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3화
프리아 여신의 난입에 주변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페르세르크를 포함한 이들은 프리아 여신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아…… 그래? 본녀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바람을 피고 온 게야?”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그녀는 상당히 냉정함을 잃고 있었다. 내게 서운했던 감정이 일거에 폭발한 것이리라.
그녀 본인은 어떻게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을 텐데.
내가 이런저런 핑계를 댄 주제에 갑자기 다른 여인과 시간을 보내다 왔다고 하니 거기에서 폭탄의 뇌관을 때려버린 셈이었다.
페르세르크는 투명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게 서운함을 드러냈다.
“잠깐만 페르. 이 양반은…….”
“데이비!!!”
그녀의 손으로 빛이 모여들며 거대한 스태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월의 종언!
그녀에게 간섭 권한을 준 덕에 내 아공간 속에 있어도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대로 꺼낼 수 있는 스태프였다.
이윽고 초월의 종언 끝으로 보랏빛의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고 내가 몸을 날리기가 무섭게 보랏빛의 섬광이 날아들었다.
“으억!!”
비명과 함께 몸을 날려 피한 나는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페르세르크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잘못 쐈어도 인명사고가 날뻔했다.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그녀가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선을 넘어버리는 그 행동에 내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야. 적당히…….”
“에이리아와 일리나와는 경우가 달라!!”
페르와 결혼하기 전부터 그 두 사람의 경우 이미 내가 본인도 모르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게 확 던져버렸다.
“아…….”
그녀가 던진 것은. 작은 손목 보호대였다.
그것도. 내 손목에 꼭 맞는, 그리고 약간 엉성하지만, 정성이 가득 담긴 손목보호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뛰쳐나가 버리는 페르세르크의 뒷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자 일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니가 저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봤는데. 네가 알아서 해. 그리고, 그쪽.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하세요.”
“히, 힘내세요.”
에이리아까지 물러나 버리자 나는 절로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그런 내 분노에 프리아 여신은 뒷짐을 진 채 나를 올려다보다 수첩을 들이밀었다.
[그냥 둬도 돼?]
“안되지 이 양반아!”
[그럼 어서 가.]
“지금 이게 누구 때문에…….”
이게 지금 누구 때문에 상황이 악화되었는데.
속으로 그 말을 씹어 삼켰다.
그걸 말해본들 그녀가 이걸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자아를 지녔지만,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빠져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갔다 와서 이야기합시다. 그리고,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이딴 짓 하면 정말 안 볼 겁니다.”
저 알 수 없는 독보적인 페이스에 결국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페르세르크를 쫓아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콰앙!!
[계약자! 어딜 싸돌아다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냐!]
동시에 내가 빠져나온 첨탑 밖으로 거대한 흑룡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야…… 야!”
[네놈과의 계약이 순간 단절된 탓에 엄청난 혼란이 있었다! 알고 있는 거냐!]
실제로 계약이 단절되는 경우는 단 하나뿐이다.
내가 사망했을 경우.
당연히 그 결과를 믿을 수 없는 이들에겐 혼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며칠이나 이어졌으니까.
페르세르크가 냉정함을 잃는 건 아마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쩐지 영지 내 분위기가 상상 이상으로 어수선하더니.
“사정이 좀 있어서 단절된 곳에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 아니야.”
[…….]
“네가 다른 녀석들 좀 진정시켜놔.”
[귀찮은 건 모두 내게 넘기는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메가로드리아는 상당히 안도한 낌새를 내비쳤다.
미련 없이 날아오르는 그를 뒤로한 채 나는 개인 정원으로 향했다.
페르세르크는 그곳에 있었다.
“여기 있었네.”
내 목소리에 흠칫 놀란 그녀는 이내 나를 보지 않고 무시로 일관했다.
“그 양반이 장난친 거야.”
“…….”
“페르. 나 좀 봐라.”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기가 무섭게 그녀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원래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어. 설마 그런 게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무슨 소린데.”
