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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110화 (1,109/1,559)

제1110화

고요한 하인스 영지의 영주성.

대부분의 시녀와 시종들이 퇴근하고 고요해진 성의 집무실에선 에이미가 머리를 감싸 쥐며 인상을 끙끙 쓰고 있었다.

“후우…… 치안에 조금 문제가 있네…… 적당히 이름이 알려진 인물을 섭외하려면 그만큼 돈이 나갈 텐데…….”

곤란한 사안이지만 데이비에게는 아직 보고하지 않았던 사안이었다.

하인스 영지는 과거부터 치안이 좋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인간이 착하거나 순박하다라는 그런 감정적인 측면이 아니라 선을 넘는 놈들을 데이비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가진 상식. 왈패들이 지닌 상식으로 아무리 무서운 황제가 있어도 뒷골목은 존재한다는 상식이 개박살 나는 곳.

도저히 어떻게 알아냈는지. 어떻게 찾아내는 건지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그의 섬뜩할 정도의 행동력에 보통 뒷골목을 점령하는 조직이나 질 나쁜 짓을 저지르는 이들은 하인스 영지에 터를 잡는 것을 꺼려했다.

그나마 비슷한 존재라면 정보 길드 정도일까.

물론, 빈민가 문제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잘 해결되어있는 터라 그런 문제가 더 적은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현재 하인스 영지는 단순 라운의 영지 기준을 넘어 성국, 마탑. 연금학파. 그 외에도 다수의 상단 지부. 무역을 위해 드나드는 상인, 하인스 아카데미의 학생들로 가득하다.

처음에야 전쟁고아 위주로 운영하던 아카데미였지만 요즘엔 귀족들도 제법 입학을 하고 있으니 관련 수행원들이 머무르는 지역도 존재할 정도였다.

게다가 하인스 영지 특유의 아름다운 영지 외관, 영지의 명물인 드래곤 같은 존재들은 관광객을 불러모으기에도 충분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베르닐 시종장의 추진대로 영지 일부에 간혈천을 개발하여 특수한 효능을 지닌 온천사업까지 추진하고 있는 터라 앞으로는 더 많은 이들이 몰려들 터.

고작 몇 년 전만 해도 영지만이 수백 단위밖에 되지 않던 버려진 땅. 죽어가는 땅. 혹은 저주받은 지역이라는 오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건 경영을 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두고두고 찬사를 자아내곤 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치안을 유지하는 데에 유지비가 많이 들게 된다.

문제는 고위귀족들도 간혹 오는 편이다 보니 어느 정도 이름이 있는 용병대나 자유근위대를 고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정해진 자본 안에서 이름을 날리는 이들을 고용하는 게 쉽겠는가.

당연히 쉽지 않지.

데이비에게 보고한다면 금방 해결될 일이지만 에이미는 그런 일 하나하나로 그에게 보고하여 신경을 쓰게 할 수는 없다는 주의였다.

덜컹!!

그때 영주성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걸어들어온다.

“저하?”

놀란 듯 에이미가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갔다.

그리고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데이비와. 빨개진 얼굴로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오셨습니까 저하.”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은 퇴근했습니다. 두 분 왕자비 마마께서는 저하를 기다리시느라…….”

“그래. 잘됐다. 이야기할 게 있으니.”

“따로 자리를 마련할까요?”

“아냐. 에이미 너도 푹 쉬어. 아 참.”

“네?”

“연애사업은 잘 되어가나?”

“…….”

얼굴이 빨개진 채 에이미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저…… 저하께서 신경 써주신 덕에…….”

“그래. 만나보니까 좋은 사람이더라. 결혼하게 되면 내가 지원해줄 테니 걱정 마.”

“하…… 하오나 저하. 저는 저하의 영지 대리관리인으로서 현재 저하의 위치를 생각하면 함부로 외부인과 혼인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너를 이용해서 하인스 영지에 큰 입지를 발휘한다?”

“적어도 외부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판단되어…….”

에이미의 대답에 데이비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 마. 그럴 사람도 아니고. 설사 그가 나쁜 생각을 품고 있다면…….”

