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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095화 (1,094/1,559)

제1095화

생명력의 제어를 내게 빼앗기고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던 놈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생명력을 주 에너지로 다루는 놈인 만큼 그 생명력을 강제로 환원시켜 세상에 흩뿌려버리면 놈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사라지게 되는 것일 테니까.

[안……돼. 내가 의식을 잃으면, 내가 의식을 잃게 되면…….]

필사적으로 내 팔을 붙잡고 무어라 말하던 그가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괴악한 덩치와 잘난 계획치고 참 허무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생명력에 절대적인 권한이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가진 않았을 테지만.

물론, 죽어버린 놈에게서 정신체 벨가를 되찾는 건 불가능했다.

허무하게 사라져버리는 괴물을 바라보던 튜나는 문득 륀느가 근처의 벽면을 슥슥 쓸어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리다니…….”

튜나는 자신을 구하러 왔다던 소년, 정신체인 벨가가 같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에 씁쓸함을 느낀 듯 보였다.

그래 봐야 적일 텐데.

그녀는 쉽게 떨쳐내질 못했다.

괴물은 죽기 전 자신이 의식을 잃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론 어떤 변화도 없었다.

“여긴 어떻게 처리한다…….”

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이곳에 대규모의 왜곡결계를 추가로 설치하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장소는 알려져 봐야 별로 좋을 게 없다.

닥치는 대로 부수고 먹어치우는 지저 종족을 연구해서 나올만한 건 그 괴물처럼 유전자가 변이된 존재가 전부일 테니까.

“음?”

그때 륀느가 어딘가를 본다.

“왜 그래.”

“……기분 탓.”

짧게 답한 후 자박자박 걸어 나가는 륀느를 나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 * *

바탄 왕국의 비밀 시설을 모조리 파괴한 후 나는 바르고 후작과 대면 중이었다.

트릭 백작이 죽었고, 바탄 왕국의 실험 희생양으로 추정되는 괴물도 죽었다.

그 외에 그 시설 내부에 숨어있던 몇몇 인원들을 그림자들이 모두 잡아 들인 참이었다.

“후우…….”

이후 의도하지 않게 서로 같은 배를 타게 된 바르고 후작은 자신을 속인 바탄 왕국과 자신을 따르는 척 몰래 바탄 왕국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려 들었던 이들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그 덕인지 그는 이번 사태의 뒷정리는 반드시 자신에게 맡겨달라며 호언장담했다.

현재 튜나가 죽은 시점에서 그의 권력은 막강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물론, 오래가진 못할 테지만 그의 분노는 여지없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승아.”

내 부름에 검은 도포를 입고 있던 저승이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영혼석에서 영혼 빼내는 대로 바로 회수해서 고리에 올려. 아, 영혼이 조금 더럽혀진 상태니까 정화시키는 것도 잊지 말고.”

[하지만 이런 일이라면 우치 님이 직접 하시는 게.]

“그 인간 뺀질뺀질하게 도망치는 것 때문에 못 미더워서 그래. 그래도 며칠 동안 돌봐준 정이 있는데. 네가 신경 좀 써주면 좋겠다.”

[후우…… 예.]

본인이 생각해도 그것을 반박할 수단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양반 언제 한번 잡아서 혼쭐을 좀 내주십시오.]

“걱정 마. 비연이 이를 박박 갈고 있으니 조만간 누가 됐건 끝장날 거야.”

물론 대부분의 승리는 비연이 가져가지만 그걸 계속 버티고 있는 우치도 대단하다 싶을 정도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신기한 듯 저승이를 보던 튜나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 시신은요?]

“장례를 준비 중이야. 아쉽냐?”

[……아쉽지 않으면 거짓말이겠죠.]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미안하다.”

짧게 사과하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에요. 당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는 서러움이 몰려왔는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아직 할 것도 많았는데.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현재 공작가에선 그녀의 영혼이 아직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녀의 영혼이 이곳에 있는걸 알면 분명 이런저런 소란이 일 테니까. 괜한 소문은 퍼뜨려서 좋아질 게 없었다.

[바르고 후작은…….]

“그 인간. 네가 죽었다는 걸 알고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바탄 왕국을 몰아붙일 기세더라.”

[웃긴…… 인간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또 이렇게 죽다니…… 난 왜 오래 살아보질 못하는 거지…….]

