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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090화 (1,090/1,559)

제1090화

습격 후 홀로 남은 바르고 후작은 몸을 비틀거리며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급히 연락한 뒤 남들이 보지 못하게 몰래 빠져나갔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싸늘한 감각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지 그는 이따금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일이 꼬여도 너무 꼬여버렸다.

쾅!!!

“트릭!! 트릭 백작!!”

격노하며 찾아온 바르고 후작은 분노를 참지 못한 채 바탄 왕국의 대사관에 밀고 들어갔다.

당연히 그의 접근을 막으려는 이들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 나온 트릭 백작으로 인해 멈춰졌다.

“이런. 연회 준비로 바쁜 마당에 왜 준비도 하지 않으시고 이리로 오셨습니까. 후작님.”

“닥쳐라!! 가증스럽고 뻔뻔한 놈!!”

바르고 후작의 격성에 트릭 백작은 잠시 멈칫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 드시지요.”

말없이 돌아서는 그를 노려보던 후작은 성큼성큼 걸어 그를 따라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백작이 안내한 장소는 조그마한 접견실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닥쳐라! 튜나를 죽인 게 네놈들이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이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분명 우리의 거래에 그녀가 방해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절대 죽이는 건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

“그랬던가요?”

그 뻔뻔한 태도에 바르고 후작이 눈을 부릅떴다.

“감히. 바탄 따위가 알베르타의 왕국, 그것도 수도 내에서 이딴 짓을 저질러?”

범인을 확신하는 그의 윽박에 트릭 백작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가 손짓을 하기가 무섭게 어둠 속에서 한 소녀가 스르륵 나타나 바르고 후작의 머리를 붙잡아 책상 위에 찍어버렸다.

“컥…….”

이빨이 몇 개 부러지고 코피가 터진 그가 경악한 얼굴로 트릭 백작을 노려보려 하지만 마치 금속으로 된 무언가에 잡힌 것처럼 그의 몸은 단단하게 압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짓을…….”

“잊으셨나 본데 여긴 바탄의 대사관입니다. 후작. 여기선 내 말이 곧 법이에요.”

“…….”

“뭐, 당신의 말대로 튜나 공작은 저희 측에서 처리했습니다.”

트릭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약속…… 과 틀리지 않나…….”

“약속이라. 맞습니다. 저희가 마약성을 띠는 약재, 혹은 소재들을 수출하면 당신이 그것을 이용해 튜나 재상을 끌어내리고 재상이 되는 것이었죠. 물론 다음 대의 재상이 될 당신은 친 바탄 왕국 파였으니 저희 쪽에서도 이득이라 판단했습니다.”

트릭 백작은 뒷짐을 진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일이 꼬였어요. 마약성 소재 수출은 막혀버렸고, 그 일로 튜나 재상은 역으로 우리 위대한 왕국인 바탄에 큰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죽이는 수밖에요.”

“미…… 미친놈들…….”

“당신이 할 말입니까? 하하하하!! 우리와 손을 잡고 모국의 애국자를 끌어내리려 한 당신이?”

“…….”

“우리도 타국의 재상을 암살하는 미친 짓을 함부로 할 순 없습니다. 근데 말입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지금 그녀를 죽이면 대신 혐의를 의심받을 이가 있지요? 그리고, 현 국왕께선 재상의 죽음에 당신이 연루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극도로 분노하실 터.”

“웃기지 마라! 내가 그녀를 죽이는 데 관여하다니! 무슨 헛소리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녀를 실추시키기 위해 저희와 손을 잡았고.”

그 한마디에 바르고 후작의 얼굴에 혼란이 서린다.

“또 이 나라에 마약을 반입하려 하지 않았소? 이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가 처단당해도 당신 또한 그리 좋은 미래를 보진 못할 텐데.”

“네…… 네 이놈!!!”

“그러니 당신은 우리와 손을 잡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제와서 물러난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킥킥거리며 그가 돌아섰다.

