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9화
그것은 명령이었을까.
아니면.
그동안 고마웠던 한 소녀에게 향하는 나의 부탁이었을까.
정확한 것은 나도 자세히 알 수 없다.
그저 엉엉 우는 에이미를 안아주며 부탁 아닌 부탁을 할 뿐이다.
“부탁한다. 에이미.”
그 말에 몸을 파르르 떨던 에이미는 결국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놓아주었을 때.
그녀는 머리를 숙인 채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억지로 누르며 고개 숙여 대답했다.
“저하께서, 흐읍…… 끅…… 그, 그리 바라신다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베르닐 시종장에게 시선을 돌린 후 말했다.
“시종장.”
“예…… 저하.”
“페르세르크와 에이리아가 에이미를 도와줄 거야. 시종장이 솔선수범해서 두사람을 도와줘.”
“명 받잡겠습니다. 저하.”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를 뒤로한 채 나는 몸을 돌렸다.
혼수상태에 빠진 직후. 홀로 왕자궁에 방치되어있던 나를 도와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에이미였다.
“데이비.”
“은인이라고 불러야 할까. 원수의 자식이라고 불러야 할까.”
“대답을 이미 정해놓았거늘, 그걸 재차 본녀에게 확인하는 건 그리 좋은 버릇이 아닌 게지.”
그녀가 장난스레 웃으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럴 땐 이렇게 물어야지.”
판단을 잘 내렸는가.
“잘 선택했다고 생각해?”
“잘했구나.”
그녀는 끝까지 나를 마치 동생 보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후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침실로 들어섰을 때였다.
밤하늘의 별빛이 환하게 비쳐 은은하게 주변이 잘 보이는 방안으로 들어서자 묘한 이색감이 서린 눈동자의 주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리아?”
“이야. 서방님. 이렇게 단둘이서 밤중에 방에서 보는 건 두 번째였지?”
상당히 느긋하면서도 평소의 에이리아와는 정반대의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녀의 뒤로 빛을 머금은듯한 은은한 9개의 꼬리가 보였다.
페르세르크처럼 장난기가 서려 있으나 의외로 숙맥인 그녀와 달랐고.
일리나처럼 저돌적이지만 승기를 잡았다고 마냥 놀리는 스타일이 아닌 일리나와도 달랐다.
에이리아의 본능. 나인테일 특유의 본성이 아직 다시 잠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사박-
그녀는 스르륵 흘러내리는 새하얀 네글리제를 하늘거리며 새하얀 발을 뻗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그리고 굉장히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종족의 자존심을 걸고 한판 붙어야 할 거 같아서. 서방님.”
“그 서방님이라는 호칭 굉장히 낯간지러운데.”
내가 쓰게 중얼거리자 그녀가 귀엽게 웃으며 한발 물러났다.
“부부 사이에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뭣하면 자기야 라고 불러주는 것도…….”
“편한 대로 불러라.”
이유 모를 오한에 몸이 파르르 떨린다.
“설마 나라서 싫은 건 아니겠지?”
“이중인격도 아닌데 굳이 거부할 이유가 있나. 취한 에이리아도 참 예쁘다 싶어서.”
내 말에 그녀가 급히 시선을 돌렸다.
“와…… 이건 좀.”
그녀가 양손으로 제 뺨을 찰싹찰싹 때리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듯 코와 입만 남기고 눈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뭐? 한판 붙자고? 겁이 없네?”
동시에 부끄러움인지 뭔지 모를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가 눈을 번뜩이며 청록빛 귀를 쫑긋거렸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야시시하게 웃어 보인다.
“나인테일의 전설이 단순히 상상으로만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러다가 진짜 후회할 거야.”
사람은 하지 않던 일을 할 때 그 괴리감과 생소함에 당황하게 된다.
그날.
나는 에이리아가 왜 나인테일이라는 종족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 * *
그날의 대면 이후. 에이미는 하루종일 밤새 고민한듯한 모습이었다.
평생 속죄하기 위해 살아온 그녀에게 다른 길의 제안은 그리 익숙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에 베르닐 시종장과 그녀에게 평소 고마움을 가지고 있던 페르세르크나 에이리아가 나서면서 모든 상황이 반전되었다.
기본적으로 제대로 꾸미지 않았던 에이미를 꾸미기 시작하고 그녀가 한 명의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굳이 끼어들 것은 없었다.
“저하. 이건 에이미 영주 대리께 책정된 예산이에요. 이 정도면 어떤가요?”
“흐음…….”
에이미에게 내려갈 예산서를 본 나는 고민하듯 눈을 감았다.
“저…… 너무 많이 잡았나요?”
눈앞에 있는 수인 소녀는 에이미를 도와 영지의 재정을 담당해주고 있는 아이였다.
계산이 영특하고 상당히 손익 계산이 빠르다.
단순 수치 놀음이야 어지간하면 다 할 수 있지만, 그녀는 내가 노예시장에서 데려왔던 수인 중에서도 가장 손익 계산에 대한 재능이 출중했다.
그녀가 책정한 예산은 한 치의 오차도, 낭비도 없는 그야말로 최선의 금액이다.
이에 나는 뒤에 ‘0’을 하나 더 붙인 뒤 앞자리 숫자를 바꿔버렸다.
“세상에…….”
“최선을 다해. 에이미는 내가 혼수상태일 때부터 나를 보필해온 충신이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지.”
“너……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제국의 황족들도 이 정도 금액을 쓰지는…….”
