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4화
초단이는 제 아버지를 닮은 탓인지 참 영리한 편이었다.
순수한 청단이와 홍단이와 다르게 성장을 일면 마친 초단이는 굉장히 영특하고 사리 분별이 확실한 편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현아의 기준에선 아직 어린 조카지만 마냥 그녀의 결단을 우습게 볼 순 없었다.
현재 지구는 각 국가 기준으로 데이비가 소속된 티오니스와 여러 교역을 진행 중에 있다.
비공정 아스가르드.
거대한 함선이 한번 올 때마다 지구에는 없는 신소재가 도착하고 지구의 물자가 그곳에 실려 티오니스로 넘어간다.
정확히는 티오니스가 아니라 그 물품들이 필요한 타 세계라는 모양이지만 현아는 그 부분까지는 깊게 알지 못했다.
사실 오빠인 세발낙지. 아니 데이비가 가져다주는 신소재는 지구의 각 국가가 상당히 열을 올리고 있는 물건들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중간 유통을 맡고 있는 신성 그룹의 주가가 날이 갈수록 오르는 것 또한 사실이고.
그 탓일까.
각국에서는 사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티오니스와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자 하는 게 사실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렇게 많은 국가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데. 그의 딸이 유학을 가고 싶어 한다?
타세계의 지식을 익히고 있는 에반젤린은 특채 학생으로 받아서 손해 볼 게 없는 입장이기도 했다.
학교의 이미지를 더욱 띄울 수도 있으니까.
다만 초단이는 그런 특혜보다는 자신이 직접 입학에 필요한 시험을 치르고 올라가고 싶어 했다.
그래도 검인데. 어디까지 할까 생각을 했건만.
“내가 잘못 생각했지.”
“세상에…… 너 대체 언제부터 지구의 교육을 공부한 거야?”
“고모가 주신 참고서 위주로 공부 열심히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시험지들을 채점한 현아가 추욱 늘어졌다.
타세계에서 온 아이가 보통 수험생들도 어려워하는 시험지를 죄다 만점을 맞아버렸으니 초단이의 저력이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한 기간은 짧은데. 엄청난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그건 기집애야. 네가 공부를 안 한 거야.”
“아 언니도 진짜 그런 말 하지 마. 나 어디 가서 머리 나쁘다는 소리 들은 적은 없거든?”
허탈함에 어쩔 줄 몰라 늘어진 현아의 모습을 보며 사과를 깎아 가져온 연희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 초단이 정말 똑똑한데? 정말 놀랐어.”
“헤헤.”
기분이 좋은지 그녀가 헤실거리자 신연희가 그녀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랑스럽다. 우리 조카.”
“고모도 정말 좋아요.”
“현수…… 아니 데이비는 잘 지내니?”
“그럼요. 아버지가 한번 나설 때마다 티오니스 대륙이 들썩이는걸요.”
이미 그의 수준에 대해 들은 바 있지만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이곳이나 저곳이나 다를 게 없는 모양이었다.
“초단아아…… 고모한테도 와줘.”
“얘는? 내가 안고 있는 거 안보이니?”
“언니는 매번 그러더라.”
“일 때문에 바빠서 잘 보기도 힘든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귀여워 해주겠어.”
“그렇게 부러우면 얼른 형부랑 결혼하시던가.”
최근 연희는 어떤 남성과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나이에 비해 굉장히 어려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연희의 나이는 이제 결혼을 생각해야 할 나이였으니 말이다.
현아의 입장에선 연희의 회사위치를 생각해서 걱정이 안 되는 바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조사 결과 굉장히 성실하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았기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부 될 사람은 참 좋겠네? 언니는 평생 그 모습으로 살 거 아냐.”
“너도 그러면서 남 말은 하지 말지?”
데이비의 부탁을 받았다면서 넬타리드교의 사도, 케인이 가져다준 영약을 먹은 두 사람이었다.
재료는 인어의 축복과 신의 은총. 효과는 더 늙지 않는다는 점으로 굉장히 귀해서 구하기가 어렵다며 케인이 투덜거린 바가 있었다.
참 놀라운 일이다.
불로불사는 아니지만 불로약이라니. 아무리 몬스터가 출몰하고 마나가 생겨서 각성자들 중에서도 늙지 않는 이가 나온다지만 평범한 일반인이 늙지 않는다는 건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게. 그래서 나도 여유를 부리나?”
“너도 어서 좋은 남자 찾아야지.”
“뭐래. 그나저나 케인도 어떻게 보면 내 조카 아냐?”
