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45화
266기 선배들이 패배한 주요 원인은 개개인의 역량도 있지만, 겁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짐을 추가로 챙겨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도 모자라 무리하게 정보 수집에 비중을 두었다.
그래서 조금 비웃음이 났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 인간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그래서 선배들을 역으로 이용했고, 찍어 누르는 데에 성공했다.
곧바로 윗기수인 269기 선배들은 상당히 제 윗선배들에게 깍듯한 모습이었지만 270기 기수생들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았으니까.
선배 대접을 받고 싶으면 실력으로 보여주라고. 그렇게 말하며 자신만만함을 내비치던 그들은 그토록 만나보고 싶었던 유명한 기수인 268기 선배들을 볼 수 있었다.
대륙의 일에 잘 관심이 없는 이도 알고 있는 존재. 일리나 데 라운과 데이비 올 라운.
두 사람의 존재는 속세와 연이 없는 이 기사단 내부에서도 유명하기 그지없다.
그럴 수밖에. 단신으로 이 기사단 전체를 한번 뒤엎어놓았던 존재니까.
반골의 기질이 조금 있던 그들에게 데이비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어떤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런 선배가 하는 짓이 한차례 찍어눌렀던 266기 선배와 다를 것이 없다.
“우리를 무시해도 정도껏이지…….”
“됐어. 우리는 우리의 역량을 보여주면 되는 거다.”
270기 팀장 바루스의 말에 남은 9명의 견습 기사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조건은 알고 있을 거다. 우리는 선배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인간들을 무시하든 격파하든 파고들어서 코어에 손을 대면 그만이다. 코어의 반경 수 킬로미터 내엔 3명만 있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사실상 진입만 하면 우리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야. 우르캉.”
“어.”
“잠입 가능하지?”
“얼마든지.”
여유롭게 대답한 우르캉이라는 소년이 손짓을 하자 녀석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사라진다.
“보여주자고. 오만한 선배님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각기 팀을 2명으로 나눠서 움직인다. 나와 우르캉은 별개로 움직일 테니 너희들은 2인 1조로 돌파해. 목적은 코어다. 다른 건 다 무시해.”
바루스의 말에 견습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후 흩어진 270기들은 숲 곳곳에서 268기 선배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거봐. 별거 없다니까.”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인 채 그들이 소리 죽여 움직였다.
그들의 시야에는 루시아 쉘만과 성기사 필디르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신호하면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자. 내가 신관 선배를 맡을 테니. 넌 성기사 선배를 공격해.”
270기 두 견습 기사는 자신들이 진다는 판단이나 예상치 못한 결과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선배들은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시야 면에서도 상당히 고립되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셋. 둘. 하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가 떨어졌고 두 사람은 섬광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대화를 하며 걸어가고 있는 두사람을 노렸다.
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루시아 쉘만이 후방으로 물러나고 필디르가 방패를 들며 전방에 나서서 공격을 차단했다.
시야가 제한되고 있을 텐데도 제법 빠른 대처였다.
역시 268기는 그래도 다른 선배와 다르다는 것일까.
순식간에 대치 상황이 이어지지만, 견습 기사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처음 [일합]을 겨뤘을 때 눈치챈 것이다.
이길 수 있다! 그렇게 강한 선배가 아니다!
각이 선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견습 기사들은 맹렬하게 두사람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필디르가 제법 방패를 이용해 공격을 잘 차단시키긴 했지만 혼자서 두사람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미안하지만 선배! 많이 약하시네요!!”
루시아에게 파고든 한 견습 기사는 금방 그녀를 제압하기 위해 힘을 끌어올렸다.
터엉!!!
하지만 그 공격 자체는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갑작스레 루시아가 제 스커트를 쫘악 찢어버리더니 그 안에서 묵직한 메이스를 끄집어내 공격을 정면으로 쳐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근접능력은 견습 기사 쪽이 위였기에 루시아는 그 공격을 쳐내는 것만으로도 한참 밀려나 비틀거렸다.
“성녀 다프네시여. 힘을 주소서.”
생각지도 못한 반격에 당황하긴 했지만, 예상범위 내였다. 견습 기사들은 승기를 잡고 씨익 웃으며 재차 공격을 가했다.