“굳이 에이미가 그들보다 적게 쓰라는 법은 없지?”
“하…… 하오나 저하. 왕족보다 사치를 부릴 경우 그에 따른 여러 문제가…….”
“두번 말하게 하지 마.”
“…….”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내가 해결할 테니까.”
“네에, 명 받잡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뒤 돌아서는 수인 소녀를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황족보다 더 나가면 어떠한가.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회랑에서 돌아오지도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즉, 에이미는 내 생명의 은인이고, 그런 그녀에게 해주고 있는 건 즉. 내 목숨값이다.
* * *
퀭해진 얼굴로 에이리아가 도시락으로 만들어준 수제 와플을 와작와작 씹는다.
와플을 건네주며 수줍게 웃던 에이리아는 결국 승리했다.
나와는 반대로 굉장히 반짝거리는 얼굴로 헤헤 웃으며 잘 다녀오라던 그녀에게 다시는 취하지 말라 말도 못 할 느낌이었다.
에이리아는 평소의 애정표현에도 굉장히 소극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그 본성은 완전히 달랐다.
“진짜 몽마는 서큐버스가 아니고 나인테일이네.”
그녀는 평소의 에이리아가 심적으로 격하게 흔들렸을 때 깨어난다.
생명의 위협. 극한의 슬픔. 혹은 분노. 그 외에 여러 요소.
본래 나인테일은 자신들의 본능과 이성을 적절히 조율하는 종족이다.
하지만 에이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그것을 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이중인격과 흡사한 무언가를 분리해내고 말았다.
물론, 정말 이중인격은 아니었다.
본성에 의한 자기 최면. 혹은 술에 취한 모습. 어느 쪽이든 틀린 표현은 아니리라.
사람이 술에 취하기 전과 후가 다른 것과 같은 모습. 다만 술이 아닌 극한의 감정이 기폭제가 되어 변해버리는 것과 흡사하다.
그게 그녀의 본래 형태였다.
그녀가 깨어나게 된 계기는 아마 친구 윤서나의 죽음이 시발점이었으리라.
“맛있네.”
선물용을 제외하고 남은 와플을 와작와작 씹어먹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에오니샤와 티아라가 머무르고 있는 구가 산하 기관으로 대여 중인 연구소에 도착했다.
제대로 된 장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이곳 포항공대의 연구소는 국가가 자체적으로 대여하고 있는 터라 말 그대로 전세를 내고 있는 꼴과 같았다.
건물에 가까워지자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엄 교수님. 확실하죠?”
“맞아요. 이건 분명해. 세기의 발견이에요.”
연구실 건물로 다가가자 누군가의 대화가 들려온다.
엄 교수라 불린 여성 교수와 남성 교수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엄청난 것을 발견한 양 떠들어대는 걸 보니 에오니샤와 티아라가 그들과 제대로 협력해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어지는 그들의 통화내용을 듣기 전까지는.
“어. 나야. 성환아. 대학원 실에 있는 애들 다 모아둘래? 조만간 국가사업 몇 개만 신청할 테니까. 기획서 준비하고…… 뭐? 쉬게 해달라고? 걱정 마. 내가 오늘 너희보다 훨씬 어린 아가씨들을 봤는데. 사람 그리 쉽게 안 죽더라.”
“어어. 나다, 환우야. 애들 모아라. 몇 달만 철야 하자. 뭐? 괜찮아 사람 쉽게 안 죽어.”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구렁텅이로 던져넣는 말을 툭 내뱉은 교수들은 이내 전화를 끊은 뒤 피식 웃었다.
“진짜 대단하네요. 얼마나 굴려야 사람이 죽지 않고 버티는지 확실히 알았으니. 이건 학계 논문감이에요.”
“아마 해외 교수들도 쌍수 들고 환영할 겁니다.”
“아니 이 사람들아. 사람을 그렇게 갈아 넣으면 씁니까?”
기가 막혀서 그들의 앞에 나타난 내가 황당하다는 듯 묻자 멍하니 나를 보는 두 교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소리쳤다.
“데이비 왕자님! 당신은 천재입니다!!”
눈을 번뜩이며 내 손을 잡고 소리치는 두사람을 보며 내가 인상을 찡그린다.
“세상에. 사람을 얼마나 갈아 넣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 같은 분이라는 걸 몰랐군요!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리 말하는 두 교수를 보며 내가 인상을 찡그린다.
그때 연구실 건물에서 낑낑대며 작은 상자를 밀차에 담아서 나오던 에오니샤가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오라버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사람들한테.”
“무슨 짓이라뇨.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런다고?”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습이다.
“네.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평소처럼 연구만 했는데요.”
“세상에 저게 평소의 연구라니! 대단하군요! 인체의 신비 그 자체지요!”
연구자 중엔 미친놈들이 많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연구협약을 보내놨더니 이상한 걸 하고 있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내가 천천히 다가온 에오니샤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녀가 밀차에 담아서 나온 박스들이다.
무언가를 담아두었던 박스는 척 보기에도 굉장한 양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건 뭔데?”
“이거요? 지원받은 각성제요.”
그 말에 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나를 말 없이 바라본다.
“아 그래? 전부 나눠 먹은 거야?”
“아뇨. 제가 먹은 건데요?”
“아 그렇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교수들이 눈을 번뜩인다.
동시에 나보다 먼저 지구에 도착했던 일리나가 언제 다가왔는지 내 다리를 툭툭 걷어차며 말했다.
“네가 이러니까 교수님들이 저러시는 거야. 이 악마 같은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