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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998화 (998/1,559)

제 998화

-에이미 실란…….

현재 실란 남작가는 과거 암살 사건과 관련되어 처벌을 받았고, 세습이 불가능해진 몰락 귀족이다.

비록 그 혈통인 에이미가 나를 통해 귀족위를 얻었다지만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몇 대를 통해 평민으로 격하되었으리라.

어머니의 시녀로써 실란 남작 부인이었다는 사실은 이제야 안 사실이지만 사실 에이미가 실란이라는 성을 지니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정말로, 실란 남작부인이 어머니를 암살했고.

콰직!!

손에 쥐어진 지구에서 가져온 만년필이 바스러져 가루처럼 흘러내린다.

그래서 처형당했다면.

에이미는 왜.

그녀는 어째서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내 곁에서 헌신한 것일까.

그녀의 성정이 너무 순수해서 나를 따르고 있다?

단순히 그랬으면 차라리 나을 테지만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복잡하게 생각했다. 대체 그녀의 진의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에이미가 6년간.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헌신적으로 나를 도운 건 알고 있다.

그 후로도 그녀는 계속해서 내 곁을 지켰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바알 백작의 말대로라면 에이미의 모친이 내 어머니를 독살한 범인이라는 소리인데…….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고자 복도를 거닐던 나는 서류 더미를 들고 오다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는 에이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강제 휴가를 줬을 텐데.

“에이미.”

“저, 저하!”

“분명 휴가를 줬을 텐데?”

“그게…….”

저놈의 일 중독.

절로 웃음이 나올뻔했지만 이내 나는 짜증이 일었다.

“넌 내 말이 우습냐?”

차가운 내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저, 저하?”

“에이미. 당장 그거 내려놓고 와.”

싸늘한 내 말에 그녀는 허둥지둥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후다닥 뛰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미는 8년 가까이 내 곁을 지켜왔다.

어떤 경우에서도 나를 모셔왔고, 그 과정에서 거짓이 없다는 건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아니 그녀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를 독살했고.

에이미가 그 사실을 알기에 내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면.

“하…… 나는 어떻게 합니까 어머니.”

머릿속으로는 이해하고 있는데. 심란함이 그것을 방해한다.

“데이비.”

고개를 돌리자 말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 세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뭐 하는 거야.”

페르세르크가 묘한 눈길을 보내오고 일리나가 뭔가 화가 난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화낼 것까진 없잖아.”

“일리나. 아무리 편해도 위계는 없어선 안 돼.”

“하지만 언니! 에이미는 데이비가 혼수상태일 때부터 홀로 지켜온 아이라면서요! 아무리 그래도…….”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야.”

일리나는 감정적인 편이었고 페르세르크는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데이비. 다른 이도 아니고 에이미에게 그런 차가운 말투는 조금 아니지 않을까 하는데.”

그녀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내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대가 무엇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지 좀 물어도 될까?”

“…….”

“말하지 않겠다면…… 일리나.”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일리나가 대뜸 다가와 그대로 내 어깨를 잡아 끌어내린 뒤 제 입을 맞추었다.

아찔한 향기와 함께 부드러운 감촉이 나를 감싸고 이내 정신이 번쩍 든 내가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역시. 일리나는 본녀도 부러울 정도로 저돌적이로구나.”

“워낙에 겪은 게 있어서요. 기회가 있을 때 마음껏 표현해두는 게 제 신조거든요.”

예전엔 아니었지 않나 싶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래. 말해봐. 뭘 알았길래 그렇게 복잡한 심경인지.”

페르세르크가 나를 놀리듯 물어온다.

이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작은 일기를 그녀들에게 내밀었다.

이에 일리나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물러났고 페르세르크와 그것을 펼쳐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르게 종이를 넘기던 그녀들이 눈을 크게 떴다.

“실란? 데이비 이거…….”

“에이미의 성이야.”

* * *

팔짱을 낀 채 일리나가 중얼거렸다.

“지구의 막장 드라마도 이것보단 나을 거다.”

“본녀도 같은 생각이구나. 참 얄궂은 일이로구나.”

나는 의자에 앉아 작은 브로치를 바라보았다.

본래 에이미에게 건네주려고 했던 것이다.

말없이 그것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일리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비. 답지 않게 귀여운 짓을 하는구나.”

오래전 내게 그토록 소중했던 사람인 어머니였으니까.

돌아가신 지 오래된 탓에 지금이야 딛고 일어났다지만 딛고 일어났다 하여 잊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 그대라면 이렇게 말했을 테지.”

