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2화
레이나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오러 블레이드를 보며 기사들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저걸 못알아 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드마스터는 국가 전략급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만큼 많은 국가에서 마스터급을 보유하고 있기에 그 위세가 한풀 꺾인 것도 사실이지만 눈앞의 인물은 그런 기준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세상에 가장 강한 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꼭 거론되는 것이 바로 그녀가 아니었던가.
알만한 사람은 라운의 왕자이며 대륙의 유일한 성자, 데이비 올 라운을 꼽을 테지만 사람이라는 게 본래 본 것을 더 쉽게 믿는 법이었다.
2년간 틀어박힌 데이비와 다르게 대륙을 유랑하며 여기저기 이름을 알려온 레이나에 대한 무용은 음유시인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많이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젠장! 쳐라!!”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기사들은 무기를 겨누고 소리쳤다.
“적은 용사 레이나 단 한 명뿐이다! 모든 역량을 사용할 것을 허가한다!”
그 말과 함께 기사들이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저건?”
그리고는 미련 없이 그 바늘 같은 것을 목에 박아넣었다.
“크윽!”
“끄르륵…….”
동시에 기사들의 마나가 불안정하게 뒤틀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레이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본능적으로 저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변화는 이미 시작된 후였다.
“저게 뭐야…….”
바늘을 찔러넣은 부분부터 시퍼런 핏줄들이 돋아나며 그들의 몸이 한층 크게 경련했다.
눈에는 광기가 서리기 시작했고 그들의 내부에서 느껴지던 마나가 한차례 응축하며 더 많은 마나를 빠르게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게 데이비가 말한 그 개조 인간이야? 그런데 들은 것과는 다른데?”
“아마 실패작이겠죠. 막시모스. 제가 저들을 제압하고 있을 테니 다른 분들을 데리고 빠져나가 주세요.”
“빨리 따라와.”
막시모스가 모르지아나를 둘러메고 달리기 시작하자 기사들이 그를 쫓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이 달려가는 지면 앞으로 마치 거대한 발톱이 할퀸 것 같은 상흔이 남으며 그들을 튕겨내 버렸다.
“어딜 가십니까. 당신들은 이 이상 한 발자국도 못가요.”
그녀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기사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 * *
레이나가 용사라는 칭호를 얻으며 유랑을 시작한 뒤로 그녀는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불살의 경지에 이른 건 아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나의 아픈 손가락이었을 테니까.
“크악!!”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지만 오래가지 않아 다시 회복하며 덤벼드는 그들은 그야말로 좀비 병사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런 행동도 한두 번이지 데미지가 누적되어 일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다수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무기를 놓치면 레이나는 잊지 않고 그 무기를 빼앗아 이기어검으로 띄워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하늘에 뜬 대여섯 자루의 검과 손에 쥐어진 하나의 검.
기사들은 마치 괴물을 보듯 침착하게 서 있는 새하얀 여인을 경계했다.
이기어검, 즉 마스터 상위의 경지인 중원으로 치면 검선의 경지.
이 경지에 이른 건 사실 현재 대륙에서 알려진 바로 몇 없다.
린디스의 불여우, 카트린느 대공. 용사라 불리는 레이나. 그리고. 현재 대륙에서 소문이 무성하게 돌고 있는 일리나까지.
데이비라는 존재는 정확하게 그 사실과정을 파악하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워낙에 다양한 힘을 지니고 있다 보니 정확한 경지를 집어내기가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때였다.
카아앙!! 캉!!
저 멀리서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리를 먼저 빠져나간 막시모스 일행에게 추격대가 붙었다는 뜻이었다.
레이나라면 데이비에게 받은 방어 아티펙트가 있기에 크게 문제가 없지만 다른 이들에겐 굉장한 핸디캡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쩌적…… 쩍!!
무언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들은 자신들을 죽여서라도 막으려 하고 있으니 이대로 대치하고 있을 순 없었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더 시간을 끌 수 없겠네요.”
레이나의 기세가 변하기 시작하자 기사들이 긴장한 채 그녀를 서서히 포위해 들어왔다.
찌직…… 쩍!!
그때였다.
“으랴아압!!!”
막시모스의 화끈한 기합과 함께 어마어마한 마나 파동이 저 멀리서 터져 나온 것이다.
