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2화
쾅!
“아가씨!! 잠깐만요!!”
황급히 들어온 안토니오의 외침에 에반젤린은 마치 잘못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흠칫 놀랐다.
[???]
[아가씨?]
[세상에 부잣집 아가씨였음?]
[어쩐지 돈 필요 없다더니, 금수저…….]
“무슨 일이세요?”
“일단 진정하시고, 그 사이트 끄세요. 당장.”
“왜…… 왜요? 이게 뭐길래.”
“아가씨. 저 믿으시죠? 한 번만 살려주세요.”
그의 말에 에반젤린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사이트를 비활성화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에 사이트를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휴우…….”
안토니오의 안도의 한숨과 함께 채팅창에서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에반젤린이 성인이고 알 것을 다 아는 이라면 몰라도 이곳의 모든 이가 모를 수가 없었다.
에린이라는 이 스트리머는 아직 미성년자라는 것을.
그동안 알하자드가 안토니오를 통해 단단히 쳐낸 게 있기 때문에 선을 넘는 또라이들이 나타나진 않았지만 사고가 한번에 터진 것이었다.
“그렇게 됐으니 저건 안 볼래요.”
담담하게 그녀가 결정을 내리자 채팅창에서는 저들끼리 의견이 빠르게 교차하고 있었다.
뭘 오버를 하고 그러냐는 이들이 일부이며, 미성년자한테 그러지 말라는 이들도 다수 존재했다.
“저게 대체 뭔데요?”
이쯤 되니 에반젤린의 내면 안에 있는 반항심이 새록새록 솟아나기 시작했다.
또 자기만 두고!
또 자기만 몰라도 된다고 하고!
또 자기만 어린애 취급이나 하고!!
감정이 격해진 그녀가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이 씨…… 생각하니까 화가 나네. 대체 뭔데요?!”
“어…… 어어? 아가씨!”
놀란 안토니오가 에반젤린을 막으려 했지만, 에반젤린은 장막을 펼쳐 안토니오의 접근을 막고 다시 사이트에 접속했다.
[무야, 무슨 일이야!]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
딸깍딸깍 소리가 크게 들린다.
그리고.
잠시 후.
방송화면에서는 어떤 사이트가 드러났다.
문제는 사이트의 특성상 별의별 그림이 다 올라오다 보니 시작부터 굉장히 맵다는 점이 문제였다.
“아…….”
[아…….]
[망했다…….]
…….
잠시간의 침묵 끝에 에반젤린이 입을 열었다.
“으…….”
그 목소리가 신호탄이 되듯 모든 이들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많은 게 꼬였다는 것을.
“우아아아앙!!! 아빠아아아!”
결국, 울음을 터뜨려버린 에반젤린이 방송을 꺼버리는 것으로 방송은 그동안 있었던 그 어떤 방송보다 짧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후 그녀는 불건전 콘텐츠라는 명목으로 또다시 정지를 먹게 되어버림으로써 스트리머 게시판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 * *
“사일런스 게이트라…… 위험도만 놓고 보면 그리 높은 건 아니지만 이게 사람을 해칠 가능성을 지녔다는 건 조금 골치 아프네요.”
찾아내기만 하면 대처가 가능하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죽였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균열 자체의 위험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유일하게 감지할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선 코오나뿐이에요. 하지만 저는 단순히 미래감지로만 감지할 수 있는 건 말도 안 된다 생각해요. 그런 게 가능했다면 과거에 흉신이 지금 같은 게이트 방식을 택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요.”
나름대로 심각한 표정으로 의논을 주고받는 현아와 일리나.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곁에서 말없이 폰 게임을 하고 있는 코오나까지.
한 명은 티오니스 소속, 한 명은 신성의 부대표. 마지막 한 명은 사일런스 게이트를 찾아낼 수 있는 현재 지구에서 유일한 인간탐지기였다.
물론 그것도 동시다발적인 출현 중 일부.
그것도 집중적인 잠복 끝에 겨우 여기서 언제 생길 거 같다는 의견만 내놓을 뿐 제대로 된 탐지가 아니었다.
