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1화
“현재 용사 레이나는 무리한 심력 소모로 인해 요양 중입니다. 의사로서의 소견으로 보건대. 육체적으로는 이상이 없으나 정신적으로 극한까지 몰려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이 제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내 말에 눈앞에 있던 네 명의 남녀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린디스 제국에서는 황제를 대신하여 카트린느 대공이 참석했고, 콘타스 제국에선 대제가 그리고 팔란 제국에선 팔란의 황제. 살리반이 참석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론 의외의 인물. 성국의 성녀인 리나의 후견인이 된 현 법왕이 출두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레이나의 활동에 직접적으로 날개를 달아주고 지원하는 이들이다.
레이나의 활동에 자금을 융통하고, 그녀가 필요할 때 병력이나 지위를 인도해준 이들이었다.
물론, 이례적인 결과이긴 하지만 그동안 레이나가 대륙 각지를 돌아다니며 해온 구원은 그만한 대가가 되었다.
그 예시는 많았다. 잘못된 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할만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폭주한 몬스터, 혹은 갑자기 나타난 오지의 몬스터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고, 위험한 몬스터나 악에 심취한 마법사를 찾아내 소탕하는 등.
단순히 마왕과 용사라는 동화적인 부분을 넘어 그녀는 대륙의 평화에 중립적으로 기여했다.
어느 한 국가에 소속되지 않기에 그녀의 입지는 모든 이들에게 중립적으로 작용했다.
덕분에 대륙 곳곳에서 펼쳐지는 자잘한 문제가 많이 해결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녀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그녀에게 원한을 품은 이도 다수 존재하겠지만.
삼제국과 1성국. 하나하나가 엄청난 입지를 지닌 네 사람이 하인스 영지로 출두한 것은 아니었다.
셋 모두가 수정구를 통한 홀로그램을 이용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 정도로 정교한 수정홀로그램은 어지간한 기술로는 구현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용사직의 사퇴라…….”
“사실상 은퇴라고 하는 게 더 좋겠지요. 허허. 실제로 그녀 덕분에 대륙은 평화에 더욱 한발 걸칠 수 있었으니.”
“뭐, 짐도 이하동문이긴 하오.”
일반적인 왕국은 몰라도 용사 레이나를 주도적으로 밀어주고 있던 것은 삼제국과 성국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이런 상태에 대해선 적어도 세 제국의 통수권자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사실 삼제국의 황제는 그녀라는 존재를 이용했다.
그녀의 존재를 이용해 괜한 분란을 처리함으로써 변수를 차단해왔으니까.
쓸모있는 도구.
그 정도로 취급해도 사실 할 말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레이나에 대해 지원을 짜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이용하는 만큼 그녀에게 확실한 지원을 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대륙의 평화가 유지될수록 삼제국은 계속 발전한다. 그 사실은 장기적으로 볼 때 힘으로 타국을 억누를 때보다 훨씬 거대한 성장치였다.
“린디스 제국에서는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겠어요. 최근 들어 대륙에 큰 분란은 거의 사라진 수준이니까요.”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카트린느 대공의 능글능글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짐 또한 대공과 같은 생각이다. 대륙의 평화문제를 고작 계시를 받았다는 이유로 한사람에게 맡겨놓는 건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지. 따라서, 콘타스는 그녀의 정착을 축복하지.”
린디스에 이어 콘타스 대제 또한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용사의 활동에 대해선 많은 국가들이 찬성했다.
이에 그녀의 은퇴에 따른 많은 국가들의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공적인 자리를 만들기 전에 삼제국의 황제들과는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어놔야 했다.
린디스 제국은 알카 후작의 뒤처리로 바쁜 상황인 만큼 레이나의 문제를 크게 걸고넘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콘타스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번 세계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크게 충돌할 것은 다름 아닌 콘타스와 린디스 제국이었으니까.
큰 전쟁을 막아준 입장 때문인지 대제는 레이나에게 빚이 있다고 여기는 듯 보였다.
