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9화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인 저택은 고요하지만 마치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고생했어. 데이비.
수정구 너머에서 일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갈 때 필요한 거 있어?”
-응, 올 때 메로나.
“그래…….잠깐 들려서 사갈게.”
-헤헤 사랑해 데이비.
“나도.”
일리나의 아이스크림 사랑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한때 그렇게 먹다가 살찐다 라는 한마디를 던졌다가 칼디라스를 미친 듯이 휘두른 전례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할 말은 다 남겼습니까?
우치를 도와 영혼을 관리하는 저승이가 선대 재상의 영혼을 보며 물었다.
-딸아이가 자립하는 걸 더 지켜보고 싶은 욕심이 있소만 불가능하겠지.
“언제까지 내가 당신의 영혼을 정화해줄 순 없으니까요.”
기본적으로 세상의 시스템에 반하는 예외 케이스를 남길 순 없으니 말이다.
내게서 떠난 튜나는 거래처를 순회하겠다는 말만 남겼다.
그녀가 남긴 전언으로는 하다못해 하루 정도는 더 머물러 달라 하였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늦은 시각에 바로 떠날 참이었다.
그런데, 연회를 할거라면 준비를 해야 할 텐데. 그렇게 여유를 부릴 시간이 있는지.
그래도 며칠간 가르친 제자랍시고 신경이 쓰인 것도 사실이었다.
-한데 이상하군. 연회에 참석해야 할 텐데…… 튜나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다니.
떠나기 전 선대 재상은 자신의 딸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굉장히 섭섭한 모습이었다.
-자, 산사람은 산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리 말하며 부여받은 권능으로 영혼의 문을 열어젖힌 저승이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하면, 물러가겠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자 선대 재상은 영혼을 인도하는 자인 저승이가 내게 깍듯이 구는 태도에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덜컹!
“데이비 왕자님!!”
그때였다.
갑작스레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시녀가 급히 뛰어들어온다.
객실에 노크나 허락도 없이 멋대로 들어오는 건 굉장히 무례한 짓이기에 떠나려던 선대 재상의 혼의 표정이 왈칵 찡그려졌지만 나는 그녀를 타박하지 않았다.
시녀의 얼굴이 눈물범벅으로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정중하게. 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묻자 그녀가 허겁지겁 달려와 내 팔에 매달렸다.
“각하…… 아가씨!! 아가씨를 살려주세요!!”
그녀의 외침에 저승이와 재상의 혼이 흠칫했다.
나는 누가 말할 것도 없이 곧바로 그녀를 따라가는 쪽을 택했다.
이후 내가 시녀를 따라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저택의 중앙 홀이었다.
그곳에 실려 온 한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분홍빛 머리카락은 먼지가 잔뜩 묻어있었고, 생기가 돌던 복숭앗빛 뺨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사람이라는 게 단순히 누워있는 것 같지만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주치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격하게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만! 돌아가셨어요. 주치의 어르신…….”
“아닐세…… 아니란 말이네!!! 아직 살아나실 수 있네!!”
누가 봐도 죽은 그녀를 붙잡고 있는 모양새였다.
주치의는 제법 오랜 시간 의학을 익혀온 이였기에 이곳에서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상태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잘 알기에 그의 표정은 파리하게 질려있었다.
-아…… 아아…….
뒤따라온 선대 재상의 혼이 비틀거린다. 그런 그를 저승이가 붙잡아주었지만, 그의 표정은 현 상황을 믿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왕자님…….”
그때 창백하게 질린 집사장이 나를 부르자 주치의가 눈을 부릅뜨며 내게 달려왔다.
“이……이보십시오 왕자님! 당신은 질병관리 본부의 내로라하는 의원들도 모두 인정하는 희대의 천재가 아니십니까! 제발…… 제발 아가씨를…….”
그의 말에 나는 말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깔끔하게 비장 부분을 관통당했다.
단순히 심장이나 머리도 아니고 복부에 찔린 상처로 죽을 수 있는가 하지만 비장 부분은 엄연한 급소. 찔리면 엄청난 과다 출혈과 쇼크로 순식간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자리이기도 했다.
“……늦었네요.”
내 대답에 주치의가 휘청거렸다.
“영혼이 빠져나갔어요. 이건, 껍데기일 뿐이네요.”