그녀의 중얼거림에 내가 물었다.

“전생은 어땠나.”

내 물음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당신…….]

[전에 내가 말했던가? 너와 나는 조금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세상에 전생의 기억을 지닌 채 윤회하는 존재는 사실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아주 특이한 케이스로 내가 그러했듯. 또 그런 케이스가 없으리란 보장 또한 없었다.

“네 본래 고향은 어디였는데.”

[……룩스…….]

그녀의 중얼거림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룩스 대륙. 심연의 공주이자 베르단데와 스쿨드의 언니. 헤라클래스의 수양딸 중 첫째인 그녀가 완전히 파괴해버린 세계.

환수 소환사 셰인 스크리프트의 고향이기도 한 세상이다.

그녀는 쪼르르 날아 자신이 본래 업무를 보던 테이블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테이블에 닿지도 않는 손을 뻗어 책상 표면을 쓸어내며 중얼거렸다.

[전 고작 24세 정도에 죽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티오니스야 대륙 성년이 16세라지만 룩스 대륙은 성년의 기준이 20살이었던 거 같기도 했던 것 같기도 했었다.

[경영학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처럼 남자와 데이트도 하고, 좋은 직장에 좋은 가정 꾸려서, 귀여운 아이를 낳고 죽고 싶었어요.]

그런데.

죽음은 너무 허무하게 찾아왔다.

여행을 가던 도중 사고가 나면서 배가 전복되고 그녀 홀로 무인도에 떨어진 것이다.

영화에서나 생존이 가능하지 보통의 경우 무인도에서 아무것도 없이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다.

그녀의 사인은 아사였다.

극심한 탈수와 피로, 배고픔을 그녀의 육체가 버티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배고픔이라는 단어에 그리 민감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됐고. 영혼석에서 네 영혼을 꺼낸다.”

[잠깐만요. 산사람은 몰라도 죽은 사람 소원 정도는 들어줄 수 있잖아요.]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아…… 나랑 하루만…… 하루만 같이 데이트해줘요.]

“뭐?”

[안 돼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래. 까짓거 이야기 정도 들어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현재 그녀는 영혼석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다. 그런 만큼 그녀가 이동하려면 직접 누군가가 영혼석을 가지고 이동해야 했다.

“좋아 도와줄게.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내 물음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고향.]

하하 웃으며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아하하 장난이에요!]

“……륀느. 여기서 기다려. 죽은 녀석 소원만 들어주고 올 테니.”

그 말과 함께 내가 영혼석을 집어 들었다.

[어? 어어? 뭐하는……]

“뭐하긴 고향 가고 싶다면서. 네가 바라던 그 고향이 지금 어떤 꼴인지 직접 보라고.”

그 말과 함께 영혼석을 쥐지 않은 남은 손으로 허공을 가볍게 그어 내리자 균열이 찢어지며 그 사이로 보랏빛 에너지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튜나가 당황한 듯 소리쳤지만 나는 미련 없이 균열 너머로 몸을 던졌다.

* * *

공간이 찢어진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과 부서진 고요함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다 왔다.”

내게 끌려 이동하며 겁을 먹었는지 눈을 꼭 감고 있던 그녀는 곧 내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게 무슨…….]

“이제와서 어디가 어디라고 말은 못 하겠지만. 룩스는 현재 이 상황이야.”

[이게…… 제 고향인 룩스라고요?]

“그래. 환수 소환사 셰인 스크리프트가 살았던 세상.”

룩스 대륙의 영웅을 언급하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세상을 구한…… 삼환수왕의 주인!]

그녀가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너 대체 정제가 뭐야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솔직히 배려가 있으면 이런 꼴이 된 세상을 보여주진 않겠다만. 적어도 네가 고향에 대한 미련은 버렸으면 한다.”

[제가 죽고 얼마나 흐른 거죠?]

“음…… 글쎄. 달력이라는 게 본래 금방금방 변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말해주자면 테무스 320이라고 했던가?”

[200년…… 전…….]

그녀가 허탈하게 주저앉아버렸다.

[내가 죽고 200년이나 지났다고…… 그리고 이 세상은 완전히 망가졌고…….]

멍하니 중얼거린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여기가 룩스란 말이에요?]

“그렇다니까 그러네. 속고만 살았나.”

