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9화
[약속 하나만 해줄래요 하레스?]
[제발.]
쓰디쓴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침대에 누운 여성이 슬프게 웃는다.
복부에 큰 상처를 입은 채 죽어가는 그녀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아이의 기억을 지워주세요. 이 일은 사고일 뿐이에요. 그리고, 그 원인은 내게 있어요. 그러니 절대. 그 아이를 탓하지 말아줘요.]
[죽어서도 당신과 페르세르크를 잊지 않을 거예요. 안녕. 내 사랑.]
부스럭.
“끄응……머리가 아프구만.”
검신 하레스는 부스스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정신을 차렸다.
정말 오랜만에 꾼 꿈이었다.
그래. 잊고 싶어도 쉬이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다.
그에게 있어서 페르세르크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너무도 소중한 딸이었고, 그녀의 일로 인해 죽은 부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갈 곳을 잃은 분노를 페르세르크에게 풀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그는 극도의 자괴감에 빠져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당장 페르세르크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소중한 딸아이에게 그럴 수 없다는 마음가짐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 무엇보다 검신 하레스가 페르세르크를 보듬어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일로 가장 괴로워하고 가장 고통스러워하며 가장 슬퍼하고 절망한 것은 하레스도, 죽은 그의 부인도 아닌 페르세르크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그녀의 손에 죽은 생명의 수는 무려 20명. 마왕으로서 전쟁을 일으킨 전적이 있는 그녀에게 사실 20명이라 해봐야 그리 많은 수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페르세르크에게 소중한 이들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피 한 방울 섞이진 않았지만 가장 소중했던 가족을 본인의 손으로 죽인 그녀의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그녀의 상태는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고, 급기야 그에 관련한 모든 요소에서 극도의 트라우마를 일으켰다.
점점 피폐해져 가던 그녀는 끝내 자괴감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자결을 시도했다가 하레스에게 저지당하기도 했다.
일의 발단 자체는 간단했다.
심연의 힘이 깃들어있던 페르세르크는 그 당시 너무 어렸다.
그런 그녀의 몸을 검진해주던 하레스의 부인이 처음 보는 어떤 힘의 응집체였던 심연의 핵을 건드리는 결과를 낳았고. 그 결과
대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안에 억눌려있던 것들이 폭주해버린 것이다.
참 간단하면서 허무한 전말이었다.
당시의 페르세르크는 어린 육신으로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미쳐버렸고, 폭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버린 하레스의 부인은 그녀가 더는 중요한 사람을 학살하지 못하도록 제 목숨을 바쳐 막아냈다.
“참 씁쓸한 일이구만. 세상을 구하고 영웅 딱지를 달면 뭣허나. 가족 하나 지키지 못한 것을.”
천천히 고개를 든 하레스는 눈앞에 다가온 사내를 바라보았다.
“왔수?”
“꼴을 보니 고민이 많은 모양이군.”
“그럴 수밖에.”
하레스는 천마 독고준이 건네준 신상 독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형씨. 당신도 자식과의 불화가 있었지 않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흥. 그딴 걸 내가 알 리가 있나…….”
“그래. 형씨가 그 답을 알았으면 그렇게 고민하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살아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 이미 죽고 난 후면 후회해도 늦을 테니.”
독고준의 말을 부정할 순 없었다.
그의 자식은 죽었지만. 검신 하레스의 자식인 페르세르크는 살아있으니까.
“그때 당시엔 부인을 잃은 슬픔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사실 가장 괴로웠던 건 내가 아니었지.”
“그래, 가장 힘든 건 그것을 기억하는 본인이지. 한 둘도 아니고.”
그 일 이후로 페르세르크는 눈에 띄게 망가졌고 검신 하레스는 끝내 그녀마저 잃을 수 없다는 이유로 백방으로 실력 좋은 마법사들을 수소문해 결국 페르세르크의 기억을 봉인했다.
어떤 여파에도 부서지지 않고, 단순히 디스펠이나 마법이 저항받는 공간에서도 그 기억만큼은 다시 수면으로 떠 오르지 않게 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마법 재료와 술식을 사용했다.
비록 그가 영웅이라 불리기 전의 일이지만 그 전에도 그는 제법 유명한 존재였으니까.
영웅의 회랑에 있는 모든 이들은 크고 작게 모두 미련을 지니고 있다.
검신 하레스의 친구 천일야장 수르트는 자신이 완성하지 못한 검, 청단이와 홍단이. 그리고 아직 보지 못한 단조의 극의를 보고 싶었다는 나름대로 미련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검신 하레스에게 있어서의 미련은.
사랑하는 딸이 슬픈 삶을 살다가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그녀가 데이비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 시점에서 미련은 거의 해소 되었지만, 아직 페르세르크가 잊어버린 그 기억만큼은 그의 고민거리로 남아있다.
