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25화
오로지 자신의 슬픔과 분노를 토로하는 원념을 강제로 정화시키지 않고 스스로 정화되게 하여 힘과 원한을 적절하게 밸런스 잡히도록 할 방법은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앞으로의 일, 혹은 현재의 일에 대처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 엎지르다 못해 바닥에 쏟아져 아예 말라버린 물을 컵에 주워 담는 건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영역이 아닌가.
아무리 내가 신격까지 얻었다곤 하지만 이미 벌어진 과거의 일을 수정하는 건 불가하다.
프리아 여신도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할 때 평행세계라는 선택을 하지 과거를 개변시키지는 않으니까.
회귀라…….
퍽 웃긴 말이지만. 그것만큼 효율성 떨어지고 오만한 말도 없을 것이다.
그동안의 업을 모조리 없는 것 치부하는 것일 테니.
그래. 차라리 비슷한 것을 꼽자면……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가능성을 품은 하나의 평행 세계라 보는 게 좋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아…… 하아…… 버…… 하아…….”
결론적으로 내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당장 그런 슬픈 과거를 가진 원귀를 기만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아…… 오라…… 하악!”
응?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
털썩!
갑작스런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자 그곳에는 작은 체육복을 입은 채 바닥에 철푸덕 쓰러져 있는 에오니샤가 보였다.
“에오니샤?”
“하아…… 하아…….”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어찌하지 못한 채 쓰러져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어린 동생을 보며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무…… 물…….”
“받아. 입에 넣고 헹군 뒤에 뱉어내.”
내 말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대로 마시면 큰일 난다.”
“…….”
빈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에오니샤는 힘겹게 그것을 받아 손을 뻗으려 했지만 이내 다시 추욱 늘어지고 말았다.
대부분 실내에서 연구만 하던 아이가 체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나를 따라오기 위해 자신의 한계 이상으로 달렸으니 아마 그녀의 상태는 탈진 직전이리라.
“자. 천천히.”
나는 그녀를 부축하듯 받쳤고 그녀의 입에 물통을 물려주었다.
벌컥! 벌컥!!
“야…… 야!!”
내가 급히 물통을 빼앗으려 들지만 어디서 나온 것인지 초인적인 힘으로 물통을 빼앗아 들이키는 그녀를 보며 나는 그대로 그녀의 복부에 손을 올려 마나를 퍼뜨렸다.
혹여 무리하게 마신 물이 그녀의 육체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녀가 말한 몸무게 증가는 조금만 손 보면 어렵지 않게 관리가 가능하다.
당장 페르세르크만 해도 그녀 본연의 힘으로 몸무게를 그램 단위로 조율하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르진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계획이 말짱 도루묵이니 무슨 소용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지금 그녀를 바깥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단순히 운동이 목적이었으면 대번에 그 망할 근육 토끼와 미친 별자리 소에게 보냈으리라.
그놈들, 또라이같이 근육 도핑에 광적이긴 해도 그만큼 그 단련 지식은 경악스러울 수준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놈들에게 두억시니를 보냈는데 잘 지내고 있을는지…….
부디 그 오크 대족장과 짜고 4인 도원결의 같은 걸 하지 않았으면 한다만…….
실제로 두억시니 이외에도 거의 강제적인 근육 도핑 덕분에 망가져 버린 드래곤이 하나 있었다.
타락용이라 불리던 이들 진영의 골드드래곤 여성이 하나.
여성이고 드래곤인 만큼 근육이 폭발적으로 증가할지는 의문이지만 전에 들리던 소문에 따르면 악력이 평소의 수배는 뛰었다는 말이 있었다.
“푸핫! 켈룩켈룩…….”
이윽고 만족스럽게 물을 먹어치운 그녀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나를 흘겨보았다.
눈물까지 고인 것이 너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힘들면 멈추면 되지 왜 그렇게 달린 거야.”
“오라버니는 제가 멈춘다고 쉬게 해주실 분이 아니잖아요.”
“…….”
할 말 없네.
“그래. 달리기는 여기까지 하자. 대충 6키로 정도 뛰었는데. 생각보다 잘 뛰었네.”
3키로 구보라면 한국 육군이 매일 달리는 거리 정도.
그런 운동량을 이 어린아이가 소화했다는 건 제법 놀라운 결과였다.
“히잉…… 이러면 다리에 근육이…….”
“자. 앉아봐.”