게다가 대제의 친혈육인 모르지아나가 그녀와 함께 다녔다는 이유만으로도 제법 호의를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뭐, 개인적인 이유이긴 하지만 짐의 혈육이 다치지 않게 잘 케어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는 입장이지.”
정확히는 그 압도적인 수다 능력을 지닌 모르지아나를 몇 년이고 데리고 다녀준 보답을 하고 싶은 거 아닙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
이후 성국의 실질적인 통수권자, 법왕도 의견을 내놓았다.
“용사라 하여도 사람이지요. 아무리 오래 나는 매라 할지라도 쉬어야 할 횟대는 반드시 필요한 법입니다. 본인의 입장으로썬 무리하던 그녀가 안쓰러워 보였던 점도 없잖아 있습니다.”
생각보다 레이나가 삼제국 황제와 법왕에게 쌓아둔 인망이 두터웠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레이나의 숭고한 사명은 많은 이들을 교화시킬 정도였으니까.
어쩌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사욕을 전혀 채우지 않던 모습이 그들을 더욱
“나는 반대입니다.”
하지만 살리반 황제만큼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반대라 하심은?”
“우선 왕자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황제임에도 그는 내게 하대를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만큼 나를 존중해준다는 뜻이리라.
남들이 보는 위치라면 그 또한 황제로서의 체통을 지켜야겠지만 이곳에는 삼제국의 대리인, 혹은 통수권자들과 나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는 입장에서 갑자기 그녀가 하인스 영지에 칩거하게 될 경우 그에 따른 잡음은 반드시 나올겁니다.”
그의 말에 대제가 흥미롭다는 듯 웃어 보였다.
“팔란의 황제께서는 제법 잔혹한 사람이로군.”
“미안하지만 도발이나 받자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단호한 그의 말에 수정구에서 흘러나온 빛으로 홀로그램화 된 대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어디 젊은 황제의 의견을 들어볼까?”
“그녀의 업적은 팔란 제국 또한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하인스 영지는 현재 태풍의 눈이지요.”
“그래서?”
“팔란 제국에서 우려하는 건 그녀가 있는 곳이 하인스 영지라는 점입니다. 그녀를 우리 팔란 제국에서 인도하겠습니다. 그녀에게 막대한 부와 지위를 주고 그에 따른 합당한…….”
살리반 황태자의 말에 내가 눈을 꿈틀거렸다.
이 인간이?
“이봐. 팔란의 황제님. 지금 팔란에서 용사를 품으면 더 문제가 커지는…….”
“그 문제는 팔란에서 해결할 명분이 있습니다.”
이 양반이 왜 이래.
“후우…… 일단 머리를 식혀야겠군. 왕자. 왕자의 의견은 잘 알았다. 다음번엔 용사와 함께 출두하도록.”
그렇게 대제가 연락을 끊고 법왕도 허허 웃으며 연락을 끊었다.
“왕자님.”
“예 대공.”
“조만간 영지에 한번 찾아갈 거에요.”
“네?”
“설욕전 해야죠? 아 참.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병도 아니고 저주도 아닌데 갑자기 사람이 돌변한다느니 뭐니 그런 이야기가 간혹 나오곤 있으니 조심하세요.”
빙그레 웃으며 연락을 끊는 그녀를 남기고 살리반 황제만이 남았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제 설명을 못 들으신 겁니까?”
그녀가 정착하고 싶어 하는 곳은 이곳이다.
그런데 그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그녀를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내 물음에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말했다.
“내 동생입니다. 일리나는 이미 당신의 품에 안겼기에 평생 가까이서 지켜줄 수 없지만, 그 아이는 달라요.”
그 한마디에 주변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 * *
내가 살리반 황태자에게 그녀의 진실을 말했던가.
기억이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 부분의 기억이 흐릿하기 그지없다.
혼란스럽네. 이런 경우는.
에이리아는 평행선에 나와 함께 내던져졌기에 그녀의 진실을 알고, 페르세르크는 그 후에 알았다.
하지만 살리반은?
내가 그에게 그녀의 정체를 떠벌린 적이 존재했던가.
이상하리만치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찰나.
그가 말했다.
“레이나는…… 아니 그 아이도 일리나입니다. 제 동생이라 이 말입니다.”
