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86화
“어…… 어어어? 잠깐만요! 이건 아니지!”
“닥쳐! 난 작지 않아!!”
엄청난 화염이 나를 감쌌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반가운 기분까지 든다.
“으억!!”
비명을 지르며 추락한 내가 대자로 뻗은 채 추욱 늘어지자 오딘이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
“이런. 데이비.”
뒤늦게 페르세르크가 달려와 내 상태를 살피려 하자 내 몸에 붙은 불이 마치 환각이었다고 말하듯 순식간에 사라진다.
“괜찮은 게야?”
“어. 익숙해서 괜찮아.”
인생 살면서 하루 이틀 불에 타보는 것도 아니잖아.
저항력을 올리기 위해서 겪었던 지옥 같은 훈련에 비하면 이건 애교나 다름없는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데이비의 은사라곤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한 게 아닌 겝니까.”
페르세르크가 화가 난 듯 오딘을 향해 말하자 오딘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레스의 아이.”
“…….”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다치진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의외로 순순히 자신을 잘못을 인정하는 그녀를 보며 내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검은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페르. 물러나.”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눈다.
임시점검이라도 박아드려야 하나.
“내가 아는 오딘은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인간상이 결코 아니야. 당신 누구야.”
내 물음에 그녀가 나를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가왔고,
망설임 없이 작은 발로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퍽!!
본래라면 알싸한 고통이 밀려와야 하지만, 어째서인지 툭! 하고 부딪히는 느낌만 든다.
“마지막이야.”
“네?”
“내가 까불거리는 너를 봐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내 팔을 잡아 자세를 낮추게 한 뒤 내 목을 끌어안았다.
“미안하구나…….”
조용한 목소리에 나는 온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섬뜩할 정도로 괴리감이 든다. 하지만 그만큼 그녀의 진정성 여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스승이나 되어서 제자가 제 목숨 버려가면서 스승을 막게 둘 줄이야.”
그녀는 겉보기엔 정말 대단한 존재나 다름없다.
신적인 존재. 닿을 수 없는 이정표. 그 외에 절대적인 기준.
하지만 그녀는 그런 목표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이다.
“데이비. 오래전 내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겠지? 약속은 함부로 하지 말라던 말.”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건, 절대로 하지 마.”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이 바로 그것이니까.
“누군가와 나눈 약속은 언젠가 다른 이들이 틈을 이용해 널 역으로 이용하려 들 테니.”
[수천 년 후 태어날 로키 데반이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도와주겠다.]
애초에 그녀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본래의 의지까지 제압당한 채 공허한 의식으로 그의 말을 따랐다.
“대체 뭔 약속을 한 겁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침묵했다.
“저…… 데이비는 본녀의 남편이니 그만 떨어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이런.”
눈을 살짝 크게 뜬 그녀가 나를 걷어차듯 밀어내 버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자신을 얽매고 있는 것에 대해 알려주었다.
“데이비. 현재 아트렐리아의 상황을 알아?”
“갑자기 그건 왜 묻습니까?”
사실 관심 없는 분야였다.
“오래전 혁명 이후 아트렐리아는 의회 선거제를 통한 시스템으로 대륙이 돌아가고 있었어.”
“아 네. 당신이 왕조를 무너뜨리고 의회 선거제가 계속해서 이어졌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경쟁자가 없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야.”
경쟁자. 자신이 뭘 해도 막을 이가 없다는 건 한쪽의 타락을 의미한다.
“수많은 일이 있었어. 처음엔 숭고한 의지로 시작된 평등. 선거의원제였지. 마법사는 마법을, 마법의 재능이 없는 이는 마법사가 하지 못 하는 일들을.”
처음엔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많은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고인물은 썩게 되고, 자연스레 평등을 목적으로 세워진 선거의원제도 결국 부정부패로 찌들어.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불평등한 세상을 만들어냈다.
“어느 쪽이건 영원한 건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게 약속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죽어서라도 이 땅을 수호하고 절망하지 않게 만들겠다.”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그녀를 직시했다.
거짓말이네.
하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있으리라.
“그런데. 로키 그놈. 당신의 후손 맞아요?”
“무슨 뜻이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아니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고, 솔직히 그 몸을 보고 결혼한 남자면 좀…….
