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2화
치렁치렁하면서도, 현 티오니스의 문화와는 조금 다른 양식의 신녀 복장.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색의 머리카락.
맞지 않는 몸의 밸런스.
격분한 내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당장. 내 몸. 원래대로.”
뚝뚝 끊어서 그녀에게 정말로 화가 났다는 시늉을 보였다.
[못 참지.]
“그걸 왜 당신이 못 참는데요!”
열이 뻗친 내 외침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무슨…… 엉?”
그리고. 이내 나를 발견한 뒤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 데이비 형씨는 어디 가고…….”
이에 프리아 여신이 뭔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슬립.]
그러자 소란스러움을 느끼고 찾아온 사내가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무너졌다.
제법 마법 저항력이 강한 인물이었지만 나는 과하게 마나를 쏟아부어 강제로 그를 재워버렸다.
“사람 인내심 시험하지 말고 본래대로 돌려놔요. 당장.”
[세 번 참으면 살생도 면한다고 하지.]
“살생 한번에 참는 걸 세 번 면할 수도 있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는 아쉬운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나를 둘러보다 이내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본래 내 키라면 발뒤꿈치까지 들어야 닿을 차이가 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그녀의 변덕으로 무성의 존재가 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외관은 남자보다는 여성에 더 가까운 모습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단순히 그녀의 변덕에 의해 이렇게 변하는 거로 뭐라 할 건덕지는 없는 일이다.
다만.
그게 내가 아닌 다른 이를 투영하는 게 아니라면.
“사람을 이용해서 다른 인간을 투영하는 거. 솔직히 더럽게 불쾌합니다.”
[프리아는 너와 같은 영혼이야.]
“기억도 안 나는 전생은 제가 아닙니다.”
지구 때의 기억은 온전히 남아있지만 1만 년도 더 된 고대문명의 신녀로서의 기억은 단 하나도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녀와 나는 같은 존재이되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단호한 내 대처에 그녀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주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입고 있던 검은 코트와 복장. 그리고, 길었던 머리는 어느덧 본래 내 머리처럼 짧게 변했다.
[미안해.]
“알면…….”
[이제는 의무에서 해방되기를.]
또다시 내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후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천천히 화를 가라앉힌 내가 물었다.
“이제 내가 더 손댈 건 없나요?”
[모든 건 순리대로.]
끝났다는 뜻이었다.
“내가 떠나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데요?”
본래 그녀는 이보다 한참 일찍 아바타가 소멸했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살려버렸고, 그녀는 이렇게 남았다.
물론, 그녀가 아바타의 핵이나 다름없는 붉은 보옥을 내게 건네주었으니 그녀도 이 이상 존재할 순 없을 테지만.
[힘의 근원은 네게.]
“이거 말이죠?”
붉은 보옥을 보며 내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본래대로 돌아가는 겁니까?”
[휴식기는 끝나지 않았어.]
“네?”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내 몸을 떠민다.
동시에 내 등 뒤로 나타난 균열이 그대로 나를 집어 삼켜버렸다.
아직, 마무리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떠밀리듯이 돌아오게 될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과거의 일도 중요하지만 사실 지금 내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페르세르크.
그녀의 안위였다.
애초에 과거로 간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페르세르크의 혼에 기억된 프리아 여신의 기억 봉인 마법 때문이었다.
[그곳에 오래 있을수록 왜곡이 심해져.]
“맞아요. 그러니 미련이 없으면 빨리 돌아오는 게 맞겠죠.”
담담하게 말하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그곳의 인간들과 딱히 긴밀한 관계를 맺은 적은 없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만큼 나는 처음 마족의 마을에서도, 검신 하레스를 만났을 때도.
그 후 아르부트 왕국에서의 일도 안타깝긴 하지만 어차피 이후의 일은 그들이 헤쳐나가야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째서였을까.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크게 미련이 없던 과거에서 나와 계속해서 함께 했던 이.
내가 아르부트 왕국의 기둥을 박살 내게 만들었던 존재.
고작 며칠인데 몇 달 동안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들었던 존재.
“프리아 여신…….”
바로 그녀의 존재였다.
그녀를 마음에 담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녀는 부모, 혹은 손 위아래의 가족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그녀가 나를 통해 조금 더 아바타의 수명을 늘리긴 했지만 내가 떠난 후 홀로 남게 될…….
“잠깐만.”
말을 하던 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여인을 향해 물었다.
“왜 여기 있어요?”
[네 성흔.]
“아니…… 당신 저기…….”
석판에 잠들어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대체 어떻게 그녀가 이곳에 있는가. 그녀가 과거의 시간대라면 존재할 수 있지만 지금 시간대에 그녀가 존재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존재. 프리아 여신의 아바타가 무슨 일 있냐는 듯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길게 바꾸었다.
그리고는 남의 혼란스러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지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아주 좋아.]
“내 머리 원래대로 돌려놔, 이 양반아.”
* * *
동시간 대에 둘이 존재할 수는 없다.
그건 프리아 여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여신이기에 더욱더 그 부분에 대해 엄격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관해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그녀가 미래의 시간대에 나타났고, 무슨 목적인지조차도.