“이봐요 황제 폐하. 그러면 더욱이 그녀를 구속하면 안 되지.”
그래. 그가 진실을 어떻게 알고 있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아무래도 내가 프리아 여신과의 일로 과거를 비틀면서 어떤 변화가 생긴 모양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이 알 수 없는 기억의 변화에 혼란스러움이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그녀는 저 너머에서 왔습니다. 이곳 모든 게 낯설어요. 그런 그녀가 극심한 향수를 느끼고…….”
“그렇기에 제가 데리고 가겠다는 겁니다.”
“…….”
“그녀의 집은 이곳 팔란입니다. 하인스가 아니라.”
그의 막강한 고집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었다.
내 곁에 있는 일리나에게 평생 단 한 번도 따뜻한 말을 해주지 못했지만, 그는 오래전 사망한 팔란의 황태자 만큼이나 일리나를 속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친동생에게 사랑한다는 한마디 못한 오라비라는 존재가 얼마나 속이 문드러졌을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릅니다. 겉으론 레이나입니다. 그 누구도 그녀를 편애한다 하여 뭐라 할 리 없습니다.”
“애초에 당신이 국가 내의 문제를 잘만 해결했으면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닙니까?”
일리나와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팔란 내부 귀족들의 정치 대처 때문이었다.
살리반은 일리나에게 가야 할 적의를 모조리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탱커가 되고자 그녀를 멀리했으니까.
현재의 그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닐 텐데.
“…….”
말없이 침묵하는 걸 보니 쉽지만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데이비 왕자.”
같은 왕족이며, 각 국가에서 압도적인 입지를 지니고 있으며 대륙에서도 막강한 위치를 자랑하지만, 그와 나는 달랐다.
“당신은 과감하게 길을 개척했지만…… 나는 아직 그 길을 개척하지 못했습니다. 당신 같은 힘과. 지혜.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겁이 없는 성격이 되지 못했으니까요.”
나는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그는 그게 불가능했다.
가진 것의 차이였으니 말이다.
“스스로가 너무도 용서가 안 됩니다. 왕자,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그의 부탁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답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마세요. 이 양반아. 꿩 대신 닭이라고? 당신 동생이 무슨 대체용품인 줄 알아?!”
“……정말 아프게 찔러오는군요.”
내 격성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 들어요. 황제.”
존칭도 버린 내가 열이 받은 얼굴로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 충격에 수정구가 한차례 크게 흔들린다.
“가족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괜찮다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걸 눈치 보는 건 틀려먹은 겁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변 눈치 따위 보지 마세요. 당신은 황제야.”
과거 정적들이 있던 황태자 시절이 아니라 이 말이다.
“일리나에게 잘 커 줘서 고맙다. 한마디라도 하고 싶다면 대체품으로 레이나를 보지 말고 당신과 함께 살아온 당신 동생에게나 해.”
한 번만 더 내 와이프 눈에서, 그리고 타 세계에서 넘어온 당신 동생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할 짓을 하면.
그땐 정말로 내가 당신을 어떻게 비틀어버릴지 모르니.
아무리 싸웠어도 오라비를 미워하지 못하는 여동생이 불쌍하지도 않나.
* * *
레이나가 용사직에서 물러나는 건에 관해서는 결국 삼제국과 1성국의 만장일치로 결정이 내려졌다.
아쉬움을 내비치던 살리반 황제였지만 그는 이상할 정도로 자세하게 알고 있는 레이나의 슬픈 과거를 기억해냈는지 그녀를 잘 보살펴 주라는 말을 한 후 먼저 물러가 버렸다.
물론, 이들은 알베르타와 바탄의 전쟁 분위기로 인해 대륙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것을 적당히 누르기 위해 움직여야 했기에 상당히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골머리를 썩는 것은 이번 사태로 알게 모르게 굉장한 피해를 보아야 했던 린디스 제국이리라.
