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1화
“몸이 허한 듯하니 잠시…… 자리를 좀 비워야겠구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나와 일리나. 그리고 에이리아 셋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프리아 여신에게 향한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안다고, 한 차례 전적이 있는 프리아 여신이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프리아 여신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아주 작은 아기의 손 싸개를 내 앞에 흔들어 보였다.
[축하할 일]
“축하할 일이라고? 저 상황이 정상처럼 보입니까?”
[왜 아닐 거라 생각해?]
그녀가 태블릿에 적어준 대답에 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홀른이 아니야.]
“마족이어도 이런 현상은 말이 안 되지 않나요?”
내 말에 그녀는 손 싸개를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작게 흔들었다.
[여자아이? 사내아이?]
“쓸데없이 손대지 마세요. 진짜 분명히 말했습니다.”
[바꿀 수 있어.]
“당신은 할 수야 있겠지. 다만 내가 원하는 건 아니네요.”
내 경고에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는 소리가 작게 쯧! 하고 혀를 찼다.
마족이 인간에 비해 아이의 수정 생장 비율이 빠르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빨랐다.
회의를 잠시 물리고 페르세르크를 따라가자 그녀는 자신의 침실에 홀로 앉아 한 손으로 가슴을 압박하며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페르.”
“데이비!”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도 내 부름에 무너져 내렸다.
당황, 놀람. 기쁨.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나를 보는 그녀는 마치 당장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혼란스러워 보였다.
“진찰 해볼 테니까 손 줘봐.”
내가 손을 내밀자 페르세르크는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내게 내밀다가 휙! 하고 다시 거둬버렸다.
“왜.”
“만약에…….”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만약에 아니라면? 그땐……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뭘 걱정해.”
그녀의 손을 잡고 맥을 짚으며 눈을 감고 있던 내가 피식 웃었다.
“지금 아니면 아이가 안 태어나나?”
“그건 아닐 테지…….”
“그럼 걱정 마. 그리고.”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쿡 밀어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업무는 절대 손대지 마.”
“데이비?!”
“축하해. 나도 축하받아야 하나?”
씨익 웃는 내 미소에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래. 왜 이렇게 빨리 자리가 잡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게 되네?”
“허…….”
내 대답에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이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된 이상, 이번 토벌에 절대 나오지 마.”
“데이비.”
“정말 힘들게 생긴 첫 아이잖아.”
그런 내 말에 그녀는 몽글몽글 맺히는 투명한 눈물을 천천히 떨구면서 고개를 저었다.
“첫아이는 아니야.”
그녀가 예쁘게 웃어 보였다.
“예쁘고 귀여운 막내지.”
누구의 뱃속에서 태어났고 누구의 핏줄이고.
이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대답은 내게 고마움을 전해주었다.
“고마워. 그리고, 축하해.”
“축하해 데이비.”
서로가 서로를 축하해주었고 나는 뒤이어 들어온 베르닐 시종장을 향해 말했다.
“시종장. 페르의 시중을 드는 시녀의 수를 늘려.”
“저하? 설마!”
“그 설마가 맞다.”
“오……오오!! 경하드리옵니다. 마님!”
평소답지 않게 반색하는 그를 보며 나는 페르세르크가 어느새 베르닐 시종장의 신임까지 장악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페르세르크와 싸운 날이면 어김없이 나를 보는 시선이 묘한 느낌이렷다.
“시종장.”
“예 저하.”
“내가 없는 동안 잘 부탁할게.”
“심려 말고 다녀오시옵소서.”
* * *
하인스 영지의 동쪽은 영지민들의 피난으로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생계가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 이런 피난이 마냥 달가울 리는 없지만 차후 이곳에 습격자들이 다시 나타난다고 하니 목숨이 아까운 이상 뭐라 할 순 없었다.
게다가 인구밀집도가 상당히 낮은 지역을 고른 탓에 큰 반동 또한 없는 게 사실이었다.
“데이비 님. 준비 완료되었다고 보고. 또한, 비공정 아스가르드가 창공을 누비며 탐색 중.”
