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6화
지하가 진동한다. 보랏빛 찐득한 피부를 지닌 괴물들의 진군 후에 남은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
폭식의 괴물들.
토트리아스. 타나토스의 잔재이자.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그 흔적들이었다.
괴물들이 지나가고 홀로 남게 된 소년 벨가는 비틀거리며 기이한 신음을 냈다.
“배…… 고파…….”
그는 분명 거대한 문어 형태의 괴물에게 먹혀 소화되었었다.
당연히 괴물에게 막대한 힘을 주었지만. 그 힘은 데이비에게 닿지 못했고, 결국 데이비에 의해 생명력을 박탈당하면서 그렇게 바스러졌다.
문제는 그곳에서 발생했다.
[지저의 아귀들을 깨우고 묶어둔 자, 스스로 억제제가 되었으나 결국 고삐를 놓쳤구나.]
이성을 놓은 채 비틀거리고 있는 벨가의 앞으로 한 여성이 천천히 내려섰다.
푸르른 빛을 내뿜으며 맨발로 천천히 내려선 여인은 조용히 태블릿을 들어 듣지 않을 이에게 말했다.
[가엾은 아이.]
그 가엾은 것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데이비에게 죽은 괴물인지. 아니면, 튜나를 찾아 이곳까지 왔다가 잡아먹힌 벨가인지.
어느 쪽이든 그녀는 그저 안쓰러움만 내비칠 뿐이었다.
이후 그녀는 공허한 시선으로 그르르 소리를 내는 벨가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옅은 빛이 그에게 스며들었고 그녀는 그것을 끝으로 돌아섰다.
[말살과 구원. 존망을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부디.
[너희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기를.]
정신체에게 있어 지금 눈앞에 있는 프리아 여신의 아바타, 아리아는 세상에서 지워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벨가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사라진 직후 몸을 꿈틀하더니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고, 이내 시뻘겋게 변한 안광을 번뜩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 고파…….”
벨가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의 등 뒤로 살점이 터져나가며 엄청난 촉수 더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는 이내 거대한 살점 덩어리에 반쯤 파묻히듯 묻힌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하유적에 격리. 연구되고 있던 고대의 종족. 토트리아스의 중심핵이 되어버린 벨가는 그저 배고프다는 욕망 하나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보랏빛의 거대한 지렁이들은 일대 숲을 모조리 갉아먹으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수는 가히 헤아리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닥치는 대로 갉아 먹으며 전진하는 괴물들이 향한 곳은 수도의 근처에 있는 인근 소영지들이었다.
평화로운 작은 소영지에, 바탄 왕국의 욕심에 사로잡힌 이들이 깨워낸 괴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영지가 아니었다. 다수의 영지가 동시에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알베르타 왕국의 근간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 * *
갑작스런 페르의 출현. 륀느는 순식간에 눈치를 채고 도망쳐버렸고, 나는 영혼만 남은 튜나를 끌고 나가버린 페르세르크의 뒤를 쫓기가 두려워졌다.
“조졌네.”
조금 전 만난 페르세르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아름다웠고, 그 미소속에는 나를 향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그렇지만.
그 미소 뒤에 지옥의 악귀가 숨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 되겠다.”
정신을 차린 나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공간을 찢으려던 그 순간.
창밖으로 페르세르크의 붉은 혈안이 비친다.
[꺄아악!! 사…… 살려주세요!! 사…… 살려!]
“그대는 이미 죽었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려달라는 게야.”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래, 말은 잘하는구나.”
다시 튜나의 영혼을 질질 끌고 가며 페르세르크가 환하게 웃었다.
“그대는 돌아와서 봐.”
나는 결국 도망치지 못했다.
정확히는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세르크가 보낸 전령 마법이 도착하면서 어그러졌다.
[저택에 본녀가 왔다는 걸 알려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어 보이니 나오도록 해. 위치는…….]
위치는 심야에도 영업을 하는 모험가 길드의 펍이었다.
