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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075화 (1,075/1,559)

제1075화

콰직!! 콰직!!

섬뜩한 파육음이 울려 퍼진다.

비명 소리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는 공간이지만 눈으로 보이는 장면은 끔찍한 참상의 현장이었다.

푸욱!!

이윽고 한 남성의 심장에서 손을 빼낸 소녀가 비틀거리며 피가 묻은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아…… 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트는 그녀의 눈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저게, 힘이 폭주해버린 페르세르크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그녀를 구한들. 변하는 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그것으로 틈이 생겨 변수가 생겨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참 보고 있으니 엿 같네. 빌어먹을 타나토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타나토스를 씹어 돌렸다. 물론, 방아쇠를 당겨버린 건 타나토스가 아닌 하레스의 부인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타나토스가 잘못이 없는건 아닐 테니까.

우우웅!!!

그녀의 기억을 전반적으로 감싸고 있는 대량의 힘이 느껴진다.

손끝에 흐르는 미세한 흐름을 제어하여 기억의 봉인을 변형시키고 더욱 견고하게 바꿔나갔다.

기존의 원형은 프리아 여신이 만들었지만, 그걸 살짝 개변하는 건 오딘의 덕분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바깥에서 누군가가 나를 돕고 있다.

프리아 여신일까.

그녀의 힘의 근원이 대체 어디이기에 이렇게 계속해서 기적을 발현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녀가 나를 따라온 것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물론, 페르의 앞에서 데이트니 뭐니 헛소리를 나불거린 것은 분명히 내게 커다란 곤혹을 선사하기 위해서라는 것에 손모가지를 걸리라.

-끄으으…….

죽어가던 한 인영이 페르세르크의 다리를 붙잡는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입 모양을 볼 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체 왜…….

이 한마디는 아마 페르세르크의 정신에 극심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주었을 것이다.

피눈물을 흘리며 미쳐 날뛰던 페르세르크의 학살은 끝내 아름다운 여인이 스태프를 들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시켰을 때 멈췄다.

벌써 몇 번째 보고 있는 것인지.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이 끔찍한 슬픔과 아픔에 노출되어 동화되어버릴 만큼 지독했다.

물론, 이 극심한 트라우마는 오로지 페르세르크에 한정하여 극도의 효과가 드러난다.

본래 예정대로라면 기억을 재차 더욱 견고하게 봉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뀐다.

서서히 마법이 완성되어가 가기 시작하자 그녀의 기억이 봉인의 여파로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과거에 그런 슬픈 기억이 있는 건 알겠는데.”

나는 역시 이 기억을 단순히 봉인하는 정도로 그치지 못하겠다.

“아무래도 이 기억은 하등 쓸모가 없어 보인다.”

그녀는 평생 이 기억과 연관되지 않았으면 했다.

“조금 더 걸리겠지만.”

나는 포식의 권능을 끌어올렸다.

[안돼.]

동시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 기억. 내가 먹어치워 줄게.”

포식의 권능이. 형체화된 트라우마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 * *

말없이 데이비를 바라보던 프리아 여신이 눈을 뜬다.

“뭔가 잘못됐어. 이 자식 정신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이이이잉!! 쩌엉!!

이윽고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데이비가 튕겨 나간다.

“아이고야…….”

그리고, 그렇게 쓰러져 버린 데이비에게 후다닥 뛰어간 오딘이 그의 정강이를 마구잡이로 걷어찼다.

“끄악?! 미쳤어요!?”

“죽어! 죽어 이 새끼야! 누가 네 멋대로 탈선하래!”

그녀의 외침에 비명을 지르던 데이비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바닥에 쓰러진 채 키득거렸다.

“아…… 아프다니까! 아하하하하!”

“이…… 이이 미친 새끼!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아예 먹어버렸습니다.”

그 한마디에 오딘이 움찔거렸다.

“머…… 먹었다고? 그걸?!”

“예.”

그 한마디에 오딘은 심각한 표정으로 데이비의 양 뺨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야! 내 눈 봐! 내 눈보라고!”

“하…… 머리가 울리니까 그만 좀 하세요.”

“이 미친 새끼야! 수천 년 쌓인 원한을 아무런 준비 없이 포식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고 한 거야?!”

“괜찮습니다.”

보통 포식의 특성은 상대의 특성. 특수한 힘. 혹은 힘을 먹어치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거나 버릴 수 있다.

다만 제어가 가능한 범위 내에선 공격 마법조차도 먹어버릴 수 있는 힘이기도 했다.