울음기가 섞인 투정에 나는 그녀가 앉은 벤치의 옆자리에 앉아 영지를 내려다보았다.
“앉아도 되지?”
“이미 앉아놓고 허락을 구하는 건 대체 어디 매너란 말인가.”
“오래전에.”
내 말에 그녀가 눈물을 닦고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네 몸에 큰 문제가 있었다더라.”
내 말에 그녀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 당시에 네 아버지는 널 살리기 위해서 알고 지내던 어떤 마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어.”
“마법사?”
“그래. 그 마법사 덕분에 넌 안전해질 수 있었지만 그게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었다고 하네.”
내 설명에 그녀는 딸꾹질을 겨우 멈추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본녀가 아이를 가지는 것과 그 일이 연관이 있었다?”
“아이를 가지면 그 문제가 네게 고스란히 다시 일어날 거야.”
“그대가 본녀를 해결해주면 되잖아. 그대는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마법…….”
“아니. 불가능해.”
내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마법은 세상에 단 한 명만 걸 수 있거든. 오딘도 나도 그 부분을 잘 알아서 함부로 손을 못 대고 있었고.”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줄게.”
그녀에게 과거의 기억에 관련된 문제가 있었다고는 영원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가 그것으로 문제 되는 모든 요소를 내가 원천 차단할 생각이니까.
“네 혼에 각인된 그 마법의 해결법을 찾기 위해 며칠간 자리를 비웠어.”
“그 여인은.”
며칠간 데이트를 하고 왔다며 페르의 속을 박박 긁어놓은 망할 프리아 여신의 아바타.
그녀의 행동을 짚으며 페르가 해명을 요구했다.
“반은 거짓말이야.”
“나머지 반은 진실이라는 소리로군.”
“적어도 연인으로서의 데이트는 아니거든.”
그렇게 말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읏?! 이게 무슨 짓!”
“가자. 네 혼에 각인된 마법을 변형시킬 거다. 이것만 완성되면 넌 얼마든지 아이를 가질 수 있어.”
“…….”
“내가 반드시 성공시켜줄게. 한 번만 더 믿어봐.”
내 말에 그녀는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겠지.”
“그래.”
“한 번 더 속이면 본녀는 절대 그대를 보지 않을 게야.”
“절대 안 속인다니까.”
그걸 위해서 내가 과거까지 갔다 왔다.
비록 과거에서 한 행동으로 인해 미래가 변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미래에 큰 변화는 없었다.
내 미소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페르세르크는 마지막 마법을 몸에 받아들임으로 인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조건을 갖춘다는 내 말을 믿기로 한 듯 보였다.
“그래서. 당신이 여기 와서 하려는 게 뭔데요.”
[후에 알게 될거야.]
그녀가 조용히 수첩을 보여주었다.
아무 이유 없이 여기까지 나타나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문득 그녀가 건네주었던 붉은 보옥을 떠올렸다.
에반젤린에게 건네주기엔 아직 시기상조이긴 하지만 그녀는 이상한 짓은 해도 결과적으로 내게 이로운 방향으로 행동했다.
말없이 기다리는 그녀를 뒤로한 채 나는 페르세르크가 누워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이미 침대의 주변으로는 커다랗고 기이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기존의 마법진과는 그 형태나 내부의 문자 기호 등등 모든 것이 달랐다.
잘 모르는 초보 마법사가 본다면 이 엉터리 낙서는 대체 누가 한 거냐고 말할 정도로 어떤 규칙도, 법칙도, 정의도 없는 그야말로 낙서에 가까운 마법진이었다.
상식을 역으로 박살 내야 구현할 수 있는 기적에 가까운 마법.
그것을 보며 내가 조용히 말했다.
“시작할게. 푹 자고 나면 다 잘되어있을 거야.”
내 말에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우우웅…….
