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7화
“녹연 출몰에 관한 보고입니다. 라운 왕국 동부 쪽에서 녹연이 다수 출몰해서 상당한 피해가 있다고 하더군요. 이 문제에 관해 기술을 제휴해달라는 왕실의 협조요청입니다.”
녹연.
다른 말로 하면 특수한 성질의 마나와 방사능, 그리고 물이 만나 물빛이 형광색으로 변해버리는 현상을 말한다.
녹연 현상은 흔하지는 않지만, 극히 드물지도 않게 벌어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녹연 현상이 한번 벌어지면 그 일대 지역은 완전 차단을 통해 못해도 50년 이상은 손을 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팔란 제국에서도 이것 때문에 거대한 다이아몬드 광산을 버렸지 아마?”
“예 그렇습니다. 특히 일대 녹연이 너무 짙게 발생해서 복구하는 데 200년은 걸린다고 하던 곳이었지요.”
“이 부분은 해결 중에 있으니까 걱정 마.”
바리스는 영특하다. 녀석은 내가 이걸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있을 거라 바로 판단했고 요청을 보내온 것이다.
“그래도 타이밍은 잘맞…… 시종장?”
내가 베르닐 시종장을 부르자 멍하니 있던 그가 화들짝 놀란 모습을 보였다.
답지 않게 요즘 자꾸 멍한 모습이다.
“듣고 있어? 영 집중을 못 하는데.”
“죄송합니다. 저하. 신이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예전 같지가 않군요.”
“거짓말할 때 나오는 버릇은 진짠가 보네.”
내 말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페르가 눈썰미가 좋거든, 시종장은 거짓말을 할 때 한쪽 눈이 파르르 떨리는 버릇이 있다고.”
“허허. 마님껜 못 당하겠군요.”
“우선 녹연 문제는 에오니샤와 티아라 영애가 해결 중에 있으니까 기다려보자고. 이걸 해결했을 경우 생길 이익은?”
“당장 팔란 제국만 해도 엄청난 돈을 주어서라도 다이아몬드 광산을 찾으려 들 겁니다. 왕실소유니까요.”
살리반 황제가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서신을 보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보다. 고민이라도 있나?”
“그것이…….”
“말해봐. 무슨 일인지 알아야 돕든 말든 하지.”
나를 바라보던 그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저하.”
“……그래 말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강요는 하지 않을게.”
베르닐 시종장이 지금까지 저렇게 대답을 숨긴 적이 있던가.
한숨을 내쉰 나는 서류를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제는?”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 미친 근육 덩어리들 때문에 더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는 건 좀 그렇다만…….”
마계의 성도 저렇지 않았을까. 보팔레빗의 분신체들이 성 곳곳에 달라붙어 근육 펌핑을 하고 있는 모습은 아직도 속이 좋지 않은 광경이다.
“신은 그럼…….”
짧게 목례하며 돌아서는 베르닐 시종장을 보며 내가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시종장.”
“예?”
“최근 하인스 영지로 온 티파티나 연회 초대장이 있나?”
“예 상당히 많습니다만. 마님들께서도 사교회는 석 달에 한 번 정도 잠시 들리시는 수준이라…….”
초기에는 그녀들도 사교회를 부지런히 다니며 나를 내조한답시고 움직였지만 그걸 막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원치 않으면 가지 말라고.
“그거 일부 추려서 준비해. 아 그리고 살롱 같은 곳에 연통을 넣어서 드레스와 보석, 그리고 디자이너 몇몇을 좀 구해와.”
“어딜 쓰시려는지요.”
“에이미 신랑감 찾아주게. 녀석도 이제 혼기가 찼잖아.”
“하오나 저하 에이미는 아직…….”
“어리긴 하지. 이제 성년이 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래도 미리 준비해둬서 나쁠 건 없잖아.”
홧김에 뚝딱 만나 결혼하는 것보다 이 만남 저 만남 다 가져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나는 에이미에게 은혜를 입었으니까 가능하면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을 뿐이야.”
오랜 시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내 곁을 지켜준 고마운 아이에게 해줄수있는게 이런 것밖에 없다는 게 참 씁쓸했다.
차라리 바라는 게 많았다면 다 이루어줬을 텐데 말이다.
놀랍게도 페르세르크조차 그녀가 바라는 게 뭔지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저하.”
“시종장도 동의했던 일이잖아.”
“저하. 좀 더 시간을 두심이 어떨는지요.”
그의 태도에 나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손녀처럼 소중한 에이미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어 했던 건 시종장이 제일 바랬던 건 아닌가? 아니면…….”