하인스 영지에서 만들어졌으며 대륙에 단 하나밖에 없는 마도 비공정인 아스가르드의 함장인 티아라가 눈에 불을 켜고 이상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사람 하나 남지 않은 고요한 도시 속에서 나는 프리아 여신과 마주한 채 물었다.
“그래서. 이거 그냥 꺼내도 돼요?”
내 물음에 프리아 여신은 대답하지 않은 채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녀의 눈이 천천히 감기며 그녀의 전신으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신의 파장은 형태 없이 파장 없이 그렇게 고요하게 퍼져나갔다.
낚시를 할 때 미끼만 던지고 기다리는 것보다 떡밥을 던져 물고기를 유인한 후 낚시를 하는 게 당연히 효과적일 수 밖에 없었다.
콰직…… 콰지지직!!!!
현재 세계의 법칙으로 인해 생겨난 정신체. 그리고, 그 정신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거대한 균열은 프리아 여신의 아바타를 찾아 헤매고 있는 만큼 그녀의 힘을 그냥 놓고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이 원 형태로 갈라지며 그 내부로 새카만 우주 공간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 페르세르크에게 마법을 걸 때 나타났다는 균열에 대해 들은 바 있지만 지금 나타난 것은 그 수준을 가벼이 넘어서고 있었다.
-나…… 나타났어요! 상공!!
뒤늦게 발견한 아스가르드의 함장인 티아라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미 보고 있어. 혹시라도 제공권을 먹겠다고 날뛰는 게 튀어나오면 모조리 떨어뜨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자아를 가지지 않았으나 하나의 거대한 현상이나 다름없는 균열은 프리아 여신의 머리 바로 위 창공에 자리를 잡고 그 깊은 힘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역시 이놈이 분명했다. 칼룸구스와 연결되어 나를 들여다보던 비틀린 정신 에너지.
프리아 여신이 정화하지 못한. 쌓여있던 분노와 증오 같은 부정적인 에너지였다.
“내가 곧 보자고 했잖아.”
대답은 당연히 없었다.
다만 변화는 있었다.
거대한 균열이 마치 프리아 여신을 끌고 가려는 것처럼 무형으로 이루어진 검붉은 사슬들이 쏟아져 내려와 나와 프리아 여신이 있는 장소의 주변에 꽂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사슬 일부는 프리아 여신을 묶어 그 거대한 균열 속으로 빨아들이려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의 거대한 균열에 끌려들어 가던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더욱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럴수록 균열은 더욱 강한 힘을 내어 그녀를 끌어들이려 했다.
물론, 그녀가 그대로 끌려가게 둘 생각이 전혀 없는 나였다.
짤그랑!!
천천히 손을 뻗어 근처에 박혀있는 사슬을 움켜쥐며 신격을 쏟아 넣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둘 모두가 세상을 구성하는 힘이다.
하지만 이쪽이 평소와 같은 데에 비해 반대편 측은 아르부트에서 정화되지 못한 힘이 뒤섞여 변질되어있었다.
“너무 대놓고 데려가면 쓰나.”
내가 하는 것은 크지 않았다. 신성력으로 정화마법을 펼치듯 신력을 그저 정화하듯 펼쳐서 쏟아붓는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는지 균열의 사슬이 맥없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나는 사슬을 잡지 않은 손으로 천천히 허리춤에 매어진 홍단이를 뽑아냈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뽑혀 나오는 홍단이의 붉은 검신 궤적을 따라 잔상이 생겨난다.
상당히 힘을 내뿜는 홍단이는 엄마를 다치게 했다는 것에 상당히 화를 내고 있는 모양새였다.
“움직이지 마세요.”
그리고는 하늘로 끌려 올라가다 중간에서 멈춰버린 프리아 여신을 향해 경고를 한 뒤 홍단이를 휘둘렀다.
서걱!!
그렇게 날아든 홍단이의 검강은 순식간에 프리아 여신의 얼굴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고.
균열 속에서 튀어 나오던 새하얗고 거대한 팔을 잘라내 버렸다.
