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14화
“만날…… 수 있는 거야?”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녀가 조심스레 물어오자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가 마음에 들면요.”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번뜩였다.
“잠깐만!”
그리고는 급히 손뼉을 치고 독특한 수인을 한번 맺더니 눈을 부릅떴다.
치이이잉…….
동시에 그녀의 주변으로 도력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내 그녀의 앞으로 독특하게 생긴 고슴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꺅! 귀여워!”
현아가 눈을 반짝이며 소리친다. 확실히 그녀가 불러낸 소형환수는 굉장히 귀여운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황금 꺼내!”
다급히 소리치는 그녀의 명령에 따라 입을 쩍 벌렸다.
-우웨에엑!
그리고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금괴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나둘. 고슴도치가 뱉어낸 금괴가 쌓이기 시작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단순한 금괴라고 하기엔 그녀가 내놓는 금괴들은 역사적인 가치가 굉장한 신라 시대의 물건.
아마 제대로 팔면 본래 가격 이상의 가치는 있으리라. 애초에 내가 바란 것은 돈이 아니었으니 그녀가 몇 개를 내놓건 저것은 추가적인 이득일 뿐이다.
그렇게 금괴가 10개가 넘어갈 만큼 쌓이기 시작하자 현아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저 작은 몸에서 많이도 나오네. 최고의 지갑이구나…….”
“이거면…… 안돼?”
이윽고 금괴가 약 20개 정도 쌓였을 때. 그녀가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오래전 왕궁에 잠입했을 때 골탕 먹어보라고 싹 털어온 건데.”
그녀의 말에 내가 물었다.
“스무 개라. 역사적 가치는 높겠네요. 그런데 이거론 좀 부족한데.”
“마…… 말만 해! 더 줄 수 있어! 서역에서 가져온 보석이라든지 줄 수 있어! 그것도 안 되면…….”
그녀가 움찔거렸다.
“설마 내 몸을…….”
반사적으로 일어나려는 페르세르크의 팔을 잡아 앉힌다.
“왜 이래, 평소랑 다르게 화가 많이 나서.”
“그대는 전혀 몰라.”
페르세르크는 뭔가 짜증 난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꼬리 아홉이라는 게 마냥 장식은 아니로구나.”
짜증스레 나가버리는 그녀를 현아가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흑…… 흐윽…… 나, 난 가진 게 이제 없는데…….”
그녀가 울먹거리며 말한다.
“방법이 없을까? 우치만 만날 수 있게 해주면…….”
“오빠…… 이렇게 간청하는데 불쌍하지도 않아?”
그녀는 급기야 나를 타박하듯 말했다.
“부부 사이라잖아. 도와줄 수 있으면 좀 도와주면 어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조용히 그녀를 직시하다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일단 금괴는 3개만 받겠습니다. 나머지 대금은…….”
이어지는 내 말에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 * *
먼저 나가버린 페르세르크를 따라 나가자 그녀는 말없이 테라스에 몸을 걸친 채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어떻게 하기로 하였는가.”
“도와주기로 했어.”
“결국, 넘어간 게 로구나. 구미호라는 족속도 참 대단한 게지.”
그녀가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그대도 홀라당 넘어갈 줄 몰랐지.”
“넘어갔다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 어때 보이던가.”
“에이리아와는 많이 다르네. 종으로 치면 친척뻘인데. 정기를 모아온 구미호라 그런가.”
“보통은 에이리아가 특이한 케이스인게지.”
“후우…… 그대가 하겠다고 했으면 더 말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왜 화가 난 건데?”
내 물음에 그녀는 말없이 창밖을 내려다보다 조용히 말했다.
“그대는 여자의 눈물에 조금 더 경계할 필요가 있어.”
그 설명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숭이라고?”
“적어도 완전한 진실은 아니겠지.”
“그건 나도 알아.”
담담하게 말하며 내가 그녀의 옆에 섰다.
그리고는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좋은 거 아니야?”
“응?”
“단순히 그녀가 우치를 보고 싶은데 볼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리는 거면 차라리 못 만나게 했겠지.”