내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베르닐 시종장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혹시 에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예?”
“데려오라 그래. 상대가 평민이건 뭐건 에이미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인성만 보고 내가 밀어준다고.”
신분 따윈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결혼 후 에이미를 힘들게 하는 놈이라면 그건 내 손에서 쳐내야 하는 게 맞다.
내 말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하. 에이미는 아직 앞날이 창창합니다.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도 그리 일찍 결혼하는 경우는 적은 편이기도 합니다.”
“…….”
“허니 좀 더 심사숙고하심이 어떨는지요.”
“시종장이 그렇다면야.”
저 인간. 지금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나는 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걸 볼 수 있었다.
이후 시종장이 나가자 내가 고개를 돌렸다.
“아이나. 륀느.”
동시에 창문이 벌컥 열리며 륀느가 고개를 쏙 내민다.
다크엘프이자 유리아 헬리샤나의 언니인 아이나는 언제 왔는지 내 곁에 와있었다.
“시종장을 조사해봐. 대체 뭘 숨기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온 것만큼 중요한일도 없어.”
“괜찮으시겠습니까. 흔적이라도 남는 날엔…….”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 거야. 에이미와 관련된 일이니 에이미 쪽을 조사해보는 것도 좋을 거야.”
“…….”
“직감이 안 좋거든. 뭔가 큰 걸 숨기고 있는데 말을 못 하고 있는 느낌이라.”
내게 말을 못 할 이유라면 여럿 있지만 이건 좀 다른 느낌이었다.
“동생 일은?”
“늘 그렇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며 그녀가 사라지자 륀느가 멀뚱멀뚱 나를 보다 날개를 펄럭이며 사라졌다.
결국, 당장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에이미의 결혼 프로젝트는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이상 진행할 수 없다.
정확히는 그녀가 일에 치여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해서 안타까웠던 탓이다.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당장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그녀가 거부하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면 단호하게 그녀를 해고해서라도 자신의 인생과 행복을 찾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하.”
그때 나를 찾아온 어떤 인물이 있었다.
“무슨 일이야?”
“수도에서 고바알 백작이 찾아오셨습니다.”
“고바알 백작? 따로 약속 잡은 게 없는데.”
이렇게 매너 없는 인간이 있나.
내가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라지만 꽤 늦은 시각에 이렇게 조용히 찾아온 게 기이하기 그지없다.
“저…… 그게 중요한 일이라고…….”
“그래. 아니면 그때 가서 대가를 치르게 하면 되니까 뭐. 들여.”
그렇게 말한 내가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자 곧 문이 열리며 콧수염이 긴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겁을 먹었으나 그것을 이겨내고 있다.
아직도 수도에는 나를 두려워하는 귀족들이 많은 만큼 당연한 움직임이지만 그는 제법 담이 큰 편에 속한다.
“그래. 고바알 백작이라고?”
“예, 대공저하.”
“대공은 내가 스무 살이 넘어야 받는 칭호고.”
“…….”
“커피, 홍차. 와인, 어떤 걸 원해?”
내 물음에 그가 긴장감을 애써 누르며 답했다.
“커…… 커피면 됩니다.”
“그래. 잠시만 기다려. 거기 자리에 앉고.”
손님 응접용 소파를 가리키자 그가 천천히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그래. 고바알 백작이라고?”
“예. 본가가 하인스 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확실히 멀지 않은 곳에 고바알 영지가 있었지…….”
내 중얼거림에 그가 화색을 띤다.
“알고 계셨군요.”
“웬만한 건 다 알고 있어. 그래. 백작. 이 늦은 시각에 연통도 없이 찾아와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게 뭐지?”
“그게…….”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이걸 좀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이게 뭐지?”
“제 딸아이의 일지입니다.”
그가 내게 건넨 것은…… 한 시녀의 일기였다.
“일기라…… 백작. 내가 왜 백작의 소중한 딸이 쓴 일기를 받아야 하는지 설명해주겠나?”
내 물음에 그가 쓰게 웃었다.
“제 딸아이가 모셨던 분이. 저하의 친모이신 레니 알리샤느 왕비님이십니다.”
“…….”
내 눈이 살짝 크게 뜨여졌다.
“어머니의?”
“예. 그리고, 이 일지를 전해드리는 건 제 의사가 아닌, 세상을 떠난 제 딸이 남긴 유언 때문입니다. 유서를 발견한 건 고작 몇 달 전. 그동안 오래 고민한 끝에 전해드리러 온 겁니다.”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일기를 받았다.