“너…… 괜찮은 거 맞아?”

“예.”

이 정도로 무너질 것이었다면 예전에 붉은 공허에서 무너져내렸으리라.

“그래도 좀 역하긴 하네요.”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데이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 요양만 하면 문제없을 거 같긴 합니다.”

그 말에 오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놈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가 심하네. 너, 그 특성 쓰지 마. 알아들어?”

어지간해선 절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할 힘이라며 그녀는 못을 단단히 박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왜 깨어나지 않는 거야?”

오딘의 질문에 데이비는 말없이 페르세르크를 바라보다 조용히 대답했다.

“빠져나오기 전에 페르의 의식 속에서 녀석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던데.”

그 한마디에 하레스의 손이 움찔거렸다.

“적어도 한마디라도 해주지 그럽니까.”

그 한마디에 하레스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말없이 페르세르크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나를 원망했으면 했다. 또 반대로 나를 원망하지 말았으면 하기도 했다.”

원치 않게 폭주했고, 원치 않게 마왕이 되어 아비의 손에 베어진 소녀였다.

가족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사실 미워할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니라곤 하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기도 하고.”

하레스의 말에 오딘은 마법을 거둬들이면서 짧게 혀를 찼다.

“미련하기는.”

“그래. 미련한 일이지.”

담담하게 말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만에 하나, 억에 하나라도 만약 페르가 나를 미워한다면, 나를 두려워하거나 미워하는 눈빛을 보낸다면.”

단 한 번이라도 그런 눈빛을 받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리라.

“나는 자신이 없었다. 괜찮다, 보고 싶다, 말하지만 그래도 불안함이 사라지진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어렵게 대답했다.

“나는 두려웠다.”

서로를 죽여야 했던 마왕과 검신. 그 슬픈 과거에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두려워했다.

페르세르크는 마왕이 되어 수많은 인간을 죽이게 만든 자신을 미워할 아버지가 무서워서.

검신 하레스는 자신을 베어버린 아버지를 미워할 딸의 눈빛이 두려워서.

“그건 아닐 겁니다.”

“뭐?”

정강이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며 일어난 데이비가 말했다.

“페르가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을 때.”

데이비가 말했다.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게 당신입니다.”

“데이비.”

“한마디라도 해주지 그래요. 길을 못 찾아서 헤매고 있을 때 등대 정도는 되어주셔야지.”

그 말에 하레스는 떨리는 눈동자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페르세르크를 담았다.

그때였다.

“아…… 버지.”

그 한마디에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서로 만났을 때를 두려워했던 그의 걱정은 단순 기우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트라우마처럼 페르세르크와 대면하지 못했다.

“나는…….”

그가 천천히 말했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정순한 기운이 흘러나오며 페르세르크와 공명하기 시작한다.

“네가 정말…….”

그 한마디에 페르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보고 싶었다. 사랑하는 딸아.”

그 한마디에 페르세르크의 투명한 눈물이 천천히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녀가 붉은색의 혈안에 제 아버지를 고스란히 담았다.

“아버지…….”

그 한마디에 하레스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뒤에 서 있는 데이비나 오딘은 보지 못했지만, 하레스의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처럼 붉게 충혈되어있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결국, 그가 오열하며 페르세르크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본 페르세르크는 힘없이 누운 채로 천천히 입꼬리를 떨었다.

그리고, 그 입꼬리는 이내 천천히 끌려 올라갔다.

딸 아이의 결혼식에도 직접 찾아가지 못했던 그였다.

어색해서 제대로 부르지도 못했던 호칭이 입가에 맴돈다.

다만 페르세르크도 용기를 내었다.

“아빠…….”

옅게 흐느끼며 하레스를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용히 오열하는 하레스의 머리를 쓸어내린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용히 그를 일으켜 세운 뒤 그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아빠…….”

부녀의 상봉을 지켜보던 오딘이 짧게 혀를 차며 돌아선다.

“신파극이 따로 없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을 유지하는 힘을 모두 빼내 하레스에게 심어 넣은 뒤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자신이 일찍 돌아감으로 인해서 하레스가 현신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킨 것이다.

“우리도 자리 좀 비킵시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프리아 여신의 팔을 잡아당겼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예 압니다.”

* * *

오랜 시간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이었다.

무슨 할말이 그렇게 많았는지 하레스는 그 이후로 몇 시간은 더 버티다가 신의 영역으로 역소환 되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영지가 혼란스러워졌지만 나는 빠르게 위병들과 관리를 파견하여 피해 상황을 복구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게 만들었다.