마나 재밍으로 인해 마나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야 했건만 그럼에도 눈앞에서 현실이 펼쳐졌다.
쩌적!! 콰창!!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서 무색 무형의 장막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좀 전까지 잘 움직이지 않던 마나가 맹렬하게 움직이며 레이나를 감싼다.
방어 아티펙트도 완전히 막아내진 못하기에 상당히 거슬렸던 기분이 완전히 사라졌다.
당연히 고삐가 풀린 레이나를 고작 개조인간 몇몇이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젠장 막아!!”
다급한 외침과 함께 기사들이 덤벼들자 레이나는 짧게 숨을 골랐다.
동시에 그녀의 등 뒤로 반투명한 날개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그녀의 눈동자에 단호한 의지가 깃들었다.
동시에 허공에 뜬 검들이 힘을 잃고 마치 비처럼 그녀의 주변으로 낙하해 땅에 박혀버렸다.
우수수 떨어지는 검들 사이에서 그녀가 낮게 뜬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데이비 식(式)]
짧게 숨을 고르며 고요하게 검을 양손으로 틀어잡는 그녀를 보며 기사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공격해!! 뭐…… 뭔가 온다!”
[공절]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쩌어어억!!
그녀의 검이 허공을 가름과 동시에 주변의 시간이 멈춘 듯 굳었다가 격변하기 시작했다.
대지가 갈라지고 어마어마한 먼지구름이 부서지는 건물의 일부들을 감쌌다.
그리고, 먼지구름이 사라졌을 때 그들은 볼 수 있었다.
비스듬하게 잘려나가 버린 탑의 건물과 그 뒤 허공에 거대한 상흔이 남아있는 것을 말이다.
일리나가 사용하는 시공격검과 비슷하지만, 정확히는 천족이라는 그녀의 힘을 이용한 아류였다.
일리나가 익힐 수 있다면 레이나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데이비가 그녀만을 위해 만들어준 검술이 바로 이것이었다.
단순히 건물이 박살 나는 수준을 넘어 허공에 거대한 상흔을 남기는 건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어려운 광경이었다.
“괴……괴물이야…….”
“계속 막겠다면 말리지는 않아요. 다만. 그때부턴 저도 손속에 사정을 둘 수 없어요.”
죽고 싶지 않으면 비키라는 이야기를 굳이 에둘러 하는 그녀였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가늠이 안 되는 저력에 그녀를 막아서던 이들은 모조리 전의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 * *
다시금 막시모스 일행이 향한 곳으로 간 레이나는 곧 건틀릿 하나로 기사들을 떡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막시모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레이나.”
“당신이 재밍을 해제한 건가요?”
“아니? 네가 한 거 아니었어?”
“그럴 리가요.”
애초에 재머의 위치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런데 재밍이 해제된 것이다. 혹시 바탄 국왕이 마음을 바꾸었나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닌 듯 보였다.
“재머는 제가 해제했습니다.”
그때였다.
갑작스런 목소리와 함께 반파된 왕실 정원 너머에서 몇몇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도와주세요.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건 당신뿐입니다. 레이나 양.”
“바탄의 왕족이 우릴 죽이려고 하던 거 아니었나?”
막시모스에 말에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난 소년. 막내 왕자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아닙니다! 절대 바탄의 결정이 아닙니다.”
“그럼. 이건 뭐지?”
막시모스는 쓰러진 기사들을 가리켰다.
그들 또한 개조인간 앰플을 꽂았는지 피부에 검보랏빛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현재 아바마마를 포함한 대부분의 왕족들은 세뇌되어있는 상태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왕실 전체가 개조 인간이 되어버릴 겁니다! 더 늦기 전에…….”
“잠깐만요. 개조인간? 무슨 뜻인지 알아듣게 설명해주세요.”
레이나의 추궁에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이내 천천히 말했다.
“바탄에는 오래전부터 진행해온 프로젝트가 하나 있습니다. 그 프로젝트의 이름은 초월자 프로젝트.”
초월자 프로젝트.
알베르타의 땅에서 발견된 고대유적을 몰래 연구하면서 얻어낸 것으로 특수한 유전자 물질을 인간에게 주입시켜 보통 인간 이상의 강한 초상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알베르타라고?”