데이비의 붉은 눈에 신뢰가 어려있었다.

“네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

“저를 믿으시는 건가요?”

“당연히 믿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믿을 수 있는가.

에이미의 친모는 과거 데이비의 생모인 레니 왕비를 독살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의 딸인 에이미에게 어떻게 이렇게 신뢰를 줄 수 있는지.

그녀의 그런 시선에 데이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죄를 갚는 건지. 그저 그의 은혜를 받는 건지 모를 일이다.

“그만 들어가서 쉬어.”

그 한마디에 에이미는 어째서인지 모를 눈물이 울컥 나올 것만 같았다.

제 어머니의 그런 잘못이 없었다면. 자신은 그 숨 막히는 왕실에서 이런 따스하고 밝은 분을 만날 수 있었을까.

잘못된 생각이지만 그 일이 어쩌면 그녀에겐 행운이자 기회가 아니었을까 하는 절대 말하지 못할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네. 저하.”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데?”

“헤헤. 저하를 모시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거 싱겁기는.”

얼마의 시간이 흐르든 절대 이 사람의 곁을 지키겠다.

그런 맹세와 함께.

* * *

페르세르크와 에이리아는 마치 시험문제의 정답을 기다리듯 긴장한 얼굴이었다.

반면 일리나는 처음부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나 양은?”

“그동안 스트레스가 심했던 거 같아서. 먼저 몸을 씻고 쉴 수 있게 조치했어.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자더라.”

마치 오랜 시간 잠을 못 잔 사람이 수면에 빠져들 듯 레이나는 금방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갑작스레 그녀와 내가 사라져버린 탓에 알베르타 쪽에선 혼선이 온 듯했지만 튜나 쪽에서 잘 처리했으니 다음에 이야기하자는 연락이 당도했다.

“흐음…….”

페르세르크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진다.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들었어. 상의 없이 그녀에 대해 일리나에게 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 데이비. 한데. 일리나의 몸에는 문제가 없었고?”

“나도 좀 당황스러운 일이니까. 그리고 일리나의 몸은 솔직히 안 믿길 정도로 멀쩡해.”

마치 세계의 규칙이 고장 난 것처럼.

“왜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다만. 결과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게 내 판단이야. 그리고 비록 모습은 바뀌었다지만 레이나가 또 다른 한 명의 일리나인 만큼 필요로 하는 게 있으면 도와주고 싶은 것도 사실이고.”

그 말과 함께 에이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돋는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다만 그녀의 케이스는 조금 독특해. 그래서 그녀만큼은 이곳에 무기한으로 [객경]의 입장으로 지낼 수 있게 해주고 싶다. 걱정은 하지 마. 그녀를 품겠다느니 그런 소리를 할 생각도 없고. 그녀가 내게 품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니니.”

내 대답에 페르세르크가 눈을 감았다.

“그게 전부?”

“그래. 그게 전부야.”

그리고는 천천히 뜨며 에이리아를 바라본다. 그러자 에이리아가 뜨끔한 표정으로 당장이라도 불안함이 현실이 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언니.”

“왜 그러느냐 에이리아.”

“무…… 무무…….”

파르르 떨며 그녀가 조심스레, 그리고 힘겹게 말했다.

“무승부로 하면 안 될…….”

“어허. 무승부라니. 내기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야.”

그 말에 에이리아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추욱 처지는 모습을 보였다. 쫑긋 솟아있던 귀가 추욱 늘어진 게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새였다.

“내기라도 했나 본데?”

“풉…… 당연히 했지. 일리나가 아무래도 거하게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여서 말이야.”

페르세르크의 미소에 일리나가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언니!! 그, 그거야 누가 봐도 착각할만한…….”

“글쎄. 본녀는 척 봐도 알겠던데.”

놀리는 것처럼 시선을 회피하는 그녀 때문에 일리나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그녀가 데이비에게 연심을 품었다고 착각한 게지, 분명 그대를 찾아가서 대뜸 그녀를 품에 거둬달라고 말했을 게야. 평소엔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면서.”

