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6화
불에 탄 잿더미가 흩날리듯 회색빛의 재가 주변을 감쌌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것은 뱀파이어 실시의 죽음을 의미했다.
애초에 태생부터 지닌 알량한 자신의 힘과 불사만 믿고 대비를 하지 않은 자기 잘못이니 누구 탓을 하겠느냐마는.
“적어도 심연의 공주가 더 귀찮았겠네.”
힘의 격차부터가 다르다.
아무리 힘의 평균 수준이 미래보다 높은 지금이라 해도 아직 긴 종족 전쟁이 발발한 게 아니기에 평균적으로 높을 뿐 압도적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 고위 뱀파이어라면 마냥 무시할 수준은 아닌 게 분명했다.
아르부트 왕국의 재상. 그의 수족. 뱀파이어 하나뿐만 아니라 그녀와 비슷한 존재가 두엇 정도 더 있다면 사실상 거의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절대 권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잿더미가 되어 흩날리는 실시의 흔적을 멍하니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다가간 나는 가볍게 신성력을 끌어올려 그들을 치료했다.
고위 치료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상처가…….”
“너…… 신관이었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만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몸에 어떤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쟤 대체 정체가 뭐야?”
수군거리는 저항군 세력의 말을 무시한 채 나는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저들과 함께.]
그녀는 내 미래를 지켜주겠다고 말했다. 즉, 앞으로 수많은 변수가 창출될 텐데, 그 과정의 변수를 그녀가 잡아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이 이렇게 한 명을 편애하는 게 가능한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확실히 내가 알던 프리아 여신과는 조금 다르게 인간미가 넘쳤다.
무표정한 얼굴에 말도 수첩에 적어 보이는 그녀인 만큼 사실 인간미가 있는 게 맞냐 물어도 할 말은 없지만 본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것도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나한테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당신…… 대체 정체가 뭐죠?”
나를 향해 조용히 묻는 엘드나의 질문에 조용히 생각했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사람.”
* * *
전혀 예상치 못한 처단부대 대장 중 한 명의 죽음.
저항군은 아직도 그 사실이 쉬이 믿기지가 않는 듯 보였다.
그 때문일까.
저항군 측에선 착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실시 그 괴물은 그렇게 쉽게 죽을 존재가 아니야. 내가 보기에 그녀는 아마 아직 살아있을 거다.”
응, 죽었어.
“머리도 좋은 년이지. 그렇다면 이 상황을 유도해서 우리가 빈틈을 보이게 유도하는 게 아닐까?”
죽었다고.
프리아 여신의 의도대로 나는 일단 저항군을 따라 이동했다.
현재 내가 이 세상에서 가하는 모든 행동 하나에 미래가 바뀐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기 위해선 프리아 여신을 믿는 방법 말곤 없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어.]
“한번 시작한 일 끝은 봐야죠. 그리고, 그놈이 아직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그냥 돌아가라고?”
애초에 그녀의 말은 틀린 말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그곳에서 살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신벌이 떨어지지 않는 거 아닙니까?”
아르부트 왕국이 신벌을 받지 않고 버텼을 때. 티오니스의 미래가 얼마나 비틀릴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페르세르크가 없을 수도 있고 팔란 제국이나 린디스 제국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라운 왕국이 없을 수도 있겠네.
[네가 선택한 길.]
“아니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일을 쳤으면 매듭을 지어야 한다.
다행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럼 이제 기다리면 됩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름한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때 가만히 있던 그녀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내 팔을 잡아당겨 침대에 뉘고는 제 무릎에 내 머리를 올려놓고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이거 불륜이라니까요.”
[이곳에서는 괜찮아.]
보는 사람 없으니까?
“내가 안 괜찮은데요.”
내 말에 그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듣지 않겠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래서, 언제부터 날뛰면 됩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구하고 싶냐라고 물었던 거네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후 나를 찾아온 엘드나의 안내를 받아 다른 방에 들어서자 다수 남녀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향한다.
동시에 알 수 없는 압박감이 전해져 왔다.