“물론, 우리도 무리하게 그녀를 암살한 디메리트가 크긴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녀의 죽음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 위대한 바탄 왕국이 제국이 되기 위한 위대한 발돋움을 시작할 테니.”

그 한마디에 바르고 후작이 눈을 부릅떴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무슨 짓이냐니. 당신이 바란 물품 이외에 몇 가지를 조금 더 반입시켰습니다. 당신의 인장을 찍어서 말이지요. 물건이 도착하고 있을 테니 도착만 한다면야…….”

그가 차갑게 웃었다.

“우리 왕국은 제국이 되어 대륙을 정복할 발판을 마련하는 겝니다.”

트릭 백작이 고개를 까딱이자 소녀가 바르고 후작을 일으켜 세웠다.

“네년은…… 튜나의 곁에 있던 시녀…… 배신자였나?”

“글쎄? 어떻게 보면 그럴 수 있겠네.”

씨익 웃는 소녀의 미소에 섬뜩함이 느껴진다.

바르고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소리 질렀다.

“벨가!!! 벨가! 이자들을 모두 제압해라!!”

선을 넘어도 너무 강하게 넘었다. 바르고 후작이 바란 것은 알베르타의 몰락이나 튜나의 죽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외침에도 어째서인지 정신체 벨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처음 튜나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으니까.

도나의 압박에 바르고 후작은 자신이 이토록 무력하며,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머저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 * *

왕성에서 발견한 정신체의 추적을 륀느에게 맡긴 나는 말 없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어쩌자고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만, 묘하게 기분이 더럽기 그지없다.

내가 여기서 나서면 좋아질 게 단 하나도 없다. 나서서 잘돼도 평타. 조금만 삐끗하는 순간 하인스 영지가 유지해온 밸런스는 물론, 자칫 라운 왕국에도 귀찮은 사태가 벌어질 수 있으니까.

나는 알베르타의 수도가 내려다보이는 중앙 종탑에 올라 도시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바르고 후작이 아니면,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이는 누가 있는가.

-데이비. 거기서 네가 간섭했다가 조금만 삐끗해도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잖아.

일리나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수정구 너머로 들려왔다.

그녀는 현 알베르타의 상황을 전해 들은 뒤 내게 차라리 다 내려놓고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다.

-국가 간섭권은 용사의 특권이야. 성자인 네가 간섭할 수 있는 건 기적을 행할 때나, 혹은 이단을 처단할 때뿐이겠지. 물론, 성국 소속이 아니니 그것도 힘들겠지만.

“그렇겠지.”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나는 네가 그녀를 위해 들쑤시고 다니다가 피해를 보는 건 원치 않아.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오히려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나를 우선순위로 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선대 재상의 영혼은 딸의 죽음에 윤회를 거부하며 악귀가 될 정도로 저항했다.

그 탓에 저승이는 그의 영혼을 억눌러 안정시키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래도 범인을 추측하자면…… 역시 바탄 왕국이겠네.

“바탄이라…… 그렇겠지.”

-네가 건드린 바람에 튜나가 위협적인 인물이라 판단된 거겠지. 예전부터 바탄 왕국과 알베르타는 서로를 무시하고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거든. 대륙연합이 생기고 나서부턴 곧잘 교류도 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바탄과 알베르타는 국경이 겹쳐있어서 싸움을 자주 하곤 했어.

그 외에도 그녀는 중부대륙 출신답게 같은 중부대륙 국가인 두 국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바탄 왕국과 알베르타 왕국의 문화 싸움부터, 영토 분쟁. 그 외에 여러 가지까지.

-라운과 볼티즈 같은 느낌이네. 다만. 볼티즈의 케이스와 다르게 바탄 왕국은 한때 제국주의를 표방해서 주변국을 점령한 적이 있거든. 국가대전 때 대패하면서 식민지들을 모두 잃었지만. 결과적으로 바탄과 알베르타는 사이가 좋아지려야 좋아질 수가 없지.

