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064화 (1,064/1,559)

제1064화

프리아 여신에게 내가 마냥 좋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그녀와 많은 충돌을 일으켰고, 한때엔 정말로 화가나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생각까지 품었으니까.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라는 게 묘하다.

다른 이가 그녀에게 못된 생각을 품는 꼴을 보고 있으니 마치 가족을 욕하는 걸 눈앞에서 보는 그런 묘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녀에게 엄한 손을 들이밀려고 했던 기사를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이 일대 전체에 메테오를 떨어뜨려 버릴 뻔한 것을 겨우 참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넌 아니지 개자식아.”

나는 이미 잿더미가 되어버린 기사를 짓밟았다.

프리아 여신의 치마에 손을 뻗었던 놈이었다.

그녀는 모험가답지 않게 참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만한 건 사실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콰직!! 콰직!!

프리아 여신을 구속하고 있던 모든 구속구들을 부숴버린 나는 프로메테우스 마법에 불타 잿더미가 되어버린 간수장과 기사들을 보았다.

마스터급 존재도 있고 그 외에도 다수의 강자인 그들이었지만 베르샤의 저주를 이용해 저항력을 깎고 8서클 고위마법으로 지져버리면 아무리 마스터급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쓰러진 이들을 뒤로한 채 나는 제 손목을 문지르며 천천히 일어나는 이 엉뚱한 주신님에게 말했다.

“내가 손을 대지 않았으면 말입니다.”

쾅!! 콰창!!

곧이어 폭음을 들었는지 누군가가 급히 내려오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에 나는 아공간에서 작은 고양이 가면을 꺼내 얼굴에 쓰며 말했다.

“당신은…… 죽는다고 했지요. 설마 저 빌어먹을 놈들이 당신을 겁탈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내 내 걱정이 기우라고 말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로 그녀가 살해당한다는 뜻이리라.

결과적으로 그녀는 살았다.

“고던?!”

“고던이 어떻게?! 저……저놈이다!”

“저놈이 고던을!”

다수의 마스터급 기척이 느껴진다.

그 수는 무려 셋. 생각 이상으로 전력이 너무 강하다.

“라운 왕국에선 소드마스터급만 고작 셋이었는데 말이야.”

그 대단한 린디스 제국도 마스터 비율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다.

“뭐. 절반은 도핑 같지만.”

그렇게 말한 나는 무기를 뽑아 들고 내게 접근하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재상의 저택 아래에 이런게 있는데, 정작 재상이 몰랐다고 하진 않겠지.”

“정체를 밝혀라! 설마 네놈도 저항군이냐?!”

나를 그 반란을 일으킨 저항군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질문에 나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하나만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내 말에 그들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닥쳐라! 내 질문에…….”

“질문은.”

그들의 말을 끊은 내가 붉은 눈동자를 일렁였다.

그제야 그들은 내 몸에서 마나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고던이 죽은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는지 침묵했다.

“내가 한다. 너희들은 대답만 하면 돼. 알아들었나?”

“네……네놈 대체 정체가…….”

퍼엉!!!

무형의 공기탄이 내게 정체를 묻던 기사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이에 남은 이들의 표정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반응할 새도 없이 동료 중 하나가 살해당했으니 겁을 먹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그중에 분노에 휩쓸린 이도 있지만.

“베슬린!! 이 자식이!!!”

쾅!!!

또 한차례 굉음이 울려 퍼지며 내게 덤벼들었던 사내가 무너진다.

나를 향해 휘두른 그의 검은 권강 이상의 경지에 있는 강기를 두른 내 주먹에 완전히 조각나버렸고 그대로 놈의 목을 마치 뱀처럼 파고들어 낚아채 처박아버린 것이다.

일방적인 힘의 격차에 그들은 침묵했다.

더는 덤비는 이는 없었다.

“저위에 저택에 있는 사용인들은 이곳을 알고 있나?”

내 물음에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압도적인 투기를 섞어 내보내자 그들의 얼굴에 공포가 더욱 짙어졌다.

“묻잖아.”

