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55화
카트린느 대공과 그동안 할 이야기가 많았는지 방에서 그녀의 곁을 지키는 에이리아에게 곧 돌아가야 한다느니 하는 눈치 없는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웃는 얼굴로 맞이하고는 있지만, 사라져버린 기억 때문에 상당히 괴로워하는 게 훤히 보이는 터라 이쪽도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카트린느 대공의 부군의 말에 따르면 카트린느가 밤에 잠을 설치는 일이 빈번하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단순히 기억이 사라진 게 아니라 강제로 삭제된 것인 만큼 영혼이 그 구멍으로 인해 환상통을 격하게 느낀다는 사실이다.
에반젤린을 제외한 모두가 같은 증상을 호소했던 것을 생각하면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어떤 일이든 여유를 잃지 않던 대공조차 힘들어 잠을 설칠 정도면 보통 인간들의 정신은 시시각각 메말라 가고 있을 것이다.
가만, 이런 식이면 마족과 인간의 화해계획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그때 내 안의 신력이 빠르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 --]
알 수 없는 언어 같은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이게 무슨 환청인가 싶을 수 있지만 나는 이 공명음을 유도한 게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허공에 손을 뻗었고, 내 육신이 입자처럼 흩어지며 뻗은 손 너머의 균열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불렀습니까?”
내가 도착한 곳은 영웅들이 존재하는 신의 영역. 그 최심부.
프리아 여신이 잠든 성역이었다.
그곳에서 심심한 듯 작은 대리석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던 여성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곁에 놓여진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태초의 존재이자 위대한 의지인 그녀가 아바타라곤 해도 피조물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매개체.
그것이 바로 저것이었다.
[우리 사랑이 식었니?]
그 질문에 나는 인상부터 찡그렸다.
“언제부터 절 사랑하셨다고.”
[그래. 난 한순간의 즐거움일 뿐이지.]
“…….”
평소라면 당황했을 것이다. 태초신에게서 떨어져나온 아바타의 자아가 이렇게 구는 경우는 잘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부른 거죠?”
내 물음에 그녀는 잠시 나를 올려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전에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내 질문에도 그녀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질문을 이어나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트린느 대공, 한사람만이라도 기억을 되돌릴 방법이 없습니까?”
내가 묻고도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없이 내게 고개를 돌렸고. 이내 태블릿을 보여주었다.
[넌 그…… 없니?]
“뭐가요?”
[양심.]
이번엔 내가 시선을 돌려버렸다.
애초에 여기서 끝난 것도 기적에 가까운 결과가 아닌가.
세계의 법칙까지 수정했으니 제정신은 아닌 결과였다.
“쓸데없는 질문을 했네요. 하긴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지겠지. 그래서. 나를 왜 불렀습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프리아 여신의 본체가 잠든 성역의 중심을 가리켰다.
[꿈을 꾸고 있어.]
“꿈이요?”
꿈이라는 단어에 내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을 크게 떴다.
“몽환 세계?”
[몽환 세계가 왜 생겨나는 것 같아?]
그녀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이 잠들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이전에도 타나토스에게 세상을 맡겨놓고 주기적으로 잠드셨다고 들었는데.”
타나토스가 괜히 잠의 신이라 불린 게 아니었다. 아마 본래 의도대로라면 프리아 여신이 자는 동안 생겨나는 꿈을 정리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지금 나는 잠들어있지.]
“언제 깨어납니까?”
즉 몽환 세계가 사라지려면 그녀가 깨어나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런 내 질문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네가 죽고 난 후에.]
“당분간 일어나실 생각이 없으시다?”
정곡이 찔렸는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요? 몽환 세계가 생겨나는 거랑 제가 불려온 거랑 무슨 상관인지 좀 물어도 됩니까?”
애초에 그게 그녀가 나를 이곳까지 불러야 할 이유였을까.
내 의문에 그녀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내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스르릉…….
동시에 내 옷이 빛에 휩싸이더니 이내 사라져버린다.
남은 것은 수영복으로 보이는 사각 수영복 한 장.
당황한 내가 표정을 일그러뜨리자 그녀가 눈을 크게 뜬 채 양손으로 엄지를 척! 하고 들었다.
[완벽.]
말은 따로 하지 않았다.
내가 무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내게 다가와 내 근육을 이리저리 찔러보고는 다시 본래의 복장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래서. 몽환 세계가 많아지면 나쁜 겁니까?”
[나쁜 건 아니야. 꿈은 휴식이고 축복이지.]
내 뺨을 살살 쓸어내린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리고 거의 닿을락 말락 한 위치에서 멈추고는 다시 떨어졌다.
[하지만 꿈을 너무 꾸면 가끔씩 악몽을 꾸기도 하지.]
“악몽?”
내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악몽은 악하진 않지만, 장난기가 많아.]
그녀가 손을 휘저었다.
동시에 어딘가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척 봐도 지구의 풍경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구가 아니었다.
그곳에 보이는 새까만 무언가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사각! 사각! 사각!