마치 사형선고처럼 가해지는 내 말에 몇몇 이들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몇몇 이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이게…… 이게 어떻게 된!”
“비켜주시오! 아가씨는 내가 살리겠소!”
급기야 냉정해 보이던 주치의마저 저렇게 나오는 걸 보며 나는 차갑게 상황을 인지했다.
“륀느.”
“명령 대기 중.”
“핏자국 따라가.”
“명령 인수.”
륀느가 입에 물고 있던 팥빵을 고개를 젖혀 한입에 삼켜버리고는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이후 나는 저승이를 바라보았다.
‘재상의 혼을 인도해.’
-……네.
-아…… 안돼! 안돼!!!!
절규하는 재상의 혼을 보지 않은 채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튜나에게 했던 남을 너무 잘 믿어서 탈이라고 했던 말은 사실 그녀에게만 해당되었던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누가 누굴 타박하는 건지…….
“어떻게 된 겁니까.”
내 물음에 한 시녀가 울먹거리며 튜나를 부르짖으며 대답하지 않는다.
이에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잡고 다시 묻자 그녀가 어렵게 말했다.
“아……아가씨께서 순회를 가시기로 하신 뒤로 연락이 되지 않아서 찾으러 갔는데…….”
왕궁 근처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왕궁?
“왕궁 근처에 사람이, 그것도 일국의 재상이 칼침을 맞고 쓰러졌는데 아무도 몰랐다고? 시체가 죽은 시각이 무려 3시간이 넘었는데?”
“그……그게…… 저도 잘…….”
기가 막힌 상황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의…… 시신을 모셔라…… 나는 이 사태를 왕궁에 긴밀히 보고하겠다. 그리고. 아가씨께서 변고를 당하신 일을 절대 누설하지 마라.”
“하…… 하오나 집사장 어르신!”
“아가씨께서 쌓아오신 모든 것이 모두 무너질 수 있다! 명심해라. 그때까지는 모두 입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억지로 울음을 참듯 집사장이 말하자 시녀와 시종들은 흐느끼면서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튜나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공작저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주치의는 넋이 나간 것처럼 주저앉아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 * *
집사장의 판단에 따라 튜나의 사망 소식은 아직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알베르타의 국왕은 튜나의 사망 소식에 경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내 그녀를 해한 살수를 찾기 위해 은밀하게 총력을 기울이겠다 약속을 붙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일국의 재상이. 그것도 왕궁 근처에서 대놓고 암살을 당했는데 세시간 동안 아무도 발견을 못 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치욕이기도 했을 테니 말이다.
튜나의 죽음에 분노하고, 또 한차례 자신들을 엿먹인 존재에 대해 분노한 국왕의 격노는 어마어마했다.
“데이비 님. 현장은 현재 기사들이 통제 중.”
나는 먼저 핏자국을 추적한 륀느를 따라 튜나가 사고를 당한 위치를 바라보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헤실거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돌아온 그녀는 차가운 시신이 되어있었다.
누군가가 죽는다는 건 아직도 쉬이 적응이 되지 않는다.
당연히 딸의 갑작스러운 피살로 인해 선대 재상의 혼이 격하게 흔들렸지만, 저승이가 그의 혼을 억눌러 현재는 구금되어있는 상태였다.
그 꼴로 윤회의 고리에 올라가 봐야 크게 의미는 없을 듯했으니까.
멍하니 있던 나는 문득 그녀의 상처를 떠올렸다.
“무기.”
내 중얼거림에 륀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설명을 요구.”
“비장을 찌른 무기는 단순한 직검이 아니야. 형태로 따지자면 약간 구불구불한 형태.”
나는 눈을 조용히 감았다.
“마법 검.”
그녀의 환부 쪽에서 느껴지던 아주 희미한 마나의 흔적. 사고현장 주변에 퍼진 어떤 장막의 흔적까지.
누군가가 고의로 노리고 그녀를 살해했다고 볼 수 있었다.
타박…….
-암살자 길드는 아닙니다.
소리 없이 내게 다가와 종이 한 장을 건네주고 사라진 아이나의 보고에 나는 차갑게 그 종이를 바라보았다.
암살자 길드가 아닌데 이렇게 전문적으로 그녀를 살해했다? 그렇다면 남은 범인은…….