“세상에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은 여인이 어디 있을까.”
모성이라는 것은 본능인 것을.
“그때 만든 기억봉인은 극도로 복잡하고 단단했지. 결국, 그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이지만.”
그 어떤 디스펠 마법으로도 함부로 풀 수 없게 걸어둔 소거 마법, 거기에 페르세르크가 지니고 있던 심연의 힘까지 뒤섞여서 본래의 것보다 훨씬 복잡한 마법이 되었다. 심연의 힘이 사라졌다 해도 심연의 힘에 영향을 받아 뒤틀린 마법은 그것이 유일했다.
그리고, 그런 유일한 특수마법에는 한가지 약점이 나타났다.
검신 하레스의 생전에는 알지 못했던 부작용.
바로 페르세르크의 뱃속에 또 하나의 생명이 자리를 잡을 경우였다.
“처음 그 사실을 오딘과 로아이아스에게 들었을 땐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지. 그래도 그 아이가 육신이 없고, 데이비 그놈이 육신을 만들었을 때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소.”
그때 당시엔 그것이 최선이었다.
“지금이라도 그 기억을 다시 손보는 건?”
“마법의 구조가 조금 독특하다더군. 지우는 거야 데이비 그놈도 할 수 있지만…… 오랜 시간 억눌려온 그 극심한 트라우마와 슬픔이 일순간에 해방되면…….”
페르세르크의 정신이 온전할지 장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상처가 아무는 게 아니라 강제로 진통제를 먹여놓은 꼴이니까.
단순히 안타까운 사고였을 뿐인데. 그 사고로 인해 그녀가 평생을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게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쯧쯧.”
천마 독고준은 그런 그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고는 물러날 뿐이었다.
그렇게 대화를 하던 참이었다.
갑작스레 균열이 열리며 그 안에서 피곤한 표정의 데이비가 걸어 나왔다.
“왔냐.”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오는 데이비를 보며 하레스가 씁쓸하게 말했다.
“페르세르크는?”
“울다가 지쳐 잠들었습니다. 아예 포기하는 게 아니라 잠시만 텀을 두자고 겨우 달랬어요.”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을 듣기가 무섭게 오늘 밤은 기대하라며 평소 잘 하지도 않던 애교를 부리던 그녀의 모습이 선했는지 데이비가 이를 빠득 소리 나게 깨물었다.
표정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네요. 그렇게 우는 건.”
그의 분노가 여지없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렵게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복잡한 일이 발목을 잡은 꼴이다.
“그러게 검증도 안 된 마법을 무더기로 덮어씌우는 미친 새끼의 말을 왜 들은 겁니까.”
“그때 당시엔 그게 최선이었다. 페르세르크의 트라우마는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뒤틀려 있었어.”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최악의 난제. 그것이 현재 그녀의 상태였다.
“x발 그딴 게 있었으면 진작 말을 해줬어야지! 아빠라는 양반이 그런 게 있다고 말도 안 해주고 뭐하는 짓입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다. 본래 네가 하려 했던 짓은 성공확률이 5퍼센트도 채 되지 않아. 그래서 나는 차라리 아무도 모른 채로 실패하길 바랐다.”
누구에게든 사실을 말하는 순간 절대적인 비밀이 사라지는 꼴이니까. 회랑의 영웅들과 다르게 산 자들에게 그 사실을 토로할 순 없는 입장이었다.
본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이에게조차 언급할 수 없었다.
성공확률 5퍼센트. 반대로 말하면 95퍼센트 확률로 실패한다는 소리였다.
“다프네의 클론인 페르세포나는 그보다 낮은 확률을 뚫고 정화에 성공했습니다.”
“그게 이상한 거다. 본래엔 불가능해.”
생기의 구슬을 통해 페르세르크가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만드는 시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성공확률은 극도로 희박했다. 금기를 어기지 않고 자연스레 생명의 탄생을 유도한 꼴이니까.
이미 죽어 혼만 남은 그녀에게 육신을 주고, 그것도 모자라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축복이 깃들게 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과 무엇이 다를까.
“아니 그런데. 대체 그 마법을 만든 게 누굽니까.”
데이비의 물음에 하레스는 턱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부인이 오래전 알고 지내던 어떤 마법사였다. 듣기로는 5서클 마법사라곤 했지만 지금 보면 그 수준은 절대 아닌 게 분명하네.”
아무리 심연의 힘이 뒤섞여 돌연변이 마법이 되었다고 해도 마법사의 신이라 불리는 오딘조차 완벽하게 조정하지 못할 정도의 마법이 고작 5서클일 리가 없다.