“부모의 잘못이 아이의 잘못일 리가 없다.”

그건 알고 있다.

그런데. 참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알고는 있는데.”

“왜 한쪽만 생각하는데?”

그때였다.

가만히 상황을 생각하던 에이리아가 손을 들었다.

이에 놀란 모두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자 에이리아가 귀를 쫑긋거리며 아홉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본래 에이리아는 꼬리를 드러내는 한이 있어도 6개를 숨겨놓는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9개의 꼬리 모두가 빛을 머금은 채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랜만이네.”

“그러게. 당신이 나를 가차 없이 때려눕힐 때 이후로.”

“…….”

그녀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일리나와 페르세르크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둘 다 고마워. 덕분에 큰일이 되기 전에 막을 수 있었어.”

“……네가 혼자 덮어쓰고 도망가지만 않았으면 더 쉬웠을걸?”

일리나가 부루퉁한 말투로 쏘아붙이자 그녀가 키득거렸다.

“이봐요. 서방님.”

“…….”

묘한 호칭에 내가 그녀를 직시했다.

“내가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듣다 생각한 건데 말이야.”

“원래 그렇게 마음대로 나올 수 있나?”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됐어. 다만 당신이 좋아하는 건 내 겉 인격이니 본능에 불과한 나는 굳이 나설 필요가 없을 뿐이야.”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말했다.

“조금 생각을 바꿔보면 어때?”

“생각을 바꾼다?”

“맞아. 언니. 예를 들면. 서방님의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 실란 남작 부인이 아닐 경우.”

내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 실란 남작부인이 아닌 경우?

“하지만 그건.”

“왜 한쪽만 생각해? 이 일기가 가짜일 수도 있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냉정함을 잃고 있었다. 아니 일기의 초반부에 적힌 너무 행복한 일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일기의 작자였던 고바알 백작의 여식에게 어느 정도 이입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일기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실란 남작 부인이 정말로 독을 탔다는 명확한 표현 같은 게 있긴 해?”

없다. 단순한 정황 사정뿐.

“그럼 실란 남작 부인이 아닌 경우도 생각해봐야지.”

“반대로 에이미는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데이비를 모시고 있는 거 아닐까?”

일리나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던 페르세르크가 에이리아를 대신해서 답했다.

“본인도 착각했을 경우지, 에이미는 자신의 모친이 데이비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죄책감을 지니고 서방님의 곁으로 온 게야. 부모의 잘못에 대해 속죄한다? 뭐 이런 뜻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을 터.”

그게 사실이라면, 에이미는 다시 없을 멍청이라는 소리가 된다.

어떤 인간이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인생 모두를 바칠 생각을 한단 말인가.

“바로 그거지. 역시 페르 언니는 나랑 같은 케이스라 금방 이해하는구나?”

“확실히 일리는 있구나.”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 진실을 파헤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넘길 수도 없는 문제였다.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일리나. 지구에 있는 티아라와 에오니샤를 좀 신경 써줘.”

“뭐……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할게. 그런데 너 그거 알아?”

그녀가 물었다.

“너 또 인터넷 영상 프로그램에서 조회수 8억 넘게 찍었더라?”

단순한 피아노 연주로.

특별한 기교도, 고난이도의 테크닉도 없었다.

그 목적도 굉장히 단순하고 흔해 빠졌다.

하지만.

“지구 사람들은 처음 들어봤을 거야. 네가 각 잡고 연주하는 거.”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인간의 감정에 접근하는 방식.

“좀 어렵긴 하지.”

“아마 굉장히 생소하고 신기했을걸? 게다가 같은 감정을 담아도 너처럼 그렇게 풍부하게 담는 거 쉽지 않잖아.”

나는 쓰게 웃어넘겼다.

빌어먹을 뮤트. 내가 그걸 익히기 위해서 연주한 악기만 몇 개였던가.

* * *

아이나는 내가 필요한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용케도 찾았네.”

나는 말 없이 종이에 담긴 정보를 읽어내려갔다.

“솔직히 저도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했습니다만…… 의외의 인간이 진상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 말에 나는 아이나를 바라보았다.

“의외의 인간?”

“크리아네스 국왕 폐하요.”

이년이? 지금 일국의 왕자 앞에서 국왕의 침소에 쳐들어가서 서류를 빼 왔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야. 너 그거 들키면 반역이다.”

“어차피 가능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가져오라 하실 분 아니셨습니까?”

“……다음부터 그런 문제는 무조건 사전 상의해라. 문제 발생하면 미련 없이 널 버릴 거다.”

