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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109화 (1,108/1,559)

제1109화

일리나의 물음에 페르세르크는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레이나가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이야기는 데이비에게 들은 바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번 알베르타에서 그 일이 터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 원인은 아마 데이비와 일리나 때문이리라.

자신이 얻지 못한 또 다른 행복한 미래.

비록 레이나가 데이비에게 연심을 품은 건 아닐 테지만 행복해하는 자신을 질투했거나. 혹은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몰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터졌겠지.

그 과정에서 일리나가 들은 것일 터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데이비가 일리나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그도 몰랐을 테지.

일리나가 듣고 나서 그것을 이렇게 기억하고 당황해할 거라곤 말이다.

안일함이 불러온 참사였다.

“후우…… 일리나.”

“언니. 사실대로 말해줘.”

그녀가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사람이 한 말…… 사실이야?”

짧은 시간에 많은 고민이 오갔다.

여기서 자신이 함부로 진실을 말해주면 괜찮은 것인가.

정말로 말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복잡한 생각이 왔다 갔다 할수록 일리나의 표정에 절박함이 더 어렸다.

“그래…… 맞지? 그래서 내가 그녀를 볼 때마다 남 같지 않고 자꾸 신경이 쓰였던 거야.”

“일리나.”

“말을 왜 안 한 거예요?! 왜 나만 속여?!”

일리나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대체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만 말하지 않은 건데?!”

울분이 터진 것처럼 그녀가 소리치자 페르세르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도 억울했고 너무도 서러웠는지 결국 일리나는 페르세르크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나라면서! 대체 그럼 나는 뭔데?! 그녀는 대체 어떻게 존재하는 건데!”

레이나가 나타난 건 데이비와 일리나가 맺어지기 한 참 전이었다.

그 전부터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페르세르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일리나는 몇몇 단서만으로 결론에 이르러버렸다.

“나는 대체…… 언니에게 뭔데? 데이비에게 뭔데?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렇게 사랑했는데…….”

배신감에 엉엉 우는 그녀를 보며 페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동시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레이나가 일리나 데 팔란이라는 단서만으로도 데이비는 피를 토하고 엄청난 페널티를 받았다.

이제 와서 레이나가 천족이 되었다곤 해도 그 사실은 여전했기에 데이비는 그녀를 데이비와 일리나 어느 쪽도 가까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일리나. 몸에 이상한 곳은 없었던 게야?”

“…….”

말없이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보며 페르세르크는 다시 사색에 잠겼다.

데이비도 멀쩡한 것 같고 일리나도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레이나?

그녀에게 이상이 생겼다면 데이비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리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레이나가 자신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듣고도 기억하고 있고.

그로 인한 페널티도 없다.

레이나가 데이비에게 털어놓은 푸념을 일리나가 엿들었기에 문제가 없다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계의 규칙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데이비가 그런 것을 시험해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실제로 한때 그 실험을 진행해본 결과 일리나는 역시나 기억을 잃었고 그는 며칠간 피를 토하며 끔찍한 내상에 시달려야 했다.

즉. 사실 레이나의 정체에 대해 발설하는 건 간단히 넘길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멀쩡하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이 되었건 일리나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인지했으며 완벽하게 결론까지 도달한 이상.

더 이상 숨기는 건 불가능하구나 싶었다.

“일리나. 하나만 정정하자꾸나.”

“…….”

눈물 젖은 얼굴로 올려다보는 일리나의 눈가를 부드럽게 닦아주며 말한다.

“데이비와 에이리아. 그리고 본녀가 네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단순히 기만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널 지키기 위해서였고.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네가 받아들이지 못했고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그녀는…… 대체 뭐죠?”

짧은 고민 끝에 그녀가 대답했다.

“너무도 슬픈 삶을 살아온…… 평행선 너머의 일리나 데 팔란.”

“…….”

“데이비가 존재하지 않던 세계에서 마족과의 전쟁으로 아픈 기억을 품고 살아왔으며 유일하게 이 대륙으로 넘어온 아이.”

그것도 모자라 본래의 육신으로는 존재할 수가 없어서 한번 죽음을 겪고 새로운 육신을 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유일한 존재의의였던 육체까지 잃어버린 불쌍한 여인.