선배들은 방독면을 뒤집어쓴 탓에 시야가 상당히 좁아져 있다.
그런 만큼 싸움은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실제로 루시아의 반격은 예상외였지만 점차 필디르와 루시아가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견습 기사중 하나가 특질능력자였기 때문이었다.
“윽…… 몸이 무거워…….”
“쓸데없이 방독면 같은 걸 쓰니까 당하는 겁니다! 정말 선배답지 않게 약하시네요!! 그 유명한 268기가 이 정도면 그냥 전부 은퇴하시지 그러세요! 저희가 막을 테니!”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필디르의 틈을 파고든 그가 방패를 쳐내 날려버린다.
강제로 방패가 젖혀진 필디르가 무방비 상태가 되자마자 필디르와 정면으로 싸우던 견습 기사는 그를 무력화 시기키 위해 추가 공격을 가했다.
아니. 정확히는 가하려 했다.
때마침 날아드는 보랏빛 광탄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콰아아아앙!!!
갑작스런 포격음과 함께 대지가 뒤흔들린다.
딱히 정밀하게 노린 공격이 아니기에 광탄을 무시한 채 필디르를 향해 진입한 그가 필디르의 팔을 잡고 그가 저항하지 못하게 제압했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추락한 광탄에서 2차 여파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커헉!!!”
바닥과 충돌한 광탄은 이내 엄청난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고 그들은 당황한 채 괴로운 듯 목을 움켜쥐었다.
“이……이게 무…… 쿨럭쿨럭!! 우웨엑!”
엄청난 어지럼증과 함께 눈과 코 목이 따가워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들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그들은 이해하지도 못했다.
“마경의 마물 중엔 유독가스를 실시간으로 살포하는 놈들도 있다. 그 위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상 너희들은 이미 진 거야.”
“비……비겁한?!”
“비겁? 마물이 정당한 수단을 따질 거라 생각해? 정말 어리석네. 그리고 방패를 젖혀 준건 네 틈을 유도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알고 가라고.”
쩌어엉!!
그 말과 함께 필디르가 방패를 버리며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 들며 대치하던 견습 기사를 순식간에 제압해버렸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을 향해 루시아가 빠르게 달려든다.
무방비 상태가 된 나머지 한 명을 노린 것이다.
그녀는 들고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메이스를 강하게 휘둘렀다.
하지만 힘 면에선 분명 견습 기사가 위였다.
아무리 빌어먹을 매캐한 연기에 정신을 못 차려도 고작 신관인 루시아에게 근접전을 질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버프는 필디르에게 가있으니 사실상 그녀는 조금 단련한 소녀일 뿐이다.
하지만.
콰아앙!! 쩌엉!!
생각지도 못한 일격이 그대로 견습 기사의 무기를 박살 내버리며 그를 후려쳐 날려버리고 말았다.
“무……슨?!”
생각지도 못한 힘에 당황한 그가 바닥에 쓰러져 몸을 비틀었다.
계속되는 어지럼증과 매캐한 연기 때문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 정작 선배들은 방독면을 쓰고 있는 터라 그것에 거의 면역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였다.
“버프 마법을 건 것은 필디르가 아니에요. 내 몸이지.”
거대한 메이스를 한 손으로 붕붕 돌리며 다가온 그녀가 다시 발을 강하게 구르며 메이스를 휘둘렀다.
“성녀 다프네 님이시여. 제게 힘을.”
콰아아앙!!!
선배들의 계략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 * *
“크악!? 이게 대체 뭐야!”
“젠장! 도망쳐!”
본래 선배들과 충돌하고 그들이 소극적으로 나오면 그들을 버려두고 코어로 달릴 생각이었다.
자신들의 목적은 시간을 끌면 되는 것 그 과정에서 은신 능력을 지닌 우르캉이 코어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버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데이비 올 라운이나 일리나가 없으면 자신들의 상대가 절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268기 선배들은. 그들의 생각 이상으로 협력이 단단했고 치명적이었다.
하늘에서 계속해서 떨어지는 광탄은 자신들의 위치를 마치 훤히 알고 있다는 듯 정밀하게 쏟아져 내렸다.