“그러면서 늘 구해주지 않으십니까.”

“내가 호구로 보여? 네 독단까지 다 처리해주게?”

이년이 적당히 선이라는 걸 그어야지 이렇게 빠꾸 없이 돌진을 해?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그녀가 눈동자를 빛냈다.

“베스퍼스 시종장이 건네준 겁니다.”

“뭐?”

“어쩌다 보니 들켰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것에 대해 조사하라는 말을 했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그것을 건네주신 겁니다.”

…….

이거 숙청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대뇌 전두엽을 찌른다.

나는 그녀가 가져다준 정보들을 종합했다.

그리고, 그녀를 돌려보낸 뒤 얼마 안 가 왕성으로 공간을 넘었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남부산 포도주를 묘비 위에 올려놓고 잔을 내려놓는다.

그 뒤 묘의 바로 옆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 비치는 세 개의 달이 강하게 비치고, 그 외에 하늘을 가득 메우는 환한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란 남작 부인이 어머니를 암살한 거라네요.”

결국, 에이리아의 추측은 틀리고 말았다.

사실 가장 바란 것일지도 모르지만 결국 틀려버린 것이다.

실란 남작부인은 리네스 왕비의 협박을 받았고, 그로 인해 어머니의 차에 독을 탔다.

이후 실란 남작부인은 처형당했고 본래라면 직계 가족인 실란 남작과 에이미도 처형당해야 했다.

하지만 리네스 바리에타와의 약속대로 실란 남작부인을 제외한 이들은 살아남았다.

세습 귀족이 세습을 빼앗기긴 했지만.

“하……”

“이곳에 오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베스퍼스 시종장.

그를 보며 내가 눈을 감았다.

“시종장.”

“페일트리스 후작도 오고 싶어 했습니다만. 이곳은 제가 오기로 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조용히 물었다.

“바리스는?”

“태자께서는 강녕하십니다.”

“…….”

“저하. 괴로우십니까?”

“아니라곤 말 못 하겠네. 어머니를 죽인 원수는 다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에이미가 미우십니까?”

그 물음에 나는 눈을 감았다.

“에이미에게 진실을 알린 것은 다름 아닌 폐하셨습니다.”

“…….”

“그거 알고 계십니까. 폐하께선 저하께서 혼수상태일 때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랬지.”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미안하다……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

“사실 폐하는 저하를 미워하셨습니다.”

미워했다라…….

“나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예.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저하께서 잘못한 게 아니라고요.”

잘못한 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 자신의 죄다.

“그 이후로 폐하께서는 저하를 찾아가는 것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죄책감이라고 한다.

“계속해서 미안하다 하셨습니다. 평생을 가도 절대 속죄하지 못할 거라 하셨지요.”

베스퍼스 시종장은 내가 건넨 술잔을 받았다.

“저하. 저하께선 힘이 있으십니다.”

“그래.”

“하지만 보통 인간은 그러지 못합니다. 알면서도 당해야 하고. 피눈물이 나는 상황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합니다.”

리네스 바리에타도, 어머니도, 폐하도. 결국은 정치라는 거지 같은 판의 말일 뿐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는 일이지만 과거 레니 전 왕비저하와 리네스 바리에타는 정말로 둘도 없는 친분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게 망가진 건 바리에타 공작과 이 빌어먹을 정치판 때문이었다.

“에이미, 그 아이는 자신의 어미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속죄하고자 자신의 인생을 바쳐 저하의 곁을 지켰습니다.”

“알아.”

“그 아이를 어찌하고 싶으십니까.”

그 물음에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할 거 같은데?”

“저하의 의중대로 되시겠지요.”

“…….”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미는 어머니를 죽인 이의 핏줄이다.

하지만. 그건 전제조건이 잘못되었다.

“그래. 그렇겠지.”

“결정이 서셨습니까?”

“그래. 섰어. 고마워 시종장.”

* * *

“에이미. 지금이라도 사실을 고하거라.”

“시종장 어르신…….”

하인스의 시종장 베르닐은 걱정스레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채로 그녀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알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저하는 지금대로 평온하게 사시면 되는 일이에요. 저는 저하를 곁에서 보필하며 저하께서 빼앗기고 잃은 행복을 유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구요.”

“네 인생 전부를 바쳤지 않더냐. 앞으로도 그럴 것이냐?”

“네.”

에이미의 단호한 대답에 베르닐 시종장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였다.

덜컹!!

에이미의 숙소로 데이비가 찾아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저…… 저하?!”