“아……알고 있소.”

그래.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이 저택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면 될 테니까.

내 기세가 변하자 그들 중 하나가 넋이 나간 것처럼 말했다.

“대체 저항군에 어떻게 저런 괴물이…….”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저항군인지 뭔지가 아니야. 여행자지.”

내 대답에 그들의 얼굴에 얼이 빠졌다.

“저……저항군이 아니라고?”

“너희가 납치한 이분이 누군지는 알고 데려온 거냐?”

내 물음에 그들의 시선이 그제야 프리아 여신에게로 향했다.

고작해야 5서클 마법사 수준의 마나가 느껴지는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여성.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가 생각해보지만 그들의 상상력으로는 그녀의 정체를 꿰는 건 불가능했다.

“그……그 여인이 누구기…….”

퍼어엉!!

또 한 명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바짝 얼어붙은 그들을 향해 다가간 내가 천천히 손에 기검을 만들어냈다.

기검의 밀도를 보고 기겁한 그들이 한발 물러났지만 도망치기엔 이미 늦은 후였다.

“모르면 맞아야지.”

“끄아아아악!”

“끄아아악!!”

이후 감옥 내에선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격하게 울려 퍼졌다.

이후 모두가 쓰러진 직후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천장을 박살 내버렸고 작은 광탄을 쏘아 올렸다.

슈슈슉!! 쩌억!!

그리고, 그렇게 쏘아져 올라간 광탄은 이내 맹렬하게 회전하며 초고열의 열기를 품기 시작했고.

이내 운석이 떨어지는 것처럼 저택 전체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쾅!!! 쾅!!

비명과 저택이 무너지는 소리, 무언가가 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악마와 그 악마에 가담한 인간들.

사실 이들이 어떤 인간이건 상관없지만, 이들이 프리아 여신을 건드린 이상 관련된 놈들은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 불태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위쪽의 저택이 무너지자 지하의 감옥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에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 감옥 속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재상에게 저항했거나. 그의 눈에 띄거나 해서 끌려온 피해자들.

그들을 보던 나는 문득 한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갈색 머리에 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드센 인상의 소녀였다.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네.”

기억하고 있다. 붉은 전갈인지 붉은 지네인지 하는 놈이 잡혀갈 때 그때 뒤에서 수갑을 차고 같이 끌려가던 한 명이었다.

이미 이곳의 병사와 기사들에게 엄한 짓을 당했는지 그녀의 복장은 거의 다 찢겨 있었고 몸엔 상처와 알 수 없는 흔적들이 가득했다.

고작 반나절 만에 저 몰골이 된 것이다.

“제정신 유지하고 있는 것도 용한 지경이네.”

“당신은…… 정체가 뭐죠?”

그녀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봤다는 듯 내게 물어왔다.

“알 거 없어.”

이에 나는 담담하게 말하며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프리아 여신을 안아 들었다.

“너, 아직 사지 멀쩡한 거 같은데. 저기 사람들 데리고 나가라.”

“여긴…… 지하인데요. 보아하니 위쪽도 파괴되고 있는 거 같은데…….”

“나가는 길이 왜 없어.”

그 말과 함께 기검을 휘두르자 두껍던 지하의 벽면이 모조리 날아가며 바깥으로 이어진 구멍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를 묶고 있던 금속구들이 일제히 박살 난다.

“알아서 데려나가.”

“자, 잠깐!”

나는 그런 그녀를 뒤로한 채 프리아 여신을 고쳐 안고는 가볍게 점프해 밖으로 뛰어올랐다.

“저기 프리아 여신님.”

이후 나는 내 품에 안겨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가만히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이 난리를 쳐도 미래에 변화가 없는 이유가 뭡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어떤 일이건 이 일로 거대한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라 했다.

즉, 내가 나서지 않아도 이 나라 전체를 무너뜨려 버릴 무언가가 이곳에서 벌어진다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해도 변화는 있을 텐데.

그런 내 질문에 그녀는 조용히 수첩을 내밀었다.

[마음 가는 대로.]