동시에 미리 준비해둔 마나가 공명하기 시작하면서 놀랍게도 낙서에 가깝던 마법진이 서서히 하나둘 공명하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작동할 리가 없는 마법진이다. 기존의 법칙을 깡그리 무시한 무차별적인 낙서에 반응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마법진은 가동했다.
그것을 지켜보는 일리나와 에이리아는 마법에 대해 잘 모르기에 의아한 기색이었지만 정작 페르세르크는 처음 마법진을 봤을 때 대체 이게 뭐냐며 황당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었다.
[마법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의 무의식 속에 있는 기억을 붙잡아야 해.]
“그게 내가 할 일이고요.”
내 대답에 프리아 여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데이비. 아까부터 궁금한 건데. 이 사람. 대체 누구야?”
일리나가 불청객이나 다름없는 프리아 여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나중에 설명해줄게.”
이윽고 마법진이 온전히 발동되며 나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혼수상태에 빠진 페르세르크의 혼과 내 영혼이 마치 공명하듯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혼 어딘가에 잠겨있는 어떤 거대한 문과 자물쇠를 느낄 수 있었다.
이거구나.
프리아 여신이 잠가둔. 뒤틀려버린 극심한 트라우마.
그 자리에 선 채 나는 마법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
그리고, 페르세르크의 혼에 각인된 자물쇠에 열쇠를 꽂아 넣어 자물쇠를 해제했다.
후우우우욱!!!
동시에.
그녀의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끔찍하고도 슬픈. 너무도 아픈 그녀의 극심한 트라우마의 원인이 말이다.
그녀의 기억봉인을 재조정하기 전까지 이 기억들이 그녀에게 닿지 못하게 내가 붙잡아놔야 한다.
이건 페르세르크의 트라우마지 내 트라우마가 아니다.
비록 이 기억이 내 정신을 갉아먹을지라도. 나는 쉬이 이것에게 틈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물론, 페르세르크에게 집중하고 있는 동안 나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
“언니…… 괜찮을까요?”
“마나가 너무 불안정해…….”
그것을 보던 일리나의 대답에 에이리아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가 아닌 두 사람이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생각 이상으로 상황이 심상찮아 보였다.
“하다못해 마나를 안정시켜줄 마법사라도 데려와야겠어.”
일리나가 몸을 돌려 빠져나가려 했다.
엘프 중에 제법 한가락 하는 마법사들이 제법 있다.
그들을 불러온다면…….
그러던 찰나.
일리나는 그녀의 팔을 잡은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여인. 그러면서도 굉장히 데이비와 친숙한 모습이었다.
“뭐 하는 거죠? 이거 놓으세요.”
물론 그녀의 발언이 굉장히 충격적이긴 하지만 일리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 대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봐요. 선은 적당히…….”
[필요한 건 그들이 아니야.]
수첩을 들이미는 그녀의 행동에 일리나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그리고.
이내 일리나는 경악스러운 장면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수첩을 들이밀었던 그녀가 가볍게 손뼉을 치더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마나가 아니었다.
신성력과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더욱더 깊고 오래된. 그리고 신성한 힘이었다.
“시…… 신력…….”
그것을 본 일리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힘이 그녀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털썩!!
반사적으로 몸을 숙인 일리나가 고개를 숙였다.
“프…… 프리아 여신님…….”
“네?!”
뒤늦게 놀란 에이리아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프리아 여신은 눈을 감은 채 신력을 발현하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설마…… 진짜 프리아 여신님이신가요?”
이윽고 일리나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물어오자 그녀는 조용히 손을 허공에 흔들었다.
그러자 허공이 일그러지며 누군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아야! 어떤 망할 자식이…….”
이윽고 그 사이에서 떨어진 금발의 작은 소녀는 자신을 끌어낸 범인을 향해 소리치려다가 멈칫했다.
“당신…….”
놀란 그녀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프리아 여신은 조용히 손가락으로 페르세르크와 그런 그녀와 공명하고 있는 데이비를 가리켰다.
[보조.]