케인은 일리나를 어머니라 부르고 있으니까. 비록 성격이 오락가락하지만, 녀석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면서도 일리나와 가끔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피식 웃으며 서류를 정리한 현아는 거실 소파에 추욱 늘어진 채 게임을 하고 있는 에반젤린을 시야에 담았다.
에반젤린도 그녀에겐 귀여운 조카였으니까.
“에린아. 게임은 재밌어? 와서 과일 같이 먹어.”
“이씨! 도발을 해?!”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지 연신 패드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티비 속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에린.”
그 모습에 초단이가 담담하게 그녀를 부르자 에반젤린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으…… 으응?”
“와서 앉아.”
“응.”
겁을 먹은 것처럼 쪼르르 달려와 자리에 앉은 에반젤린이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제법 맛이 있었는지 옅게 웃어 보이며 사과를 아삭아삭 씹어 삼켰다.
“고모가 알아본 바로 네가 갈 수 있는 대학들이야. 낙하산도 아니고 특채 전형이 있어서 초단이 네가 시험만 통과하면 얼마든지 편입할 수 있어. 물론 네 케이스를 생각하면 신입생부터겠지만.”
“정말요?!”
신이 난 듯 초단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청적색이 섞인 머리카락이 신기하게 흩날렸다.
두 개의 투톤 색으로 엮인 머리카락이면 어색할 법도 한데 어째서인지 굉장히 예쁜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고모한테 맡기지 않을래? 고모가 말 한마디 살살 찔러넣으면 얼마든지 데려가려 할 텐데.”
“그렇게 하면 아버지가 곤란하시잖아요.”
화사하게 웃으며 답하는 그녀를 보며 현아의 눈이 게슴츠레 뜨여졌다.
“나도 초단이 같은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 뭐 좋아. 그럼 기회 정도는 내가 만들어줄 테니까. 초단이는 열심히 공부해봐.”
“네!”
애초에 초단이가 바라는 건 공부였다. 보통 놀기 좋아할 텐데 저렇게 뭔가를 배우는 것에 열을 올리는 건 신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에린아.”
“네.”
“네 아빠가 성질머리 더럽긴 해도 생각보다 새가슴이거든.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렴.”
그 말에 에반젤린이 입술을 툭 내밀었다.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 먹었니? 더 먹고 싶은 건 없고?”
“네. 고마워요. 고모.”
예전처럼 사랑한다며 헤헤 웃던 모습은 사라졌지만, 현아의 입장에선 에반젤린의 그런 모습도 귀여웠다.
애써 말하지 못하고 부끄러움에 말을 삼키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참. 에린아.”
“네?”
“놀러 가는 건 좋은데 너무 멀리 가진 마. 최근 몬스터 마나 파동이 격해지는 시기거든. 이런 시기엔 균열이나 몬스터 브레이크가 심심찮게 일어나니까.”
“네.”
“네가 마스터급? 어쨌든 굉장히 강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절대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렴.”
“걱정하지 말아요. 고모. 그깟 몬스터들 나와도 내가 다 지켜줄게요.”
툴툴거리듯 말하면서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숨긴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데이비에게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한 걸 보면 제 아빠와 한바탕 싸움을 한 것 같은데 그 모습이 참 귀엽기 그지없었다.
좋아하긴 하는데. 부끄럽거나 자존심이 강해서 그런 말도 못 하는 모습이 꼭 예전에 자신을 보는 느낌이었다.
“자. 그럼 필요한 과목들을 알려줄 테니 나와 같이 도움이 될만한 서적들을 가지러 갈까?”
“네? 가지러 가요?”
“내가 누구니, 국제기업 부대표야.”
물론, 말이 부대표지 실질적으로 그녀의 위치는 이사 같은 그런 케이스로 구분하기 어려운 위치인 건 분명했다. 회사에서 아무도 함부로 못 하며, 결정권마저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인 직급은 부대표라는 본래 없던 직급이었으니까.
“우리 초단이가 원하는 게 있는데 준비도 안 해놨을까. 전부 구매해놨으니까 원하는 대로 가져와.”
현아가 검은색의 카드를 손에 쥐고 빙그르르 돌리며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상상 초월의 갑질에 초단이가 약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참. 그리고 이번 기회에 코오나와도 친해져 보는 건 어떨까. 현수 그 인간말종이 후견인이랍시고 맡겨놨는데 잘 찾아오지도 않으니까 굉장히 외로워하는 거 같던데.”
두 사람이라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현아였다.
