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2화
“에린.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고요한 연무장 위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에반젤린을 향해 천천히 부유하던 몸을 착지한 페르세르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대룡, 이클립스와 헤라클레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소중한 자식이 된 에반젤린이다.
그녀는 인간과 태생부터가 다른 탓에 성장 속도가 인간과 달랐고,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옹알이를 하고 이제야 겨우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는 다리안과 다르게 십 대 중반 정도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작 두 살의 나이로 소드 마스터급에 이른 막대한 힘을 얻은 존재가 바로 그녀였다.
물론, 페르세르크의 입장에선 그딴 건 아무래도 좋으니 저 왈가닥이 조금이라도 사고를 덜 쳤으면 싶은 심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앗! 오셨어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에반젤린이 페르세르크에게 후다닥 달려와 품에 안겼다.
“그래. 늦은 시각까지 검을 휘두르진 말라 하였을 텐데…….”
“하지만 조금만 더하면 더 강해질 수 있을 거 같단 말이에요.”
칭얼거리듯 투정을 부리는 에반젤린이 귀엽다는 듯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좋으나 무리함으로 인해 몸에 문제가 생기면 그 즉시 멈추게 할 게야.”
“네에.”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그녀가 헤헤 웃어 보였다.
“밤공기가 찰 수 있으니 어여 들어가야지.”
“다리안은요?”
“곤히 잠들었으니 아마 에이리아의 곁에 있을 게야.”
“헤헤 같이 자야지!”
신이 난 듯 폴짝폴짝 뛰어 걸어가던 그녀가 멈칫한다.
“에린?”
어둑어둑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에반젤린이 그대로 가만히 서 있자 의아함을 품은 페르가 천천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어머니.”
그때 에반젤린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저거…… 원래 저랬어요?”
에반젤린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가리킨다.
본래 이 세상에 떠 있던 달은 두 개의 붉고 푸른 달. 사이러스와 크리아스가 존재했다.
하지만 2년 정도 전 데이비가 심연과 잠의 신인 타나토스를 소멸시켜버리며 그가 품고 있던 생명력을 이용해 정령계에서 달을 띄워 올렸다.
모든 차원, 세상에서 보이는 생명의 줄기. 타나토스라는 이름으로.
“타나토스? 별문제가 없는데.”
페르세르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에반젤린이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라? 멀쩡하네.”
“응?”
“아니에요. 제가 잘못 봤나 봐요.”
헤헤 웃으며 대답한 에반젤린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페르세르크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잠깐.
하늘에 뜬 달이 기이하게 보였다.
둥글고 녹빛을 띠던 달은.
반으로 쪼개져 수많은 파편으로 흩어진 모습이었고.
은하수인지 뭔지 모를 거대한 에너지의 길이 하늘을 길게 수놓고 있었으니까.
“잘못…… 본 건가?”
* * *
화르르륵!!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카트린느가 타오를 듯한 머리칼을 흩날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빠르게 추적해 들어가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흥! 대단하네?”
쩌어엉!!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공격하는 그녀는 엄연히 린디스 제국의 최강자.
일개 군단이라 불리는 전력이다.
마스터가 전략 병기라 불리는 이 세상에서 그 기준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파워 밸런스가 되어버린 이들은 존재한다.
즉. 눈앞의 그녀는, 단신으로 알베르타 왕성에 홀연히 나타나 난장판을 만들어버리고 알베르타가 자랑하는 왕위기사단의 목을 딴 채 유유히 돌아갈 수 있는 전력이라는 소리였다.
“쓰읍…….”
숨을 짧게 들이켠다.
최대한 힘 조절.
[중검]
[태산 쪼개기]
쩌어어엉!! 와장창!
“큭…….”
오른손에 든 방울 가지를 튕겨 주변의 공간을 장악하고 왼손에 든 청단이로 그녀의 몸을 크게 한차례 베었다.
힘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깻죽지에서 피가 크게 튀는 것도 모자라 그녀의 뒤편 지면이 마치 크레바스처럼 잘려나가 버렸다.
청단이가 물리계통을 베는 권능은 없다지만 단순 나뭇가지만으로도 필요한 것을 다 베어버릴 수 있는 현재 내 입장 상 어려울 것도 없었다.
“또 날 죽이지 않네.”
그녀는 불안정했다.
단순히 배신자. 혹은 본성을 드러낸 무언가라곤 생각지 않는다.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그동안 지겹게 봐왔고.
“카트린느 대공. 일단 숨 좀 돌립시다.”
“하! 언제까지 나를 비웃을 수 있을 거 같아? 난 당신에게 이기기 위해 그동안 엄청나게 노력했는…….”