짧은 한마디가 수첩에 쓰였다.
본래대로라면 오딘이 뒤집어엎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지만 오딘은 어째서인지 얌전하게 그녀의 말에 따라 마나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 데이비 저 자식 혼자서 안될 거 같은데 왜 혼자 가나 했네.”
그렇게 말하며 오딘이 마나를 손끝에 걸어 마치 지휘하듯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혼란스럽게 폭주하던 마나가 서서히 고요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프리아 여신은 조용히 한 손을 더 허공에 뻗었다.
쾅!!
“컥!! 아이고 허리야…….”
그리고. 또 한 명이 강제로 세상에 현신 되었다.
“으으…… 여긴 또 어딘…… 엥? 저놈 저거 저기서 뭐…….”
그렇게 말하던 사내는 곧 데이비가 손을 잡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고 입을 다물었다.
[신의 뜻에 따라.]
“프리아 여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프리아 여신이 내민 수첩에 글귀가 변한다.
[딸아이를 만날 기회를 줄게.]
인간적인 면모가 서린 글귀였다.
하지만 균열에서 떨어진 두 번째 영웅 검신 하레스는 멍하니 걸음을 걸어 들어가며 침대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제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재회할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건만.
영원히 못 만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가 현신하기 위해선 많은 것들을 잃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모조리 무시한 채 눈앞의 신의 아바타는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다.
검신 하레스에게 이 마법진의 보조를 맡길 건 없었다. 애초에 그건 오딘 한 명으로 충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검신 하레스이기에. 오로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존재했다.
[곁을 지켜줘.]
그 한마디에 검신 하레스는 알 수 없는 울컥함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페르…….”
페르세르크를 바라보던 하레스의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쉬이 말이 떨어지지 않는지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오딘과 일리나. 에이리아는 그저 말없이 지켜만 보았다.
본능적으로 무슨 상황인지 알게 된 탓인지 에이리아는 눈물까지 흘리며 부녀의 상봉을 지켜보았다.
“왜 이리…….”
이윽고 입술만 달싹이던 하레스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왜 이리 야위었니. 밥은 제때에 챙겨 먹고 있는 게 맞는 거니……? 페르세르크.”
그는 눈을 감고 있는 페르의 손을 잡은 채 힘겹게. 그리고, 너무도 어색하게 말했다.
한쪽은 자신을 못난 아비라 생각했고, 한쪽은 자신을 불효막심한 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서로 만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피하고 피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본래라면 만나고 싶다고 해도 사실 피하려 했던 하레스였다.
하지만. 프리아 여신으로 인해 강제로 소환된 지금. 페르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그는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변명일 뿐이었고.
사실은 그도 딸아이를 너무도 만나고 싶었다는 것을 말이다.
괜찮다고 말한 것들 전부가 사실은 반대로 딸아이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신님. 이런 감정 조종은 불쾌합니다.”
[그것은 네 감정이야.]
“……할말이 없네요.”
그 또한 프리아 여신이 생각 이상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에 놀란 기색이었지만 그걸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지금은 프리아 여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딸아이가 있었으니까.
보지 않아도 잘 살고 있으니 괜찮다고 말했건만.
직접 마주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머릿속은 백지처럼 새하얗게 변한 지 오래였다.
너무도 미안해서.
너무도 사랑하고 보고 싶어서.
그는 평소의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도 지워버린 채 공허하면서도 슬픈 눈으로 페르세르크를 바라보았다.
낙서에 가깝던 마법진의 빛이 강해질수록. 주변은 한참 동안 고요함만이 울려 퍼졌다.
누군가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으리라.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건 그리 쉽게 돌아가지 않는 듯했다.
축축해진 눈망울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일리나에게 프리아 여신이 수첩을 들이밀었다.
[방해꾼이 와.]
“네?”
[네가 막아주겠니?]
그 한마디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 일리나가 이내 진지하게. 그리고 분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떤 개자식들인데요.”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소환된 신검이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