현재 알베르타는 바탄 왕국의 개 짓거리와 튜나 재상의 암살로 혼란스럽다.
그런 만큼 어느 정도 거물인 내가 함부로 쏘다니는 게 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적당히 인지 저해마법을 걸고 그녀가 부른 장소로 찾아가자 사람 하나 없는 고요한 펍이 보였다.
사람이 제법 있어야 할 시간일 텐데. 어째서인지 주인장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야. 다 쫓아낸 건가 설마?”
“전세를 놨을 뿐이야. 손님 하나 없었으니.”
그녀는 빈자리에 훌쩍이고 있는 튜나를 앉혀둔 채 보리 맥주를 거칠게 들이켰다.
“후우…… 이게 뭐하는 짓이야 페르.”
“그건 본녀가 묻고 싶은 말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 왜 바람피웠어.”
“바람? 뭔 헛소리야. 나한텐 너희 말고 누가 있는데.”
내 말에 그녀가 차갑게 웃었다.
“거짓말이로구나.”
“거짓말은 무슨. 억지도 적당히 부려라. 평소랑 다르잖아.”
물론 튜나의 부탁대로 잠깐 데이트를 즐겨 준건 사실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망자의 바람을 이루어준 것뿐이었다.
재령의 한 분야로. 단언컨대 튜나에게 마음을 준 바 없었다.
“후우……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녀가 움직이자 튜나가 움찔거리며 페르세르크의 눈치를 살폈다.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짓을 했길래 튜나가 저렇게 겁을 먹은 것인지 모를 일이다.
페르세르크의 성격이 생각 이상으로 굉장히 무섭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튜나도 상당한 왈가닥 기질이 있을 텐데.
그렇다고 너 괜찮냐는 질문을 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우선은 오해를 푸는 게 필요했으니까.
애초에 내 말은 그렇게 잘 믿어주는 그녀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데이비. 본녀가 말했지.”
로브 자락 너머로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보였다.
“에이리아와 일리나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그 이상은 절대 안 돼.”
“아니 그러니까.”
“본녀를 배신할 셈이야?”
“헛소리하지 마라. 내가 왜 널 배신해.”
내가 화를 내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품 안에서 작은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그건?”
“프리아 님이 건네준 목걸이야. 그리고. 그대와 연결된 목걸이지.”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하지만 이 목걸이를 지니고 있으면 그대가 간혹 강렬한 감정을 품을 때 그 감정이 본녀에게도 전달돼.”
“왜 그런걸…….”
황당한 심정을 애써 누르며 물었다.
이에 그녀는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대가 슬플 때 누구보다 먼저 그대를 달래주고, 그대가 기쁠 때 누구보다 먼저 다가가서 함께 기뻐해 주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대가 화났을 때. 그대의 곁을 지켜주기 위해서.”
네가 많은 이들을 구하면, 넌 대체 누가 구하는데?
일리나가 예전에 했던 말. 그 말을 듣고 복잡한 생각이 든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본녀는 일리나처럼 강하지 못해. 그러니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뿐이었지. 한데…….”
그 목걸이를 통해 전해져온 감정에서, 이성을 향한 강렬한 연모의 감정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럴 생각은 없었어. 의심병도 아니고 그대를 감시할 생각도 없었고.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페르세르크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본녀가 벌써 지겨워진 게야? 일리나는? 에이리아는? 그대 하나만 보고 다 내팽개친 그 아이들은?”
그녀의 물음에 나는 우선 오해를 풀어야 했다.
“우선 두 가지만 정정하자 페르세르크.”
그녀가 눈시울을 적셨다. 그 감정이 못내 심정을 강하게 자극했다
“결혼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까지 난 단 한 번도 질린 적이 없어. 이게 첫 번째다.”
내 말에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내 버릇을 보고 판단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가 거짓말을 할 때 주로 보이는 버릇 중 일부를 알려주었지만 알려주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둘째. 목걸이가 사기라도 쳤는지 모르겠다만 난 그런 적 없어.”