“실은 새언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걱정 말아요. 아가씨. 에린이가 이곳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데 어떻게 보답할까 고민하고 있었던걸요.”
큰 문제는 아니지만, 그냥 두면 많은 사람이 피해를 받을 테니 처리하고 싶어 하는 현아의 입장을 일리나는 잘 알고 있었다.
“도울 수 있는 건 도울게요. 이 일은 다른 걸 다 제쳐두고서라도 우선시해야 할 만큼 중요해 보이니까.”
그때였다.
쾅!
“우아아앙!! 엄마아아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뛰쳐 들어온 에반젤린이 그대로 일리나의 품에 안긴다.
깜짝 놀란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에반젤린에게 물었다.
“무, 무슨 일이야?!”
아무 말도 안 하고 엉엉 우는 그녀를 보며 멍하니 있던 일리나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눈치챘다.
그녀가 알하자드의 제안으로 방송을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실 그리 내키진 않지만, 알하자드의 말대로 방송을 통해 그녀는 인간에 대한 원망이 어느 정도 희석되는 것은 물론이요 여러 가지로 순기능을 얻고 있었기에 크게 반대하진 않았다.
선을 넘는 놈들만 제외하면…….
“설마…….”
“어머니…….”
이윽고 초단이가 들어오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후 초단이를 통해 방송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일리나와 현아, 그리고 폰 게임을 멈춘 코오나는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조져버릴까요.”
“그냥 티오니스로 끌고 가도 돼요. 아가씨?”
동시에 질문을 던지는 두 사람과 다르게 코오나는 천천히 일어나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다.
“저…… 세 분 다 진정하세요.”
그나마 침착한 초단이가 말리려 들었지만, 일리나의 눈에는 이미 불이 붙은 후였다.
“그 자식은 운이 좋은 줄 알아야 할 거야.”
만약 이곳에 와있는 게 에이리아였다면 필연적으로 데이비의 귓가에 이 소식이 전해질 것이고.
페르세르크의 귀에 들어갔다면. 적어도 일리나 이상으로 그놈은 끔찍한 결말을 맞이할 테니까.
“잠깐만요…… 세분 지금 균열 때문에 의논하고 계시던 거 아니었나요?”
“지금 그게 중요해?!”
“네 동생 아직 다섯 살도 안 됐어!”
극성을 부리는 두 사람과 다르게 코오나는 말없이 집을 나서고 있다.
반사적으로 뛰어들어 코오나의 허리를 붙잡고 다시 끌고 온 초단이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잘 생각해봐요. 지금 에린이의 정체가 드러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어머니.”
“그럼 소리소문없이 처리하자. 내가 할 테니까. 우리 초단이는 아무 걱정하지 마.”
“맞아. 적정선이라는 게 있지 어디 애한테 그딴 걸 보여줘?!”
일리나가 신검 칼디라스를 붕붕 돌리며 이를 빠득 깨물었다.
그대로 두면 대참사가 터질 거라는 생각이 든 초단이는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희망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저씨!!
한국에서 인수한 회사의 정황을 지켜보고 있던 알하자드는 황급히 결려온 초단이의 전화를 받았다.
“초단이구나.”
-아저씨! 어머니 좀 말려주세요! 잘못하면…….
다급히 에반젤린의 상태와 지금 일리나와 현아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지 빠르게 말한 그녀는 이전처럼 알하자드가 두사람을 말리고 큰 문제로 번지지 않게 막아주려 했다.
하지만.
“음. 그렇구나. 그래. 나도 그 상황을 봤지, 걱정 말려무나. 아저씨가 깔끔하게 인생이 어떻게 쓰게 변할 수 있는지 보여줄 테니.”
믿었던 알하자드는 화끈하게 초단이의 기대를 배신했다.
* * *
그날 사건은 제법 큰 문제였다.
버그로 의심되는 악질 후원으로 인해 보호조치가 되는 것과 방송 도중에 연령제한이 넘는 콘텐츠가 방송된 것은 엄연히 그 무게가 달랐다.