물론, 그녀가 물러나면서 당연히 그녀의 파티원이었던 막시모스나 모르지아나, 그리고 이오, 마족인 유시르까지 제 갈 길로 흩어지게 되었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있던 곳으로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레이나가 이제라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편히 쉰다는 말에 그녀를 위해 하인스 영지까지 찾아온 그녀의 파티원 모두가 다행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정확히는 내가 전원을 데리고 대규모 전이 마법을 사용했지만 말이다.
묘하게 아쉬워하는 막시모스만을 제외하고.
“그래서. 저놈은 어떻게 하게.”
눈앞에서 우아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는 튜나 드 머전트를 향해 나는 고개를 까딱였다.
늦은 밤 여성 공작이 있는 저택에 스리슬쩍 찾아온 것도 모자라 대뜸 반말을 해도 튜나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제가 돌보겠어요.”
“저놈 정체 드러나면 곤란한 건 알지?”
소년 벨가.
배고픔에 시달리던 녀석은 내가 태초의 포식자로 한번 먹어치우면서 놈의 안에 잠들어있던 어마어마한 수의 정신체들을 모조리 먹어치워 버린 탓에 녀석의 공복은 이전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졌다.
“배고픈 건 힘들지. 나도 미쳐버리게 만들 수준이니.”
정확히 내 경우, 공복으로 미치다 못해 신의 힘이 폭주하여 경악스러운 힘으로 우주까지 뒤흔들어버렸으니까.
“당신이…… 배고파 본적이 있는 건가요?”
놀란 얼굴로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당신…… 과거엔 굉장히 힘들게 살았다고 했죠.”
“뭐 좋은 기억은 아니야.”
담담한 대답에 나는 벨가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벨가의 공복과 내가 느끼는 공복은 다르다.
하지만 내 포식의 권능과 비슷한 힘을 사용하는 태초의 포식자는 놈들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삼단논법으로 생각했을 때. 결국, 저 정신체의 공복과 내 공복도 어떤 의미로 비슷한 게 아닐까.
어이없는 생각도 가볍게 들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는 제가 주는 음식에는 배고파하지 않아요.”
“덕분에 힘이 남기 시작했고.”
그 힘을 이용해 알베르타에 한차례 찾아오게 만든 흉년을 반전시켰다.
튜나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만으로 막대한 생명력을 기반으로 대지를 풍족하게 만들었고 예정 수확량이 전년도의 몇 배는 될 정도의 효율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일단은 제자였으니까 노파심에 해두는 말인데, 저놈. 네 적과 손을 잡고 있던 놈이야.”
“바르고 후작. 그자는 끝났어요. 이번 일로 그는 왕실에 신임을 잃었으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저놈은 바탄의 수많은 인간을 죽였고…….”
“바탄이 만들어낸 괴물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요.”
의지가 확고한 그녀를 향해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지 않으려던 말까지 꺼냈다.
“저놈 때문에 네 아버지가 죽었을 수도 있는데?”
다리를 꼰 채 차갑게 말하자 그녀가 움찔거렸다.
사실 선대 재상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역린이었다.
한번 죽어서도 떠나지 않고 그녀의 곁을 지키던 그의 혼은 끝내 그녀를 살리기 위해 소멸을 택했으니까.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나에 대한 연심이 지워진 탓에 제 아버지가 소멸했다는 끔찍한 죄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쪽이든 사실 좋은 결과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선 그녀가 가능하면 아버지의 기억을 잃는 게 더 좋진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애써 외면하던 진실이 물 위로 떠오른 탓일까.
그녀의 얼굴에 혼란이 서렸다.
“그가 아버지를…….”
“뭐, 사실 벨가 그놈이 네 아버지를 죽인 건 아닐지도 모르지. 괴물에 먹히기 전까지 저놈은 인간을 단 한 번도 죽인 적이 없다 했으니.”
“…….”
원흉은 바르고 후작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에 대한 원한이 없는 게 맞는가. 그를 보고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런 질문을 던졌다.
손이 터질 것처럼 꽉 쥐고 있던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그는 나를 구하기 위해 그곳까지 왔어요. 그가 없었다면 륀느 양이 나를 찾진 못했겠죠. 당신도.”
“나야 뭐. 이러나저러나 결과적으로 저놈을 살렸으니까 이 이상 원한을 가질 이유는 없지.”