그러자, 이번엔 튜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본인도 알고는 있겠지만 면전에서 자신의 연정을 거절당한 것일 테니까.
그래도 선은 확실히 그어야 했다.
튜나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페르세르크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는 뭔가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안해 데이비. 본녀가 착각을 한 모양이야.”
“오해하게 한 내 잘못이지. 다만 나를 믿지 못한 건 좀 슬픈데.”
“그럼 저 아이를 데리고 정령계니 다른 세계니 쏘다닌 건?”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고자질의 범인, 륀느를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 범인이 누구인지 굳이 헷갈릴 것도 없었다.
너 그러다가 언제 한번 크게 혼난다.
그러자 륀느는 페르세르크의 뒤에 쏙 숨어버린 뒤 혀를 쏙 내밀었다.
“륀느. 전 시간부로, 라인을 갈아탈 것을 명시해.”
순식간에 갈아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당연히 페르세르크는 그런 륀느를 품에 끌어안은 채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에 잠시 륀느와 눈싸움을 하던 나는 녀석의 응징을 포기하고 대답했다.
“억울하게 죽었잖아.”
내 한마디에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튜나가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 저 녀석의 시신은 멀쩡하지만, 다시 살려낼 방법은 없어. 윤회의 고리에 올라가야지.”
아직 살날이 창창한 그녀가 이토록 허무하게 죽은 것이다.
그래서 조금 안쓰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녀 또한 결국 나와 같은 전생의 기억을 지닌 존재이며 전생에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은 것 때문에 미련이 많이 남아있을 테니까.
아주 잠깐이라도. 기적처럼 그녀가 바라는 건 다 이루어주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결국…… 절 동정한 거네요…….]
“그렇게 해서라도 미련을 떨쳐내라고. 망자가 미련 가져봐야 좋을 게 없다.”
[하지만 내가 당신을 마음에 품은 건 사실인걸요. 그래. 이미 죽은 마당에 다 무슨 소용이야.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떠날 거야.]
쿡쿡 웃는 페르세르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돌하기 그지없지. 임자 있는 남자에게 꼬리를 치는 것도 이 정도로 당당하면 할말이 없어질 지경인 게야.”
[알아요, 안다구요. 이런 거 잘못된 거. 그런데…… 사람 마음이 가는 걸 어떻게 해요.]
그녀의 투정에 페르세르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다 끝이야. 결국, 이번 생도 허무하게 죽는 거라고…… 망할 주인장! 나도 여기 맥주 하나 주란 말이야!]
그녀는 손을 휙휙 통과하는 맥주잔을 집어 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사물을 지나칠 뿐이었다.
[망할…… 적어도 떠나기 전에 맥주라도 한잔 원 없이 마시고 싶었는데…….]
그녀의 중얼거림에는 씁쓸함과 후회가 남아있었다.
“대체적인 상황은 륀느에게 전해 들었어. 그래서. 그녀를 어떻게 해주려고?”
“영혼석에서 꺼낼 때 영혼 자체에 상처를 입을 수 있으니까. 고리에 올릴 때까지는 내가 좀 봐주려고.”
“한데 영혼석이라니. 이런 방식의 영혼석은 처음 보는데.”
“그렇겠지. 세상에 어떤 영혼석이 이렇게 편리하겠냐. 이것도 고대유물이야. 륀느가 살았던 시절의 물건.”
내 대답에 페르세르크의 눈에 호기심이 감돌았다.
오해가 풀린 시점에서 더 이상 화를 낼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래도 그녀가 말한 목걸이의 감정은 대체 무엇이었던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거. 정말 내 감정을 전해주는 물건이 맞는 것일까.
페르세르크는 목에 끼고 있던 목걸이가 방해라고 생각했는지 거칠게 벗어버린 뒤 구겨서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쓸모없는 물건이로구나. 여신을 만나면 단단히 따져야겠어.”