그 말에 일리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녀는 너와 같지만 조금 다른 존재이니.”

“그래서…… 그녀가 중검을…….”

페르세르크는 한숨을 내쉬며 레이나가 어떻게 데이비와 만났고, 그녀가 어째서 신의 기적까지 빌어가며 그곳에서 이곳까지 넘어와야 했는지를 알려주었다.

이곳의 일리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진실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떻게 이곳에 와서.

어떻게 변해서.

어떤 선택을 내리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 * *

“읏…….”

칼바람이 부는 거대한 눈 덮인 산은 맹렬한 추위가 섞인 눈보라로 가득했다.

적당한 자리에 깃발을 꽂아놓고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내가 물었다.

“어때. 보기 좋지? 에베레스트의 끝이야.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 해발 8천 미터가 넘거든.”

“여긴…… 지구인가요?”

“그렇지.”

킥킥 웃으며 대답해주자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풀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옷은 하늘하늘한 만큼 굉장히 추워 보였지만 내가 덮어준 담요는 엄연히 마법아티펙트였다.

설산 지대에서 버티기 위해 만들어진 보온 장비. 그렇기에 장비 효과만으로도 레이나에게 추위가 가해지는 일은 없었다.

“여길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데?”

“글쎄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네요.”

애초에 이곳에 데려온 것에 큰 이유는 없었다.

격정적으로 울분을 토하던 그녀에게 잠시 머리를 식힐 시원한 곳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아마 네가 괴로웠던 건 정착하지 못한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라는 이유는 아닐 거야.”

그런 게 문제였다면 그녀가 이렇게 고통받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게 다름 아닌 일리나 데 팔란 본인에 대한 질투심이었다면.

“그녀를 지키기 위해 이곳까지 온 주제에…… 이 대륙의 평온을 위해 온 주제에…….”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제 와서 그녀가 행복한 삶을 사는 걸 보고 질투나 느끼고…….”

주기적으로 일리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그녀였다.

똑같은 자신인데 누구는 평생을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하고, 누군 행복을 찾았다.

그걸 유도한 건 레이나 본인이었다.

그녀는 죽을 줄 알았던 자신이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으니까.

“미안해요. 이런 거 나 진짜 뻔뻔하게……”

“넌 뭘 원하는데.”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나는 일리나로써 이곳에서 살아갈 수 없고, 일리나가 가진 행복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없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네가 레이나로써 일리나 부럽지 않은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는 것뿐이야. 아, 이거 먹을래?”

나는 아공간에서 컵라면을 꺼낸 뒤 뜨겁게 끓어오르는 물을 부은 다음 건네주었다.

그러자 레이나는 훌쩍거리면서도 라면을 받아 후루룩 먹었다.

일리나도 레이나도 라면을 굉장히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몸이 달라져도 영혼이 같으니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후루룩…… 후룩…….

칼 같은 눈보라가 부는 이 에베레스트의 정상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라면을 먹고 있는 그녀를 보니 퍽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라면 국물까지 싹 먹어치운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미안해요. 그래도 마음이 조금 편해지나 봐요.”

그녀는 내 곁에서 웃는 일리나를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일리나 데 팔란이라는 인물로서 살아가며 부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이 땅에선 이방인이었으니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전부 들어줄 테니.”

내 물음에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모르겠어요. 이젠 내가 뭘 원하는 건지도…….”

“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재차 질문을 던지자 그녀가 움찔했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그녀는 일리나 데 팔란으로써 다시 살아갈 수 있다. 그곳은 한차례 내가 전쟁을 막았기에 더 이상의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지금 그곳은 레이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었으리라.

“네가 바란다면 프리아 여신을 쥐어짜서라도 돌아갈 방법을 만들어줄게. 다르다곤 하지만 넌 일리나와 다르지 않으니까.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와주고 싶은 게 내 심정이기도 해.”

“아…….”

그녀는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거지?”

“……네.”

짧게 답한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 난…….”

그녀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당신의 곁에 있고 싶어요…….”

“레이나.”

“이제, 그만…… 그만하고 싶어. 다 내려놓고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싶어…….”

