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4화
귀를 찢는듯한 굉음과 함께 낙하하자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공간이 나를 반기기 시작했다.
절반은 파괴되었지만, 거대한 공간이라는 것은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파괴된 잔해에서 어떠한 흔적들도 보였다.
“데이비 님. 임무완수.”
약간 지친 기색으로 내게 보고하는 륀느를 바라본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물었다.
“꼴이 왜 이래. 세피로스(백익)를 오래 쓰기라도 한 거냐?”
“나태함의 결과. 륀느. 제대로 된 에너지 충전을 하지 않았다 보고해.”
하긴, 그동안 먹는 데에 정신 팔려서 자연적으로 에너지를 수급하는 걸 게을리하긴 했지.
“세상에 어떤 로봇이 할 일을 두고 게으름을 피우냐.”
“반박 불가. 감정회로가 매우 빠르게 가열 중. 륀느가 이것을 부끄러움이라 명시.”
“됐어. 크게 안 다쳤으면.”
담담하게 말한 뒤 고개를 들자 아주 개판 같은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분이라도 일어났나?”
눈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문어처럼 엄청난 수의 촉수가 달린 몸체에 원형태의 이빨이 촘촘히 난 괴물의 입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의 입안으로 혓바닥 대신 사람의 상체 같은 것이 달려있는 게 보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든 형체였다.
그리고, 그 괴물은 촉수를 이용해 정신체를 휘감고 있었다.
“저거 같은 편 아니었나?”
내 물음에 대답한 건 륀느가 아니었다.
[다…… 당신!]
“튜나?”
황당한 상황에 내가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미안한데 쟤 좀 구해줘!]
그녀의 외침에 나는 말 없이 정신체와 괴물을 바라보았다.
다리 한쪽이 사라지고 팔 한쪽도 없다. 멀쩡한 상태가 아닌 정신체, 누가 봐도 한바탕 싸우고 괴물이 우세를 점친 상황이다.
“정신체치고는 약한데?”
“륀느의 공격에 의한 타격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
그렇다고 해도 많이 약하다는 느낌은 강하게 들었다.
“지상에선 분명 이곳을 알 수 없었을 텐데?! 어…… 어떻게 이곳을?!”
“땅 파서 내려왔지 어떻게 오긴.”
“우,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겁에 질린 듯 괴물이 소리 질렀다.
괴물은 맨들맨들한 두피에 핏줄을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여길 어떻게 찾았냐 묻는 거다!!”
“이거 웃긴 놈이네.”
헛웃음을 흘린 내가 한발 움직이자 괴물이 흠칫 놀라며 물러났다.
쩌억!!!
하지만 내가 이미 붉은 궤적이 날아들어 촉수 일부를 깔끔하게 잘라내 버렸다.
“커억?! 어…… 어떻게…… 검은 분명 움직이지 않았을 텐데?!”
내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듯 괴물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확실히 언 듯 보면 홍단이가 전혀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분명 검을 휘둘렀다.
“네가 못 봐놓고 왜 남 탓을 하나 그래.”
내 헛웃음에 괴물이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저 괴물을 여기까지 끌어들이다니, 도나! 이 쓸모없는 년!!”
도나, 분명 그녀도 제법 저항하긴 했다. 하지만 그림자를 너무 우습게 보았다는 게 큰 실책이었다.
물론 괴물의 윽박에 도나가 대답해줄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다.
그녀는 현재 그림자에게 제압당해 있을 테니 말이다.
괴물의 등장으로 인한 소란은 바르고 후작 쪽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그와 그리 달가운 사이는 아니지만 바탄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아버린 그의 입장에선 나와 손을 잡아서라도 바탄을 물 먹여버리는 걸 간절히 바랄 터였다.
“젠장!”
그때였다.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그가 순식간에 정신체를 한입에 꿀꺽 삼켜버렸다.
쩌억!!
이에 내가 반사적으로 홍단이를 휘둘러 놈의 몸체를 반 토막으로 잘라내 버렸지만, 녀석은 끝내 죽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악!!! 망할! 아프다!!”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비틀자 붕괴하던 주변 공간이 더욱더 부서져 내렸다.
놈의 크기를 전부 가늠할 순 없지만 지금 드러난 부분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저주를 퍼부어서 뿌리 끝까지 말려버릴까.
다만 그렇게 하면 남는 게 없으니 조금 여유를 두는 것도 좋으리라.