이 정도면 자리 펴고 점집 차려도 되겠구나 싶었다.

“누가 봐도 착각할만한 모양새였잖아요. 나를 질투한다고…… 그런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 행복에 젖어있었으니…… 차라리 내 자리를 내어주는 한이 있어도…….”

어차피 둘 모두가 일리나 라는 사실은 변치 않을 테니까.

물론 그건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일리나는 일리나고, 레이나는 레이나일 뿐이다.

“그녀의 질투는 이성의 질투가 아니었다는 것이지. 그리고.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했다간 혼날 줄 알아.”

보지 않고도 어떻게 알아낸 건지.

레이나의 고향이었던 평행선 너머의 팔란 제국은 마족과의 전쟁으로 불타 사라졌고, 이곳의 팔란 제국은 그녀에게 낯설다.

아니 이 대륙의 대부분이 그녀에겐 낯선 세상일 수밖에 없었다.

즉. 레이나가 극심하게 느끼고 있던 것은…….

바로 극심한 향수병.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향수병.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본녀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지.”

“대체 언니는 그걸 어떻게 알아채신 거예요?”

에이리아가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지 페르세르크에게 물어왔다.

“글세…… 동질감이라면 표현하기 쉽겠구나.”

나는 천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돌아왔을 때 6년밖에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사망 이후 수천 년 이상 잠들이었다가 최근에 와서 깨어났다.

때문에 그녀는…….

“그렇구나…… 어떤 면에선 레이나 양과 언니는 정말로 비슷한 경우네요.”

“정확히 짚어서 그녀는 본녀보다 더할 테지만.”

극심한 향수병은 급기야 같은 존재인 자신을 질투하게 만든다.

레이나가 처음 바란 것은 평화로운 세계를 보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도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유일하게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그녀를 이해해줄 수 있는 나와 페르, 그리고 에이리아가 있던 하인스 영지뿐이었다.

하지만 나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존재했다.

또, 지금처럼 일리나가 나와 혼인하여 이곳에 정착한 이상 사실상 레이나는 절대 이곳에서 오랜 시간 머무를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되어버린 이곳에 올 수 없다는 사실이 아주 천천히 그녀를 갉아먹어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본인도 모르게 서서히 말라갔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이곳에 있는 본인인 일리나에게 질투를 느낀 것일 터다.

당장 해소되진 않겠지만 이곳에 머무를 수 있다면 서서히 그녀에게도 좋은 징조가 되리라.

“그래서. 내기가 뭔데.”

“에이리아도 일리나와 같은 착각을 한 모양이라. 레이나 그 아이가 그대에게 연심을 품은 줄 알았던 게지.”

“그래서?”

다시 묻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이후야 뭐 더 생각할 것이 있겠는가. 에이리아는 레이나 그 아이가 그대에게 연심을 품은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 말에 에이리아와 일리나 둘 다 움찔거렸다.

“본녀는 레이나 그 아이가 단순히 이곳에 정착하고 싶어 할 뿐이라고 했을 뿐이지.”

빙그레 웃는 그녀가 말한다.

“만에 하나 레이나가 연심을 품었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었을 게야. 에이리아와 일리나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대의 곁에 더 이상 다가가게 둘 생각이 없어서 말이야.”

본녀는…….

부드럽게 웃는 미소 속에 그녀의 소유욕이 보였다.

그렇게 소유욕이 넘치면서 에이리아와 일리나를 받아들인 건 참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모르지 않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던 몸. 그리고 그녀와 맺어지기 전부터 그녀들에게 일정의 마음을 허락해버린 나를 위해서.

페르세르크에겐 평생을 다해 보답해도 모자라지 않을까.

일리나와 에이리아도 사실 그 사실을 알기에 페르세르크를 나보다 더 따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 부끄러워…….”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일리나가 중얼거렸다.

“웃기긴 했지. 향수병 때문에 힘들어하는 레이나의 앞에 떡하니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킥킥 웃으며 내가 고자질해버리자 일리나가 벌떡 일어나 내 등을 퍽퍽 때렸다.