생각해볼 수 있는 범인은 바탄 왕국뿐이다. 하지만 조금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별수 있나. 직접 캐보는 수밖에.”

-데이비? 너 설마…… 바탄의 대사관을 털어버릴 생각이야? 그만둬, 지금 바르고 후작가를 털어버린 것도 큰 문제가…….

“일리나.”

-으…… 응?

“제자가 살해당했잖아.”

한마디에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분이 상당히 다운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어야 하나?”

-하지만 그렇게 하나하나 걸다간 언젠가 네가 바란 조화는…….

잘돼도 평균, 못하면 독박이지만.

그래도 선을 넘으면 안 되지.

-그래도 최소 증거는 확보해야 할 거야.

“확신만 서면 상관은 없으니까.”

-어떻게?

“바르고 후작에게 정보를 얻으려고 옷 안에 도청장치와 추적장치를 심어놨거든.”

그런데 이 인간이 급하게 대사관으로 가더라고.

나는 어둑어둑해진 바탄의 대사관을 향해 걸어 나갔다.

튜나의 죽음은 아직 공공연한 비밀이라 거리의 분위기는 평소와 다를 게 없지만, 날이 어두워진 관계로 돌아다니는 인원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저벅…… 저벅.

몇몇 경비병만이 지키고 있는 바탄의 대사관에 들어선 나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에게 미스릴 패를 보여주었다.

“라운의 대공, 1왕자 데이비 올 라운이다. 트릭 백작과 만나러 왔다.”

내 한마디에 경비병들이 눈을 부릅뜨며 나를 경계한다.

하지만.

그들은 곧 얼마 가지 않아 그대로 무너져 내려버렸다.

깔끔하게 기절한 것이다.

고요한 대사관 건물 내부로 진입하는 동안 나는 누굴 만나건 일단 트릭 백작을 직접 보려 했다.

어차피 그 또한 꼬리 자르기의 일환이기에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이들이 정말로 범인이라면 보일 수 있는 특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데이비 올 라운 왕자님.”

이윽고 내부로 들어가자 정갈한 복장의 한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트릭 백작. 데이비 올 라운입니다.”

“익히 명성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왕자님. 바탄 왕국의 트릭이라고 합니다. 백작위를 지니고 있지요. 한데…… 무슨 일로 연통도 없이 이리…….”

무례하게 찾아왔냐는 말을 아낀 그가 나를 탐색하듯 물었다.

“몇 가지 알아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나는 천천히 그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알아볼 것이라 하심은…….”

“제 제자가 살해당했거든요.”

빙그레 웃으며 내가 말하자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린다.

“제자…… 제자라니…… 설마! 튜나 재상을 말하는 것입니까?!”

경악한 듯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좀 알아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런데…… 왜 여길…….”

“여기. 바르고 후작이 있을 텐데요.”

내 미소에 그가 아주 한순간 표정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짓는다.

후작이 이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상관없다는 듯 말을 살짝 바꾸었다.

“그렇지 않아도 후작께서 찾아오셔서 재상을 해한 것이 저희가 아니냐며 따진 참이십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뭐 그럽시다.”

나름대로 자신이 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언제까지 가는지나 보자고.

이후 나는 트릭 백작을 따라 내부로 들어갔고 응접실에 멍하니 앉아있는 바르고 후작을 볼 수 있었다.

“당신은…….”

“바르고 후작. 다시 보내요. 데이비 올 라운입니다.”

내 말에 바르고 후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다시 본다고…… 설마?!”

그러더니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났다.

“별건 아니고. 당신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요.”

내 미소에 그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는 한참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소.”

“아는 것이 없어요?”

내 미소에 그의 표정이 살짝 질렸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표정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뭐 사실 물어볼 건 당신이 아니라 이거거든.”