푸드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균열 속에서 거대한 팔이 계속해서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발악에 가까운 저항이었다.
비록 백혈구에 비교하긴 했지만, 인간의 육신과 세상의 이치는 다른 법.
특히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초월적인 힘인 신력의 경우 비틀린 저 균열에 서린 증오 같은 오염된 정신 에너지를 정화시키거나 태워버리는 게 가능했다.
“시간 끌면 내가 무조건 이깁니다. 나 믿죠?”
프리아 여신을 향해 말하자 그녀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인 채 저항하지 않았다.
물론 의지체가 없어도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균열에서 튀어나온 팔이 나를 계속해서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요격 모드를 가동하기 시작한 륀느의 손에 쥐어진 천칭을 녹여낸 창의 힘이나 내 홍단이로 인해 번번이 잘려나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겉보기엔 정말 느릿느릿하고 아무것도 없는 팔이다.
하지만. 느릿느릿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나의 관점일 뿐이고.
“데이비 님.”
“절대 팔에 잡히지 마. 잡히는 순간 끝장날 거다.”
그 느릿한 팔이 머금고 있는 힘은 상상 이상으로 끈적하고 어두웠다.
그때였다.
[넌…… 실패할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념이 내 머릿속에 밀고 들어온다.
“실패를 무서워하면 사업 못 하지.”
빈정거리듯, 대답하며 홍단이가 한차례 또 휘둘러지자 붉은 궤적이 시간을 무시하며 날아들어 새하얗고 거대한 팔과 균열의 일부를 뒤흔들어놓았다.
[넌 움직일 수 없다.]
“그렇지.”
[너를 막기 위해 나의 손가락이 움직일지니.]
마냥 자아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건지.
“그것도 아니면, 누가 자아가 있는 척 연기를 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사실 상관은 없었다.
물론, 놈의 사념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게임에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보스를 공략하다 보면 보스를 지키기 위해 부하 몬스터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소멸시켜버린 칼룸구스나 일리나와 에이리아가 만났던 놈들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그 수가 몇일지는 정확하게 예측할 길이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움직일 거라는 사실은 완벽한 확신이 서 있다.
[그들이 온다.]
“잘됐네.”
그렇기에. 나는 대비가 가능하다.
“마침 우리 쪽에서도 그쪽에 당한 게 있는 모양이더라고.”
내 말과 함께 저 멀리서 거대한 검기가 시공간을 찢어발기며 창공을 향해 쏘아져 올라간다.
그 여파를 보며 나는 균열을 향해 말했다.
“어차피 시간을 끌수록 내가 유리해져. 넌 나를 못 막으면 그대로 정화돼서 소멸하는 거야.”
[나의 손가락이…….]
“내기하나 하자. 그 손가락이라는 것들이 방어를 뚫고 내게 접근하면 네가 이기는 거고.”
그 반대로 방어를 뚫지 못하면.
그땐 내가 이기는 거다.
당연히 대답은 없지만 내기 자체는 이미 시작된 후였다.
* * *
은발의 수인족이 소녀는 눈앞을 막아선 환한 금발의 소녀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비켜.”
“비키란다고 비킬 거면 내가 여길 왜 왔겠어?”
“또 피를 흘리면서 아파하고 싶은가 봐?”
사실 두 인물이 만난 건 처음이 아니었다.
서슬 퍼런 손톱을 번뜩이며 손가락을 뚜둑 소리 나게 꺾은 소녀가 빈정거리듯 물었다.
“전엔 두 명이 덤벼서 상처하나 못 내지 않았나? 거기에 치명상까지 입고 말이야.”
실제로 수인 소녀는 일리나와 페르세르크 둘 모두에게 부상을 입히고 돌아간 전적이 있었다. 물론 치명상이라고 하기엔 부상의 깊이가 얕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허를 찔린 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오염된 정신체로 만들어진 수인 소녀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기억을 지닌 그녀의 기억 속에 일리나는 그리 신경 쓸만한 적대 대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페르세르크도 없이 홀로 앞을 막고 있으니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콰득!!!