[당신이 의심하는 법을 배우라면서요.]

쓸데없는 곳에선 습득력이 빠르다.

“거짓말은 안 해. 냉정하게 고향에 대한 미련 버리라고. 룩스 대륙에 다시 생명체가 생겨나려면…… 못해도 천년은 더 있어야 할 거다.”

거짓말이다. 룩스 대륙의 생명체가 멸절했다면 이곳에 다시 누군가가 살 여건이 되기까지 몇천, 몇만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심연의 공주, 울드가 파괴한 세상의 흔적은 이토록 잔혹했다.

“자 다 봤으면 이동하자.”

[누구예요?]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풍화된 나뭇조각을 집어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이지만 이곳은 분명 사람이 살았던 도시가 분명했다.

[대체 누가 이곳을 이렇게 만든 거냐고요!!]

“튜나 드 머전트. 그걸 알면 어쩌게?”

[그거야…….]

“복수라도 하게? 죽은 주제에?”

내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정신 차려. 넌 죽었어. 네 목숨 소중히 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물론, 네가 죽었으니 여길 보여주는 거다만.”

[…….]

“세상을 파괴시킬 생명체가 내려왔어. 룩스 대륙은 내가 손대기도 전에 무너졌고. 그게 전부야.”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뭐죠?]

이쯤 되니 내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당신…… 정말 데이비 올 라운 맞아요?]

“맞아. 조금 기이한 경험을 했을 뿐이지.”

내 대답에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두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알베르타의 독녀가 되어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오면서 재상이 될 준비를 했죠.]

그녀가 진정한 것은 약 20분 정도 후였다.

생각보다 정신을 빨리 차린 것은 칭찬해주리라.

[첫 번째 인생은 너무 허무하게 죽어버렸으니까. 두 번째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녀는 더욱 열심히 했다. 첫 번째 생은 너무 어이없이 죽어버렸지만 두 번째 생에서 그녀가 명실상부한 재상이 된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세상에 과로사도 많다.”

내 타박에 그녀는 입을 삐쭉였다.

[그런데 죽어버렸네.]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제 가요. 다른 데로 가고 싶어.]

“어디로 데려다줄까.”

[정말 어디든 갈 수 있어요?]

“그래.”

내 말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짓궂게 웃었다.

마치 이건 안될걸? 하는 듯한 미소였다.

[옛날에 동화책에서 정령들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어요. 정말 아름답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가보면 알겠지.”

[자…… 잠깐만요! 정령계에 간다고요?!]

“그래. 멀미 좀 날 수 있으니 잘 참아라.”

우우웅!! 츠팡!!

그녀는 아직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정령계에 도착한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정령계에 왔다는 걸 제대로 믿지 못하겠는지 연신 두리번거렸다.

당연히 정령계의 정령들은 또다시 자신들의 세계를 방문한 나의 존재를 눈치채고 벌떼처럼 모여들었고, 귀가 아플 정도로 재잘거리며 즐거워했다.

정령들에게 나는 태초의 정령을 구원한 은인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반면 정령들을 처음 보는 튜나는 자그마한 생명체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게 그리 신기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처음엔 튜나를 보고 경계하던 정령들이었지만 이내 내 말을 듣고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고, 의외로 친화력이 좋았는지 그들은 곧 튜나의 곁에서 쉬이 떨어지지 않으면 재잘거렸다.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튜나가 다 내려놓은 채 즐겁게 웃으면서 수다를 떠는 모습을 본 것은.

최소한의 껍질을 쓰고 웃어도 정말 제대로 웃는 게 아닌듯하던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마음을 가볍게 내려놓은 듯 보였다.

[벨가. 그 아이는 정말로 죽은 거겠죠?]

그렇게 정령들과 원 없이 떠들고 다시 티오니스로 돌아가는 길에 오른 그녀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아마도.”

[제가 없어도 알베르타는 잘 굴러가겠죠?]

“아마도.”

건성건성한 내 대답에 그녀가 입을 삐쭉였다.

[제대로 답변해주면 안 돼요?]

“나도 몰라 그런 건.”

미래를 확연하게 보는 건 지구에 있을 선녀의 힘을 지닌 코오나나 프리아 여신이 전부일 것이다.

[그래도 정말 놀랐어요. 당신이 다른 세상을 옮겨 다닐 수 있는 존재였다니.]