문제는 선배들의 행동거지였다.
270기 견습 기사들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상대의 행동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고, 선배들은 필요한 장비를 이용해서 상태 이상에 저항하며 견습 기사들을 몰아넣고 강하게 휘어잡았다.
힘이 강하면 도망칠 틈도 주지 않고 짓누르던 평소와 다르게 일부러 틈을 내주거나 주변 환경을 이용하는 선배들의 행동은 마치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너희 선배들은 이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일 거다. 그런데 너희가 그런 식으로 찍어누른다면. 우린 우리대로 쓴맛을 보여주는 수밖에.”
10명에 달하는 견습 기사 과반수가 벌써 당해버렸다.
유인, 함정. 등등 별의별 수를 다 이용해 공격하는 268기 선배들의 공격에 이들은 어떻게든 반격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밀리는 피지컬은 협동과 정보로 커버치고 있다.
선배들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에 대해 온전히 꿰고 있었고, 자신들도 눈치채지 못한 공략법을 내밀었다.
문제는 그 상성이었다.
견습 기사 A를 상대하기 좋은 선배가 그들의 앞에 나타나는 식으로 말이다.
이쯤 되면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어디로 올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불리하면 바로 빠지며 후퇴하며 유인한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이 끔찍한 재앙 같은 연기는 견습 기사들을 계속해서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그 틈이 보이기가 무섭게 공격이 들어온다.
이쯤 되면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선배들. 분명 개개인의 힘은 딸리는 이도 분명 존재하는데.
왜 그런 선배들에게조차 이기지 못하는 것인가.
“왜 지는지 궁금해? 너희들이 상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야.”
거대한 물방울 속에 견습 기사를 가둬버린 샤이르 렌다가 빙그레 웃었다.
“난 너희들의 힘과 수준을 다 조사한 데에 비해 너희들은 내가 어떤 수준인지. 심지어 어떤 정령과 계약하고 있는지조차 알아보지 않았잖아?”
아직 어리기에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해서 상대를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실제로 지금도 그렇지. 정보를 얻기 힘들면 싸우면서 간을 보고 상대의 정보를 종합해야 해. 마경에선 그 하나하나가 목숨을 이어 붙여주니까. 하지만 너희는 지금도 그러지 않고 있지.”
정령사가 가지는 보편적인 특징만 기억하고 있으니. 상대가 될 턱이 있나.
샤이르 렌다는 그녀에게 식판을 끼얹었던 망할 후배인 베델을 향해 말했다.
“걱정 마. 우리들은 너희를 그렇게 쉽게 놔줄 생각이 없으니까. 몇 번이고 덤벼들게 해줄게.”
싱긋 예쁘게 웃는 그 미소에 베델은 섬뜩함마저 느끼며 손에 쥔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검에 샤이르의 물방울이 잘려나가는 일은 없었다.
“마경은 지금 이곳보다 훨씬 위험해. 이렇게 준비를 해도 당할 수 있지. 그래서 안타까워. 너희처럼 재능도 좋은 녀석들이 좀 더 조심성을 지니면 정말 대단한 기사가 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순식간에 대부분의 견습 기사들이 당해버렸다.
견습 기사들끼리의 통신은 이미 어떻게 된 것인지 막혀버렸고, 제대로 된 의사소통 교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팀원들이 그렇게 순식간에 유도당하고 무력화 당하자 가장 당황한 것은 270기 팀장인 바루스였다.
바루스는 처음부터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모의전략전 상태를 보며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선배들이 자신과 거리를 절대 주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계속되는 견제로 인해 진행속도도 느리다.
‘그래 봐야 어차피 시간 벌이일 뿐이다. 제한시간이 없는 이상 우리가 패배할 일은 없어!’
데이비 선배는 자신들에게 말했다. 한쪽이 전부 아웃되기 전까지 전략전은 계속될 거라고.
다른 말로는 시간의 제한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가 가는 길마다 쏟아지는 저 악마 같은 광탄에 맞았다간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한다. 바루스의 특질능력이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그의 힘은 저기 쏟아지는 광탄을 상대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지금까지와는 너무 다른 모의전략전이었다.