울상을 짓는 그녀의 다리를 쭉 편 뒤 그녀의 종아리를 살살 주물러 주자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오…… 오라버니?!”
놀라는 그녀의 외침을 무시한 채 천천히 주물러주자 그녀의 얼굴은 마치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내일 돼도 근육이 뭉칠 일은 없을 거야. 고생했다.”
“그…… 그럼 끝인가요?”
“아니.”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한 내가 한쪽을 가리켰다.
“다음 운동 시작하자.”
* * *
간단한 운동을 매번 그녀와 같이 하기를 약 5일.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듯 나를 따라 달리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며 내가 느긋하게 물었다.
“몸무게는 다 뺐는데. 아직도 따라오네?”
“흥. 시작한 거 꾸준히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역시 그녀는 적당히라는 게 없다.
그녀는 태생이 게으른 게 아니었다.
너무 열심이기에 뭘 해도 끝장을 내버리는 것이었다.
연구도, 방구석 폐인도, 운동도.
마냥 좋은 일인가 하면 또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적당히라는 단어를 가르치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어떻게 한다…… 아예 하루 일과표를 짜주면 거기에 강박증이 생길테고…….”
“오라버니. 무슨 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요즘엔 게임 잘 안하나?”
“글쎄요. 이것도 나쁘진 않네요.”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마.”
“그게 동생에게 할 소리인가요?”
“네 몸 관리도 못할 정도로 열중하진 말라고.”
연구할 때엔 스스로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
게임에 빠졌을 때도 마찬가지.
반대로 운동을 통해 그녀의 건강을 되찾아주는 것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극도로 건강에 예민해지면 별별 짓을 다 하는 게 인간이니까.
“어서 움직여요. 이러다가 열 손실 나겠다.”
“열 손실은 뭐야.”
“모르세요? 열량손실이요.”
“…….”
얘는 진짜 답이 보이질 않는다.
“아, 이거 진짜 선 씨게 넘네…….”
* * *
결국, 연희 누나의 극약처방 덕분에 에오니샤를 방구석 폐인에서 꺼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에오니샤는 티오니스로 돌아가면 다시금 연구를 시작하겠다 했지만, 결과론적인 면에서는 사실 원점이나 다름없다.
운동을 통해 바깥 활동에 다시 흥미를 붙인 그녀는 본래의 흥밋거리인 연구에 매진하게 될 테고 다시 극도로 자신을 갈아 넣으려 들것이다.
“애초에 그 원인은 결국 나구나.”
당장은 어찌할 수단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중 무언가가 번뜩였다.
“아…… 잠깐만.”
뭘 해도 극도로 열심히 한다.
사실 게임에 빠져 연구도 귀찮다고 하던 걸 보면 아예 여지가 없는건 아닌 듯하지만 말이다.
앞으로 적당히 그녀를 불러서 다른 일을 하고 환기를 시켜주는 수밖에 없겠다.
적어도 그녀 스스로가 익숙해질 때까지는.
그게 오라비로서 해줄 일이고, 그녀가 이토록 워커홀릭이 되어버리게 만든 내 책임이다.
“에오니샤.”
“네?”
숨을 짧게 들이켜며 계속해서 움직이는 그녀를 향해 내가 조용히 말했다.
“무리해서 어디 몸이 안 좋아지거나 네 감정이 메마른 일은 부디 없었으면 한다. 이건 제안도 명령도 아니야.”
“그럼요?”
“가족으로서의 부탁이고 자잘한 잔소리야.”
내 말에 그녀는 새삼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 * *
에오니샤는 영특한 아이인 만큼 거기서 다른 길로 세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국이 정식적으로 원전 폐기물 중화 시스템을 도입하고 결과가 슬슬 나오기 시작하자 일본 측과 중국 측에서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내 알바가 아닌 문제였기에 나는 계약이 끝난 대로 에오니샤와 티아라를 모두 데리고 티오니스로 복귀했다.
그동안 하인스 영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에이미가 있었지만, 그녀에 대한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있는 낌새였다.
에이리아와 일리나의 도움으로 그녀는 요즘 하인스 아카데미의 한 교수와 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는 듯하니 말이다.
둘 다 나이도 젊고 잘 어울리니 좋은 결과가 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에이미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에오니샤도, 에이미도 방식이 다를 뿐 비슷한 건 변함이 없다.
“그래서.”
“훕…… 훕…….”