온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던 괴물은 나를 한차례 노려보고는 검은 먹물 같은 것을 방출했다.
그리고는 내가 먹물을 장막으로 틀어막는 그 순간 바닥을 부수며 사라져버렸다.
도망치는 데엔 마치 이골이 나 있는 듯한 행동거지였다.
괴물이 사라지고 그 틈으로 바위들이 쏟아지며 더욱 빠르게 붕괴하기 시작하자 나는 륀느에게 고개를 돌렸다.
“륀느.”
“명령 대기 중.”
“우선 상황설명 좀 해줄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 손절을 하던, 찾아가서 말려 죽이건 하지.
그래도 제자였던 튜나를 헤친 놈들이니 대가를 치르게는 해주겠다만, 사실 냉정하게 분석하면 타국의 일에 이렇게 마구잡이로 간섭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내가 타국에 밀고 들어가는 건 대부분 내 가족과 관련되었거나 하인스 영지, 혹은 나 자신과 관련된 이들의 일이 대부분이었으니까.
* * *
륀느와 튜나에게 현 상황을 전해 들은 나는 망설임 없이 튜나의 귀를 콱 잡아당겼다.
“멍청하기는. 호위 하나 없이 길거리를 쏘다녀? 네가 어린애냐? 어? 어디 겁도 없이 쏘다녀. 내가 말했지. 내일이 없이 오늘만 살아가는 놈들은 앞뒤 위아래가 없다고, 그런 놈들이 재상이라고 널 비켜 갈 거 같아?”
물론, 실제로 튜나를 건드리는 미친놈은 없을 것이다. 알베르타 왕국 내에서 튜나를 향한 백성들의 민심은 굉장한 편이었으니까.
정확히는 선대 재상이 펼쳐둔 덕이지만.
나름대로 조사해 본 바로는 알베르타 내부에 있는 다수의 거대 갱단이나 조직에서도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머전트 공작가라는 점이었다.
그들의 저력에 겁을 먹은 게 아니라 재상이 생전에 펼친 덕 때문이라는 모양이었다.
[꺅!! 놔…… 놔요. 이거!!]
“내가 사람 함부로 믿지 말라고 했지.”
[아파! 아프다고!]
허공에 뜬 채 버둥거리는 그녀의 저항에 손을 놓아주자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진 채로 내게 소리 질렀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귀신을 만질 수가 있어?!]
빽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머리를 콱 잡은 채 눈을 부릅뜬다.
“야. 내 말이 안 들리나 보다? 어?”
[죄…… 죄송합니다…….]
“죄송? 하. 내가 재상정도 되면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가 불러올 수 있는 참사가 얼마나 많은지 다 알려주지 않았나?”
[그럼 당신이 잘못한 거잖아! 왜 귀신을 때려!!]
“이게 어디 하늘 같은 교관님에게 대들어, 뭘 잘했다고!”
빡!!
그녀의 이마에 강렬한 딱밤이 가해지자 비명을 내지르며 허공을 굴러다녔다.
내가 생각해도 억지에 가까운 행동거지였지만 평소 이상으로 과하게 그녀를 괴롭힌 것은 그녀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안도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숙하긴 하지만 그녀를 며칠 가르치면서 정이 든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멀쩡해 보이네.”
내 말에 이를 부득부득 갈며 노려보던 그녀가 멈칫했다.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물어왔다.
[내가 죽어서…… 놀랐어요?]
“놀라긴 얼어 죽을. 꿈자리 뒤숭숭해진다.”
[아하하…… 걱정하셨구나.]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가 돌아섰다.
그리고는 몸을 웅크린 채 파르르 떤다.
그 모습에 장난스레 물어보았다.
“야. 우냐? 울어?”
[아닌데요.]
울음기 섞인 대답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나였다.
“쟤 왜 진짜 우냐?”
영체만 남은 주제에 몸을 파르르 떨며 내게 등을 돌리고 갑자기 흐느끼다니. 설마. 내가 이 상황에 놀린 게 서러웠던 것일까.
“야. 미안하다. 죽은 마당에 놀리기 까지 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쳐다봐야 할 거 아니야.”
[지금은…… 좀 그런데요…….]
그리고는 휙 도망가버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영혼석을 찾았지만, 그녀는 죽은 몸이다. 이 일이 정리되는 대로 저승이를 시켜 선대 재상과 함께 윤회의 고리에 올려주는 게 맞으리라.
그때 륀느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바지춤을 잡아당겼다.