듣기만 해도 거부감이 드는 소리였다.
[그 아이의 기억은 되돌릴 수 없지.]
절대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게 생겨난 기억의 괴리를 몽환 세계의 힘으로 덮어씌워서 메꿀 순 있어. 마치 자고 일어나서 꿈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기억은 돌아오지 않아도 적어도 그로 인해 고통받지는 않게 할 수 있다.
극약처방이었다.
* * *
“아. 어서 오세요!”
카페의 브레이크타임. 잠시 휴식을 위해 근처의 편의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이나와 초단이는 검은 봉지를 손에 쥐고 온 청년을 바라보았다.
“초단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박승현이라고 합니다. 이 쪽분은 레이나 씨죠?”
제법 매너가 몸에 받쳐져 있다.
“레이나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제법 싹싹한 말투로 그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주었다. 그러자 귀에 걸려있던 머리카락의 몇 가닥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저도 모르게 요염한 모습이 흘러나오자 절제, 박승현이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참. 여기 커피에요. 저기 앉으실까요?”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편의점 앞 테이블을 가리켰다.
워낙에 눈에 띄는 두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절제, 박승현도 꽤 잘생기기로 유명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다.
물론, 방송의 내용을 보면 이놈이 생긴 것과 다르게 조금 또라이구나 싶지만, 또라이가 아닌 스트리머가 몇이나 될까.
“우선 사과드리겠습니다. 저 때문에 괜히 귀찮게 돼서.”
승현의 사과에 초단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과를 받을만한 짓을 당한 적이 없는데요.”
“예? 카페에 사람이 바글바글하게 몰려든 건. 제가 괜한 글을 쓰는 바람에.”
“아니에요.”
초단이가 키득 웃었다.
“아무 관련 없어요. 그러니 고개 드세요.”
아무래도 절제 박승현은 자신이 쓴 글을 누군가가 추적했고, 결국 그녀들을 찾아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진실은 달랐다.
지금 카페에 바글바글한 손님은 에반젤린의 시청자 같은 게 아닌 근처 대학생들이었다.
그냥 예쁜 알바생 두 명이 왔다고 해서 잠시 들렸다가 그녀들이 지구 문물에 익숙하지 않아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귀여워서 구경하러 온 게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중 일부는 어떻게 접촉해보려는 이들도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승현의 잘못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하하…… 그런가요. 그건 다행이네요…… 후우…….”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그때 레이나가 물었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르신데요.”
그녀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묻자 승현이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부정의 의사를 밝혔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안도해서 긴장이 풀린 모양입니다.”
“안도요?”
“네. 괜히 티오니스 성자님 심기를 거스른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는 눈치가 없는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목숨의 위협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에반젤린을 자주 놀리는 건 나름대로 정이 든 것도 있지만 넘을락 말락 에반젤린을 놀리는 게 생각 이상으로 목숨을 거는 스릴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른 이유도 아니고 어그로성 글 하나 때문에 데이비에게 찍혀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피곤하리라.
물론 소문만 돌 뿐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지만, 만약 정말로 사실이면 그건 그것대로 굉장히 소름 돋는 일이었다.
“아…… 아버지가.”
상황을 이해한 초단이가 쿡쿡 웃었다.
“덕분에 잠도 못 자고 얼마나 밤잠을 설쳤는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아요.”
“예?”
“괜찮다고요. 아버지는 엄청 만족하고 계세요.”
그녀의 의외의 대답에 박승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초단이는 예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아버지는 승현 씨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제게요?”
“네, 에린이가 승현 씨를 잘 따르잖아요. 복잡한 인터넷 방송계에서 에린이가 의지하는 건 매니저인 알하자드 아저씨와 승현 씨가 전부인걸요.”
지구에서 에반젤린을 도와주고 있는 이는 많지만, 방송 도중에 그녀를 케어해주고 있는 건 사실 두 사람이 전부였다.
“초단이 말이 맞아요.”
초단이를 대신해 레이나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만약 정말로 거슬렸다면 곁에 서 있는 분들이 벌써 움직였을걸요?”
“곁에 서 있는 분들요?”
박승현이 의아한 듯 주변을 둘러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혹시 그녀가 장난이라도 치나 의문이 들어 레이나를 보자 레이나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간단한 마나 흐름의 방해였다.
가녀리고 흰 손이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휘둘러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각성자들의 움직임을 봐도 이런 걸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위협이라고 하기엔 옅은 바람이 흔들렸을 뿐이었다.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해 다시 물으려던 그는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레이나와 초단이의 맞은편에 홀로 앉아있던 그의 양측에 막대한 존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키는 2미터 30센티 정도 할까.
도저히 사람의 체격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터질 것 같은 근육질 몸매가 보인다.
그 외에 보인 것은 새하얀 털인지 피부인지 모를 인간의 육신. 보디빌더들이 입고 다닐법한 새빨갛고 작은 팬티 한 장.
경악스러운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들의 얼굴은…….
뀨.