내가 보기에 벨가 저놈은 정신체 중에서도 독특한 놈이라는 게 판단이다. 아마 프리아 여신의 아바타에 큰 영향을 주진 못하리라.
“내가 신경 쓰이는 건 오히려 네 쪽이다. 튜나.”
“당신은 그렇게까지 저를 신경 써주시는 건가요?”
“일단은 제자잖아.”
정확히는 직계라기보다는 술술 흘리듯 가르쳐준 학생에 가깝지만 말이다.
“적어도 의미 없는 책임감은 가지지 말라고.”
내 말에 튜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은, 참…… 말은 싸가지가 없는데…….”
“쯧.”
“그래도 참 좋은 사람이네요.”
“잠꼬대는 자면서 해라. 앞으로의 판단은 네가 알아서 해. 벨가 저놈은 이미 내 손을 떠났어. 건드릴 생각도 없고.”
내 말에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데이비 올 라운 왕자님.”
“…….”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내가 멈췄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덜컹!!
저택의 중앙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걸어들어온다.
환한 미소와 굉장히 활발해 보이는 인상. 적색의 머리카락과 꼬리를 가진 수인족이다.
“당신은?”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튜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튜나 드 머전트 재상님.”
“카트린느 대공.”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데이비 왕자님도 오랜만이네요. 우리 귀여운 황녀 저하는 잘 계시나요?”
“그렇지요.”
내 말에 그녀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늦은 시각에 이리 기별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재상님. 다만 이번 사태에 린디스 제국이 알베르타에 끼친 피해를 보상해주고자 이리 찾아왔어요.”
그녀의 말에 튜나는 차가운 표정을 한 채 말했다.
“그건 다음에 연통을 넣고 다시 찾아오세요.”
카트린느의 행동은 아무리 제국의 대공이라 할지라도 명백히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찾아오길 기다리던 케이스와는 상황부터가 달랐다.
그녀가 빙그레 웃는다.
“어머, 그건 안타깝네요. 하지만 중요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찾아왔어요.”
그녀가 빙그레 웃자 소란을 듣고 찾아온 시종 시녀들이 당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동시에 반대편 복도에서 작은 꼬맹이인 벨가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천진난만하게 걸어 나왔다.
하지만 튜나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달려가려 그의 발걸음은 카트린느를 눈에 담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녀가 그리 말하며 다가온다.
그리고.
나를 지나치려던 그 순간.
벨가가 반사적으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튜나! 도망가!!!”
다급한 그의 외침과 함께 카트린느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카아아앙!!!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진 홍단이와 그녀가 꺼낸 검이 그대로 충돌했다.
홍단이로 베어버렸음에도 검은 멀쩡했다.
“눈치챘구나?”
여유롭게 웃는 그녀의 눈가에 알아차리기 힘든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가짜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카트린느와 달랐다.
마치 연기하던 인간이 본색을 드러낸 것처럼.
이에 나는 허공에 손을 뻗었고, 그대로 아공간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대로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
딸랑!!!
나뭇가지에 달린 방울이 청명하게 울려 퍼진다.
[주작부]
[1급 주술]
[극진 태화부]
콰아아앙!!!
손을 뻗던 카트린느의 신형이 화염에 휩싸이며 저택 밖으로 튕겨 나갔다.
과거 모의 대련 때 사용하던 것과는 격이 다른 화력에 맞았음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그녀를 추격했다.
같은 시각.
“대체…… 대체 왜 이러는게냐! 이…… 이러지 마라!”
서부대륙의 국가. 창의 국가 명국의 천자. 아니 천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호위군 사이에 홀로 내버려 진 채 와들와들 떨며 눈앞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보다 그녀에게 충의를 바쳤던 이들이다. 아직 어린 그녀가 하나하나 이름까지 외우고 있으며, 과거 정계 싸움으로 내란이 일어날 조짐을 보였을 때 목숨을 바쳐 그녀를 지켜주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죽어주시지요.”
그 한마디와 함께,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장자문벽에 마치 수채화를 그리듯 흩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