“예. 정작 알베르타 왕실에서는 몰랐던 것이지만 저희 바탄에서는 폐하의 명에 따라 오랜 시간 그곳에서 비밀리에 연구 자료를 가져와 개조 인간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가 저것이냐는 듯 막시모스가 엄지로 쓰러진 기사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실패한 앰플을 복용한 것뿐입니다. 진짜는 다른 곳에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개조 인간인지 뭔지 때문에 이 왕실이 끝장났다는 건가? 레이나. 믿을 수 있겠어?”
“쉽게 믿긴 힘들지만 개조 인간에 대해 들은 바 있어요.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 개조인간 프로젝트와 지금 왕실이 이 지경이 된 건 무슨 상관이죠?”
일리 있는 추궁이었다. 개조인간 프로젝트가 뭘 어쨌길래 왕궁이 이런 극단적인 처우를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을 유도하는 자들 때문입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저희 바탄뿐만 아니라 린디스 제국의 어떤 귀족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제국의 귀족!
단순히 귀족일 뿐이지만 바탄 같은 왕국에는 고작 한 명의 고위귀족이라도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자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것이 제국의 위엄이었으니 말이다.
“전쟁을 바라는 바탄의 몇몇 귀족과 알베르타의 귀족, 그리고 그 린디스 제국의 고위귀족으로 인해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바탄의 국왕도 알베르타와 전쟁을 원하는 편이긴 했지만, 앞뒤 안 가리고 전쟁을 벌이기엔 담이 작은 인간이었다.
이에 전쟁을 옹호하는 자들이 수작을 부린 것이다.
국왕에게 개조인간 샘플 중 특정한 효능을 지닌 약을 주입시킨 뒤 어떤 파장을 이용하여 국왕을 조종하고 있었다.
레이나는 처음 바탄의 국왕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이상하리만치 괴리감을 주었던 그의 모습은 역시 정상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막내 왕자의 설명을 듣고 있던 레이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왕자께선 무사하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금 전 제게도 마수가 뻗치긴 했습니다만, 운이 좋게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와 제 기사들의 힘만으론 전쟁 옹호론자들에게 장악당한 왕실을 제압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마나 재머를 해제한 건 당신이었군요.”
“당신들뿐이니까요.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건.”
그의 말에 막시모스가 손가락을 뚜둑 꺾으며 레이나에게 말했다.
“지시를 내려봐. 우린 단장이 하자는 대로 한다.”
“우선 그를 믿어보죠. 저희가 할 일은 뭐죠?”
“폐하와 주요 대신들을 조종하고 있는 파장. 그 파장이 왕성 외곽에 있는 폐성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곳을 파괴해야 해요.”
그 말에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이동하죠.”
레이나의 대답에 막내 왕자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일행들을 빠르게 안내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레이나를 발견한 기사들이 마치 좀비 떼처럼 모여들긴 했지만, 그들은 온전한 개조 인간도 아니었던 만큼 레이나의 발을 막을 순 없었다.
바탄의 현 왕성은 새로 신축이 된 건물들이다. 그리고, 그 왕성의 뒤편엔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구왕성의 잔재들이 존재했다.
“으스스하네.”
“본래 이곳도 철거하려 했습니다만.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아서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막내 왕자의 설명에 이오가 파르르 떨었다.
가면 너머에 숨겨진 그녀의 안광이 떨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싫다…… 귀신은 좀 그런데요.”
“다른 이는 몰라도 넌 귀신을 무서워하면 안 되지.”
막시모스가 얼굴을 가리키며 말하자 이오가 가면 너머로 막시모스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입가에 한기가 흐른다.
가면 너머 보이지 않는 안광이 섬뜩하게 빛나는 느낌이 들었다.
“막시모스 씨. 그러다가 진짜 뒤져요.”
“옙…….”
일순간에 침묵하는 그를 뒤로한 채 레이나가 한 발 내디뎠다.
“어릴 땐 저도 귀신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밤중에 기이한 비명이나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렸으니까요. 하지만…….”
“예. 제가 운이 좋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에 뭐가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왕자에게조차 기밀 취급되는 비밀이 바로 개조인간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던 막내 왕자가 이곳을 탐험하다가 그 흔적들을 발견해버렸고, 그는 오늘 같은 사태를 대비해 대응책을 마련해둔 것이었다.