‘나를 우습게 보고 있어!!’
이렇게 된 이상 이쪽에서도 치고 나가는 수밖에.
“우르캉! 은신능력 사용하고 빨리 진입해!”
선배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앞에 얼쩡거리고 어그로를 끌거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있지만 지나치면 얼마든지 지나치면 되는 일이 아닌가.
오히려 오만한 게 누구인지 보여주마라는 심정으로 그가 다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탄환을 피해 파고든 은신 능력자인 우르캉과 바루스는 결국 코어의 위치에 도착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일대에 있는 선배는 고작해야 셋. 그 정도면 바루스의 능력으로 순식간에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데이비나 일리나가 없는 이상은.
“그래 봐야 정면 싸움에선 우리가 이길 수 있다!”
바루스의 가장 큰 자신감은 바로 능력의 차이였다.
정면으로 붙으면 절대적으로 자신이 이긴다라는 판단이 그를 지탱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진입하면 코어가 있는 영역.
선배들이 나설 수 없다.
그러니 은신 능력을 지닌 우르캉이 그곳에 진입만 한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다!
철컹!! 기이이이이이이잉!!!
그때였다.
숲 저편에서 갑작스레 무언가가 나타난다.
거대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인은 자신의 팔을 변형시키더니 이내 거대한 톱을 만들어냈고 톱날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대화수단 장착. 대화를 개시.]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골렘을 보며 바루스는 온몸이 차갑게 식는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칼같이 대기하고 매복하고 있는 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건 척 봐도 위험하다. 단순히 봤던 선배들의 전력과는 격이 다른 위험. 선배들뿐만 아니라 저런 괴물까지 상대해야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불평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어떻게든 저 골렘을 뚫고 진입을 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힘인 지진능력을 이용해 주변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균형을 잡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골렘에게 지진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마치 이런 것을 미리 대비했다는 것처럼 빠르게 접근할 뿐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마치 저 골렘은 바루스를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그의 모든 공격을 상쇄시켜버리고 위협적으로 진입해왔다.
섬뜩한 톱이 웽웽 회전하자 본능적인 두려움에 휩쓸린 바루스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기었다.
“이……이건 사기야!!”
하지만 그런 그의 말은 곧 들려오는 대답에 침묵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기라니. 선배들은 엄연히 너희들에게 정보를 제공했어. 이런게 있고 저런 게 있을 거다. 한번 대처해봐라. 하지만 자만에 빠진 너희는 그런 걸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지.”
생각지도 못한 이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반파된 나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나무 위에 걸터앉은 아름다운 금발의 소녀가 그를 내려다본다.
“이…… 일리나 선배…….”
나무 위에 걸터앉은 일리나가 예쁘게 웃자 바루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혀버렸다.
“데이비가 했던 말 기억해? 본인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고. 나 또한 그렇지. 하지만 데이비가 다루는 골렘은 조금 이야기가 달라. 그래도 나름대로 수준을 맞춰주기 위해 일부러 골렘의 능력이나 개체수를 최소화시키긴 했지만 적어도 골렘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어야 했어.”
약하다고 비웃었던 266기 선배들도 너희처럼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진 않았거든.
아니, 오히려 준비만 철저히 했다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게 설계해두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 말에 바루스의 속이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다면, 적어도 방독면도 챙기지 않고 당당하게 입장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 선배들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런 것들을 챙긴 거라 생각해?”
“이…… 이건…….”
“상대를 알아보지 않은 것은 너희 잘못이야. 그리고. 저 골렘이 어떻게 네 앞에 나타나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사실을 하나 말해주자면…….”
그녀가 차갑게 웃어 보였다.
“메가트론은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어. 너희 선배들의 너를 이곳으로 유도한 것뿐이지.”
즉. 전략전 초반부터 그냥 손도 못쓰고 놀아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
“좀 전에 재밌는 말을 하던데? 시간제한이 없으니 결국은 너희가 이긴다고.”
불안함이 엄습한다.
“미안한데 그 반대야. 시간제한이 없다는 건 너희에게 엄청난 압박을 주게 될거야.”