그것이 이끄는 결과는…….

[나를 대신해. 이곳을 징벌할 대리 존재로서.]

그 말뜻은 간단했다.

내가 하지 않았다면, 선을 넘고 신을 범하려 한 인간, 그리고 인계의 지옥을 만들어버린 이 지옥도를 보다 못한 프리아 여신이 이 나라를 지워버렸을 거라는 소리였다.

대체 얼마나 원한과 증오, 슬픔이 섞여야 태초의 신이 그 기도를 듣고 직접 강신해 징벌을 가할 정도인지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아르부트가 멸망한 이유는 당신이었네요.”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내 뺨을 가지고 놀 듯 살살 꼬집으며 수첩을 보여주었다.

[인과의 결과.]

그리고, 글귀가 다시 변한다.

[완전히 같은 미래는 존재하지 않아.]

모든 행동, 숨 쉬는 패턴 하나에 미래가 바뀌는 게 과거와 미래다.

그렇기에 내가 여기서 날뛴다고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는 건 사실 믿지 않았다.

[하지만 네가 용기를 내서 나를 구하는 건 묘한 기분이야.]

그녀의 무표정에서 처음으로 아주 옅은 미소가 걸렸다.

태초신조차 처음 느껴보는 묘하게 간질거리는 그 행동이 그녀에겐 익숙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번엔 내가 네 미래를 구원해. 나를 믿어 주겠니]

너무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 * *

거대하고 고요한 저택. 그곳에서 재상은 알몸으로 의자에 앉은 채 느긋하게 와인을 음미했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듯 침대에 널브러진 한 여인을 보고 씨익 웃어 보였다.

“마음에 드는구나. 다음에도 부를 터이니 영광으로 알 거라.”

“흑…… 흐흑…….”

슬픔에 잠긴 울음소리를 마치 음악처럼 들으며 그가 악마처럼 웃어 보였다.

침대에 널브러진 여인은 그 와중에도 정신을 놓은 듯 고요하게 침묵하는 작은 소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건 다름 아닌 그 여인의 딸이었다.

악마.

더는 달리 말할 것이 없는 악마 그 자체였다.

재상의 얼굴은 겉보기엔 굉장히 친절하고 멋진 귀족의 표상이었지만 그의 실체는 너무도 끔찍한 악마 그 자체였다.

“재상 각하. 마음에 드셨습니까.”

“그래.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지구였다면 당장 미친놈 소리를 들을 자였지만, 아니 티오니스의 악질 귀족들도 이건 아니다 라며 고개를 내저을 정도의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였지만.

그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그는 곧 신이며, 법이었으니까.

아르부트 왕국의 국왕? 어차피 재상의 앞에선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실질적인 지배자는 재상. 바로 그였다.

“그나저나 내가 데려오라 시킨 그 여인은 어찌 되었느냐?”

“예. 벌써 저택의 지하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이곳의 일을 마치시고 돌아가시면 언제든지 품에 안으실 수 있도록 준비하라 일러두었습니다.”

기사의 말에 재상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재상 각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한 심부름꾼이 급히 뛰어들어와 엎드린다.

“저……저택이…… 저택이 습격당했습니다!!”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던 재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봐.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제……제대로 들으셨습니다. 현재 저택에…….”

“지하는.”

그가 험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하는 어떻게 됐지?”

“지……지하를 지키던 기사와 마스터급 강자인 고던 경을 포함한 다수의 가디언들이 모두…….”

그 말에 재상의 눈이 살짝 크게 뜨여졌다.

“살해당했습니다.”

마스터급 존재가 총 다섯이었다. 그런 강자들이 있는데 대놓고 그곳을 습격해 모조리 박살 냈다?

“범인은. 범인은 그놈들인가?”

“그것이…….”

스릉!! 서걱!!

순식간에 기사의 허리춤에 있던 롱소드가 뽑혀 나와 심부름꾼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그것을 실행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재상이었다.

“그를 불러와라. 그리고, 처단부대 수장들을 모조리 불러.”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누군가의 구둣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어머나. 참 천박한 짓을 하시네요. 각하.”