하지만 문제가 크게 번지기 전에 방송이 꺼져버렸기 때문에 에반젤린은 약 사흘 정도 다시 정지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에린이에요.
-엄청 못된 사이트였어요. 아직도 속이 안 좋아요…… 이상한 거 틀어서 미안해요. 며칠 쉬고 올게요.
간결하고 깔끔한 공지였다.
알하자드가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만들어준 그녀의 채널에는 그녀의 이름으로 어떤 공지가 올라왔다.
당연히 그것을 본 시청자들은 그때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두고두고 회자에 올렸다.
그리고, 그중에선 어떤 이야기도 오가기 시작했다.
첫째로. 에반젤린에게 그런 것을 추천한 선을 넘는 인간에 대한 비난이었다.
척 봐도 아직 어린아이 방송이다. 실제로 처음엔 여러 이유로 모였지만. 이들 중 과반수는 에반젤린 특유의 순수함과 귀여움에 매료되어 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은 에린을 마치 재롱을 부리며 커가는 아이를 보는 아빠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 것도 사실이었다.
정작 에반젤린은 자신을 어른처럼 봐주길 바랐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러다 보니 정도가 심하지 않은 악질들도 여기서만큼은 자제한다는 불문율이 퍼져있었건만.
스트리머 [절제]를 놀린답시고 선을 넘어버린 한 시청자가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선을 넘는 채팅을 친 놈의 아이디가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였다.
평소에도 악질로 유명한 시청자였던 만큼 이런 일로 그가 위축될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어디로 사라져버리자 이야기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에린 방송. X나 부잣집 아가씨 같지 않음?]
[그래. 누가 아가씨라고 하는 것도 들었는데.]
[설마 찾아서 묻어버린 건 아니겠지?ㅋㅋㅋ]
[그런 악질 쉑 묻히건 말건 상관은 없는데. 진짜일 거 같아서 소름 돋네.]
[근데 진짜 근황 모름? 이 미친놈이 갑자기 개과천선할 리도 없는데.]
[난 진짜 찾아서 묻었다에 한 표 건다.]
[솔직히 예전이랑 다르지 요즘 세상이. 특히 이번에 티오니스 성자 딸내미 일로 무근거 비난 던지던 쉑들 다 작살난 거 기억하면 함부로 말 못 할 텐데.]
다행이라면 에린의 방송이 한때 여론을 뜨겁게 달궜던 피해자인 에반젤린과 동일인물이라 생각하는 이는 아직 없는 듯 보였다.
정확히는 현아가 여론의 물타기를 이용해 두 사람의 접점을 살살 비틀어버린 것이지만 말이다.
악질시청자의 근황에 대해선 당연히 소문만 무성할 뿐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현재 에반젤린은 한 손에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든 채 초단이와 함께 균열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
방송이 정지된 이후로 그녀가 울적해 하자 초단이가 그녀를 데리고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균열을 찾아온 것이었다.
-크오오오오오!!
에반젤린을 향해 달려드는 D급 이상의 몬스터들이 맹렬하게 포효한다.
물론 D급 몬스터인 만큼 그리 위협적인 놈들보다는 조무래기에 가깝지만 일반인이 보기엔 그놈이 그놈인 게 몬스터라는 족속들이다.
그 수는 무려 수십.
한 손에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들고 있는 에반젤린은 엄연히 2차성장 전에 마스터의 경지를 돌파했고, 이제는 2차성장을 하면서 용족으로써의 힘도 얻어낸 참이었다.
[피어]
빠르게 다가오던 몬스터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우울하게 있던 에반젤린의 눈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그대로 굳어버렸다.
세로로 찢어진 드래곤 아이.
그 눈을 들여다본 몬스터들이 느낀 것은 지독하게 거대한 어떤 존재의 공포였다.
순식간에 주춤거리며 굳어버린 몬스터들을 보며 에반젤린은 말없이 그들을 보다 손뼉을 쳤다.