에이미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시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닌가. 걱정하며 그녀가 조마조마한 시선을 보냈다.

“받아라. 에이미.”

이윽고 데이비가 어떤 일기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펼친 에이미의 눈이 떨린다.

“실란 남작 부인. 내 어머니를 독살한 범인.”

그 한마디에 에이미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고. 베르닐 시종장이 화들짝 놀랐다.

“저하! 설마!”

“그래. 다 알았다.”

그 말에 두 사람은 고요하게 침묵했다.

그리고. 에이미가 데이비의 앞에 몸을 납작 엎드렸다.

“저하. 제 목숨을 거둬가시고자 하신다면 기꺼이 목을 내놓겠습니다.”

“에이미!!! 저하! 조금만 더 생각해주십시오! 에이미는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저하께 헌신해왔습니다!”

“베르닐 시종장. 좀 닥쳐.”

싸늘한 한마디에 베르닐 시종장이 움찔거렸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데이비는 말없이 에이미를 내려다보았다.

“에이미. 내가 널 죽일 거라 생각하나?”

“……저하께서 바라신다면.”

“미안하지만 죽이진 않을 거다.”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에이미를 무기한 정직에 명한다.”

그 한마디에 에이미가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하!!!”

그건 어쩌면 죽음보다 더 가혹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에이미에게 있어 데이비라는 인간의 곁을 지키는 건 그녀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고 속죄할 유일한 방법이니까.

“저하! 이 명령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소신의 목을 치십시오! 에이미는…….”

“조용히 하라 했지. 시종장.”

서늘한 목소리에 움찔거린 베르닐 시종장이 한발 물러났다.

“에이미. 네 어머니가 내 어머니를 독살한 일. 알고 있었지?”

“……네.”

“그리고. 넌 그 사실을 알고 내게 고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 속죄한다고 이곳에 있었고.”

“……네 그 말씀대로입니다. 저하.”

그녀의 말에 데이비가 다시 말한다.

“정직을 피하고 싶나?”

“……차라리 소녀의 목숨을 거둬주세요. 저하. 저하의 인생을 풍비박산 낸 죄 달게 받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데이비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던졌다.

“저하?”

“정직을 피하고 싶으면 다섯 가지 조건을 맞춰라.”

그 한마디에 에이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지금부터 한 달에 무조건 최소 3회 이상 연회에 참석해. 그곳에서 네가 원하는 남자를 찾아.”

“…….”

“그곳이 아니면 하인스 영지도 좋다. 어디든 너를 사랑해줄 사람을 찾아라.”

그 말에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치 이념 그딴 거 다 필요 없고 오로지 에이미 실란 너 본인을 사랑해줄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친구를 찾아라. 그 과정에서 하인스 영지의 이름이 필요하면 무기한으로 대여하겠다. 기한은 무기한이지만. 그것을 거부하겠다면 너의 무기한 정직을 철회하지 않겠다.”

“저…… 저하?”

“또 다른 조건이다. 하인스 영지에서 제공하는 귀금속을 거부하지 말고 품에 지니고 있을 것이며, 하인스 영지 북부에 있는 땅 일부를 받아라. 그 또한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의 정직은 풀리지 않을 거다.”

“그런.”

에이미의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마지막으로.”

데이비가 차갑게 일갈했다.

“한 번만 더 속죄한다는 마음으로 나를 모시지 마라. 내 사람으로서 나를 모셔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역시 정직을 철회하지 않겠다.”

“저하, 그렇다면…….”

데이비는 천천히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친구와의 만남,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경우 혼인에 필요한 모든 물자. 자신을 꾸미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 그 모든 것은 하인스 영지. 아니 내 개인 사비로 지출한다.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역시 정직을 철회하지 않겠다.

에이미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저하! 차라리 소녀를 죽여주세요! 이런 과분한 대접을 받을 순 없어요! 저는…… 제 어머니는 레니 왕비저하를 살해한!!”

절규하는 그녀를 향해 데이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어머니를 죽인 건 실란 남작부인이다. 에이미 네가 아니야. 그녀는 벌을 받았고, 어머니의 바람대로 에이미 너는 살았다. 그렇다면 너를 살린 건 어머니가 된다.”

애초에 고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리네스 왕비의 딸인 에오니샤조차 받아들였는데.

부모의 잘못이 아이의 잘못은 아니니까.

그녀가 애초에 속죄할 이유는 사실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조건이다. 에이미 실란. 평생 나를 지켜온 너를 저버리지 않게 해다오.”

용서와 복수의 선은 너무도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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