내 품에 안겨들며 그녀가 흐느꼈다.

“처음엔 몰랐다고요…… 그저 평화로운 세계를 보는 게 즐겁다고 이 평화가 지속되게 유지하고 싶다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함이 그녀를 채웠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녀를 만든 것이 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마치 아이가 부모를 따르는 것처럼.

그녀는 내게 어떤 연심을 품은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그녀를 가장 잘 알고 그녀를 가장 이해해줄 수 있는 존재는 단둘뿐이다.

나와 에이리아.

그녀와 내가 있는 곳으로 그만 돌아가서 정착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오랜 시간 유랑하는 이들이라도 자신의 집으로 주기적으로 돌아가곤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집이라고는 서대륙의 숲이며. 그곳에는 그녀를 이해해줄 수 있는 나와 에이리아가 없었다.

그동안 아무 말도 없이 유랑한 것도 정말 기적에 가까운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녀가 말하는 집은 평행선이 아닌 이 세상. 그리고. 내가 있는 하인스 영지가 아닐까.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부탁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를 데려올 순 없었다.

일리나도 레이나도 양측 모두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이에 내가 그녀를 달래주려던 그 순간.

쩌억!!

“하인스 영지로 와요. 내가 도와줄게.”

뜬금없는 누군가의 등장에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너?!”

“레이나…… 아니. 일리나 데 팔란.”

“당신은?!”

레이나도 깜짝 놀라 공간을 찢고 나타난 소녀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지켜왔잖아…… 그럼 이제 내가 당신을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니야?”

절대 인지해선 안 될 이가 진실을 가지고 눈앞에 나타났다.

“데이비. 그녀를 거둬 줘.”

일리나의 부탁에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물었다.

“네가 어떻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네가 우리와 약속을 한 것을 알아. 하지만…… 나는 그녀를 이대로 두고 싶지 않아…….”

침울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너 괜찮은 거 맞아? 어떻게…….”

“들었어.”

들었다고? 듣는다고 기억을 하고 아무 문제가 없으면 지금껏 그 난리를 쳐가며 두 사람의 거리를 유지할 리가 없다.

그 페널티로 받는 내상이 얼마나 지독한지 알기에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일리나를 품에 당겼고 그대로 그녀의 몸 안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흐읏?!”

일리나가 빨개진 얼굴로 신음을 흘린다.

하지만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몸 내부에 내상의 여부를 빠르게 확인했다.

문제가…….

없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뭔가 잘못되었다.

* * *

일리나가 떠난 이후 에이리아와 페르세르크는 회의를 하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너무 가여워요. 하지만 이런 일은 데이비 오라버니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요.”

“맞아. 본녀 또한 그렇게 생각해.”

“만약 데이비 오라버니가 괜찮다고 하셔도 언니는…….”

“레이나는 남이 아니야. 에이리아. 일리나 그녀 본인이나 다름없으니까. 다만…….”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녀는 데이비에게 마음을 품은 게 아닐 게야.”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성의 사랑이 아니라.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따스한 집이 아닐까.

“그래서 일리나 언니를 말리지 않으신 거네요.”

“물론. 착각은 본인의 자유니까.”

키득거리는 페르세르크를 보며 에이리아가 쓰게 웃으며 앞에 놓인 서류 중 몇 개에 사인을 했다.

보낼 영지 대리 관리인이자 데이비의 시녀인 에이미가 최근 결혼준비를 하느라 바빠지면서 일을 에이리아와 페르세르크가 나눠서 처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죄책감 때문에 데이비의 곁에서 평생을 종사하려던 그녀도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찾아가고 있었다.

“언니는 가끔 짓궂을 때가 있어요.”

“그보다. 이 사태가 왜 이렇게 된 건지 조사를 좀 해봐야 할 터인데…….”

그녀는 걱정스레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마치 폭풍전야처럼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머릿속에선 이건 잘못되었다. 지금이라도 수습해야 한다고 외쳐대지만, 굳이 반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쪽이 작살날지 저쪽이 작살날지. 그건 지켜봐야 하는 게 아닌가.

“에이리아. 본녀와 내기 한번 하겠니?”

“내기요?”

“그래. 돌아왔을 때 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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