“바르고 후작 쪽인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가 여기서 무언가를 한다고 들쑤실 입장인가.
아니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냥 넘기기엔 기분이 상당히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가 되었건 한번 들쑤셔봐서 손해 볼 건 없겠지.
* * *
바르고 후작은 격분한 채 테이블을 내리쳤다.
콰앙!!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격노한 그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정보원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저희의 눈을 피해 벌어진 일이라…….”
퍼억!!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든 나무로 도니 조각상이 그에게 부딪혔다.
피를 흘리면서도 정보원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것처럼 말하는 바르고 후작의 중얼거림에 정보원은 조용히 사라졌다.
“빌어먹을…… 이렇게 죽으면 곤란하단 말이다…….”
그가 주먹을 부서질 듯 강하게 쥐고 중얼거렸다.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그녀가 아무런 준비 없이 암살당한다면 의심은 오로지 그가 모두 뒤집어쓰게 된다.
당연히 그는 튜나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말은 했지만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튜나를 나락까지 끌어내린 뒤 자신의 품 안으로 거둬들이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녀가 죽게 되면 그런 목적 자체에 크게 반하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손을 쓰기도 전에 죽어버린 것이다.
“벨가!! 벨가!!”
이윽고 바르고 후작이 흠칫 몸을 떨며 소리 질렀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하는 얼굴로 그는 정신체 벨가를 불러낸 뒤 물었다.
“설마 네가 죽인 거냐?”
그의 물음에 벨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고파.”
“대답이나 해!!”
“무슨 소리야. 난 아무도 죽인 적이 없어.”
“웃기는 소리 마라! 다른 이들의 감시를 피해 그렇게 그녀를 죽일 수 있는 건 네놈뿐이다!!”
그의 외침에 벨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
“그래! 튜나 드 머전트!! 네가 감시하던 그년!!”
그의 외침에 벨가의 눈이 살짝 크게 뜨여졌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변화에 혼란스러운지 비틀거리고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벨가!! 벨가!!”
뒤이어 그를 불러보지만, 벨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망할……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거지?”
그녀는 인망이 두터운 탓에 누군가가 그녀를 암살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현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황당무계한 현 상황에 바르고 후작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때였다.
덜컥…….
콰앙!!!!
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섬뜩한 압박감이 느껴졌고. 바르고 후작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검은 복장의 누군가가 그의 몸을 짓눌렀다.
“끅…… 끄륵…….”
“질문은 내가 한다. 넌 대답만 하면 돼.”
“누…… 누구…….”
쾅!!
“질문은 내가 한다고 했지.”
싸늘한 목소리에 바르고 후작은 전신의 피가 차갑게 식는 공포를 느꼈다.
온몸이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 속에서 그가 바들바들 떨고 있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물어왔다.
“튜나를 네가 죽였나?”
“…….”
“거짓을 답하면 죽음이 축복이 될 정도의 지옥을 보여줄게.”
그냥 하는 위협이야 많이 들어봤다. 저것보다 더한 말도.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르고 후작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지옥 구덩이에 떨어져 고통받는 환각까지 볼 정도로 두려움에 질렸다.
‘이…… 이자의 말은 진짜다!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초월적인 무언가. 그래. 이를테면 동화에나 나올법한 고등한 종족들.
대체 튜나의 곁에 누가 있었기에.
두려워하던 그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나…… 난 아니오…… 난 아니라고! 난 그녀를 죽일 생각까진 없었어!!”
물론 결백했던 그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걸 믿으라고?”
하지만 대상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제…… 제발…… 나도 그녀가 죽는 걸 원하지는 않았단 말이오! 그녀가 저, 정적인 건 사실이고 그, 그녀가 협상에서 대성과를 거둔 탓에 기분이 거슬렸던 것도 사실이지만…….”
쾅!!!
묵직한 타격에 그의 의식이 날아간다.
그런 와중에 바르고 후작은 들을 수 있었다.
“이 인간이 아니면 남은 범인은 둘 뿐이네. 륀느. 여기서 도망친 그 정신체 놈 잡아 와. 그놈은 너도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다.”
“명령인수.”
그 한마디와 함께 후작의 의식이 그대로 추락했다.
뭔가 바르고 후작의 인지를 아득히 넘어선 무언가가 튜나를 지켜주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만 드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