그녀는 제법 미련이 떨쳐진 듯 보였다.

[아버지께 오래 살겠다 약속했는데. 전 불효막심하네요.]

“…….”

저승이에게 잡혀 먼저 떠났을 선대재상이 보면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만나지 못한 게 오히려 다행이겠지.

나는 굳이 그녀에게 선대재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당신이 보여준 기적 덕분에 미련이 어느 정도 떨어졌어요.]

거짓말이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한 듯 보였다.

[그런데. 제 아버지와 무슨 거래를 하신 건가요?]

“너희 가문에서 오랜 시간 보관해온 어떤 보물이 있어. 신기한 아티펙트인데. 어떤 생물에게서 가공한 거라더라.”

[처음 듣는데.]

“뭐. 나도 그냥 흥미가 동해서 받아들인 것뿐이야.”

의외로 나도 수집 욕구가 대단한 편이니까.

그녀는 떠나기 전 남들이 보이지 않게 저택을 한 바퀴 돌았다.

내가 그녀를 데리고 타 세계로 간 건 고작 한 시간 남짓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듯 보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같이 춤춰줘요.]

그녀가 다시 한번 부탁했다.

[왕실연회에 초대했을 때 매몰차게 거절했잖아요. 마지막 부탁인데 안 돼요?]

그녀의 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발 밟지 마라.”

그리고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조금 허무하게 끝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이 튜나를 보는 마지막이 되리라.

그녀는 오래전부터 춤을 배워온 덕인지 굉장히 능숙하게 내 리드에 따라 춤을 췄다.

달빛을 조명 삼아 예쁘게 웃어 보인 그녀는 분홍빛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춤의 마지막 동작을 마쳤다.

[슬슬 가실 시간입니다.]

이후 저승이가 나타나 떠날 시간을 알렸다.

이에 그녀는 말없이 나를 보다 천천히 다가왔다.

[저게 뭐예요?]

그때 그녀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거?”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

동시에.

영체의 서늘함 감촉이 뺨에서 느껴졌다.

“…….”

[사실 말 안 했어요. 고작 며칠 사이에 그랬다고 하면 비웃을까 봐.]

그녀가 너무 예쁘게 웃었다.

[나 사실, 당신을 좋아하나 봐요. 고작 며칠인데. 나는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믿지 않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러났다.

말없이 뺨에 손을 올려놓고 있던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죽은 사람 소원 들어주었다 생각…….

콱!!!

“이 망할 암고양이가 감히 누구 남편에게 꼬리를 치는 게야.”

갑작스레 창문이 박살 나며 그 틈 사이로 붉은 안광이 일렁였다.

그리고, 새하얀 손이 튜나의 영체를 낚아챈다.

[꺅?!]

“페…… 페르세르크?!”

[본녀가 말했지. 남에게 여지를 주지 말라고. 사람 마음이라는 건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이건 그대도 잘못한 거야.]

예쁘게 웃는 그녀의 미소는 평소라면 정말 환하게 보였겠지만 지금 나는 그녀의 미소가 지옥의 악귀를 마주한 것 같은 두려움을 일게 했다.

“네…… 네가 여길 어떻게…….”

[감이야.]

그 한마디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다…… 당신은 누구?!]

“이렇게 일쳐놓고 도망치려고? 어림도 없지. 그대는 본녀에게 혼이 좀 나야 해. 남의 남편에게 꼬리 치면 어찌 되는지 보여주지.”

* * *

데이비가 떠난 고대유적. 인기척 하나 남지 않은 유적의 지하. 말라비틀어진 괴물의 시체에서 아주 옅은 빛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빛이 점점 커지면 이내 괴물의 육신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천천히 수축하며 한 명의 인영을 만들어냈다.

그 모습은 연녹빛 머리칼의 소년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스으으으으…….

이성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안광과 숨소리가 퍼져나간다.

저벅…… 저벅…….

알몸 상태로 걸어 나온 소년의 눈에 광기 비스름한 섬뜩한 무언가가 비쳤다.

동시에.

구구구구구구구구!!!

엄청난 굉음과 함께 대지가 박살 나며 엄청난 크기와 길이를 자랑하는 보랏빛의 지렁이 같은 것들이 쏟아져 지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소년의 정체는 폭주해버린 정신체, 벨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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