“닥쳐라.”

싸늘하게 일갈한 재상은 곧 들어온 여인을 바라보았다.

고혹적인 의상을 입고 있는 여인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만큼 가시가 있는 꽃이라는 느낌이 드는 여인이었다.

“그와 다른 수장들을 부를 필요 없답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하니까요.”

그녀의 미소에 재상이 험악하게 말했다.

“반드시 살려서 잡아 와라. 반드시! 감히 이곳에서 내게 대적하는 존재는 그냥 둘 수 없다.”

누굴 건드렸는지 알게 해준다며 재상이 섬뜩하게 웃어 보였다.

* * *

재상을 뒤로한 채 파괴된 저택으로 찾아온 여인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공작급 뱀파이어. 그중에서도 상위 존재인 그녀에게 이 세상은 너무도 미약했으니 말이다.

“자. 그럼 그를 어떻게 찾아낼까.”

이 정도 파괴 흔적은 저항군 따위가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들은 장난감일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곧 파괴된 지하에서 잿더미가 된 시체들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피의 기억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후 그녀는 마치 무언가를 찾은 것처럼 피처럼 흩어졌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어떤 두 사람이 있는 조용한 숲속이었다.

* * *

프리아 여신을 데리고 저택을 빠져나온 나는 본래 대로라면 곧바로 왕성으로 찾아가려 했다.

하지만 프리아 여신이 갑자기 나를 붙잡고 무언가를 요구했다.

[개울가로 가. 그곳에서 물장난을 치고 싶어.]

애도 아니고.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바를 거부할 입장은 아니었다.

“내가 의심이 많은 겁니까? 지금 하지 말라는 말로 들리는데요.”

내 말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두 시간 정도야.

그리고는 아르부트의 외벽에 있는 호숫가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녀를 물가에 있는 낮은 바위에 앉혀주자 그녀는 새하얀 맨발을 찰랑거리며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물고기를 잡아줘.]

“……아니 이 양반아.”

[맨손으로.]

뻔뻔한 요구에 이마에 실핏줄이 돋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요구에 응해주었다.

그리고는 바지를 살짝 걷어붙인 후 얕은 물가로 걸어 들어갔다.

곪을 대로 곪은 인계의 지옥인데도 겉보기엔 참 아름다운 곳이다.

나는 맨손으로 유유히 떠다니는 물고기들을 낚아채기 시작했다.

밤이라 어둡지만 호수바닥엔 푸르게 빛나는 발광석들로 인해 굉장히 밝았다.

첨벙!! 첨벙!!!

한 마리, 두 마리.

그렇게 낚아 뭍으로 쳐올린 물고기 중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듯 흔들어주자 그녀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고는 말없이 손을 뻗어 쓸어내렸다.

마치 인간의 아기를 다루듯 말이다.

먹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 건가 싶었지만 그녀가 바라는 대로 몇 마리를 더 낚아채기 시작했다.

저택에선 난리가 났지만, 그 범인이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하겠는가.

느긋하게 손 낚시를 하던 찰나였다.

그녀가 물고기를 놓아주더니 내게 무언가를 써 보였다.

[흔들리기 시작했어.]

그 한마디와 함께 누군가의 접근이 느껴졌다.

“후우…… 후우…… 여기 있었네요.”

이곳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저택의 지하에서 구해주었던 갈색 머리의 소녀였다.

“몸 상태가 엉망인데 그렇게 달리다니. 평생 다리 절고 싶어 환장했지?”

“그건 됐어요! 당신 덕분에 탈출을 했으니까!”

“척 봐도 수 시간 동안 학대를 당했을 텐데 그렇게 무리하게 움직이면 다시는 회복 못 한다. 의사 소견 무시하지 마. 그러다가 잘못하면 너 결혼생활 못 해. 평생 불임으로 살고 싶어?”

그녀의 상태는 심각했었다. 보통 소녀라면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학대를 당했으니까.