운이 좋았다면 좋았다.
“만약 이곳을 정리하지 않고 당신들이 왕성으로 갔다면 아마 전쟁 옹호론자들은 사태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폐하를 시해하거나 그에 준하는 사건을 만들었을 겁니다.”
막내 왕자가 길을 안내하며 이를 빠득 깨물었다.
“그들에겐 애국심 같은 건 없어요. 린디스 제국의 한 인간의 손에 의해 시작된 지독할 정도로 이기적인 영리단체일 뿐입니다.”
“일루미나티와 비슷하네요.”
“일루미나티?”
“별거 아니에요. 오래전 데이비 씨가 날려버린 조직이죠.”
데이비가 날려버렸다는 말에 막시모스는 더는 묻지 않았다.
“저하. 조심하셔야 합니다. 여기부터는 뭐가 나올지…….”
주변을 경계하던 기사 하나가 조심스레 말하며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레이나는 기사의 뒷덜미를 잡아 앞장서서 걸어가던 막내 왕자에게서 떨어뜨려 놓았다.
기사를 바라본 레이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물러나세요.”
그리고는 그대로 검을 움직여 막내 왕자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이…… 이게 뭐하는 짓…….”
“내 눈, 못 속여요.”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이지? 겉으론 아닌척했겠지만. 현재 이 빌어먹을 연구를 진행하고 도맡고 있는 인간.”
레이나의 말에 막내 왕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소리를…….”
“당신 몸 안에 인간이 아닌 요소가 수백이 넘어가고 있어요. 그것도 하나같이 안정적이지.”
레이나의 말에 분위기가 일변했다.
“마나 재밍을 이용해 제 경계를 푸는 것까진 좋아 보였습니다만. 그래서요. 여기 저희들을 데려와서 뭘 할 생각이었죠?”
그 말에 막내 왕자가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있었다.
“이보시오 용사! 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 사태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그건 계획의 일부겠죠. 당신. 그 상태가 된 지 꽤 오래된 거 아니야? 그리고, 귀족들이 폐하의 몸에 변이 유전자를 쉽게 주입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게 가능한 건 같은 왕족뿐이니까.”
그런데 다들 미쳐버렸는데 혼자 멀쩡하다?
레이나의 말에 막내 왕자는 침묵했다.
이에 기사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확히 말해서. 당신. 다른 사람이잖아. 내 눈에 비친 당신의 몸은 이미 시체야.”
죽은 이의 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 한마디에 기사들이 입을 쩍 벌렸다.
“하…… 망할 눈치 빠르네. 조금만 더 갔으면 됐는데.”
동시에 이들을 모두 안내했던 막내 왕자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이래서 눈치 빠른 년이 싫다니까?”
한쪽 눈의 흰자위가 검게 물들어 역안이 되어버린 왕자가 옅게 웃어 보였다.
“뭐 상관없지. 여기서도 가능하거든.”
그의 손이 꿈틀거리더니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기괴하게 변해버린 손은 벽면을 관통했고 주변을 마치 거대한 살점 덩어리처럼 진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말이야. 전쟁으로 돈이나 만질 생각이 가득한 알베르타의 그 돼지들하곤 달라. 나는 순수한 연구가 목적이거든.”
“그래서. 당신은 누군데?”
레이나의 물음에 그가 낄낄 웃었다.
“그게 중요해? 이미 늦었어.”
그 말과 함께 벽면이 뒤틀리며 수많은 촉수들이 날아들어 모두를 옭아맸다.
“유일한 성공작. 유일한 흡수체! 완벽한 궁극체!!”
막내 왕자의 탈을 쓴 괴물은 그렇게 소리쳤다.
“큭?! 마나가 빨려 나간다!”
촉수에 붙잡힌 막시모스가 그것들을 끊어내려 했지만 마나를 흡수당하는 탓인지 저항하지 못했다.
레이나 또한 몸을 휘감는 촉수에 저항하지 않았다.
“뭐, 바탄은 사실 내가 장악하고 있거든. 오래전부터 말이야. 알베르타의 전쟁을 바라는 자들과 린디스의 알카 후작까지. 그들은 전쟁으로 돈이나 벌어보겠다는 심정이었겠지만.”
