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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108화 (1,107/1,559)

제1108화

환한 금발, 눈길을 사로잡는 일리나의 드레스.

그리고. 빨갛게 달아오른 부끄러운 표정.

일리나와 혼인했던 그 날. 그녀가 데이비에게 보여주었던 수줍음이 보인다.

그녀는 데이비의 손을 잡았으며 그가 리드하는 대로 움직였다.

“일리나.”

“어…… 응.”

“어딜 보는 거야 그렇게 바닥만 보다가 꼬인다.”

잔잔한 음악 속에서 그녀는 부끄러운 듯 몸을 파르르 떨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복잡한 심경이 섞인 그 표정에 데이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아픈 거 아냐?”

“아…… 아냐! 어디 아픈…… 꺅!”

놀란 그녀의 스텝이 꼬이자 데이비는 그녀를 잡아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주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빨개진 그녀는 다시금 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이 끝나자 그녀는 도망치듯 테라스로 나가버렸다.

“왜 그래.”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아무도 없는 창밖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데이비.”

“응?”

그를 부른 그녀가 천천히 다가온다.

그리고는 말없이 데이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데이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그저 말없이 데이비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천천히 뒤꿈치를 들어 얼굴을 가까이했다.

입맞춤을 바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늘 그랬듯 일리나의 애정 구애는 확연했기에 데이비는 천천히 그녀에게 맞춰 얼굴을 가까이했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천천히 감긴다.

평소와 다르게 굉장히 부끄러움이 어린 듯한 그 모습은 상당히 그의 욕망을 자극해왔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닿을락 말락 두 사람의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

이에 데이비는 행동을 멈추고 양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 붙잡았다.

그리자 일리나는 원망. 의문이 섞인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왜?”

“너, 일리나가 아니구나.”

콰창!

동시에 그녀의 전신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옅게 울려 퍼지며 다른 인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새하얀 피부와 신성한 힘이 서린다.

평소 그녀가 눈에 밟힌다며 숨겨왔던 하늘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흘러내렸다.

“레이나.”

“…….”

그의 부름에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이상한 점은 분명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가 들키자마자 흠칫 놀라 떨어졌다. 들킬 거라고 예상했으면서 막상 들키니 당황한듯한 모양새였다.

“…….”

“왜?”

명백한 기만이고 배신이었다. 하지만 데이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미안함이 서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천족으로 재탄생하면서부터 이제 일리나와 다른 인물이다- 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근본이 일리나 데 팔란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직도 일리나와 레이나가 서로에 대해 인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리라.

과거엔 존재조차 허락받지 못했다면 지금은 속임수를 사용해 존재는 허락받되 일리나가 구조적으로 레이나에게서 정체를 들을 수 없다.

실제로 한번 레이나에 대해 말했던 적이 있었지만, 일리나는 마치 고장 난 것처럼 그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일리나가 데이비에게 말했던 그녀를 자꾸 신경 쓰는 이유. 알게 모르게 뒤에서 그녀를 계속해서 도와주는 이유가 그러했다.

레이나가 대륙을 유랑하며 용사로서의 사명을 수행해 나가는 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크게 문제가 된 바는 없었다.

그건 전부 데이비가 뒤에서 그녀를 밀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데이비는 레이나가 자신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던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페르세르크는 남녀 간의 관계를 보는 시선만큼은 형편없다고 말한 바 있지만 그때 당시엔 [내가 아무리 1천 년 모태솔로라도 3천 년 모태솔로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며 비웃은 바 있었다.

하지만 그런 비웃음도 지금에 와서는 할 말이 없다.

그녀가 바라는 게 대체 무엇이었을까.

“말해봐.”

그 물음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침묵했다.

“일리나의 모습은 어떻게 된 거야. 아, 베르단데…… 이년이…….”

이오의 모습을 인간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알았지만 레이나에게까지 무슨 짓을 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여기서 기다려. 아무래도 혼을 좀…….”

“아…… 안 돼요!”

그녀가 허겁지겁 데이비의 팔을 잡아 만류했다.

“내가, 내가 부탁했어요…… 내가.”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부탁한 거라구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랬냐라고 물어도 그녀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역시 그녀는 어떤 마음을 품은 것일까.

상식적으로는 그런 의심을 할 수 있지만, 본능은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냥, 그녀가 부러웠어요.”

숨이 막히는 한마디였다.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기도 했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게 너무 괴로워서.”

체념한 듯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제 나는 그녀가 아니고, 천족 레이나인데. 레이나라는 새로운 인물인데. 어째서인지 그녀가 웃는 걸 보고 있으면 나는 영원히 이대로인지…… 아니면 그녀처럼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인지…….”

그녀가 참회하듯 중얼거렸다.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

“레이나.”

“나도 일리나인데! 나도 일리나 데 팔란인데. 전쟁에서 져서 인생을 대부분 잃어버렸을 뿐인데…….”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녀는 작은 손을 꼭 쥐었다.

“난 사실 레이나 같은 게 아닌데…… 용사 같은 것도 아닌데…….”

억눌러온 감정이 폭발한 것처럼 그녀가 끝내 눈물을 떨구었다.

그렇게 흐느끼는 그녀를 바라보던 데이비는 말없이 아공간에서 망토를 꺼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그녀가 놀란 듯 그를 천천히 올려다본다.

“바람 좀 쐴까? 머리 좀 식히게.”

“보온장비…… 대체 어딜 가시려고…….”

“있어. 좋은 곳.”