나는 그의 품 안에서 어떤 장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게 무슨…….”

“도청장치. 알고 있나 모르겠네.”

내 말에 뒤따라온 트릭 백작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그럴 리가! 어떤 마법 아티펙트도…….”

“마법으로 만들어진 아티펙트가 아니니 백날 탐지해봐야 모르지.”

나는 바르고 후작의 품 안에서 작은 장치를 꺼냈고 그것을 미리 준비해둔 물건에 꽂아 재생시켰다.

“차라리 아니었으면 싶다만.”

그러자 생생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일이 꼬였어요. 마약성 소재 수출은 막혀버렸고, 그 일로 튜나 재상은 역으로 우리 위대한 왕국인 바탄에 큰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죽이는 수밖에요.

미…… 미친놈들!

당신이 할 말입니까? 하하하하!! 우리와 손을 잡은 매국노인 당신이?]

익숙한 두 사람의 목소리를 말없이 듣고 있던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뻔해서 말도 안 나오네.”

“이…… 이건 모함이오!”

“모함?”

고개를 돌린 내가 안광을 번뜩이며 트릭 백작을 직시한다.

“대답 똑바로 안 하면 대가를 치르게 될거다. 백작.”

마법으로 탐지하여 추적장치나 도청장치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 이들이었다.

당연히 지구에서 가져온 물건이니 이들이 알 리가 없다. 추적장치와 도청장치를 아공간에 회수한 뒤 나는 빙그레 웃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을 누가 믿겠소! 이걸 가지고 왕궁으로 가보시오! 증거로썬 부족하다 할 테지!”

트릭 백작의 외침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양반들이 믿진 않겠죠.”

“…….”

“그런데 나는 믿잖아.”

그 한마디에 순식간에 사방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들이 모여들며 내게 무기를 겨누었다.

그중엔 도나라는 이름의 튜나의 곁을 지키던 시녀도 보였다.

기본적으로 사람이지만 그들은 특질능력자처럼 어떤 특수한 파장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개조 인간처럼.

“그래. 금기는 아니니까 뭐라 하긴 그렇네.”

금기의 조건은 참 묘하다. 옅은 거 같으면서도 의외의 부분에서 완고하니까.

내 한마디에 주변으로 검은 연기 같은 것들이 흩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검은 무복을 입은 그림자가 스르륵 나타나 그들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바르고 후작.”

싸늘한 내 목소리에 후작이 움찔 떨었다.

“기회 줄 때 돌아오는 게 좋을 거야. 거짓을 말한다면 내가 당신의 저택에서 했던 말을 실현시켜 줄 테니.”

그 한마디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후작은 몸을 파르르 떨다 악을 쓰듯 소리 질렀다. 그의 시선엔 자신을 속인 트릭 백작을 향한 막대한 적의가 서려 있었다.

“이자들이오!! 이자들이 그녀를 죽였소이다!! 나는…… 나는 그녀를 죽일 생각까진 없었단 말이오!! 빌어먹을 괴물 놈들! 네놈들은 정치적 싸움의 선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냐!!”

정치적 싸움의 선? 웃기고 자빠졌네.

“바르고 후작!!!”

트릭 백작의 격성이 바르고 후작을 다그친다.

하지만 어디선가 날아든 단검 두 자루가 트릭 백작의 양어깨를 관통하여 그를 벽면에 고정시켜버렸다.

“커억?!”

“소리를 높이지 마라.”

어둠 속에서 모두의 기척을 숨긴 채 모습을 드러낸 다크엘프. 아이나가 어두운 안광을 번뜩이며 경고했다.

“그림자. 감히 은인에게 무기를 겨눈 자들이다. 제압해.”

“크윽…… 그만!!”

그때였다.

트릭 백작이 나를 향해 소리친다.

“당신은 제삼자요!! 동부왕국의 라운이 우리 두 국가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고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소?!”