모두가 착각하고 있는데. 어정쩡한 재회는 오히려 더 힘들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그녀가 생각보다 약삭 빠른 인물이라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거지.”
그 정도로 자기 앞가림 할 줄 아는 인물이라면, 그 여파는 마냥 신파극처럼 슬프진 않을 테니.
뭔가 이해한 것일까? 페르세르크가 인상을 콱 찡그렸다.
“조금만 삐끗해도 슬픈 결말이 될 테지.”
“반대로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낯선 세상에서 눈을 뜬 그녀가 너무 불쌍하기도 하고.”
가짜 눈물. 조금 의심스러운 속내. 여러 가지가 눈에 보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가 우치라는 영웅을 정말로 사랑하며 그리워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
“그리고 나는 이번 일로 너도 한가지 느끼는 게 있으면 좋겠다.”
3천 년이 넘었으면 이제 못다 한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그녀가 나를 스윽 지나쳤다.
“불효를 저지른 자식이 무엇이 할말이 있을까.”
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무엇을 받기로 한 게야? 그대의 목적이 재밌는 상황을 구경하는 것이라 해도 맨입으로 돕진 않았을 텐데.”
“페르세르크.”
내 말에 그녀가 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구미호의 전승에 대해 알아?”
“전승?”
“그래. 나인테일과 비슷하지만, 지구에 있는 구미호는 엄연히 그 계통이 달라. 그 전승을 아느냐는 거지”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들어본 적이 없구나.”
“그럼 됐어. 곧 크리스마스인데. 기대해.”
“아이들 선물이라면 이미 생각해두었음이야. 그리고 본녀가 기대할 게 있나?”
그렇게 말하며 스카이 바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를 향해 조용히 중얼거렸다.
“산타 입장에선 이 세상 모든 인간이 똑같아. 애들이건 어른이건.”
* * *
“대가를 받았으니 나는 어떻게 해서든 당신 앞에 그 인간을 데려다 놓겠습니다.”
“정말로? 그런데…… 고작 이걸로 대가가 되는 거야?”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구미호. 당신에겐 흔한 일이지만 그게 안 되는 이도 많습니다.”
현재 나와 페르세르크. 그리고 구미호 [비연]이 있는 이곳은 미국이 아닌 한국,
바로 현아와 삼촌이 나를 위해서 마련해놓은 별장이었다.
처음엔 이름을 밝히길 꺼려하던 그녀였지만 그녀의 이름이 주는 최혼향이 내게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안 뒤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모두 알려주었다.
“그나저나 인간의 기술력은 정말 대단하네…… 진짜 신기해. 우와. 이건 석빙고야?”
그녀가 냉장고 문을 덜컹 열며 묻는다.
“효과는 비슷한데 그런 것보다는 조금 더 효율적이겠죠. 냉장고라는 겁니다.”
“이건?”
“오븐. 음식을 구울 때 쓰는 거.”
“장작 넣는 곳도 없는데?”
“요즘 누가 장작을 쓰나.”
“그럼 이건?”
“식기 세척기. 저건 정수기. 저건 벽걸이 TV 자, 됐으면 빨리 오세요. 자꾸 흐름 끊으면 거래 엎는 수가 있습니다. 사모.”
“아참 내 정신 좀 봐.”
그리 다가오면서도 그녀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너 우치랑 관련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구나? 주작의 구현 형태가 그와 완전히 일치해.”
“사실이니까요.”
“그래. 그런 거면 믿을 수 있어. 그리고 네가 여자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그녀였다.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자 계획 세우는 거지? 나는 솔직히 그가 어디 있는지. 왜 만나지 못하는지도 이해 못 하고 있으니까 설명 좀 해줘.”
그녀의 물음에 나는 대략적인 현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우선 첫째. 우치의 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뭐? 이야기가 다르잖아!”
“아뇨. 같아요. 소속이 달라진 것뿐. 그의 혼은 상위 존재가 됐으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우화등선한 것과 비슷한 겁니다.”
지금 우치의 위치는 감히 우화등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세계의 조율자라는 위치에 있지만.