수갑부터 채워야 할 것 같은데…… 그런 내 합리적인 의심에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대뜸 내게 달려들어 목을 콱 졸랐다.
“너 그냥 콱 죽어!”
컥컥대며 페르세르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내보지만 돌아온 것은 차디찬 시선뿐이었다.
“꼭 그 주둥이가 매를 버는구나. 본녀는 못 본 것으로 할 테니 알아서 하라지.”
그녀의 행동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오딘의 화가 풀릴 때까지 맞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딘의 공격에는 전혀 힘이 실려있지 않았다.
* * *
오딘의 폭행은 제법 길게 이어졌지만, 그녀가 평소 하던 폭행보다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애써 숨기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딘이 자아까지 빼앗겨 가면서 그 지경이 된 건 무엇 때문인가.
그녀가 약속을 강제로 지켜야 할 만큼 이 아트렐리아 대륙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오딘의 약속이 정말로 절망하는 이가 없게끔 만드는 것인지는 나도 헷갈리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데이비였다.
“인간의 감정은 어떠한 미지의 법칙에 따라 힘이 돼. 그리고, 지금 대륙에 퍼진 이 빌어먹을 왕실군과 저항군의 싸움으로 절망이 극에 달해있고.”
전쟁이야 늘 있는 일이지만 그녀가 이곳에 묶인 상황이니 그 상태가 심각하다.
“그렇다면.”
“데이비. 무슨 수를 쓰건 이 망할 인간들이 절망하는 걸 막아. 어떤 방안이든 좋아.”
그녀의 말에 데이비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조건이. 생각보다 너무 쉽다.
“그거면 됩니까?”
“할 수 있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어려울 건 없죠. 그런데 말입니다.”
데이비의 붉은 눈빛이 옅게 일렁였다.
“이번일, 정말 당신도 예상 못한 거 맞아요?”
정말. 그녀도 손 쓸 수 없이 휘말린 것일까.
“무슨 뜻인데?”
“내가 아는 당신네들이라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 놀아나 주고 있는 것 같거든.”
그 명백한 증거로, 로 아이아스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마치 이 일은 오로지 오딘과 데이비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
대답을 회피하는 그녀를 보며 데이비는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손바닥만큼 작아진 페르세르크를 어깨에 앉힌 뒤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쩌억!!
“데이비. 이제는 전이 마법을 써도 되는 게야?”
“제일 큰 방해꾼이 정신 차렸잖아. 이제는 괜찮아.”
한번 지나온 자리는 좌표를 확실히 확립할 수 있다.
또한, 모든 전이 마법을 방해하던 오딘이 정신을 차린 이상 이제 이동에 제약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조용히 자리에 앉은 채 데이비가 떠나는 모습을 보던 오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약속할게. 내 영혼이 불살라져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피투성이가 된 채 한 사내를 끌어안고 그녀가 절규하듯 소리쳤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데이비처럼 완전 기억 능력을 지닌 건 아니지만 수천 년이 지나도 그녀에게 있어서 이 기억만큼은 너무도 생생했다.
[이 눈을 써서라도 빌어먹을 이 땅에서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이는 없게 만들겠어.]
그녀가 자신의 흑안을 이용해 영혼에 새긴 약속.
죽어가던 소중한 사람에게 한 약속이며.
그녀의 한이다.
실제로 데이비에게 맡긴 절망하는 이가 없게 만들라는 것은 그녀가 한 약속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신의 과오를 자신의 제자가 떠안게 할 수는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 이유 중에는 부끄러운 과거를 제자에게 알리기 싫다는 고집도 있었다.
“데이비. 네가 어떻게 할지 한번 지켜볼게.”
증오의 굴레로 쌓인 이 빌어먹을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지.
그녀는 우로보로스 의식으로 인해 폭주하는 흑안의 힘을 강제로 제어하기 시작했다.
* * *
좌표가 직접적으로 연결된 도시는 단 하나뿐이다.
바로 처음 약초를 구매하고 평화유지군 집행관과 충돌했던 도시. 아트헴.
어쩌면 그때 내가 저지른 일이 오딘에게 도움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페르. 전쟁이 시작되면 쉽게 못 멈추는 이유가 뭐일 거 같아.”