말을 하던 그녀가 눈을 부릅뜬다.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나는 그녀를 깔아뭉개듯 내리찍으며 그녀의 어깨에 청단이를 박아넣었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푸욱!!
푸른 검신이 그녀의 어깨를 관통하며 대지에 박히자 그녀의 얼굴에 고통이 어리는 게 보였다.
죽이기 위해 모든 것을 내건 모습이다.
자신의 한쪽 어깨가 관통당했음에도 그녀가 반격하려 하자 나는 그녀를 제압한 채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공. 계속 저항하면 진짜 탈모의 저주를 걸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 한마디의 파급력은 매우 강력한 듯했다.
움찔한 그녀가 멈춘 틈을 타 내 손가락이 그녀의 명치를 찌른다.
[점혈]
파바바바박!!
그리고는 엄청난 속도로 비트를 일으키듯 손가락이 튕기며 그녀의 혈도를 강제로 제어했다.
점혈은 쓰기에 따라서 인간을 단번에 죽일 수도. 깔끔하게 제압할 수도 있다. 물론 그만큼 상대의 육체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만 카트린느 대공정도면 꽤 제법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만큼 겉으로 보고 그녀의 혈을 모를 수가 없었다.
“사…… 기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시체처럼 굳어버렸다.
“카…… 카트린느 대공!”
뒤늦게 깜짝 놀란 튜나가 뛰어나왔고 그런 그녀를 보호하듯 벨가가 순식간에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서…… 설마 죽인 거예요?! 제국의 대공을?!”
“안 죽였어. 죽일 리가 있나.”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녀는 어째서 이곳까지 찾아왔고, 왜 튜나를 죽이려 했는지. 그리고 갑자기 사람이 돌변한 이유가 또 무엇인지.
쓰러진 카트린느의 몸에 마나를 불어넣고 신력까지 불어 넣어본다.
청단이를 통해 그녀의 이상 현상을 제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변화가 없었다.
지속적인 비 물리법칙 계통이 아닌 것인가.
그럼 단발성 세뇌를 생각해봐야겠지만 카트린느 대공과 멀쩡하게 대화한 게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기절해있는 카트린느의 상황은 마치…….
“벨가.”
낮은 목소리로 벨가를 부르자 녀석이 움찔거렸다.
“너 뭘 본 거냐. 이 여자한테서.”
내 물음에 튜나가 굳은 얼굴로 벨가를 바라보았다.
말해달라는 시선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똑바로 말해. 상황에 따라서 너도 의심대상이니까.”
싸늘한 내 대답에 튜나가 움찔거렸다. 마치 이 아이에게 왜 그러냐는 시선이었다.
“인간.”
벨가가 조용히 읊조린다.
“인간은 어떤 흐름과 틀을 가지고 있어.”
“그건 알아.”
“그녀는 달라. 겉보기엔 인간과 흡사한데…… 뭔가 잘못되었어.”
벨가의 설명에 나는 다시금 카트린느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이상은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행동거지가 진실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이상했다.
“튜나.”
“네…… 네?”
“카트린느 대공이 이곳에 찾아온 사실은 숨기는 게 좋아 보인다.”
린디스의 알카 후작이 바탄을 지원한 탓에 바탄과 알베르타가 전쟁을 치를 뻔 했다.
하물며 지금 같은 사태에서 린디스의 대공이 알베르타에 와서 난동을 부렸다?
겨우 아물고 있던 상황이 터지는 건 한순간이리라.
다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하게?”
“확인해야지.”
장인어른에게 직접.
잘못된 게 있다면 반드시 이질점이 나온다.
벨가의 설명대로라면 그녀에게 생긴 이상 현상은 명백히 비정상적이 외부의 무언가였다.
나는 발로 걷어차듯 허공을 찢었고, 그대로 린디스 제국에 좌표를 찍었다.
“벨가. 따라와. 이상이 생긴 이를 보는 거로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너뿐인 것 같으니.”
내 말에 벨가는 말없이 튜나를 돌아보았다.
튜나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걱정스레 나와 벨가를 바라본다.
“다녀와. 갔다 오면 꼭 맛있는 디저트 준비해놓을게.”
복잡한 심경을 억누른 채 옅게 웃는 그녀의 말에 벨가는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 * *
린디스 제국의 황제. 데오르트 알 린디스는 고요한 황제의 침실에서 아들이자 가장 그를 잘 따르는 황태자. 알버스 알 린디스와 와인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갑작스레 내가 린디스 제국의 황성에 나타나자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게 나를 불러들인 꼴이었다.
“어때 보여.”
“멀쩡해. 그들에겐 이상이 없어.”
황제에게 그들이라 칭하는 점에서 벨가는 확실히 간이 부은 놈이 틀림없으렷다.