자신은 다르다. 순수한 연구욕.
그것이 그의 본질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그때 레이나가 중얼거렸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적어도 이 나라는 당신만 처리하면 된다는 거니까요.”
“뭐? 하하하하하! 마나를 빨아 먹히고 있어서 움직이는 거기서 탈출도 못 하는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미안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네가 나를 막아냈다 해도 전쟁은 무조건 터져. 알베르타의 전쟁을 바라는 자들이 멈추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
그의 설명에 레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용사 레이나. 넌 정말 위험한 변수지. 그래서 바깥에서 너와 충돌했다간 절대 이기지 못했을 거야.”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레이나의 질문에 막내 왕자는 승기를 잡은 듯 여유롭게 대답했다.
“뭐지?”
“지금 바탄을 공격하는 괴물들. 당신의 소행인가요? 같은 괴물 같은데.”
그 물음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저런 게 있는지는 몰랐다. 솔직히 의지도 자아도 없는 고깃덩어리들이 왜 갑자기 살아났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 대답에 레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토트리아스에 그 토트리아스로 유전자를 변이한 미치광이에 전쟁물자로 돈이나 챙기려는 작자들이라…… 참 복잡하게도 꼬였네요. 그래도 바탄 왕국을 해결할 문제는 간단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막시모스, 고개 숙여요.”
스릉…….
동시에.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이해한 막시모스가 고개를 강하게 숙였고.
쩌억!!!!
방금 전까지 고요하던 건물에 거대한 빛의 궤적이 남았다.
“당신과 당신이 손을 잡은 작자들은 단 하나도 이루지 못할 거야.”
“무…… 무슨…….”
몸이 반으로 잘려버린 막내 왕자가 바닥에 추락한 채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시선에 보인 것은 세 쌍의 반투명한 새하얀 날개를 지닌 그녀였다.
무섭도록 시린 눈에 무섭도록 아름다우며 성스러웠다.
“그 어떤 것도.”
“하…… 하하하하. 나를 죽이게? 미안하지만 나는 고작 칼에 베인다고 죽는 몸이 아니거든.”
막내 왕자의 실소에 레이나가 차갑게 웃었다.
“그거야 보면 알겠죠.”
콰직!!
그의 이마에 검을 틀어박은 레이나의 눈에 새하얀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버려진 구 왕성 전체가 어마어마한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왕성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고 잔해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잔해의 속에서 레이나는 뒤편에 나타난 한 흑발의 소녀를 볼 수 있었다.
“내가 나설 것도 없었네.”
“적어도 그에게 민폐를 끼칠 순 없죠.”
“단신으로 왕국전력에 해당하는 괴물을 베어버린 것치곤 굉장히 담담한 거 아니야?”
“적어도 내가 아니면 당신이 했겠죠.”
레이나의 대답에 그녀의 뒤편에 나타난 베르단데가 어깨를 으쓱였다.
“데이비. 여긴 베르단데야. 바탄은 끝났어. 자세한 건 따로 설명할 테니까 이제 그 일에만 집중해.”
베르단데의 보고에 수정구 너머에서 바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힘 조절하기 진짜 어렵네!
데이비의 투덜거림이 들려온다.
“데이비?”
이에 베르단데가 눈을 꿈틀거리며 중얼거리자 데이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치웠나?
“엥?”
갑작스런 데이비의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진다. 이에 베르단데는 이놈이 뭘 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였다.
콰아앙!!!
잔해 속에서 분명 죽었어야 할 막내 왕자가 회색빛의 피부를 지닌 괴이한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는 막내 왕자의 본래 모습과 비슷하지만 끔찍한 갈고리 같은 팔을 지닌 괴물이 된 막내 왕자의 모습은 절대 이전보다 가볍지 않았다.
“저거 죽은 거 아니었어?”
그 물음에 레이나가 한숨을 내쉰다.
“생명력이 질기네요. 생각보다.”
동시에 그녀의 검이 또 한차례 번뜩였고 괴성을 터뜨리는 막내 왕자의 목을 날려버렸다.
당연 막내 왕자는 전보다 더 강해져 있었지만, 레이나의 힘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지직…… 해치…….
“그만. 조용, 닥쳐 데이비.”
베르단데가 그대로 수정구의 연결을 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