“엉?”
“데이비 님…… 륀느의 수리를 요망…… 신력을 요청해…….”
세피로스를 각성한 이후로 녀석은 신력만 부여해주면 스스로 힘을 회복하거나 수복이 가능해졌으니 상당히 편해진 느낌이었다.
엎드린 채 추욱 늘어져 있는 륀느의 등에 손을 올려 신력을 끌어올리자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회전하며 힘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이내 륀느의 힘이 본래대로 돌아오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도망친 놈부터 잡아볼까.”
[잠깐만요.]
“음?”
그때 소매로 눈가를 닦아낸 튜나가 돌아서며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마주하더니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저…… 저는…….]
“말해봐. 더 멀리 도망치면 귀찮아진다.”
[저는 살 수 있나요?]
고민하던 그녀가 용기 내 질문을 했다. 이에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차갑게,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뜨며 단언했다.
“불가능하지. 넌 이미 죽었어.”
[그건…….]
“나도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현실은 직시해라.”
그녀에겐 잔인한 말이지만, 체념은 빨리 할수록 좋으리라.
* * *
괴물을 추적하는 건 육안으로는 쉽지 않았다.
지하 50여 미터는 우습게 파고들어 간 거대한 땅굴이 마치 개미굴처럼 퍼져 있었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모를 동굴은 언 듯 보기엔 그 기괴한 문어 괴물이 뚫어놓은 것 같지만 그것만큼은 아니리라.
실제로 촉수에게서 빠져나온 륀느가 연구시설로 들어갔을 때 문어 괴물은 그곳에 잠깐 동안 진입하지 못했었으니 말이다.
즉. 이 지하에는 알베르타 왕실조차 알지 못하던 고대의 유적이 존재한다.
그게 내 결론이었다.
바탄은 정작 이 유적을 알베르타보다 먼저 발견했고, 알베르타 모르게 연구시설을 장악하여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마냥 그렇게 생각하면 참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던 중 나를 더욱 황당하게 만드는 것은 얼마 가지 않아 발견된 어떤 왜곡 결계였다.
추적을 막고, 외부에서 침입을 하지 못하게 공간 자체를 왜곡시켰다.
중간에 무슨 사태가 벌어진 것인지 유적의 시스템이 부서지면서 왜곡 결계가 내부에서 부서져서 지상과 이어졌지 그냥 두었다면 륀느의 흔적이 있었어도 찾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아주 거대유적이네. 알베르타가 머저리도 아니고 이걸 몰랐다니.”
차라리 유적이 바탄 왕국 내에 있었다면 말이 되겠지만 이건 선을 강하게 넘은 수준이었다.
[예전부터 알베르타 내부엔 친 바탄 세력이 많았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죠. 바르고 후작을 따르는 귀족 휘하에 이 사태를 도와준 이들이 있을 거예요.]
바르고 후작도 바탄 왕국과 손을 잡은 쪽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는 이 일로 알베르타가 바탄에 의해 크게 흔들리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다.
“수족 관리 못 하는 머리통이라니. 내가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왜…… 왜요!]
“그래도 가르친 제자가 살해당했는데. 그냥 두리?”
[잠깐만요…… 그럼 설마. 지금 알베르타의 일에 간섭한 건가요?! 그렇게 되면 당신이…….]
“죽고 영혼상태이면서도 그런걸 신경 쓰나?”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나 때문에 지금 당신이 얼마나 큰 손해를 보고 있는데!]
그녀는 영특하게도 내가 이번 일에 관여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바로 눈치챘다.
“뭐, 뻔하지 지금까지 눈치만 보던 국가들이 살살 간을 보면서 내 영향력을 줄이려고 악을 쓸 거야.”
내 대답에 그녀는 인상을 찡그린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걸 알면서…….]
“알아도 해야지.”
담담하게 말한 나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일단, 며칠밖에 안 됐지만, 제자가 살해당했는데 그냥 둔다? 이쪽이 내겐 더 큰 손해야.”
[그게 합리화되진 않아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다 내려놓고 하인스로 돌아간다면…….]
“그건 내가 사절이다. 아, 이놈 흔적 찾았다.”
콰아아앙!!!
추적을 방해하면서 끝내 도망치던 괴물이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나는 놈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괴물이 어째서 흔적을 남겼는지도 알 수 있었다.
[아하하하!!!]
거대한 땅굴 속 또 다른 유적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괴물은 처음 봤을 때본단 작아져 있었다.