빨간 콩알 같은 눈을 반짝거리고 있는 토끼였다.
마치 토끼 인형 탈을 뒤집어쓴 근육 거한들 같은 모습이지만 이 둘 모두가 인간이 아니라는 건 본능이 부르짖었다.
“그 사람. 에린이에 관해선 너무 극성이라. 여기저기 보디가드가 있거든요.”
이윽고 레이나가 다시 손을 휘젓자 토끼들이 스르륵 하며 흩어졌다.
“대체 뭘…….”
“무얼요. 그냥 당신 곁에 있는 토끼들의 그림자를 살짝 걷어낸 거예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라지겠지만.”
그 말인 즉. 저건 레이나가 불러낸 게 아니라.
레이나가 손짓을 하면서 원래 있던 놈들을 볼 수 있게 해준 것이라는 소리였다.
오한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아 걱정 말아요. 저분들도 착한 분들이라.”
초단이가 손사래를 치며 그를 안심시키려 하지만 절제 박승현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진 않았다.
“게다가 저 두 분은 저희에게 붙어있는 분이라서 승현 씨에게는 아무도 없어요.”
걱정 마라.
그런 말을 하지만 절제는 혹시 자신이 에반젤린에게 실수한 게 없는지 절절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 그런데 왜 동생에겐 말하지 않으셨나요?”
“아…….”
초단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괜히 방해될까 봐서요.”
“저런……그런데 두 분 다 이 근처에 사시나 보네요.”
“맞아요. 우연이네요.”
키득키득 웃어 보인 초단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언니, 저 잠시 자리 좀 비울게요.”
갑작스레 초단이가 자리를 떠버리자 박승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앞에는 이번에 처음 본 사이인 레이나만이 남았으니 말이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조심스레 레이나가 물어오자 그가 얼굴을 살짝 붉게 물들였다.
‘정신 차려라 박승현, 너는 연상 취향이다. 너보다 어린애는 아니지.’
그의 나이 이십 대 중후반 나이는 약 스물일곱 정도. 그렇기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억눌렀다.
물론, 그는 레이나가 그보다 연상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정말로 사과만 하러 오신 건가요?”
그때 레이나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화사하게 웃었다.
“네?”
“아직 어려서 그런지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네요.”
레이나의 미소에 승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리다는 말이 익숙하게 들리지 않았다.
“저…… 제가 동안 소리 듣긴 하지만 그래도 이십 대 중 후반이고 3년만 지나면 달걀 한판인데…….”
“제가 몇 살처럼 보이세요?”
“네? 아…… 한 이십 대 초반 정도…….”
“땡.”
레이나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녀에게 지구는 하나의 외딴 지역과도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있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었다.
“설마…… 저보다…….”
“맞아요. 제가 당신보다 한두 살 더 많겠네요.”
거짓말 같은 사실이 터져 나왔다.
애초에 저 외모에 무슨 서른이란 말인가.
경악하는 승현의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자 그녀가 쿡쿡 웃어 보였다.
“알다시피 일정 경지에 오르면 노화가 느려지거나 멈춰요.”
정확히 레이나는 아예 노화라는 게 없는 종족인 천족이지만 그 사실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누나라고 불러볼래?”
눈을 가늘게 뜬 레이나가 장난스레 그를 놀리듯 말했다.
“어…… 어…… 그.”
당황한 그가 우물쭈물한다.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 당황한 그였다.
“장난이에요.”
“아…… 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그녀의 질문에 절제 박승현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때였다.
우우웅!!!
갑작스런 공명음과 함께 주변이 진동한다.
갑작스런 지진에 놀란 이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괴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파스스스스!!!
섬뜩한 소리와 함께 하수구 안에서 무언가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왔다.
동시에 박승현의 표정이 퍼렇게 질렸다.
“미…… 미친!! 으아아악!!”
하수구에서 튀어나온 것은 직경 1미터는 되어 보이는 바퀴벌레 한 마리였다.
평소 벌레, 그것도 바퀴벌레에 굉장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그는 평소 자신의 행동거지도 잊은 채 그대로 레이나에게 달라붙었고 그런 그의 모습에 레이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많은 남자라는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순간적으로 번뜩임과 동시에 대기를 가볍게 흔들어 놓았다.
서걱!!
새하얀 빛의 칼날이 날아들어 바퀴벌레를 양단해버렸다.
파스스스스…….
동시에 바퀴벌레가 마치 환영이었던 것처럼 날아다니기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실체가 없는 바퀴벌레였다고 말하는 것처럼 놈이 날뛰던 곳에는 어떤 파괴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죠?”
당황한 듯 바라보던 박승현이 중얼거리자 레이나가 조금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저, 그만 떨어져 주실래요?”
“어…… 어어?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대로 달라 붙어버린 그가 얼굴을 뻘겋게 물들이며 물러났다.
동시에 스르륵 나타난 두 마리의 토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박승현을 가리켰다.
치울까?
그런 의도가 다분해 보이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레이나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