하레스가 떠난 이후 페르세르크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잘됐네.”

일리나는 콧잔등이 시큰한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정을 전해 들은 이후 그녀는 몇 번이고 잘됐다는 말만 반복했다.

“볼 수 있을 때 실컷 봐놔야 해.”

과거 살해당한 오라버니나 어릴 적 잃은 어머니.

일리나 또한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언니는 괜찮아?”

그녀의 물음에 나는 영지의 피해 상황보고 서류들을 빠르게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아무 문제 없어.”

이제 페르는 아무 걱정 없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 되었다.

거참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번거로웠다며 투덜거려보지만, 입가에 미소는 쉬이 가지 않았다.

“고생했어. 네가 언니를 위해 그렇게까지 노력한 줄은 몰랐거든.”

“질투나?”

“질투 나지.”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키득거린다.

질투가 난다고 하면서도 딱히 불만이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보다 네가 마법을 발현할 때 말이야.”

“그래. 직접 네 입으로 듣는 게 낫겠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검은 밤하늘에 뜬 세 개의 달이 보인다.

사이러스와 크리아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만들어버린 세 번째 달. 타나토스.

낮에 있었던 균열 폭주는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너무도 고요했다.

“왕실에서도 연통이 왔어요. 무슨 일이냐고. 일리나 언니가 우선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내긴 했지만 그건 블랙홀 같았어. 하지만 단순한 블랙홀이 아니라…….”

단순 블랙홀이라고 하기엔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자연현상.”

그렇게 중얼거리자 일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지만. 재발할 가능성은 사실 낮다고 봐도 될거야.”

지켜보고 조사해봐야겠지만 아무래도 그 균열은 아마 프리아 여신이 신벌로 아르부트 왕국 전체를 정화시키지 않으면서 생긴 어떤 부작용이 아닐까 싶었다.

한 국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은 것이 가져다주는 여파는 상당히 클 테니까.

내 대답에 일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로 아이아스 님이 아니었다면 곤욕을 치렀을 거야.”

“그 사람이 나섰으니까 재발할 걱정이 없다는 거지.”

그냥 억제한 것이라면 당장 결계부터 손을 봤을 것이다.

로 아이아스가 나선 시점에서 자연현상이든 뭐든 중요한 게 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런 존재였으니까.

“대체 그녀는 얼마나 강한 거야? 예전에 네가 훈련을 받을 때도 보긴 했지만.”

“그건 나도 모르겠네.”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

“적어도 하나는 확실해. 헤라클래스가 없는 이상 신의 영역에서도 그녀보다 강한 이는 없을 거라는 거.”

굉장히 온순하지만, 꼭지가 도는 순간 그녀를 막을 존재가 사라지는 건 사실이었다.

“너도…… 못 이겨?”

“소멸시킬 작정이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럴 수도 없거니와 반대로 나도 작살날 각오는 해야지.”

그 한마디에 일리나가 파르르 떨었다.

“절대 까불고 싶지 않네.”

“그렇지? 회랑의 개망나니 영웅들도 절대 선은 안 넘지.”

선을 넘는 순간 지옥을 볼 테니.

똑똑.

그때였다.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나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우리는 먼저 가볼게.”

“어? 가긴 어딜 가. 얼마 만에 만났는데.”

“어딜 가긴. 우리도 눈치는 있거든?”

일리나가 혀를 쏙 내밀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에이리아도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꿈 꾸셔요. 데이비 오라버니.”

“에이리아. 오늘은 와인이나 좀 딸까?”

“좋아요. 언니.”

귀를 쫑긋거리며 일리나를 따라 나가버리는 두 사람의 행동에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있었나?

일리나의 성격이라면 이렇게 야심한 시각이 되면 대뜸 덮쳐올 줄 알았건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은 곧 문을 열고 나타난 이를 보며 이해할 수 있었다.

“페르? 너 벌써 움직이면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

그렇게 말하던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후유증이 남아서 상당히 탈력감이 몸을 지배하고 있을 텐데.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움직이려던 찰나.

작은 로브를 입고 들어온 그녀는 로브를 휘릭 벗어던진 뒤 그대로 내게 다가왔다.

“어…….”

그리고. 그녀의 복장을 보며 한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와. 잠깐만.”