“경고하는데. 내 뒤에 있는 분을 생각해서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하면 왕국이고 나발이고 후회하게 될거다.”
내 말에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있던 사내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제법이군……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데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니.”
“말했잖아요. 실시를 압도했다니까?!”
엘드나의 외침에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선 우리 동지를 구해준 점에 대해 감사를 표해야겠군. 나는 현재 저항군의 대리 사령관인 말톤이오.”
“데…… 아니. 현수다.”
“현수? 서대륙 유목민족인가?”
“편한 대로 생각해.”
그렇게 말한 나는 직사각형 테이블의 반대편에 의자를 폈다.
그리고는 나를 따라온 프리아 여신의 팔을 잡아 앉혔다.
“그 여인은 누구지? 애인인가?”
“내 상사.”
내 대답에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반대로 프리아 여신은 뭔가 만족스러운지 어깨가 살짝 펴진다.
“상사라니…… 어딘가에 소속된 건가?”
“어떤 의미로는 그렇네.”
“어느 왕국?”
“티오니스.”
내 한마디에 말톤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 생각했는지 킥킥 웃어넘겼다.
“말해줄 생각이 없나 보군. 하긴. 타국의 세력이 함부로 이 나라에 간섭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그가 나를 직시했다.
“우리도 정보를 조금 종합해봤다. 네 상사라는 저 여인을 재상이 납치한 게 원인이었나?”
“일단은 그래.”
“그녀를 구하는 과정에서 엘드나를 포함한 우리 동지들을 구해냈고.”
“겸사겸사.”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우리의 리더를 구하려면 엘드나는 사실상 포기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정확히는 현재 우리 전력으론 그곳을 습격할 수조차 없었지. 하지만 네 덕분에 저 말괄량이를 구할 수 있었다.”
“알고 있으면 일 시키지 말고 절대안정부터 시켜. 의사 소견으로 말하는데. 지금 몸이 한계라 당장 쉬어주지 않으면 평생 장애를 앓게 될거다.”
내 말에 사내가 엘드나를 찌릿 노려보자 그녀가 움찔거렸다.
“멀쩡하다 하지 않았나?”
“그…… 그게…….”
“당장 나가. 내가 말할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마라. 엘드나.”
“하지만!”
“명령이다!”
그 외침에 엘드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나가버렸다.
“의학에도 조예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의술까지 가지고 있다니.”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사실 개인적인 궁금증이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그 물음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내가 들은 보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해 무…… 물고기를 강화시켜서 실시를 두드려 팼다거나…… 신성 마법을 사용했다던가. 상식적으로 그 두 가지를 병행하는 건 인간의 몸으론 불가능하지.”
그렇게 말한 그가 나를 향해 다시 물었다.
“혹시…… 드래곤인가?”
드래곤. 사실 가장 애매할 때 생각할 수 있는 최강의 동물이라면 드래곤밖에 없긴 했다.
“그걸 내가 답해줘야 하나?”
“아니. 그저 개인적으로 궁금했을 뿐이다.”
“그럼 계속 모르는 게 좋을 거야. 알려져서 좋아질 게 없으니.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날뛸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황이라는 뜻 같은데. 우릴, 도와줄 수 있나?”
“도와달라라…….”
“이 아르부트 왕국의 겉면은 정말로 아름답다. 하지만 알 사람들은 다 알지. 이 나라는 썩었어. 그것도 인계 지옥이라 부를 정도로 끔찍하다.”
그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재상의 심기를 거스른 인간이 고문실로 끌려가 차마 말 못 할 고문을 당하고 몬스터 밥이 되었다.”
고문현장을 보진 못했지만, 감옥 내에서 인간들이 하고 있던 몰골을 보면 대충 감은 잡혔다.
“그들에게 고문과 학대. 학살은 취미일 뿐이야. 얼마 전 엘드나가 암살한 중앙 귀족 중 하나는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를 잡아다가 철창에 가두고 독을 실험하는 취미가 있었다더군.”