“그…… 그만!? 그만해 데이비!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래. 그녀가 본인이라는 걸 알았으니 그럴 수 있지. 한데 일리나.”

“네…… 언니.”

“그녀의 사정을 듣고 혼란 속에서 다급하게 결단을 내린 건 칭찬할 일이야. 오히려 관심이 없었다면 더 슬펐을 테지.”

“그건…….”

“다만. 이일은 그대뿐만 아니라 모두와 상의를 거친 뒤에 결정을 내리는 게 도리상 맞는 일이겠지.”

“죄송해요. 언니…… 제 생각이 짧았어요.”

“괜찮아. 사실 이 사태는 본녀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반쯤 유도한 것이니까.”

일부러 했다는 말에 일리나의 눈에 의문이 서린다.

“그게 무슨…….”

“아무리 본인이라지만 데이비가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제일 혼란스러울 건 일리나 너 자신이겠지.”

즉. 레이나가 만약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진실을 안 일리나가 정말 편히 그녀라는 존재를 객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였다.

그 작은 단서만으로도 그녀는 나와 일리나. 그리고 레이나 모두의 상황을 파악하고 떠본 것이었다.

정말로 문제가 없을지에 관해서.

“언니는 정말…….”

“하면 에이리아를 조금 도와주겠니?”

그 말에 에이리아의 표정이 더욱 파랗게 질렸다가 이내 화색을 띤다.

그리고는 황급히 일어나 일리나의 손을 꼭 잡았다.

“에…… 에이리아?”

“언니. 같이 가요.”

그 말에 일리나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남을 힘들게 할 바에 혼자 다 뒤집어 쓰고 만다고 말할 정도로 착한 에이리아가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뭐야. 뭔데.”

“이따가 보면 알아. 그보다. 문제가 하나 더 있지 않아?”

그녀가 다리를 꼰 채 내게 말했다.

“하나 더?”

“그녀는 용사야. 그것도 그대와 어떤 유착 관계도 없던 중립을 유지하는 삼제국 공인을 받은 인물.”

그런 그녀가 하인스 영지에 갑자기 정착하면? 그때 생길 잡음 또한 반드시 존재한다.

“그렇겠지. 공익을 목적으로 삼제국 황제에게 공인을 받은 용사가 실은 나와 유착 관계가 있었다고 하면 말은 많아질 거야.”

“그에 대한 대책은 세워놨겠지?”

“당연하지.”

“그래. 그래야 본녀가 그대의 팬을 자처하는 보람이 있지.”

최상책은 납득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힘을 이용해 압박하는 것은 사실상 최하책으로 후에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객경이라는 단어를 쓴 거야.”

그래서. 에이리아와 한 내기가 뭔데.

내 질문에 그녀는 야시시하게 웃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대체 무슨 내기를 했기에 이러는 건지.

그런 의문은 곧 풀릴 수 있었다.

페르세르크에게 떠밀리듯 에이리아의 침실에 찾아갔을 때.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의 차림새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르.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두 사람을 향해 내가 다가갔다.

* * *

고요히 잠든 레이나는 꿈속에서도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푸른 빛이 감도는 은발을 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데이비를 따라다니는 골렘, 륀느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륀느라고 하기엔 성숙한 모습이었다.

“여신님…… 이군요?”

다만. 그녀의 종족 때문인지 그 존재를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건 꿈이다. 하지만 너무도 생생했다.

“당신의 자비인가요?”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묻지도 않고 먼저 물은 것은 그것이었다.

“절대 서로에게 정체를 들키면 안 되죠. 도플갱어 이야기처럼.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문제가 해결되어버렸어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다가간 레이나는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이곳에 있어도 되나요? 이제 정착해서 편히 쉬어도 되는 건가요?”

데이비는 괜찮다 했다. 어찌나 편안함을 느꼈는지 지낸 기억이라곤 며칠밖에 없던 하인스의 영주성의 객실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었다.

이 장소가 편안한 게 아니었다.

