져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별자리가 셋.”
셋이 모이면 문을 딸 수 있게 된다.
문을 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솔직히 너를 믿기가 힘들긴 하지.”
“그렇다면 계약하지.”
그가 허공에 손을 뻗어 어떤 문양을 만든다.
그것은 별자리.
인마궁의 별자리였다.
동시에 내 앞에 어떤 창이 일어났다.
[별자리 인마궁 사수자리가 당신을 후원하고자 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Y/N]
“게임이냐?”
“알기 쉽게 만든 것뿐이다. 나는 이미 치명상에 가까운 타격을 받아 더 이상 형체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너를 도울 방법은 이게 전부다.
나는 내 앞에 떠오른 창을 바라보았다.
“받아들이겠나?”
그 말에 나는 조용히 Y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놈의 형상이 무너진다.
억지로 유지하고 있던 형태가 무너진 것이다.
[첫 번째 후원 받아라.]
띠링!!
[인마궁 사수자리가 당신에게 별가루 100,000개를 후원하셨습니다.]
[이만한 수를 후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리액션 같은 건 없나?]
“죽고 싶으면 요구해봐.”
별가루라는 것이 모여들며 내게 스며든다.
“그래서. 환전은 어디서 하는데.”
내 물음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보면 있을 텐데?]
이후 나는 내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 같은 것을 스윽 훑으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밌네.”
* * *
데이비를 찾아 그녀들과 접촉했던 인마궁과 데이비가 만나기 위해 떠난 시각.
잠든 에이리아의 추욱 늘어진 귀를 보던 일리나가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사귄 지 얼마 안 된 친구지만 정말로 마음에 들었으리라.
그러니 그녀가 눈앞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을 보고 폭주한 것일 테고.
“그렇다고 하기에는 에이리아의 내면 폭주는 좀 과하게 뻥튀기 된 감이 없잖아 있음이니.”
“언니. 이 일은 내가 해결할게요. 그러니 데이비를 도와주세요.”
일리나의 말에 페르세르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에 수위 제한 같은 것도 없어. 그러니 아주 아작을 내버려.”
그녀가 데이비의 부인으로서 공적으로 활동하면 상대를 짓뭉개는 데에 문제가 꽃필 것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상관없는 일이다.
“그럴 생각이에요.”
그녀가 신검 칼디라스의 검집을 꽉 잡으며 으르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