“아! 언니!”
“응?”
조용히 에반젤린을 뒤에서 봐주고 있는 초단이가 되묻자 에반젤린은 스마트폰을 꺼내 몬스터들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보니까 근황 사진 같은 것도 올리던데. 나 이거 해도 돼?”
어차피 에반젤린만 나오지 않는다면야.
애초에 각성자들이 방송을 하는 것도 제법 흔한 장면이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거니와 그녀가 각성자임을 알면 적어도 악질들이 선을 넘는 것도 덜하지 않을까. 초단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대신 네 모습은 나오면 안 돼.”
“헤헤. 그건 쉽지.”
그렇게 말하며 몬스터들을 향해 에반젤린이 소리쳤다.
“전부 이리와! 여기 줄 서서 2열로 서!”
막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는 몬스터를 향해 소리치는 에반젤린. 누가 보면 미쳤냐고 물을 질문이다.
특히 이곳은 공개 균열인 만큼 여러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행히 사람은 없는 듯했지만, 당연히 사람의 말을 절대 들을 리 없는 몬스터들이다.
하지만 에반젤린의 드래곤 아이에 그대로 직격당한 몬스터들의 정신은 그런 것을 따질 여력이 없었다.
그냥 드래곤도 아니고, 그 드래곤이 황족처럼, 신처럼 모시는 고대용.
그 고대용 중에서도 가장 강한 존재였던 이클립스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에반젤린의 피어는 그 근본부터가 남달랐다.
겁에 질린 몬스터들이 움직이지 않자 에반젤린은 검 끝을 놈들에게 겨눈 뒤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포토 글귀에 에린의 던전 사냥이라는 어그로성 제목을 쓴 뒤 자신의 채널에 업로드해 버렸다.
그러자 빠르게 채널에 댓글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각성자였음? 그보다. 손 진짜 귀엽네.]
어린아이의 손이라기보다는 십 대의 작고 하얀 손이다.
사진에 브이 자를 그린 에반젤린의 손을 보며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모습을 보였다.
[어? 저기 검은 늪지대 아님? D급 공개 균열.]
[그러네. 맞네. 와 저게 다 몇 마리야.]
[기술만 있으면 어려운 놈들은 아닌데.]
[방장…… 거긴 따뜻해? 여긴 추워…… 빨리 돌아와…….]
[금수저에 각성자에…… 그런데 어린애? 어린애가 균열 들어가도 되는 거임?]
[실력만 확실하면 나이 신경 안 쓰는 거 모름?]
[조심해. 방장. 삼촌부대가 응원할게.]
[와. 근데 19금 보고 엉엉 울면서 방종하던 애가 현실에선 몬스터를 도살하는 백정이다 뿌슝빠슝?]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장르부터 다른데.]
[그렇긴 함. 그런데 조심하셈. 진짜. 혹시라도 다칠까 겁나네.]
[ㅇㅇ 아무리 각성자라도 에린은 왠지 모르게 겁나 물가에 내놓은 애 같아서.]
고작 며칠 만에 그녀의 시청자들은 그녀를 그냥 혼자 두면 불안 불안한 아이 정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었다.
[다 컨셉질 아님? 손보니까 완전 애도 아니고 알건 다 알 나이 같은데. 꼴랑 그거 봤다고 우는 것도 그렇고.]
[아니 찐텐으로 울던 목소리 기억 안 남? 그리고, 애초에 그 컨셉질이라는 것도 본인이 이중성 드러낸 것도 아닌데 왜 지x이지?]
[ㄹㅇ 거짓말한 적은 없지. 애초에 나이 물어보면 14살 정도라고 했잖아. 요즘 애들 영악해도 세상 물정 모르는 거 보면 진짜 천연기념물 맞긴 함.]
[부잣집 아가씨…… 천연기념물…… 몬스터 백정…… 어우야…….]
[위에 새끼 차단 좀 ;;]
[ㅋㅋㅋ 근데 애초에 에린이 사냥하고 있는 거 맞음? 그냥 오빠들 따라간 거 아님?]