“너 아무래도 프리아 그 양반에게 속은 모양인데?”
“망할!”
내 말에 그녀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내가 생각한 걸 그녀가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다. 프리아 여신이 건네준 목걸이는 아무래도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오기 위해 그녀가 건네준 밑밥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거칠게 목걸이를 벗어던져 버린 것도 사실상 그 이유 때문일 것이었다.
오해가 풀렸다곤 하지만 튜나가 내게 했던 행동이나 발언들은 당연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괘씸하기 그지없긴 하지만 원하는 만큼 쥐어팼으니 한번은 용서해주지…….”
“뭐?”
“크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신경쓰지 말아.”
[…….]
침울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그녀의 영혼석을 꺼냈다.
“남은 건?”
[…….]
“지금 떠나보내면 끝이야. 사실대로 말해서 네가 전생을 기억하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깝고. 더 바라는 건 없어?”
내 물음에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완고한데 이제와서 자신의 연정을 강조하는 건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말은 다 했으니까요. 다만…….]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벨가가 마음에 걸리네요.]
벨가. 바르고 후작을 도와주던 정신체의 이름이다.
확실히 녀석의 죽음은 조금 어처구니없기도 했었다. 실제로 그놈이 괴물에게 붙잡혀 있을 때 나는 그놈을 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잡아먹히고 난 후에도 크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까.
“차라리 거기서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지.”
어떤 이유에서건 그놈들은 프리아 여신의 아바타를 노리는 백혈구. 즉 언젠가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할 적이었다.
적어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선 다행이라 여길 수밖에.
“다른 건?”
[아버지, 아버지를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어요. 아 물론 안 되는 건 알아요.]
“이 나라에 대한 걱정이 아니고?”
[아쉽긴 하지만, 제가 없다고 알베르타가 무너질 일은 없을 테니까요.]
애석하게도 선대 재상의 혼은 내가 저승이를 시켜 먼저 올려보내게 했다. 그의 혼과 튜나가 만나서 좋을 게 하나도 없을 테니 말이다.
“본녀가 도와줄까?”
“아냐. 내가 책임지고 마무리 지을게.”
그렇게 말한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저승아.”
스르르륵…….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검은 옷을 입은 저승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 끝나셨습니까?]
“그래. 내가 정화를 끝내면 바로 데리고 윤회의 고리로 인도해.”
원 없이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 털어놓은 튜나가 눈을 감았다.
아직 미련이 남은 듯 보였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오래 남아봐야 그녀에게 득이 될 것도 없을 테니까. 차라리 그녀를 저승이처럼 영혼 인도자로 만들 수도 있지만, 그녀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저승이처럼 특수한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럴 순 없었다.
이후 나는 그녀를 영혼석에서 빼내기 위해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쩌적!! 쩍!! 이윽고 영혼석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한데 데이비. 듣자 하니 저 아이의 육신은 아직 공작가에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안착시킬 방법이 없어. 육체와 혼에 괴리가 생겼으니까.”
윤활유가 되어줄 중간이 사라진 이상 그녀의 영혼을 강제로 끼워 맞춰본들 좋은 결과가 나올 리가 없었다.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때였다.
“그 괴리. 내가 채울 수 있다고 들었네.”
생각지도 못한 이가 난입했다.
이미 윤회의 고리에 들었어야 할 양반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아…… 버지?]
놀란 튜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튜나.]
[정말…… 아버지세요?]
눈을 크게 뜬 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말하는 그녀는 급기야 손으로 눈을 비비며 자신이 헛것을 보는지 멍한 얼굴이었다.
선대재상이 죽었을 때 그녀가 어떤 슬픔이나 상실감을 느꼈을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죽은 아버지가 눈앞에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딸아이에게 잘했다. 멋지다 한마디 칭찬하나 해주지 못하고 엄하게 대하다가 끝내 죽어버린 아버지에. 그런 아버지에게 성장하는 자신을 보여주겠다며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자신을 갈아 넣은 딸의 재회는 참 황당하게 이어졌다.