“넌 대체 뭐 하고 있는 거냐.”
나는 내가 오거나 말거나 스쿼트에 열중하고 있는 도깨비를 보며 물었다.
[보면 모르나? 운동 중이다! 후웁! 훕!]
나는 놈의 옆에서 아주 만족스러운 듯 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이는 새하얀 토끼 놈을 바라보았다.
터질듯한 근육을 가진 토끼 놈을 보니 속이 메스꺼워지는 기분이다.
“두억시니. 넌 언제부터 존재했지?”
내 물음에 놈이 운동을 멈추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스쿼트를 하는 채로 답했다.
[오래 됐다. 아주 오래.]
“네가 살아있던 당시에. 구미호가 있었나?”
내 물음에 그는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다시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뭔 대답이 그따위야.”
[나도 모른다. 세상일 따위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럼 원귀에 대해선?”
[원귀?]
그 말에 녀석이 드디어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 원귀가 가진 원한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
내 물음에 두억시니는 조용히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는 이내 답했다.
[오래전 일이라면 불가능할지 몰라도 어느 정도 해소하는 거라면 해결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있다고?]
내 물음에 그가 조용히 끄덕였다.
[바로 기만이지, 네놈도 알고 있을 텐데, 원귀의 기억은 굉장히 세밀하다. 그리고…… 불안정하지. 하나 묻겠다. 너는 그 원귀의 원념을 모두 해소 시키려는 거냐? 아니면, 어느 정도 약화시키려는 거냐.]
당연히 어느 정도 약화시켜서 놈의 원한이 가진 힘을 얻…….
[정말 그것이면 왜 망설이지? 당장 원한을 품은 귀신 하나 속여서 일부러 당해주기만 해도 원한을 약화시킬 수 있다.]
그의 말에 나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섬뜩함을 느꼈다.
그 방법을 알면서도 기만이라는 이유로 하지 않는 것은…….
[그의 원한을 모두 해소 시키는게 아니라면 어쭙잖은 위선은 집어치워라.]
“…….”
아무리 생기의 구슬을 위해서라지만. 한 나라의 충성을 다했던 불쌍한 영혼을 기만하고, 부숴가면서 내가 그것을 이룰 자격은 있는가.
예전이었다면 무슨 상관인가라는 생각도 들었겠지만. 그의 과거를 본 시점에서. 그리고, 나 또한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시점에서 그게 쉽게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누구 보여주려고 일부러 모질게 구는 것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 누군가를 짓밟아야 할 만큼 나는 그렇게 이기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호구가 아닌 합리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은 다른 법이니까.
[우치의 시험은…… 네가 그걸 어떻게 조율하냐가 아니다.]
역시 그는 우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네놈이 현실을 보고 나서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보고 싶은 것이지.]
그게 주술사 스승인 우치가 내게 내리는 마지막 가르침이며, 한 명의 동등한 존재로 보기 위한 마지막 시험이었다.
[선택 잘해라. 넌 재주가 다양하지만 분명한 주술사다. 그것도, 영적인 눈을 가진 주술사. 주술사의 근원은…….]
영적인 것, 그리고 세계의 진리와 교감하는 술사.
그리고, 슬퍼하는 자를 구원하기 위해 힘을 기르는 자.
마나 혹은 신성력 정령 마나만 아닐 뿐. 그 원류는 같다.
원귀의 슬픔을 무시하고 생기의 구슬을 완성시키느냐. 아니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아 돌아가게 되더라도 원귀의 아픔을 보고 지나치지 않는 것이던가.
[네가 어떤 선택을 내리건 그는 아마 너를 비난하지 않을 거다. 네게 그와 같은 인생을 강요할 놈은 아니니까.]
“한 방 먹었네.”
결정이 섰다.
“원귀는 포기한다.”
그놈의 슬픔은 그냥 보고 넘어가고 싶지 않아졌다.
생기의 구슬을 각성하는 건 원귀가 가장 효율적이지만 방법이 완전히 없는 건 아닐 테니까.
“방법이 있겠지?”
[이미 지난 괴로운 과거를 해소하는 건 아득한 미래인 현재엔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치가 말하지 않은 방법이 하나 있다.]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그의 눈을 직시했다.
“그렇구나.”
나는 모두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련 없이 원귀의 서리를 봉인해둔 장소로 향했다.
“후…… 시작하자.”
나는 망설임 없이 원귀와 다시 접촉을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