담담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노령의 사내를 바라본 벨가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비. 연락도 없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장인어른.”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내가 둘러맨 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동시에 린디스의 황제. 데오르트와 황태자 알버스의 눈이 경악으로 뜨여진다.
“대…… 대공!!”
깜짝 놀란 알버스 황태자가 황급히 달려가 그녀를 부축하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카트린느는 추욱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왕실 기사단에 소속된 이후로 카트린느가 공적으로 누군가에게 패배한 바는 없었다.
나와 처음 대련을 했을 때도 사실상 처음 패배를 시인하긴 했지만, 그녀가 의식을 잃은 적은 있었던가.
린디스 제국에 있어서 카트린느 카라벨라 대공은 그런 인물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당황한 알버스 황태자와 다르게 데오르트 황제. 즉 에이리아의 아버지이자 내 장인어른은 내게 물었다.
“그녀는 최근 네 녀석에게 새로이 설욕전을 하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네 실력에 손대중을 실수한 것도 아닐 텐데 이 부상은 뭐냐.”
“치명상이라고 하기엔 조금 문제가 있는데 왜 의식을…….”
“일부러 기절시켰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약하게 한 겁니다.”
“뭐라?”
데오르트 황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사위라 할지라도 제 충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으니까.
“저 소년은 또 뭐지?”
“저 녀석은 신경 쓰지 마세요. 장인어른과 황태자께서 현재 멀쩡한 상황인지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놈이니.”
내 말에 두 사람이 의아한 듯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이에 나는 곧 카트린느가 어떤 상황이고,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들에게 털어놓았다.
“말도 안 돼!! 그녀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입……!”
콰앙!!!
알버스 황태자의 외침에 데오르트가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알버스. 짐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폐…… 폐하…….“
* * *
사실을 모두 전해 듣고 난 후 알버스 황태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데오르트 황제는 조용히 침묵했다.
“장인어른.”
폐하라 부르지 않은 건 개인적인 만남이기에 그를 믿는다는 내 입장이었다.
“그녀는 에이리아가 가장 아끼는 사람입니다. 그녀의 성격이 이런 성격이 아닌 건 알고 계셨겠죠?”
“그렇다. 대공은 그럴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짐이 그녀의 모든 삶을 아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녀는 비틀려있어.”
그때 벨가가 나서서 말하자 두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향한다.
“무례하다! 폐하의 어…….”
“알버스. 입 닥치거라.”
“예…… 예 폐하.”
한방에 쭈그러진 알버스가 침묵했다.
“난 인간이 아니야. 그리고 인간의 법도에 얽매일 생각도 없고.”
“맹랑한 녀석이로구나.”
“인간은 본래 어떤 형태를 지니고 있어. 하지만 저 여자는 그게 비틀려있었지. 아니 정확히는 그게 정상인 것처럼 변해있다고 해야 하는 게 옳을 거야.”
벨가의 설명에 데오르트 황제의 눈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어떤 변화가 생기는 거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지금까지의 추측으로 보건대…….”
벨가는 담담하게 충격적인 사실을 늘어놓았다.
“인간이 변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병인가. 혹은 세뇌인가.”
“그 둘 어느 쪽도 아니야. 둘 다 비슷하겠지만.”
원인은 그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카트린느는 보기엔 멀쩡하지만, 정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 기이한 밸런스 때문에 마법이나 약물로 치료가 가능한 게 아니었다.
신력으로도 치료가 안된다는 건 지금 카트린느의 모습이 완전히 정상으로 판단된다는 뜻이었다.
그 어떤 상황보다 제일 x같은 상황이었다.
치료가 불가능한 변질.
신력으로도 치료가 안 되는 현상. 마치. 내가 알고 있던 인간이 완전히 다른 인간이었다라는 반전이 있는 것만큼이나 엿 같은 상황이었다.
“폐하. 어쩌면…….”
그때 알버스가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그래. 짐도 같은 생각을 했다.”
“짚이시는 게 있나 본데요.”
“대공이 최근 조사하던 일이 있다. 수도 내에서 다수의 살인사건, 혹은 난동 사건이 있었지.”
“살인사건에 난동이라…….”
결국, 이 사태는 대공 하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폐하!!”
그때였다.
갑작스런 외침과 함께 한 대신이 허겁지겁 황제를 부른다.
“들어오라.”
덜컹!!
동시에 내부로 들어온 귀족은 곧바로 나와 벨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무릎을 꿇었다.
“코…… 콘타스 제국에서…… 명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하옵니다!”
“뭐라?”
“사유는! 사유가 있을 것 아니오!!”
그 외침에 귀족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명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천자가 시해당했다고 합니다.”
천자. 외부에는 천자로 알려져 있지만 명국의 황제는 작고 어린 소녀였다.