“저승아.”
이윽고 아비와 딸의 영혼이 만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뒤지고 싶어?”
내 윽박에 그가 움찔거렸다.
“내가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특혜를 주는 건 안 된다고.”
누군 특혜를 주고 누군 주지 않고, 그런 일이 벌어질수록 세상에 괴리가 생겨서 붉은 공허 때와 같은 거지 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당장 하나 정도는 문제가 안 되겠지만…….
본래 모든 일은 시작이 반이라고, 한번 선례가 남으면 귀찮아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잘못을 알긴 아는지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그의 간곡한 부탁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승이의 사죄에 재상이 나서며 나를 향해 말했다.
[그를 너무 탓하지 말아 주게. 이 늙은이가 고집을 부린 것뿐이니.]
“이봐요, 재상님.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복잡해질 수 있는지 전혀 모르시나 봅니다.”
웃는 내 얼굴에서 살벌한 기세가 흘러나오자 그가 움찔거렸다.
“나라고 좋아서 당신을 먼저 올려보낸 게 아니야.”
물론 나도 이런 상황이 더 좋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프리아 여신을 잠재우고 그녀를 대신해 세상을 일정 조율하는 입장에서 내가 나라는 이유로 세상의 시스템을 멋대로 손질하면 피해를 보는 것은 오로지 세상이요, 그것을 조율하는 영웅들의 몫이었다.
클린한 기업을 목표로 하는 내게 있어서 이건 본래 목적과 정반대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특혜는 이걸로 끝입니다. 3분 줄 테니 원하는 말 다 하세요.”
내 말에 선대재상이 페르세르크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입니다. 딸자식이 못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페르세르크 왕자비.]
“오랜만에…… 뵙는군요. 재상님.”
페르세르크는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던 사내의 영혼을 보며 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륀느에게 선대재상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튜나, 튜나.]
[아버지…… 아버지 맞죠?! 진짜죠?!]
[그래. 이 아비가 맞다.]
재상의 말에 튜나는 그대로 달려들 듯 그의 품에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죄송해요. 아버지!]
그저 미안하다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재상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억지로 체면 때문에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했지만 뭐가 그리 슬픈지 그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보일 것 같은 모습을 억지로 삼켰다.
[괜찮다. 다 괜찮아……. 내가 못나 이리된 것을. 오히려 이 못난 아비가 더 미안하구나…… 널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어…… 네가 바라던 소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지 못했구나.]
그의 따스한 말에 튜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칭찬이 없었던 그였다.
재상은 딸을 대할 때 밖에선 딸 자랑을 했지만, 그녀의 면전에선 그녀를 더욱더 엄하게 대했다고 했다. 그래야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공작가의 후계자가 될거라 생각했기에.
이렇게 죽어버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네게 더 좋은 말, 더 많은 칭찬을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 사람은 이리도 후회를 하는 어리석은 존재란 말인가…….]
[아버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의 눈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 눈물을 닦아준 재상이 슬프게 웃어 보였다.
[튜나야…… 정말 미안하구나. 그리고, 지금껏 이 말을 제대로 해준 적이 없구나.]
[죄송해요. 아빠…… 아빠 미안해요! 흐윽…….]
[정말, 사랑한단다.]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담백하게 자신의 잘못을 말하는 그 모습에 나는 내 아버지가 문득 떠올랐다.
끝내 화해하지 못한.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부자지간은 참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엉엉 우는 튜나를 토닥이는 그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렇게 될 수 없었던 것일까.
혹. 내가 한발 양보했다면 폐하께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와서 그런 걸 생각하기엔 많이 늦었다.
그에 대한 복수심은 이미 꺼진 불씨가 되어버렸지만, 그에게 내린 아들로서의 형벌은 그를 평생토록 괴롭게 할 테니까.