그렇게 말하며 나는 허공을 찢었고, 그대로 레이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데이비가 있던 테라스의 바깥.

일리나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야?”

본래라면 그녀가 레이나의 진심을 듣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녀는 명백하게 듣고 말았다.

‘나도 일리나인데! 나도 일리나 데 팔란인데. 전쟁에서 져서 인생을 대부분 잃어버렸을 뿐인데…….’

그 한마디가 감당하지 못할 충격이 되어 다가왔다.

* * *

“아가. 어서 자라려무나. 어미가 기다리고 있으니.”

페르세르크는 자신의 배를 살살 쓸어내리며 행복하게 웃었다.

그동안 가지고 싶었던 아이였다.

절대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결과지만 데이비는 끝내 세상을 비틀어서까지 자신에게 아이를 품게 해주었다.

처음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 때의 그 환희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보통 아이보다 훨씬 오래 자리를 잡고 자랐다지만 그래도 그녀의 눈에는 너무도 귀엽고 소중했다.

물론 기쁨도 기쁨이지만 한때엔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었다.

만약 자신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그땐 다리안이나 에반젤린 혹은 청단이 홍단이에게 같은 애정을 쏟아줄 수 있는가.

그런 불안함도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엄마!”

문이 벌컥 열리며 에반젤린이 후다닥 뛰어들어왔다.

그녀의 뒤로는 표정이 없는 어벤저 편대의 생체 골렘 메라몽과 에나벨이 그녀를 호위하듯 가만히 서 있었다.

“헤헤헤.”

“에린이 왔구나.”

페르세르크가 옅게 웃으며 반겨주자 에반젤린은 마치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달려와 페르세르크의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녀의 배를 유심히 보며 물었다.

“요기 동생이 있는 거죠? 그쵸?!”

“그럼.”

사실 고민은 의미 없었을지도 모른다.

배 속의 아이도 소중하지만. 에반젤린도 이리 소중한 것을.

“헤헤 막내야아. 언니야 언니.”

언니라곤 하지만 사실 아직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에반젤린은 제 동생이 여동생이었으면 싶은 눈치였다.

페르세르크 본인은 다리안이 외롭지 않게 남자아이가 태어났으면 싶었지만 말이다.

“이거 봐요. 에이리아 엄마가 막내 선물이라고 만든 거래요!”

에반젤린은 갓난아기가 입을 법한 예쁜 옷과 손보다 작은 귀여운 신발, 그리고 손 싸개를 보여주었다.

“어떻게 이렇게 발이 작아요?”

“그럼. 갓 태어난 아이는 그렇게 작단다.”

“저두요?”

“그럼.”

에반젤린이 처음 알에서 태어났을 때, 다리안이 태어났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그녀가 옅게 웃어 보였다.

“헤헤 신기하다 얼른 보고싶다아…….”

칭얼거리는 에반젤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아빠는 언제 와요?”

“음…… 글쎄. 일이 잘 해결되었다고 하니 곧 오지 않겠니?”

“아빠가 오면 지구에 보내달라고 할거에요!”

“응?”

“지구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싶어!”

그녀의 외침에 페르세르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굳이?”

“아빠는 지구와 이곳 모두의 문화를 한 번쯤은 겪어보는 것도 좋다고 해서요.”

확실히 티오니스와 지구는 문화가 다른 만큼 양쪽 문화를 모두 경험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다만 어느 쪽이든 안 좋은 쪽은 존재하는 만큼 페르세르크로써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데이비도 마찬가지일 터.

“그건 좀 더 상의해보는 게 좋겠구나.”

“네에…….”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며 에반젤린이 침묵했다.

“초단이 언니도 보고싶다아……”

“그렇구나.”

조용히 서로 배 속의 아이를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저벅…… 저벅…….

누군가가 걸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나?”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반젤린.”

“엄마!”

“미안한데 잠깐만 다리안과 놀고 있어 주겠니?”

일리나의 말에 에반젤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에반젤린이 도도도 뛰어 사라지자 일리나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언니.”

“그래. 데이비와 함께 온 거니?”

“아뇨. 그 녀석은 거기에 있어요.”

“혼자 온 게야?”

“네.”

일리나가 성큼성큼 걸어가 데이비가 아껴놓은 와인 창을 열었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하필 가장 귀한 것을 꺼낸 뒤 거침없이 마개를 따고는 잔에 따랐다.

“무슨 일이 있구나.”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페르세르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녀석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게야?”

“아뇨. 언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본녀에게 묻고 싶은 것?”

“네.”

그녀가 눈을 잠시 감았다.

“레이나. 빛의 용사는 대체 누구죠?”

“응? 그녀는 레이나. 천족이며 빛의 용사지. 프리아 여신의 계시와 은총을 담은 존재가 아니더냐.”

“제가 묻는 건 그게 아니에요.”

일리나의 말에 페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 자기가 분명 말했어요. 자기가 일리나라고. 일리나…… 데 팔란이라고.”

동명이인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 대륙에서 일리나 이면서 [데]라는 미들네임과 팔란의 성을 사용하는 건 세상에 단 한 명뿐이다.

“그녀는 대체 뭐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페르세르크가 굳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일리나가 세계의 법칙 구조에 따라 절대 인지할 수 없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그 말을 대체 어디서…….”

“들었어요. 데이비와 그녀가 대화하는걸.”

데이비 이 멍청한 것이…….

페르세르크가 입술을 씹었다.

하지만 금방 이해해야 했다. 아무리 데이비라도 일리나가 이 사실을 알아낼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들어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말해줘요. 그녀는 대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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