정성스레 쓰인 글귀들을 보며 내가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잘 받을게.”
“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선다. 정말로 이것뿐이었을까.
나는 복잡한 생각을 버려둔 채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는 일기를 펼쳤다.
그 안에는 처음 왕성 시녀로 배치된 한 소녀가 겪은 일들을 모두 적어놓았다.
단순히 어머니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내가 모르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쓰인 일기는 제법 소중했다.
고바알 백작에게 나중에 보답이라도 해야겠네.“
이 시녀는 어머니를 많이 따랐던 모양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죽어서도 이 일기를 남겨놓을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실란 남작부인에 고바알 백작가의 차녀. 후시암 자작가의 삼녀…….”
어머니를 따르던 시녀는 총 넷.
내가 알기로 이 네 시녀 모두 현재엔 왕성에 없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제법 즐거운 추억들이 담겨있었다.
-xxx년 xx
에나 후시암이 정원을 손질하겠다고 직접 나섰다가 벌집을 건드렸다. 얼굴이 퉁퉁 부어버린 탓에 왕비 저하께서 직접 약을 발라주시는 걸 보며 한참 웃다가 결국 에나를 울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웃으며 그 내용을 읽어내려간다.
내가 모르는, 너무 어릴 적,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도 있었다.
-xxx년 xx
왕자 저하께서 태어나셨다. 붉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를 가지신 아주 귀여운 왕자 저하셨다. 꼬물거리며 손을 움직이시는 걸 보니 문득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그런 좋은 이야기도 언제부터인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리네스 바리에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점차 고립되어가는 입장. 리네스 왕비의 행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시로 어머니의 시녀들을 잡아다가 문책하며 공격했고, 심지어는 매질을 한 기록도 있었다.
독한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집착이 대단하다.
이후 나는 일기의 주기가 점차 드문드문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엔 이리 쓰여있었다.
-xxx년 xx
리네스 바리에타에게 불려갔다. 내 뺨을 쳐올릴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그녀는 실란 남작 부인과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그 후 그냥 돌려보냈다. 별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일이 있은 후로 일주일 뒤.
실란 남작부인이 왕비저하의 찻잔에 독을 탔다. 끔찍한 기억이다. 어리신 왕자 저하께서는 엉엉 우시고, 왕비 저하께서는 괜찮다는 말만 실란 남작 부인에게 반복했다.
왜일까. 왜 저하께서는 남작 부인에게 괜찮다고 한 것일까.
표정이 굳는 게 느껴졌다.
어머니를 독살한 이는 어머니의 시녀 중 하나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다.
그 때문에 강한 조사가 이어졌고, 대부분의 하녀와 시녀 시종 등등 모조리 처형장으로 끌려간 일이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일기에 따르면 어머니를 독살한 이는…….
“실란 남작부인…….”
나는 그 이름을 곱씹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잠깐만, 실란?”
나는 벌떡 일어나 왕실 귀족에 대해 기록한 책을 펼쳤다.
기억에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제발 그냥 내가 잘못 봤기를 바랄 뿐이었다.
“…….”
이후 나는 일기를 손에서 떨어뜨렸다.
“실란 남작 부인에게 딸이 한 명 있고.”
그 딸의 이름이…….
“에이미 실란…….”
* * *
“에이미 남작부인.”
하인스 아카데미의 젊은 교수인 바니안 교수는 최근 한눈에 반한 레이디인 에이미에게 말했다.
“아. 교수님.”
“오늘도 이곳에 계시는군요.”
“네에…….”
“저…… 이걸 받아주세요.”
바니안 교수가 그녀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저와 정식으로 교제해 주실 순 없으십니까.”
바니안 교수의 나이 22세. 에이미는 그보다 좀 더 어리다.
사실 그리 나이로 문제가 되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에이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교수님.”
“에이미 양…….”
남작부인에서 양으로 호칭이 바뀐다.
“저를 받아주실 순 없는 겁니까.”
“저는 저하의 곁을 평생 지키기로 마음먹은 것을요.”
그녀가 아련하게 웃어 보였다.
“제 평생을 바치고, 육신이 문드러질 때까지 그분의 곁을 지켜야 해요. 그러니 죄송합니다.”
“대체 어째서입니까?”
“예?”
“에이미 양이 데이비 왕자님을 오랫동안 모셔온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용인도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버려가면서까지 따르진 않습니다.”
교수의 말에 에이미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게…… 제가 저하께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일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