그 형체가 한눈에 다 보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놈이 내뿜는 힘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아아!! 활력이 넘쳐!! 이런 건 처음이야!]
마치 힘에 취한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양팔을 뻗고 소리 지르고 있던 괴물의 시선이 나를 발견하고 시야에 담았다.
전체적으론 문어를 연상케 하지만 긴 주둥이나 빨판 없는 촉수, 그리고, 거대한 입속에서 튀어나온 혓바닥 대신의 인간 상체는 좀 기괴하기 그지없다.
이제 보니 문어라고 하기도 참 뭣한 기괴한 모습이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뒤따라온 튜나가 질려버린 듯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진화에 성공한 거지. 몸 안에 있던 유전자들이 모두 활성화되었거든!]
괴물이 양손을 펼치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마 이 정도일 줄 몰랐어. 이 정도면 네년의 영혼석도 필요가 없겠는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음? 정신체라 불리던 그 꼬마 녀석을 소화시킨 것뿐이다만.]
정신체를 소화시켜? 일반적으론 그게 불가능할 텐데?
괴물이 자신의 입안에서 어떤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정신체 벨가가 허리에 매번 차고 다니던 비상식량이 담긴 주머니였다.
[저항할 힘도 남지 않은 주제에 몸 안에 이만한 활력을 지니고 있다니! 내 힘과 아주 딱 맞잖아!]
마치 마약에 취한 사람처럼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괴물이 고개를 기괴하게 꺾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무형의 기운이 그대로 나를 강타했다.
이에 인상을 살짝 찡그리자 그는 기분이 좋은지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미안하게 됐어. 유전자가 멋대로 날뛰는 것 같아서 말이야.]
쩌어어엉!!!
반사적으로 신력을 둘러 공격을 막아내자 괴물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비쳤다.
[이제 됐어. 멍청한 알베르타도,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역겨운 바탄도 전부 복수할 수 있다고.]
시너지가 만나 폭발적인 효과가 드러난다.
정신체 벨가는 생명력에 굉장히 특수한 체질을 지닌 존재였다.
그리고 저 괴물 또한 생명력을 기반으로 한 활력이라는 힘을 기반으로 힘을 축적하는 케이스이리라.
굳이 적대하는 그를 살려둘 필요가 없기에 나는 홍단이를 거두고 청단이를 뽑았다.
웅웅 거리며 청단이가 내 손에 잡힌 게 기쁜지 공명한다.
“다들 불사라 칭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계획이 있지.”
[뭐?]
“한번 썰려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쩍!!
불사의 권능을 지니고 있어도 그것을 절단하고 베어버리는 청단이의 권능이 발현된다.
그리고.
순식간에 괴물의 상체가 조각나듯 갈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침묵하는 괴물을 보며 나는 턱을 어루만졌다.
청단이로 베어 넘길 때 불사의 권능만 믿고 있는 놈들의 경우 불사의 근원과의 연결을 끊어버릴 수 있는데. 그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이건 마치 불사의 힘에 기대어 부활하는 게 아니라 거대한 몸집 중 일부에 칼집을 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단순 상처만 나는 것이라면 청단이로 베어본들 치명상이 될 리가 없으니까.
실제로 놈은 멀쩡하게 움직이며 잘려나간 조각들을 먹어치웠고 이내 본래대로 회복하듯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법적인 힘이 아닌 단순 체질적인 재생이었다.
압도적인 생명력을 기반으로 한 재생.
이에 나는 말 없이 청단이를 바라보다 홍단이까지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두 자루의 검을 합쳐 청적색의 검, 초단이를 만들어냈다.
“그럼 한 번 더 가보자.”
우웅!!!
청적색의 검기가 모여들기 시작하자 괴물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당당하게 소리 질렀다.
[좋아! 화끈하구나! 그럼 그에 맞춰 나도 움직여주는 수밖에!]
그렇게 소리친 그가 빠르게 움직이며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벽, 천장. 바닥을 가리지 않고 덩치에 맞지 않게 엄청난 속도로 미끄러지며 내 틈을 엿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말없이 눈에 푸른 빛을 번뜩이며 놈을 바라보던 륀느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비 님. 토트리아스!”
토트리아스.
고대 시대 삼신의 전쟁 당시 나타났었던 심연의 신 타나토스의 잔재였던 종족 중에 하나.
슬라임 형태의 지하 종족.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며 끝도없이 커지는 괴형체.