딸아이를 살리기 위해 욕심을 부린 태후가 사망하고 뱀파이어와의 유착이 끊어진 뒤 천자는 자신의 힘으로 명국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나를 상당히 총애하는 기색을 내비치던 귀여운 소녀는 주기적으로 하인스 영지에 근황을 묻는 편지를 보내곤 한 인물이기도 하다.
“명국이라면……”
“예. 서부대륙의 대국 중 하나입니다만…… 하루아침에 이런 사태가…….”
“현국에선 어찌하고 있답니까.”
“콘타스 제국과 함께 움직이는 듯합니다.”
천녀는 상당히 주변국과 우호를 다지는 편이었다.
강국이라는 점은 그녀를 오만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녀는 전쟁보다는 평화를 좋아하는 편이었으니까.
“알았으니 나가보라. 날이 밝는 대로 대신들을 소집하도록 하지.”
“예…… 예 폐하.”
본래라면 바로 대신들을 모았을 황제가 시간에 유예를 둔 것에 의아함을 품은 그였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라. 대공을 본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카트린느를 제압하는 건 그녀가 깨어났을 때 다시 난동을 부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약한 이도 아니고 그녀 정도 되는 인간이 그렇게 날뛰기 시작하면 대참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그녀를 본래 상태로 되돌려야 했다.
그런 데오르트 황제의 불안함이 숨겨지지 못한 질문에 벨가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현재로선 불가능해. 저 여자는 저게 정상인 거니까.”
즉. 이상이 있어야 치료를 할 텐데 정상이면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과거 저 여자가 어떠했건, 한번 뒤틀린 이상 돌이킬 방법은 없어.”
그녀는, 죽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데이비! 그녀를 살려라! 짐이 무엇이든!!”
“현재로선 불가능합니다.”
그의 외침에 나도 담담하게 말했다.
“정보가 너무 부족해요. 게다가. 내 힘으로 회복을 하고 말고 할 게 없습니다.”
간섭이야 쉽다. 하지만. 벨가의 말대로 그녀는 현저히 정상이다. 사람만 바뀌었을 뿐.
그것을 어떻게 할 수단은 없었다.
“성자의 힘으로도…… 불가능한가…….”
“확답을 주긴 힘들어 보이네요.”
그 한마디가 무겁게 내리깔리자 데오르트 황제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고 이를 악물었다.
“당장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그녀가 왜 튜나 재상을 습격했는가입니다.”
“튜나 재상을…….”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정상이라면 그녀의 사고는 정상적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움직였는지를 짚고 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 일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흑막이 생명체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질병으로 분류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안돼…… 대공…….”
“빌어먹을…….”
알버스가 허탈하게 중얼거린다.
그리고, 지금껏 어지간해선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던 데오르트 황제, 그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 * *
저벅…… 저벅…….
어두운 복도를 누군가가 담담하게 걸어간다.
달빛에 비치는 실루엣만으로 그녀가 여인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 수준이었다.
곤히 잠든 에반젤린은 누군가가 와서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손가락을 쪽쪽 빨며 에반젤린을 꼭 끌어안고 잠들어있는 다리안이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에이리아가 옆으로 누운 채 곤히 잠들어있었다.
고요한 복도.
그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맨발로 바닥을 밟는 소리에 에이리아의 귀가 한차례 움찔거렸다.
“일리나…… 언니?”
수인의 후각과 청각은 보통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다.
잠결에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킨 그녀가 주변을 둘러본다.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잘 못 들은 것인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 그녀는 두 아이가 깨지 않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석등을 들고 복도로 걸어나갔다.
스르륵 하며 길게 늘어진 잠옷이 늘어진다.
“일리나 언니?”
분명 잠결에 느낀 향은 일리나에게서 자주 나던 달콤한 향이었다.
하지만. 복도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잠을 잘못 잔 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귀를 한차례 쫑긋거린 뒤 돌아서다가 깜짝 놀랐다.
“꺅!”
“에이리아!”
놀란 일리나의 외침이 들려온다.
“이…… 일리나 언니.”
“괜찮아? 무슨 일이야.”
“언니야말로…….”
“나야 뭐 데이비를 기다리고 있었지.”
일리나의 대답에 에이리아는 고개를 내렸다가 흠칫 놀랐다.
하지만 끝내 말하지는 못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깜짝 놀랐잖아요.”
“미안해. 들어가서 자.”
“네.”
손을 꼭 쥔 채 방에 들어선 에이리아는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짧게 골랐다.
일리나가 복도에 있는 거야 늘 보던 일이다.
간혹 잠이 오지 않는다며 데이비를 이끌고 복도를 거닐거나 하는 경우는 간혹 본 적이 있으니까.
홀로 저렇게 조용히 복도를 걷는 모습도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검을 들고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