내 물음에 그녀는 쓴 표정을 지었다.
“원한과 분노겠지.”
전쟁의 시작은 참 사소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불길이 커지는 순간 그때부터는 전쟁의 시발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게 변한다.
“전쟁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지. 시간이 흐르면 전쟁의 본질은 서로가 끝장날 때까지 싸우는 것으로 변질되니까.”
정작 전쟁에서 희생되는 건 싸우는 이들이다.
전쟁을 일으킨 이들은 뒤에서 호의호식하며 그저 사태를 관망한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야.”
거대한 첨탑의 꼭대기에서 내 어깨에 앉은 채 그녀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전쟁이 끝나도 엄청난 피해로 인한 증오가 사라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그녀의 말마따나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가족을 전쟁에서 잃은 이들은 적대 병사와 집단을 증오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전쟁이 지고 가야 할 업이나 다름없었다.
“증오로 인해 전쟁을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다는 거지.”
나는 저 멀리 묵빛의 복장을 한 이들에게 거칠게 끌려가는 남녀들을 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이미 생겨난 분노는 못 죽여,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지.”
오딘의 말에 따르면 본래 선거의원제로 돌아가던 이 대륙은 현재 부패가 극심해져 있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갑자기 나타난 왕정체제 지지파가 생겨나면서 두 진영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
로키 이 빌어먹을 놈은 그 두 진영의 전쟁을 이용해 오딘이 더욱더 이곳에 얽매이도록 만들기도 했다.
모든 마나가 사라지면 싸울 수단을 잃은 이들은 자연스레 전쟁을 멈추리라.
대를 위해 소를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시키는 놈인 만큼 그 과정에서 얼마나 죽어 나가든 상관하지 않는 태도였지만 그의 그런 미친 태도는 전쟁이 가지는 그 불합리함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자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페르. 내가 4대 명검 이야기를 했던가?”
“본녀로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다만.”
“아직 하나 안 꺼냈지?”
평화유지군으로 사람들을 끌고 가는 이들과 그런 그들이 끌려가지 못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충돌한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벌어질 것 같은 그 형태를 보며 내가 말했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땐 말이다.”
임시점검 딱지를 붙이는 수밖에.
나는 첨탑에서 당장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들을 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아공간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평범한 검과 창들이 쏟아져 나와 내 의지에 따라 허공을 날아올랐다.
동시에 검은 천마공의 내공이 스며들며 내 명령에 따라 하늘 위로 쏘아져 올라갔다.
수천 자루에 달하는 병장기들이 검 끝을 지상으로 향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내 격분한 몇몇 사내들이 평화유지군에게 덤벼들려던 그 순간.
내 명령에 따라 하늘을 부유하던 무기들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심검]
[만검폭우]
콰아앙!! 엄청난 예리함을 뽐내며 비처럼 쏟아지는 무기들의 낙하에 싸움을 벌이려던 이들 모두가 하던 것도 멈추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으아악!!”
“이…… 이게 뭐야!”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무기에 꼬치가 되어버릴 만큼 섬뜩함을 건네주었다.
물론, 내가 쏟아부은 무기들은 단 한 명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정교한 낙하를 이뤄내며 모두의 움직임만 막았고, 당장이라도 서로를 죽일 것처럼 달려들던 이들을 강제 소강상태로 만들었다.
“임시점검 들어갑니다. 다들 로그아웃해주세요.”
스르륵…… 터어엉!!!
땅에 깊게 박힌 묵직한 헬버드의 끝 위로 가볍게 내려서며 내가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나를 발견하고 경각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방해되니까.”
“다…… 당신은?!”
익숙한 대머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담담하게 선고했다.
“종전해주세요.”
전쟁은 지속될수록 증오가 커진다.
그리고. 그것을 해소할 방법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전쟁이 극 초반의 형태를 띠고 있다면.
강제로 멈추는 것으로도 효과는 크게 볼 수 있으리라.
새까맣게 꽂힌 무기들의 중앙. 거대한 헬버드 위에서 떨어지지도 않은 채 유유자적하게 균형을 잡고 있던 내가 말했다.
“다 뒤지기 싫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