“재상님. 시간 많이 못 드립니다.”
“데이비, 조금만 더 기다려주어도 될듯한데.”
“안돼.”
단호한 내 말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직시했다.
뭐, 왜요.
심드렁하게 그를 바라보자 그가 나를 향해 말한다.
[튜나의 영혼은 이곳에 있네.]
“그렇죠.”
[육체 또한 자네가 깔끔하게 회복시켰다고 들었네.]
“…….”
이 영감탱이가?
[자네. 튜나가 죽었을 때부터 이미 염두에 둔 것 아니었나? 이 상황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튜나는 죽기엔 아직 너무 젊어. 자네라면, 튜나의 혼을 다시 육체에 안착시킬 수 있을 거라 들었네.]
“저승이 너 이 새끼.”
내가 그를 노려보자 부녀의 상봉에 손수건을 적시고 있던 저승이가 놀란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손수건은 또 뭐야. 언제부터 감수성이 저렇게 좋았다고.
자신이 아니라는 의사를 강하게 어필하는 저승이의 행동에 내 눈초리가 꿈틀거렸다.
그때 페르세르크가 나를 부른 뒤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던 카운터의 안쪽에 청은발이 흘끗 보인다.
내가 아는 선에서 저런 머리색을 지닌 이는 륀느와 그녀뿐이다.
아. 내가 저 양반 때문에 진짜.
“당신이 그러면 안 되지, 진짜…….”
찡하게 울려오는 머리에 나는 문득 프리아 여신이 내가 그녀에게 쳐온 뒤통수를 그대로 갚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신나게 날뛰었으니 너도 한번 당해봐라. 이런 느낌이었다.
[내 영혼을 써주게. 내 영혼을 써서 저 아이의 혼을 다시 육신에 안착시켜주시게.]
“안 됩니다.”
단호하게 내가 말했다.
그런 짓을 하는 순간 선대 재상의 혼은 똑바로 윤회의 과정을 거칠 수 없는 것은 물론, 종래엔 그의 영혼이 소멸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소중한 딸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이미 살 만큼 살았어. 다음 생이 있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
[부탁하네. 상인인 주제에 대가로 내놓겠다고 하나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 내게 빚이 조금 있지 않나. 하인스 영지가 한창 발전할 때 내가 얼마나 많이 도와주었나…… 자선사업 하는 셈 치고 딱 한 번만…… 도와줄 수 없겠는가.]
이리, 부탁하네…….
눈물을 떨구며 통곡하고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는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빌어먹게도 저 양반과 튜나의 모습에서 라운 왕국의 국왕이자 나의 아버지였던 크리아네스 올 라운이 겹쳐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자세히 설명해줄 테니 잘 들어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당신은 소멸해요, 거기에 이건 시작에 불과…….”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내가, 내가 잘 못 들은 건 아니죠?]
[상관없네!]
[아빠!!]
아무리 소중한 딸이라지만 영혼이 소멸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저런 결정을 내린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었다.
얼마나 딸을 사랑한 건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소멸을 택하는 아버지의 말을 들은 튜나가 기겁하며 그를 말리려 했지만 선대 재상은 요지부동이었다.
급기야 튜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해 엉엉 울며 그를 때리고 소리 질렀다.
안된다고. 절대 안 된다고.
하지만 그는 그녀의 주먹질도 무시한 채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동시에 튜나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우뚝 굳었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아버지의 따뜻한 포옹에 그녀는 그저 선 채로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분께서 내게 보여주셨네. 소멸 후에 어떻게 되는지.]
소멸 후를 보았다면, 모든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아이는 내 삶의 전부였네. 이 늙은이의 영혼을 대가로 한 번만 기회를 줄 수 없겠는가.]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제대로 따뜻한 말을 해주지 못한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통한의 후회 끝에 내린 결정을 막을 순 없어 보였다.
미련한 작자 같으니,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