이윽고 수인 소녀가 손톱을 한차례 튕기자 일리나의 주변 바닥에 엄청난 수의 손톱자국이 나타났다.
“이번엔 경고만 했지만 두 번째는 없어. 빨리 비켜.”
그녀의 경고에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일리나가 빙그레 웃으며 칼디라스를 고쳐 잡았다.
“너, 많이 급하지?”
그 한마디에 수인 소녀가 움찔거렸다.
그녀와 연결된 저 하늘의 균열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순 없었다.
균열이 약화되어 사라지면 자신들 또한 사라지게 되리라. 당연히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좀 아픈 꼴을 봐야겠네.”
미소를 지운 채 서늘한 표정을 지어 보인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카아앙!!!!!
동시에 일리나의 정면으로 무형의 발톱이 날아들었고, 칼디라스와 충돌했다.
“우연치곤 잘 막는구나?”
그녀의 공격은 무색이었고, 무취였으며, 형태 또한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이며 그 힘은 가속이라는 법칙에서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바트라나카트.”
“응?”
“내가 지은 내 이름이야. 어때. 예쁘지?”
“조금 기괴한데?”
일리나의 대답에 소녀 바트라나카트는 씨익 웃으며 몸을 낮췄다.
“네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나는 내 이름을 지을 정도로 이 세상이 마음에 들었거든. 그러니까 나를 죽이려 하는 것들에겐 어떤 자비도 베풀 마음이 없어.”
스산한 말과 함께 몸을 낮춘 그녀의 손이 꿈틀거렸다.
푸확!!!
동시에 일리나의 육신이 크게 흔들리며 비틀렸고, 이내 그녀의 어깨에 또 한 번 피가 튀었다.
“흐흣!”
그것을 보며 바트라나카트는 광기 어린 웃음기를 지어 보였다.
“죽고 싶지 않았으면 하다못해 다른 이들도 데리고 왔었어야지!”
그리고 바닥을 재차 공격을 가하려던 그 순간.
서걱!
그녀가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손톱 공격이 일리나가 만들어낸 검기와 충돌하며 상쇄되었다.
“어?”
한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은 말이 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 네가 말했었지.”
상성 상 절대로 일리나가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내가 볼 땐 그 반대야.”
“무슨?!”
또 한 번 공격이 막혀버린 수인 소녀가 급히 공격을 재차 쏟아내려던 순간.
그녀는 자신의 시야가 이상하리만치 높아져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손가락부터 발가락까지 그 어떤 것도 그녀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늘 높아졌던 시선은 이내 천천히 낮아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평소보다 낮아지며 말없이 칼디라스를 든 채 서 있는 일리나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수인 소녀 바트라나카트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라는 의문이 말이다. 이후 그녀의 육체가 하나의 에너지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다시 본래의 형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 정신체라고 했었지. 머리를 잘라낸다고 죽는 게 아닌 정신체.”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일리나를 보며 바트라나카트는 점점 험악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찢어 죽여버리겠어.”
쿠우웅!!!
그때였다.
갑자기 근처에 있던 건물의 벽면이 한순간에 박살 나며 그 안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로구엘레?!”
그것은 몸의 일부가 입자처럼 일그러진 작은 소년이었다.
키가 1미터 남짓한 아주 작은 꼬마 소년은 벽을 박살 내고 튀어나온 뒤 바트라나카트와 눈을 마주쳤다.
“바트라…….”
“뭐 하는 거야 너.”
바트라나카트의 말에 로구엘레라 불린 작은 소년은 그제야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부릅떴고, 그들이 향하던 중앙이 아닌 그 반대편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저건 아니지!”
거친 욕설을 토해내며 말이다.
갑작스러운 그의 그런 태도에 수인 소녀 바트라나카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구구구구구구구궁!!!
갑작스레 저 멀리서 새빨갛고 콩알만 한 눈을 한 징그러울 정도로 근육이 돋아난 백색의 2족 보행형 토끼들이 해일처럼 몰려와 그들을 지나치자 벙찐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수를 헤아리기 힘든 새하얀 토끼의 물결은 일리나나 바트라나카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맹렬한 속도로 그들을 지나쳐 소년을 따라 사라져 버렸다.