“게다가 그 양반. 지금 상황을 대강 눈치채고 있을 겁니다.”
“…….”
“절대 안 나타나려 할 텐데요.”
“흑…….”
다시 눈물을 보이려 하는 그녀를 말린다.
“그러니 계략 하나 짭시다.”
“계략? 어떤 계략?”
“견우와 직녀.”
* * *
“멍청한 새끼! 네가 그럴 줄 알았다!”
신의 영역에는 수많은 공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현재 우치가 있는 이곳은 그 신의 영역에서도 굉장히 아래쪽에 존재하는 지하 그 자체였다.
인간이 만드는 방공호는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큼 깊고 두꺼운 지하.
그냥 동굴이 아니다!
신의 영역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신강을 도배하듯이 발라놓아 어떤 마법적인 간섭도 할 수 없는 이 극한의 방공호는 다름 아닌 우치가 제 존재감을 마구잡이로 투자하여 만들어낸 공간이었다.
“히히…… 히히히히! 너 새끼야. 사람 잘못 봤어. 난 절대 안 내려가. 절대 안 나가 이 새끼야.”
제아무리 데이비라도 강제로 그를 끌어내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비연이 이곳까지 온다는 건 더욱더 말이 안 되는 상황.
즉.
“내가 여기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지.”
비록 신강 때문에 그도 바깥의 상황을 알지 못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데이비가 비연과 접촉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미친놈은 반드시 비연과 자신을 만나게 할 것이라고.
“백날 천날 기다려봐라. 내가 나가나.”
그는 시각을 알려주는 도구 하나만 든 채 아예 완전히 틀어박혔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데이비를 잘 아는 만큼. 데이비도 그를 너무 잘 안다는 사실을.
“시작합시다.”
“…….”
우치가 틀어박힌 거대한 바위 동굴의 입구를 바라보며 데이비가 섬뜩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던 오딘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얼마나 돌려줘.”
“이 양반. 독해서 10년은 안 나올 겁니다. 10년만 돌리죠.”
“난 책임 안 져.”
지팡이를 손에 든 오딘이 천천히 안대를 벗는다.
동시에 검게 변색된 그녀의 흑안이 드러나며. 어마어마한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거 회랑의 영웅들이 누가 제일 센데요? 라는 데이비의 한마디에 아포칼립스를 강림시킨 적이 있었다.
그때의 승자는 헤라클래스와 로 아이아스로 끝맺어지기도 했다.
그때도 오딘은 자신의 안대를 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알고 있는 데이비는 스산하게 웃어 보인다.
“신강은 여기뿐이죠?”
“당장은. 아무리 우치라도 신강으로 만들어진 동굴을 두 번 이상 만들진 못해. 한번 끌어내는 순간 다시는 못 들어가게 막을 순 있겠지.”
“그거면 됩니다. 이런 은신처가 있으면 곤란하지.”
“우치는 여러 가지로 도망갈 길을 만들어놨을걸?”
“상관없어요. 도망쳐도.”
째깍…… 째깍…… 째깍…….
그러면서도 오딘의 손끝을 따라 빛으로 된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치는 데이비를 잘 안다. 그렇기에 데이비가 당장에라도 비연을 도울 거라 생각했기에 비연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스스로를 봉인하듯 숨어버리면 된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생각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이 신의 영역에 있는 미치광이들은 절대 착한 양반들이 아니라는 것을.
“구미호에게 생기의 구슬은 왜 받았는데?”
데이비가 대가로 받은 것은 어떤 힘의 응집체였다.
마왕도, 신격을 지닌 자도, 그 어떤 존재도 만들지 못하는.
오로지 특수한 조건을 맞춰 세상의 규칙으로부터 완벽하게 인가를 받은 한 종족과 태초신만이 가능한 기적과 같은 무언가.
흑안을 아주 살짝 개방하여 마법을 강제로 뒤틀기 시작한 오딘이 묻는다.
“구미호가 천년 가까이 생존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만에 하나 생존하는 데 성공하면 그 생기의 구슬은 기적에 가까운 축복을 가지게 됩니다.”
당신이나. 나나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데이비의 말에 오딘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