순식간에 에반젤린이 있는 균열의 위치를 알아내는 시청자들을 보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요상한 건 다 배워서…….
초단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즐겁게 웃으며 열중하는 에반젤린을 응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에 초단이가 눈을 크게 떴다.
“에린아!”
동시에 2차성장을 하면서 귀 끝이 뾰족뾰족해진 에반젤린의 귀가 쫑긋거렸다.
“피 냄새…….”
“잠깐만! 괜찮아 에린아. 네가 나서지 않아도 돼!”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는 건 다급한일이지만 자칫 그녀가 나섰다가 또 인간들에게 상처를 받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선 그녀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리 없을 텐데.
걱정이라는 게 본래 그런 법이다.
그런 초단이의 말에 에반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언니. 나 어린애 아냐. 언제까지 그 일로 꽁해있을 생각도 없고.”
에반젤린이 씨익 웃는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웃음은 초단이가 가장 좋아하는 창조주이자 아빠인 데이비의 미소와 닮아있었다.
“괜찮아.”
그말과 함께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들고 섬광처럼 날아오른 에반젤린의 눈이 자색으로 물들고 세로로 동공이 찢어졌다.
이에 초단이는 자신의 형체를 살짝 흩어 에반젤린에게 깃들게 한 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그런 초단이의 시야에 몬스터에게 포위당한 채 부상을 입고 있는 몇몇 각성자들이 보였다.
아직 초짜인지 굉장히 불리한 장소에서 다수의 검은 늑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중 한 마리가 빙빙 돌다 한 명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한다.
바로 나서지 않으면 한 명의 애꿎은 목숨이 날아갈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었다.
이윽고 에반젤린의 일검이 낙하한다.
검신 하레스의 검. 중검의 기초.
폭발적인 중량이 압도적인 내구성을 지닌 용신검 트와일라잇에 담긴 채 폭격이 쏟아지듯 낙하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나타난 에반젤린은 멍하니 자신을 보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티오니스 성자의…….”
“괜찮아요?”
에반젤린의 물음에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각성자들이 넋이나 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예전 나룻배의 방송으로 에반젤린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이들이었기에 그녀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래서 조금 당황하고 경계한 것도 사실이지만 애초에 그녀가 자신들을 구해준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고, 그녀가 피해자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사일런스 게이트의 여부는 아직도 논란거리였지만 말이다.
뒤늦게 비명을 듣고 온 다수의 각성자들의 시야에도 에반젤린의 모습이 담기기 시작했다.
불안함이 서린 초단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행히 그녀를 알아보았다고 해서 크게 상황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르르르르…….
이윽고 몬스터들이 맹렬하게 에반젤린을 향해 달려든다.
하지만 에반젤린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자색 눈동자에 세로로 찢어진 동공에서 폭발적인 피어가 터져 나오면서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깨갱!!
그대로 굳어버린 채 겁에 질린 표정을 짓는 몬스터들을 보며 각성자들은 멍하니 에반젤린을 바라보았다.
“도움…… 필요한 거 맞죠?”
약간 불안함이 담긴 질문이었다.
이에 부상을 입은 각성자는 문득 그녀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상처 입을까 겁을 먹은 동물처럼. 눈치가 빠른 그녀는 에반젤린의 태도가 왜 저런지. 알 수 있었다.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남을 바로 도우려 하면서도 겁을 먹는 아이가 사람을 찾아가서 죽였다고?
헛소리.
각성자는 자신의 환부를 꽉 눌러 지압한 채 말했다.
“부탁할게. 아가씨.”
에반젤린이 티오니스 성자의 딸이기에 국가에서 사고를 묻어버렸다.
혹은, 자신들이 모르는 어떤 음모론이 있다.
티오니스 성자의 딸은 인성이 좋지 못하다.
그때 사건이 터졌을 때 나온 수많은 루머들이었다.
전부 개소리.
전부 헛소리.
인터넷의 낭설은 믿을 게 못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