산 사람이 독을 천천히 투여받으면서 얼마나 고통받고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보면서 낄낄거리고 웃었다는 소리였다.
“보통 그런 상황이면 주변국에서 가만히 안 있을 텐데?”
“아르부트는 강대국이다. 땅덩이는 좁지만, 재상이 보유한 전력은 모든 국가가 긴장하게 만들 수준이지. 게다가.”
그가 이를 악물었다.
“현재 인간과 이종족 사이에 많은 분란이 있어서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지금 우리는 아직 너무 미약해. 하지만 네가 처단부대 대장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면. 우린 반드시 네 힘이 필요하다.”
“내가 타국인사라서 못 나선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건 아닐 거라는 것에 내 손목을 걸지.”
그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어 보였다.
노름으로 저항군의 부대장을 하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뭘 필요로 하는데?”
내 힘의 총량을 알았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재상을 포함해 처단부대 대장과 수호자를 모두 처리해달라고.
내겐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도 사실 내가 알아서 나설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 역량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조만간 우리의 리더, 붉은 전갈을 공개 처형할 거다. 다행히 방비하는 전력은 그리 크지 않지.”
“그래서.”
“그러니 우리가 위험해지면 우리의 리더만이라도 데리고 탈출해다오. 그가 있어야 저항의 뿌리가 살 수 있다. 그가 있어야 이 인계 지옥을 본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
그런 명분을 지닌 인간이라는 뜻일 것이다.
“내가 무슨 이득이 있어서?”
애초에 나는 저항군 소속이 아니었으니까.
“도와다오. 제발 부탁이다.”
끝내 말톤은 감정에 기인한 부탁을 해오기 시작했다. 딱히 마음에 걸리는 건 아니지만 프리아 여신이 하라 한다면 해야 하는 게 현재 입장이었다.
이에 나는 프리아 여신을 똑바로 직시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합니까.
그런 내 시선에 다른 이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가 내 상사라고 했으니 그녀가 결정을 내리면 내가 움직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것이다.
“제발 부탁이오. 이 끔찍한 지옥은 반드시 끝내야 하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도와만 준다면…….”
그의 설득에 프리아 여신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수첩에 무언가를 쓴 뒤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붉은 돌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 내게 보여주었다.
[도와줘.]
“뭐 그렇게 하죠.”
결정에 번복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지만 나서는 건 반드시 사흘 뒤.]
“도와주는 건 사흘 뒤.”
“괜찮소. 처형은 정확히 사흘 뒤였으니까. 그리고, 가능한 당신이 나설 일은 생기지 않게 노력해보지.”
말톤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후 나를 데리고 나온 프리아 여신은 내게 무언가를 말했다.
[검신 하레스를 막아.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정체를 들키지 않고.]
검신 하레스를 막으라고?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하레스가 이 아르부트 왕국에 간섭하기 위해 움직였으니 그를 막으라는 뜻이었다.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진지해진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한 문장을 뜸 들이는 걸 보니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인 듯 보였다.
[볶음밥. 지금 당장.]
그녀의 뜬금없는 의사 표현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장 중요한 것처럼 굴더니 상당히 뜬금없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손을 뻗어 내 가슴팍에 손을 올려놓았고 동시에 내 옷이 빛에 휩싸이더니 마치 지구의 셰프와 같은 복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깔끔하고 정돈된 복장이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그녀는 한 손으로 갑자기 코피가 흐르는 코를 틀어쥐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무리하게 물질에 간섭했기 때문에?
대체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단순한 마법의 영역이 아니었다.
기적 그 자체였고, 그 기적은 아바타인 그녀의 힘을 아득히 넘어선 월권이었다.
그렇기에 그 행동이 그녀 본연의 신격에 얼마나 큰 부담을 주는지 알기에 깜짝 놀라 황급히 그녀를 부축하고 안아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분명 변화가 있어야 할 그녀의 신력에 타격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바타가 코피를 흘린 것 자체가 거짓말인 것처럼.
“…….”
[좋아.]
그녀가 들어 보인 수첩에 적힌 글귀에 내 표정이 차갑게 식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