이후 하늘 위로 에반젤린이 질린 표정으로 쫓아가는 게 보였다.
“뭐야 저거…….”
분명 이전에 왔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혼란스러워하던 그 찰나.
바트라나카트는 본능이 알려오는 섬뜩한 경고음에 몸을 날렸다.
촤악!!!
하지만 모두 피해내진 못했는지 팔 한쪽이 그녀의 육신에서 떨어져 나갔다.
무감각하게 한 손에 든 칼디라스로 팔을 베어버린 일리나가 자신을 바라본다.
이깟 절단 상 따위는 얼마든지 몸을 다시 붙이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
잘려나간 팔은 어째서인지 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물에 칼질을 하면 다시금 본래 형태로 돌아오는 것처럼 아무리 베어내고 찔러도 그녀의 형체는 본래의 형태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 좀 전의 머리가 날아갔을 때도 돌아왔건만 어째서인지 팔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마치 잘려나간 절단면의 공간이 비틀려버린 것처럼.
“허?!”
당황하는 그녀를 향해 일리나가 백은의 거검 칼디라스에 기묘한 빛을 머금으며 한 발 내디뎠다.
“여기선 뭐가 좀 부서져도 상관없다더라.”
그 한마디에 그녀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그럼 힘 조절 할 필요 없는 거 맞지?”
일리나의 그 미소와 함께 그녀의 주변으로 정체 모를 마나의 기류가 스멀스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전엔 저런 게 없었는데.
인간과 수인의 공통된 상식을 받아들여 자의식이 생겨난 그녀에게 눈앞의 일리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대체…… 뭐야 너…….”
그 물음에도 일리나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에 홀린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공격을 쏘아 보내지만, 일리나는 한 손에 검을 든 채 망설임 없이 그것들을 모두 쳐내버렸다.
공격이 먹히지 않아야 하는데 먹히는 사태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엔 좀 이해가 안 됐지. 보이지도 않는 주제에 물리법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는 공격. 저럴 리가 없는데 하고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지.”
마법도 안 통해. 오러 블레이드도 안 통해. 할 수 있는 거라곤 당하는 것뿐이었다.
바트라나카트가 만들어진 무형의 손톱은 그 수나 범위 화력도 문제지만 우연스러운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상쇄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인지 일리나는 모조리 쳐내는 것도 모자라 바트라가 인지하기도 전에 공격을 날려 그녀의 육신에 치명적인 데미지를 가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녀의 검이 단순히 데미지를 넘어 회복까지 못 하게 틀어막고 있었다.
잘려나간 팔과 육신 사이에 에너지 전달이 안 되게 차단된 것처럼 말이다.
“완전히 무시되는 게 아니고 간혹 막히잖아. 그 점에서 눈치 못 채면 그건 바보 등신이지.”
일리나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마…… 말도 안 돼. 그게 어떻게?!”
애초에 쳐낼 수 있다고 해도 인지하는 게 불가능할 텐데 어떻게 인지를 하는 것일까.
그런 그녀의 외침에 일리나는 제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공격을 볼 필요는 없어. 실제로 네 그 거슬리는 손톱은 데이비도 안 보인다고 하더라.”
느끼긴 하되 신안을 격상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일리나에게는 달랐다.
공격이 날아들면서 찰나 비틀리는 공간이 시야에 담긴다.
“마…… 말도 안 돼…….”
“되거든?”
“괴…… 괴물 같은 년.”
“고마워.”
시공간을 베어야 하는 시공격검을 익히는 주제에 그것을 못 볼 리가 없는 이야기였다.
상대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땐 유리했으나 반대로 그 구조를 파악한 이상 그녀가 다른 이도 아닌 일리나에게 이길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 세상에서 시공간 자체를 눈으로 보는 건 검신 하레스와 일리나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극 상성이라는 말이 이런 곳에 쓰이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