당황한 내게 다가온 그녀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책상의 옆에 있는 침대로 나를 밀치고는 그대로 올라타며 붉은 눈동자를 요염하게 빛냈다.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비치는 듯한 그녀의 눈꼬리가 요망하게 휘는 걸 보며 나는 생각했다.

프리아 여신이 코피를 흘리던 모습과 지금 내 모습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미쳤냐? 지금 그 꼴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녀는 현재 속옷과 새하얀 와이셔츠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지구에서 입돈 와이셔츠인 터라 새하얀 소매가 그녀의 손 대부분을 가릴 정도로 컸다.

아무리 야밤이라도 순찰하는 시녀들은 있을 텐데.

“오늘 이 근방에는 아무도 오지 않아. 일리나가 벌써 명을 내려두었으니.”

그녀의 말에 나는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데이비. 이제 아무 문제 없는 거 맞지?”

“어…… 어? 어 그렇긴 한데…….”

알 수 없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내게 말했다.

“고마워, 본녀의 아비를 만나게 해줘서, 그리고 사랑해 데이비. 이 말을 꼭 먼저 하고 싶었구나.”

그 한마디에 나는 얼굴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 근육이 멋대로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분명, 페르세르크와 처음 결혼했을 때, 그녀와 초야를 치르기 위해 바짝 긴장하고 있었을 때.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았다.

평소 이상으로 요염한 자태에 눈빛. 슬쩍 올라간 입꼬리까지.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기분이었다.

그녀에게 제압당하듯 깔린 채 멍하니 있자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셔츠의 단추를 살살 건드렸다.

“오늘 밤은 절대 재우지 않아.”

그 말 평소에 반대로 하지 않았나.

일리나와 에이리아가 왜 자리를 비켰는지 알 것만 같았다.

손을 살짝 오므려 마치 고양이 흉내를 내듯 요염한 미소를 짓는 그 모습에 이성이 한계에 치닫기 시작했다.

선 씨게 넘네.

“차려놓은 건 거절 안 하는데. 자신 있냐?”

“얼마든지 덤벼보아.”

그녀의 말에 내가 움직이려던 찰나.

쾅!!

“아빠아아!”

갑작스런 홍단이와 청단이의 난입에 나는 반사적으로 침대 시트를 튕겨 올려 페르세르크를 감쌌다.

상당히 야시시한 차림새였기에 당황한 페르세르크도 눈을 끔뻑거리며 허겁지겁 시트로 몸을 가렸다.

“호…… 홍단이 청단이? 여기서 뭐 하니?”

어색해진 내 미소에 두 아이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나와 페르세르크에게 돌진하듯 안겨들었다.

“읏?!”

“아빠랑 같이 있을 거야!”

“처, 청단이도 엄마랑 같이 잘 거야!”

잠시 나와 계약이 끊어지면서 상실감을 느낀 것 때문이리라.

두 아이들은 평소 잘 안 하던 짓까지 하고 있었다.

“하…….”

헛웃음이 나온 내가 페르세르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말없이 두 아이를 바라보던 페르세르크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홍단아 청단아.”

“네에?”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쌍둥이 아이를 보며 페르세르크가 환하게 웃었다.

“륀느 옆에서 코 자면, 내일 특별한 간식을 만들어 줄게.”

그 한마디에 두 아이의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 간식!

“그럼, 그것도 슈크림으로 만든 케익. 평소엔 못 먹게 했잖니.”

“케…… 케이키!”

홍단이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여지며 발음까지 뭉개지기 시작했다.

침이 고이는지 입이 헤 벌어지고 있었다.

“아…… 아빠랑 같이 자고 싶은데…… 간식도 먹고 싶고…….”

고민하던 두 아이는 마치 일생일대의 결정을 하듯 고민했다.

그리고. 두 아이가 내린 결론은…….

“아…… 안녕히 주무세요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쪼르르 나가버렸다.

“푸흡…… 그대는 간식만도 못하구나.”

“…….”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딸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 * *

영주성의 첨탑.

페르세르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데이비를 멀리서 지켜보던 여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이내 허공에 손을 가볍게 뻗어 올렸다.

그러자 옅은 빛가루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내 그녀의 손에 응축된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뭉친 그녀는 조용히 페르세르크에게 그 빛의 응집체를 천천히 날려 보냈고, 그것이 소리 없이 페르세르크에게 스며드는 것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르륵…….

그리고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태초의 축복이 함께 하길.]

그녀가 사라진 자리엔 그리 적힌 글귀의 수첩 한 장이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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