하지만 그녀가 이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뭔가 나름의 수가 있기 때문이리라.
이에 나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
사실 그녀를 그곳에 그냥 두고 온 게 조금 미련이 남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어서 가. 너를 기다리는 이에게.]
복잡한 심경을 보이던 내게 그렇게 말한 그녀는 현재의 본체가 잠든 석판의 곁에 기대듯 앉아 눈을 감아버렸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 그저 본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있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이내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프리아 여신이 내게 보여준 페르세르크의 기억봉인 마법진은 너무도 복잡했다.
보통이라면 기록을 해두지 않는 이상 절대로 외우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완전 기억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완전 기억능력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싱숭생숭하게 다가왔다.
“미래가 바뀐 게 있어요?”
떠나기 전 나는 프리아 여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세상의 흐름을 속였다곤 해도 완전히 같은 미래는 아닐 것이다. 혹시나 하는 불안함에 내가 질문을 던지자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석상에 기대어있던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내게 수첩을 내밀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말 안 해줄 겁니까.”
[곧 만나게 될거야. 다만 조심해.]
“조심하라고요?”
[수천 년 억압된 피의 사슬은 강대한 힘을 불러낼 테니.]
그녀의 설명을 천천히 곱씹으며 걸어 나간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알아서 되겠지.”
그런 내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프리아 여신은 이내 짧게 하품을 한 뒤 눈을 감았다.
* * *
페르세르크는 데이비가 떠난 이후부터 말 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어지간한 일로 마음고생을 잘 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안겨줄 줄 정도로 슬픈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언니…… 괜찮을 거예요…….”
말없이 서류에 도장을 쾅쾅 찍어 넘기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에이리아가 흠칫하며 물러났다.
“……미안하구나. 본녀가 현재 그리 마음이 편치가 못해.”
“죄송해요. 언니…….”
“어찌 그대의 잘못일까…… 그 빌어먹을…….”
쾅!!
“데이비가 잘못이거늘.”
진실을 모르는 그녀의 입장에선 데이비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절대 이렇게 일방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의 냉정함을 모두 잃고 있었다.
“아이를 가진 제가 이런 말 하기 뻔뻔한 건 알지만…… 데이비 오라버니도 나쁜 뜻으로…….”
쾅!
“흡…….”
“알아…… 본녀가 왜 모를까. 다만, 지금은 그 나쁜 놈을 보고 싶지가 않구나.”
데이비가 영지를 비운 며칠 사이.
하인스 영지에선 많은 일이 있었다.
데이비가 떠난 이후 무슨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
갑작스레 홍단이와 청단이가 흠칫하더니 데이비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두 아이를 자주 달래주던 륀느까지 심각한 기색으로 말했다.
‘데이비 님을 수색. 륀느가 계약의 단절을 낮게 평가.’
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건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녀는 너무 데이비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평소의 냉정함을 잃지 않던 그녀가 이렇게 편협한 생각을 할 정도로 화가 난 상황이기에 에이리아는 그저 슬퍼할 뿐 그녀를 타박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 어느 쪽이건 다리안의 친모인 에이리아의 말이 그녀에게 와닿을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투둑…… 툭…….
그때였다.
서류 위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어…… 언니?!”
깜짝 놀란 에이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인장과 깃펜을 들고 서류를 빠르게 정리해나가던 페르세르크가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선 투명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나쁜 새끼…… 주었다 빼앗는 게 대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희망의 끝에서 절망의 끝으로 내던져진 그녀의 슬픔은 생각 이상으로 짙었다.
홍단이와 청단이 그리고 륀느의 혼란. 그리고, 페르세르크의 슬픔. 이 상황 속에서 며칠 동안 데이비가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에이리아의 입장에선 당장이라도 데이비가 돌아왔으면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였다.
“주었다 빼앗다니. 나는 그런 적 없다.”
덜컹!!
“엇?”
창문이 벌컥 열리며 들려온 목소리에 에이리아와 페르세르크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냉정함을 되찾은 페르세르크가 차가운 얼굴로 창문으로 난입한 존재. 데이비를 쏘아보았다.
“그대는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해준다 하였어!”
“알아.”
“본녀는 그대의 부인이야! 그대 이외에 그 누구와도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어.”
“당연하지. 그랬으면 그놈 사지를 부러뜨려놓을걸?”
데이비의 말에 페르세르크가 이를 악물었다.
“그대가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하였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으로 만들어놓고! 본녀를 놀리는 겐가?!”
그녀의 외침에 창문의 침입자 데이비가 씨익 웃었다.
“네 몸이 아직 불안정하니까 그랬지.”
“뭐?”
“내가 뭐 때문에 며칠이나 자리를 비웠다고 생각해?”
여유롭게 들어서는 데이비의 말에 페르세르크와 에이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때였다.
[며칠간 나와 데이트했지.]
갑자기 난입한 누군가가 수첩을 들이민다.
본능적으로 그녀가 들이민 수첩을 읽은 페르세르크의 표정이 콱 일그러졌다.
“아니 이 양반이 여길 왜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