무수한 구타 흔적. 그리고 거칠게 능욕당한 탓에 그녀의 몸은 회복마법을 걸어주어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고위 회복마법까지 걸어준다면야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때 당신엔 그러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곁으로 10대 후반. 20대 30대 등등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나타났다.

“뭐하는 짓?”

“당신이 그 저택을 습격한 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재상이 괴물을 풀 거야. 그들 중 하나만 나타나도 절대 이기지 못해. 그들은 불사자들이니까.”

“불사자라…….”

“상식 밖의 괴물이다. 그들은 아르부트 왕국이 대륙 전체적으로 위용을 떨치게 만든 존재들이다. 단 한 명만으로도 대륙의 그랜드마스터조차 이기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랜드마스터.

검신 하레스를 말하는 것이다. 이 당시의 그는 확실히 검신이라 불리기엔 무리가 있긴 했다.

그 말에 나는 침묵을 지켰다.

“우리를 따라와. 당신 덕분에 엘드나를 구할 수 있었으니 그 은혜를 갚겠어.”

한 사내가 다가왔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들이 찾을 수 없는 은신처가 있어. 그곳으로 따라와. 일단 우리가 너를 지켜주겠다.”

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건지.

“그의 말이 맞아요. 그 괴물 중 하나만 해도 대륙의 그랜드마스터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그때였다.

“어머나. 그러면 쓰니?”

갑작스런 누군가의 난입에 저항군 소속 인간들이 일제히 흠칫 놀라며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젠장! 벌써!”

“경계태세!! 긴장을 놓지 마라!!”

“그러지 말렴. 아가들아. 너희들이 날뛰어봐야 날파리일 뿐인걸.”

동시에 호수 일부분이 붉어지며 핏방울이 되고 그 위로 고혹적인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뱀파이어. 실시…….”

“내 이름도 아는 거야? 그거 영광인데?”

일방적인 강자의 입장으로 나타난 실시라 불린 뱀파이어는 느긋하게 걸어 다가왔다.

“엘드나! 그들을 데리고 도망쳐라! 그는 여기서 죽어선 안 된다!”

이윽고 30대의 한 남성이 검을 뽑아 들고 격하게 소리쳤고 엘드나라 불린 갈색 머리 소녀는 급히 내 팔을 잡아당겼다.

“따라와요. 어서!”

“누구 마음대로 여길 벗어나겠다는 거니? 미안하지만 그는 우리 계약자가 필요로 하니 데려가야겠단다.”

“누구 마음대로!!!”

선공은 30대 남성이었다.

그가 맹렬하게 실시에게 덤벼들어 마스터의 상징인 오러 블레이드가 서린 검을 휘둘렀다.

매서운 공격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흰 손으로 그 검을 잡아버렸다.

동시에 오러 블레이드가 증발한다.

“이…… 이 괴물이?!”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붉은 핏방울 같은 것이 서서히 그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던 그가 포박당한 채 소리 질렀다.

“전원 공격!! 엘드나! 반드시 그를 데리고 도망쳐라!! 절대 이년에게 잡히게 두지 마!!”

그의 필사적인 외침에 엘드나가 급히 내 팔을 잡아당기려던 그 순간이었다.

촤자자자작!!

붉은 창 같은 것들이 일제히 저항군의 몸을 포박하듯 묶어버렸다.

일제히 순식간에 제압당한 것이다.

“벌레는 벌레답게 굴어야지. 안 그러니 아가야?”

“안돼…… 이럴 순…… 없어…….”

압도적인 힘의 격차에 절망하는 저항군을 무시한 채 뱀파이어 실시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저항군의 보호는 더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했는지 그녀의 표정은 더욱 황홀함이 묻어났다.

“넌 덤비지 않을 거니 아가야?”

그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누구보고 자꾸 아가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뱀파이어가.”

그 말과 함께.

철썩!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물고기 하나를 그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지금 주신님 어리광 들어주느라 바빠, 꺼져. 지금 가면 당장은 살려줄 테니까.”

내 한마디에 주변이 싸늘하게 식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