그 말에 바루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그래도 결국은 우리가 승리할 겁니다. 선배들도 저희를 너무 쉽게 보셨네요.”
바루스의 말에 일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신 능력자인 우르캉?”
곧바로 우르캉을 언급하는 일리나의 물음에 바루스는 온몸을 움찔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보가 무섭다는 걸 방금 깨달았는데 한 마디 한 마디 조심해야 했다.
“그래 들어가긴 했지? 그런데 그거 알아? 우르캉 그 아이를 제외하고도 네 동기 다섯이 더 진입했어. 코어의 영역에.”
우르캉 하나로도 충분한데 다섯이라! 결국, 선배들의 허를 찌르고 진입하는 데 성공했구나!
그렇다면! 코어를 건드리기만 한다면!
바루스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잠깐만, 이상한데.’
잠깐. 다섯 이상이 진입하게 그냥 뒀다고? 지금까지 자신들을 농락한 선배들이?
심지어 눈앞의 일리나는 그걸 알면서도 너무 여유로웠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곧 일리나의 말에 해소될 수 있었다.
“아마 금방 다시 도망쳐 나올걸? 나도 저 안에 있는 것들은 좀 상대하기 싫더라…….”
그 말에 바루스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 * *
같은 시각. 선배들의 생각지도 못한 함정과 유인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견습 기사들은 우연찮게 보인 틈을 역 이용해 코어가 있는 지역에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아쉬워하는 선배들을 향해 비웃음을 던져주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선배들은 그리 아쉬워하면서도 딱히 미련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금방 다시 볼 거라 말하는 것처럼.
물론 그 틈을 타 이곳에 진입한 것은 다른 견습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수는 무려 다섯.
생각보다 많이 남았다.
“원래라면 우르캉이 벌써 모의전을 끝냈어야 했어. 그런데 이 자식 어디서 뭘 하는 거야.”
한 견습 기사의 말에 다른 견습 기사가 인상을 찡그린 채 걸어가다 눈을 크게 떴다.
“찾았다. 우르캉.”
소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 나무 옹이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소년이 몸을 웅크린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팀장인 바루스가 시간을 끄는 사이 은신 능력을 사용해 먼저 코어영역에 진입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코어를 건드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몸을 웅크리고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우르캉! 무슨 일이야!”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것처럼 계속해서 웅얼거리는 그 행동에 우르캉을 제외한 다섯 견습 기사들은 짜증을 내며 진입했다.
“뭐가 걱정이야 고작 셋이야 금방 처리하고…….”
“그런데 말이야. 우리…… 다른 선배들 이미 다 보지 않았어? 그럼 대체 누가 코어를 지키고 있는 거야?”
그 물음에 모두가 침묵했다.
듣고 보니 이상했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정보활동을 너무 안일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주는 말에만 집중하여 전혀 다른 요소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저거…… 뭐야?”
그때 한 소녀가 질려버린 표정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가 가리킨 곳을 향했을 때 그들 모두 볼 수 있었다.
새파란 빛을 내뿜는 코어.
그리고 그 코어의 앞에 일렬로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의자.
“저게…… 뭐야…….”
세 개의 의자엔 각기 다른 존재들이 하나씩 앉아 있었다.
마치 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문장처럼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크기는 대략 2미터에서 3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크기를 지닌 그것들은 나란히 의자에 앉은 채 다리 한쪽을 꼰 채 어마어마한 위압을 내뿜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 정말 터져버릴 것 같은 근육질의 토끼와. 별을 머금은듯한 거대한 미노타우로스.
그리고 가시 달린 방망이를 바닥에 지팡이처럼 지지시킨 채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넝마를 걸친 뿔 달린 괴물까지.
주변에만 가도 어마어마한 습기와 압박감이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기분이었다.
그 누구도 저들을 상대로 진입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데이비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던 말에만 집중한 탓에 다른 것을 전혀 보지 못했던 270기 견습 기사들은 아직 몰랐다.
이 끔찍한 악몽이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말이다.
가만히 있던 세 괴물 중 새하얀 토끼가 빨간색의 콩알 같은 눈을 반짝인다. 자신들을 보고 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더욱 두려움이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