고대에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종족이다. 물론 이것도 과거 흉신과 싸울 때 알아낸 내용이지만 말이다.
이미 사라진 종족에 대해 더 자세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겠나 여겼지만, 하필 그 토트리아스라는 종족의 샘플이 이 고대유적에 보관되어있었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티오니스 대륙의 곳곳에는 1만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잔재들이 조금씩 남아있다.
륀느가 보관되어 있던 오지의 유적처럼 말이다.
“토트리아스라…… 그럼 저 생명력도 이해가 되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저 괴물의 형태, 재생력도 이해는 갔다.
마법적인 힘이 아닌 육체 그 자체가 마치 플라나리아처럼 자체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꼴이니까.
이런 불사체가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귀찮은 케이스이기도 했다.
타나토스가 달이 되면서 놈의 잔재로 만들어진 것들도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흔적을 인간들이 겁도 없이 손을 댔다가 저런 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야 할까.
바탄 왕국은 개조 인간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했었으니 눈앞의 괴물 같은 실패작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주변을 빠르게 배회하며 내 틈을 보던 녀석의 눈이 한순간 번뜩인다.
동시에 천박을 박차며 나를 향해 빠르게 접근한 녀석이 나를 위협하듯 촉수들을 치켜세웠다.
스릉…….
물론, 놈이 어떤 놈이건 적을 살려둘 이유는 없었다.
청단이로 안되면 초단이로 베어버리는 수밖에.
조금 베어서 안 되면 일대 전체를 베어버리는 수밖에.
그조차 안되면.
까짓거 중력 균열을 만들어 처박는 것도 방법이리라.
하지만 나를 위협하던 녀석의 행동은 굉장히 뜬금없었다.
[협상을 제안한다! 데이비 올 라운!]
뜬금없는 소리에 나와 튜나, 그리고 륀느까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얘 뭐라는 거야.”
[우리는 같은 적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괴물이 씨익 웃어 보였다.
[안 그런가?]
마치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그를 보자 문득 어떤 감정이 샘솟았다.
이건, 그래. 짜증이다.
“안 그래 이 새끼야.”
콱!!
놈의 팔을 잡은 내가 눈을 번뜩였다.
붉은 공허를 아작내면서 얻어낸 고유권능.
생명력 제어의 힘이 놈에게 스며든다.
타나토스의 잔재로 만들어진 생명력을 기반으로 하는 괴물.
벨가도 그랬지만 생명력을 기반으로 하는 놈은 생명력 그 자체에 절대권한을 지닌 나와 상성이 극도로 좋지 않다.
갑자기 자신의 몸 안에 생명력이 멋대로 폭주하기 시작하자 괴물이 당황한 듯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아까도 말했잖아.”
자신이 불사라고 굳게 믿는 놈들은 하나같이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다고.
썰려보기 전까지는.
놈의 거대한 육체가 마치 수분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말라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갸아아아아악!!! 이……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난 아직 복수도 못했…….]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바스러져 버린 놈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적 앞에서 자기 신상정보를 상세하게 말하는 것들이 제일 먼저 죽는 거야.”
* * *
“메기.”
하인스 영지로 돌아와 영주성의 옆에 몸을 엎드린 채 곤히 잠들어있던 흑룡, 창공의 폭풍 용왕 메가로드리아는 갑작스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감히 자신을 메기라고 부르는 자는 많지 않다.
영지민들도 수호신, 수호신 하지만 자신을 두려워하니 말이다.
[어떤 건방진…….]
화를 내듯 말하던 메가로드리아가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그의 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페르세르크였다.
함부로 까불었다가 어떤 뒷감당을 감당해야 할지 모를 존재.
사실 메가로드리아가 가장 두려워하는 숨겨진 하인스 영지의 실세였다.
“본녀를 그놈의 곁으로 데려다줘.”
[무슨 일로?]
떨떠름하게 메가로드리아가 묻자 페르세르크가 환하게 웃었다.
“데이비 이 개자식이 아무래도 바람을 피우는 것 같으니.”
밑도 끝도 없는 그 한마디에 메가로드리아는 날개를 펼쳤다.
그녀의 말을 의심하거나 하지 않거나 관심 없는 분야지만 지금 페르세르크의 말을 거슬렀다간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이던가. 창공의 왕이며 환수의 왕이다. 아무리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여기서 물러날…….
[올라타라. 빠르게 데려다주지!]
수도 있는 법이지. 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