데이비가 고민하듯 침음성을 흘린다. 실제로 한번 확인해봤기에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한번 보긴 했는데. 이거, 그냥 마법사 작품이 아니에요.”
“그 정도냐?”
“맞아. 저놈이 본 게 정확해.”
그때였다.
두 사람이 난입하며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데스 로드 로 아이아스와 마법사의 신이라 불리는 대마법사 오딘.
두 사람은 데이비와 하레스를 번갈아 보고는 말했다.
“솔직히 말할게. 이건 마법의 영역이 아니야.”
“정확히는 기적의 영역이죠.”
기적.
다프네의 신성 마법 중에도 기적류가 있긴 하지만. 그것과 지금 두 사람이 말하는 건 엄연히 방향성이 틀렸다.
“하레스. 당신이 마법을 부탁했던 그 사람. 특징을 말해줄 수 있나요?”
“특징이라고 할 게 있나. 평범했어. 어디서나 볼법하지만, 실력은 제법 있는 마법사.”
“그 외에는요?”
“딱히 내세울 만한 건 없군. 여행을 자주 다니던 이라고 들었는데.”
어깨를 으쓱이는 그를 보며 로 아이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의 몸에 각인된 봉인 마법. 심연의 힘이 뒤섞이면서 돌연변이가 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
실제로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복잡하게 꼬여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고.
강제로 지우라면 지울 방법은 두 가지나 존재하지만 두 방법 모두 페르세르크의 트라우마가 아주 잠깐이나마 깨어날 수밖에 없다.
트라우마가 깨어난 기억까지 삭제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 상태에 대해 조사해본 오딘의 말에 따르면 이건 트라우마의 수준을 넘어 그녀의 영혼을 아주 짧은 시간에 붕괴시켜버릴 정도로 지독하다는 뜻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봉인을 풀지 않고 그 구조를 조정하는 것이죠. 실제로 마법을 걸 당시의 구조만 확인할 수 있다면 데이비도 해결할 수 있어요, 그래서 확인해봤는데…….”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건 단순히 인간이 만들 수 있는 범주를 넘었어요.”
“나는 마법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데 쉽게 설명해줄 수 있나?”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적류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단 하나. 오랜시간동안 단 한 명밖에 없어요.”
자애의 여신이자. 주신이며, 태초의 의지.
프리아 여신.
“그녀가…….”
“일단은 그렇게 추측하고는 있는데…….”
“아니 잠깐만요. 그럼 프리아 여신이 지금 중간계에 강신해서 그 봉인마법을 걸어줬다. 뭐 이겁니까?”
데이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왜요? 무슨 이유로?”
태초신인 프리아 여신이 그렇게 강신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페르세르크의 기억을 봉인시켜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건 직접 과거로 가서 그 사실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자세한 이유는 몰라. 하지만 프리아 여신이 아니면 이건 설명할 수 없어. 뭐 프리아 여신이 아니라 너처럼 별종 같은 존재가 있었다고 생각해봐도 이건 도가 지나쳤어.”
“당장 지구에 있는 넬타리드 신도 이런 기적류의 마법을 만들어내진 못할 거에요.”
회랑의 영웅들 전원이 달려들어도 아무런 부작용 없이 페르세르크의 기억을 조정하는 게 불가능하다.
완벽한 기억봉인이긴 하지만 반대로 너무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독고준이 열반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툭 던지듯 말했다.
“어쩌면 말이다. 그 여신이 널 부르는 게 아닐까? 그때 그 시간대로 말이다. 사실상 그 마법을 조율하기 위해선 초기 단계의 마법 구조를 직접 봐야 하니까.”
그 한마디에 데이비가 헛소리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하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 건 알죠? 그 여신, 최근의 일도 예견 못 했는데 3천 년 전에 지금의 상황을 예견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화아아아아아악!!!
그때였다.
새하얀 빛이 주변 전체를 감쌌고. 데이비의 의식이 마치 유체이탈이 된 것처럼 밀려난다.
“여신의 신력…… 빙고였네.”
그리고, 흐릿하게 오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화세요.
잠시 정신이 이탈했다가 돌아오는 데엔 꽤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벌레 우는 소리와. 시원한 밤바람이 뺨을 때렸다.
소름 돋을 정도로 실감 나는 이 현상에 멍하니 있기를 잠시.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반드시 나를 찾아.]
프리아 여신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생기가 넘치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프리아 여신 본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내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듯한 손의 감촉과 함께 다시 정신이 본래의 육신으로 돌아왔다.
“뭘 보고 왔냐.”
오딘이 내 다리를 툭툭 걷어차며 물었다.
“프리아 여신, 그녀의 목소리.”
나는 멍하니 답했다.
“결국, 맞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