* * *
초단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실실 웃던 에반젤린은 방에 들어서서 문을 등에 기대기가 무섭게 양손으로 입꼬리를 매만졌다.
“이러면 안 되지. 안돼.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이제 자신은 다 컸으니 어린애처럼 굴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현아가 자신을 위해 꾸며준 방을 둘러보았다.
기왕 이렇게 [출가] 한 거 현아의 집에서 한동안 머물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초단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현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사람을 불러 방을 빠르게 꾸미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에반젤린이 지낼 수 있는 그녀의 취향에 맞는 방을 만들어주었다.
방 한켠엔 그림 도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현아는 그녀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것들을 전부 준비해준 것이다.
평소라면 수채화 쪽을 했을 테지만 지구에 온 김에 지구의 문물을 이용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뭘 그려볼까…….”
배운 대로 익숙하게 컴퓨터를 조작해 태블릿 펜을 든 그녀가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곳에 왔을 때 본 사진을 떠올렸다.
새하얀 병실. 그곳에서 특수한 복장을 입은 현아와 연희.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평범한 인상의 남자가 보인다.
특출나게 잘생기거나 기억에 남는 얼굴은 아니다.
뭔가 불만인지 약간 찡그려진 표정을 보면 사실 평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너무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흥. 나한테 관심도 없는 아빠 따위…….”
그리고는 천천히 펜을 들어 태블릿에 무언가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리는 것은 그 사진이었다.
제법 재능이 있었던 그녀는 나름대로 방법을 가미해 빠르게 세 사람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티오니스에서 태어나기 전 아빠의 전생.
신현수와 그 곁에 있는 두 누이의 모습을.
한번 집중하기 시작하자 에반젤린의 눈동자가 자색으로 물들며 약간 공허한 느낌을 풍기기 시작했다.
에반젤린이 극도로 집중상태에 들어갔을 때 보이는 변화였다.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생동감 넘치는 그림이 만들어지는 건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완성본을 다 구상해놓고 그리는 것처럼 처음엔 낙서 같았던 모습도 점점 변해가며 하나의 그림이 되어갔다.
너무도 환하게 웃는 데이비. 아니 신현수와 함께 나란히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린다.
사진에는 찡그린 이가 둘이나 있었지만, 이 그림에서만큼은 너무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잠시 그림을 멈춘 에반젤린이 말없이 스케치 된 그림을 바라보았다.
“음. 역시 이게 훨씬 좋아.”
그리고는 예쁘게 웃었다.
띠링! 띠링!
그때 컴퓨터의 아래쪽에서 무언가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떤 영상의 알람이었다.
[S급 각성자들 강함 순위.]
참 유지한 제목이지만 묘하게 어그로를 끄는 느낌이 있었다.
현재 지구엔 1차 각성자와 2차 각성자가 두부류로 존재한다.
과거 알프 온라인을 통해 게임에서 쌓아둔 힘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1차 각성자. 그리고 마나로 인해 특수한 힘을 개화하기 시작한 2차 각성자들이 있다.
대부분의 강자는 1차 각성자들이 많지만, 지구에는 한때 몬스터의 습격으로 인해 각성자들이 상당수 죽어 나갔던 만큼 이제는 2차 각성자들도 제법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다.
이윽고 영상에선 한 명 한 명 이름과 그들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한다.
대부분은 사실 처음 보는 이들이며 별로 관심이 가는 이들은 아니었다.
다양하게 각양각색의 인간들의 간단한 인적사항과 그들의 몬스터 사냥 장면 같은 것이 첨부되며 설명을 돕고 있었다.
그저 멍하니 그것을 보던 와중 에반젤린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우리 아빠는 왜 없어?”
데이비는 에반젤린이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강함 순위를 논하는데 왜 아빠가 없는 것일까.
별로 관심 없다고 말하면서도 이상하게 언급이 되지 않자 묘하게 불쾌한 느낌이 드는 그녀였다.
이에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독수리 타법으로 댓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왜 티오니스 성자는 없어요?]
단순한 의문을 표하는 질문이었지만 익명성이라는 건 가끔 선을 넘을 때가 있다.
[빡대가리야, 각성자 강함 따지는데 뭔 티오니스 성자야. 걔가 뭐 각성자냐?]
빠직…….
에반젤린의 이마에 실핏줄이 돋았다.
“씨이…….”
대뜸 욕설이 날아오는 댓글을 보며 그녀는 화가 난 듯 다시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냥 물어본 거지 왜 화를 내세요? 그리고, 걔라니요. 티오니스 성자가 당신 친구예요?]