이곳에 그가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부모님이 계신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은 오랜 시간 향수병과 그리움으로 지친 그녀에게 평온을 선사했다.

[네가 바란다면.]

“제 정체로 인해 그들에게 문제가 발생하진 않나요?”

다시금 재차 물었다.

이런저런 오해가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데이비는 그녀가 잠들기 전 그런 말을 남겼다.

이곳에 객경으로써 지내게 해줄 테니 원 없이 머물라고.

비록 삼제국의 공인을 받은 용사이기에 데이비와의 유착 관계가 드러나면 좋을 일이 없지만, 객경이라는 입장을 잘만 이용하면 그녀가 이곳에 장기간 체류해도 문제가 되진 않을 활로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걱정이 되는 건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음으로써 생길 세계의 구조적 문제. 그로 인해 데이비나 이곳의 본인인 일리나 데 팔란. 혹은 이 사실을 아는 이들에게 피해가 가는 게 아닌가.

그것이 가장 걱정이었다.

그런 그녀의 물음에 여신은 말없이 다가왔고, 레이나의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누군가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면 사실 거부감부터 들어야 할 텐데.

어째서인지 굉장히 포근한 느낌이 그녀를 감쌌다.

마치 오래전 뱀파이어로 인해 사망했던 그녀의 친모가 안아주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괜찮아.]

그녀의 손에 쥐어진 빛을 내는 패드에 글귀가 쓰여졌다.

[이제는 다른 존재가 된 너를 어찌할 수 있는 시효가 지났고. 힘도 약해졌으니.]

“힘이, 약해졌다구요?”

[정신체. 구원을 받은 개체가 이 땅에 존재함으로써 규칙의 간섭능력이 더욱 떨어져.]

벨가. 벨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 녀석이 사라지지 않고 데이비와 튜나 재상에 의해 구원을 받아 이 세상에 남게 된 탓에 세계의 규칙이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힘이 약해졌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

어째서일까. 눈물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모든 선택은 미래를 자아내게 되겠지. 그 미래는 내가 던진 하나의 질문이니.]

결정은 데이비가 하였다. 그 결과 레이나도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너를 구원하는 것 또한 하나의 대답일 터. 오래 돌아왔지만 결국 완성된 하나의 거목이 되었구나.]

그녀는 프리아 여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데이비에게 몇 가지 선택을 종용했고. 그 선택의 결과. 프리아 여신의 의도한 미래. 즉 레이나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미래가 만들어진 것이다.

자잘한 행동 하나하나를 엮어 거대한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

천문학적인 수학 계산을 통해 미래를 보는 악마 같은 존재가 있다고 하였던가.

그런 악마도,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수천 년의 미래를 완벽하게 구상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게 단순히 한두 명의 미래수준이 아니라 전 우주, 전 차원, 전 세계의 미래를 계측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정말. 어떤 생명체도 계획할 수 없는 창조주급의 큰 그림이었다.

[큰 그림.]

무표정한 그녀가 태블릿을 보여주며 한 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완전 이득.]

“그러네요. 완전 이득이네요.”

[겁이 나니?]

“나요. 정말 제가 바란 게 그의 곁에 있는 게 맞는 건지. 향수병이 맞는 건지. 혹시라도 나중에 제가 회까닥해서 그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건 아닌지…….”

말은 그리하지만, 레이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건 향수병이 맞다고.

그리고는 데이비가 심심찮게 하던 말투를 따라 해보며 엄지를 세웠다.

프리아 여신의 뭔가 미묘한 말투에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다만, 프리아 여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직 끝은 아니야.]

“앞으로도 질문을 던지실 건가요?”

질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미래를 구현할 갈림길.

선택은 그와 자신들의 몫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소중한 아이들을 믿고 있어. 태초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무표정이던 프리아 여신의 얼굴에 아주 잠깐.

미소가 어린 느낌이었다.

용사 레이나. 그녀가 용사직의 은퇴를 결정하고 하인스 영지에 정착하게 된 소식은 그 후 금방 대륙에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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