그의 외침에 나는 말 없이 그를 직시했다.

* * *

수도에서 멀지 않은 평야의 숲지. 그곳에 나타난 벨가는 홀린 것처럼 어디론가 급히 향했다.

자신이 왜 그곳으로 가는지도 몰랐다. 벨가와 손을 잡고 있는 바르고 후작은 그에게 다른 명령을 내리겠다 하였지만, 벨가는 튜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그녀가 죽은 장소로 갔고, 그곳부터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이동했다.

-배고픈 건 똑같아. 너도 배가 고픈 거잖아. 배고픈 건 슬픈 일이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적대적인 인간이었고, 그녀가 어떻게 되건 관심 없었는데.

왜 자신은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이 냄새의 끝에 도달하면 무언가를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왜…….”

그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내면 일부에선 당장이라도 주변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생명력을 갈취하라는 공복이 그를 괴롭혀왔다.

실제로 바르고 후작의 명을 받고 평야의 수많은 곡물들을 모조리 메뚜기 떼를 조종해 먹어치웠을 때도 허기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튜나가 준 육포를 먹었을 땐 전혀 배고프지가 않았다.

오히려 든든하게 차는듯한 그 공복감은 쉬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평생을 공복 속에 살아야 하는 지옥에서 처음 맛본 달콤한 과실 같은 무언가.

벨가는 점점 속도를 올렸다.

파직!!

하지만 그의 발걸음을 막는 이가 있었다.

쩌어엉!! 쾅!!!

숲 저편에서 나무를 그대로 관통하며 날아든 황금빛의 화염이 둘린 창이 그를 꿰뚫을 것처럼 지나간 것이다.

휘리릭!! 터엉!!

그리고, 그렇게 날아가 닿은 지점일 대를 완전히 태워버린 창은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어디론가 빠르게 날아갔고, 이내 어떤 인물의 손에 잡혔다.

작은 키에 청은발의 머리카락. 무표정한 얼굴의 작은 소녀는 신비로웠다.

붕대를 감은 맨발, 머리 위에 뜬 기하학적인 형태를 지닌 원고리. 마지막으로

세 쌍의 날개.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앞선다.

“목표 발견.”

천천히 날아오른 작은 소녀 륀느는 눈을 부릅 뜬 채 멈춰있는 그를 바라보더니 무감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빠르게 창공으로 날아올랐고.

“제압 개시.”

무시무시한 선고를 내렸다.

쩌엉!!

손에 쥔 거대한 창을 빠르게 회전시켜 역수로 틀어잡은 그녀가 창을 투창하듯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정확히 벨가를 향해 겨누고 던진다.

쩌어엉!!!

소닉붐을 일으키듯 스파크를 일으킨 창이 그를 향해 맹렬하게 날아들자 벨가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해 공격을 피해냈다.

그 어떤 생명체도 자신을 해할 순 없다.

그런데. 눈앞의 저 작은 소녀의 공격은 본능이 위험을 경고할 수준이었다.

저 힘. 일반적인 힘이 아니다.

놀란 벨가가 자신의 힘을 끌어올리며 반격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당장 가야 한다.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향하는 곳 끝에 그녀가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륀느를 벗어날 순 없었다.

륀느가 던진 창은 애꿎은 지상을 파괴하고 멈췄지만.

그 뒤를 따라 수백 미터의 길이에 수십 미터의 폭을 지닌 빛의 창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그의 시야를 완전히 뒤덮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저 배고팠을 뿐인데. 내가 저런 괴물에게 노려질 정도로 잘못한 것일까.

자신,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다수의 존재들이 그저 오랜 시간 배고픔에 허덕였을 뿐인데.

하늘에서 그를 향해 겨누어진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빛의 창들을 보며 벨가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 주저앉아버렸다.

콰아앙!!!

뒤이어 숲 전체에 빛으로 된 창이 쏟아지며 엄청난 폭음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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