화가 난 그녀 딴에는 최대한의 항의였다.
[ㅋㅋㅋ 알 게 뭐야. 끽해야 스무 살도 안 된 애새끼 아님? 솔직히 난 티오니스 성자 개 꼬아서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나도 솔직히 썩 마음에 들진 않음. X나 힘 있다고 제 맘대로 하는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애들 보상심리 같은 느낌.]
[ㄹㅇ ㅋㅋ]
뒤이어 댓글들이 달리자 에반젤린은 이마에 실핏줄이 하나 더 돋는 느낌이 들었다.
“아, 화나…….”
타다다다다닥!
[당신 같은 사람들도 사람이라고 구해주려고 한 티오니스 성자가 안타깝네요.]
[응 아니야~ 구해달라고 한 적 없어~ 그리고, 그 새끼가 몬스터 처리하는 과정에서 내 가게 건물이 박살 났는데 이건 누가 보상하나?]
빠직!
“후우…….”
왜 이런 건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에반젤린이 새하얗고 작은 손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뭐 이딴 게 다 있어?!”
그리고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전투적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누르다가 1:1 메시지 보내기 기능을 발견하고는 보냈다.
[당장 사과해요. 대가가 어떻든 티오니스 성자가 지구 사람들 지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속에서 부글부글 무언가가 끓어오른다. 이상하게 알 수 없는 분노가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며 저도 모르게 고대룡의 힘이 그녀의 몸 주변으로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악의 가득한 댓글을 달던 사람이 그것을 느낄 리 만무했다.
대상은 신나게 에반젤린의 말을 빈정거리거나 말투를 물고 늘어지며 놀리고, 그녀에게 악의 가득한 조롱을 쏟아냈다.
그뿐만 아니라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진실인양 떠들며 에반젤린을 도발했다.
[티오니스 성자 그런 사람 아니에요. 사과하세요.]
이에서 부득부득 소리가 날 정도로 험악하게 표정을 찡그린 에반젤린은 이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동시에 주변의 물건들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니가 봤냐? 봤냐고. 나는 그런 모습을 봤다는 사람을 몇이나 알고 있는데? 대가리가 깨져도 티오니스 성자라고 대깨티냐? 어휴 자라. 놀아주는 것도 지겹다. 부인만 셋이라면서. 그 바람둥이 새끼 안 잡아가고 넬타리드는 뭐하나 몰라.]
지구에 넬타리드 신이 존재한다는 게 알려진 건 꽤 오래되었다. 지금은 거의 괴멸되어 세력이 약해진 넬타리드 교단이 한때 기적을 발휘했으니 말이다.
콰직!!!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에반젤린이 섬뜩한 분노를 터뜨렸다.
[야. 너 어디야.]
[어우 무서워라. 현피라도 뜨시게? 근데 내가 그걸 왜 알려주나?]
빈정거리는 답장이 도착한다.
그것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던 에반젤린은 이내 자신의 몸 안에 있던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컴퓨터 너머로 전해지는 어떠한 악의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정신계통의 능력자라도 불가능한 힘이지만 그녀가 그걸 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킨 에반젤린이 손을 튕기듯 뻗자 허공이 찢어지며 그녀의 손에 검은 장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쉬리리릭 터엉!!!
너무도 부드럽게 검을 돌려 허공에 한 번 내리친 그녀는 당장이라도 폭발하려는 분노를 억누르려 했다.
“우리 아빠 욕하지 마…….”
화를 내며 씩씩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지독한 냄새.”
지독한 악의의 냄새를 맡은 그녀의 등 뒤로 검은 피막이 날린 작은 날개가 나타났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창문을 열고 날아가 버렸다.
이후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까.
“에린아. 방에 있니?”
마침 휴가를 즐기고 있던 현아가 노크를 하며 에반젤린의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방 내부의 풍경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이거…….”
난장판이 된 방안에는 컴퓨터만 켜져 있었고 창문이 열려있었다.
멍하니 터벅터벅 걸어간 그녀는 반사적으로 모니터 안의 글자들을 스윽 훑었다.
“…….”
“현아야. 에린이도 내려오라고 해. 밥먹…… 뭐야 이거?”
뒤이어 초단이와 연희가 들어오며 방 안의 상태를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현아야. 이게 무슨…….”
“…….”
말없이 모니터를 노려보던 현아가 말했다.
“에반젤린…… 얘 지금 현피 뜨러 간 거 같은데?”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냐는 듯 현아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