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58화
“착하지?”
품 안에 더욱더 파고드는 작은 소녀를 부드럽게 안아주며 레이나가 웃어 보였다.
“흐윽…… 흑…….”
그 부드러움에 상당히 울분이 쌓였는지 악몽은 끝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레이나를 올려 보더 더욱 파고들었다.
데이비의 말에 따르면 악몽은 두 가지 힘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하나가 프리아 여신을 대신해 가득 찬 몽환 세계를 소모시킬 수 있는 힘이었다.
데이비가 직접 소멸시키기엔 너무 큰 영향력을 미치기에 문제없이 자연스럽게 몽환 세계를 소모시키는 방법으로 악몽의 힘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세계의 법칙으로 인해 인격이 한번 비틀렸던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 그 괴리로 인한 혼란을 악몽이 채워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게 막아주는 것이라면 그들도 더 이상은 힘들어하지 않으리라.
린디스의 대공 카트린느 카라벨라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도 들어 알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시스템을 이용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면 신빙성 자체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
레이나는 조용히 악몽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그녀의 말에 악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왜 그러느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작고 흰 손으로 레이나의 뺨을 쓰다듬은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꿈을 꾸거든.”
그 생생한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과거의 기억이다.
마족의 전쟁. 닉스를 필두로 한 적들의 공세. 무너져 가는 왕국들과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
반격을 위해 모여든 저항군들이 자신의 포부를 밝히고 언젠가 좋은 세상이 올 거라 다독이던 모습.
그리고, 그런 그들이 피를 흘리며 전장에서 쓰러져 가는 기억까지 꿈에서 너무 생생했다.
그 이후 포로가 된 기억부터 끔찍한 약 10여 년간의 기억은 그녀가 인지하지 않아도 꿈에서 간혹 섬뜩할 정도로 자세하게 나타나 그녀의 심정을 좀먹었다.
이 이야기에 관해서 데이비는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는 듯 보였지만 자세하게 알려줄 순 없었다.
원인이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생기는 죄책감, 그녀는 현 상황을 그리 진단했다.
본인이 구해달라고 해서 구해주었는데 그것 때문에 또 고통받고 있다고 말하는 건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오래됐으면서도 괴로운 꿈이야.”
눈앞의 존재는 악몽이다. 하지만 레이나가 꾸는 악몽을 만들어내는 존재는 아니었다.
현재 레이나가 꾸는 악몽의 근원은 그들 모두를 두고 홀로 안식을 얻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 원인이었으니 말이다.
레이나의 중얼거림에 악몽은 말없이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 천천히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레이나의 뺨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파직!!
동시에 악몽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물러났다.
“뭐야. 무슨 일이야.”
갑작스런 스파크에 놀란 데이비가 다가왔다.
“아…… 아아…….”
당황한 악몽이 주춤거리며 물러난다.
“야. 또 이상한 짓 한 건 아니겠지?”
데이비가 섬광 구슬을 꺼내 들며 묻자 악몽이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레이나의 뒤로 숨어버렸다.
“그만 해요. 이 아이도 놀란 거 같으니.”
이에 레이나가 중재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 악몽이 자신에게 한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실감 나는 과거의 꿈을 꿀 때마다 괴로워하니 그것을 어떻게 해주려고 한 것이리라.
적어도 악몽이 레이나에게 만큼은 호의적이라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했다.
모든 꿈에 간섭할 수 있는 악몽이 레이나의 꿈을 어찌하지 못한 것이었다.
“으으으…… 으으으!!”
이윽고 데이비가 악몽을 한 손에 안아 들고 일어서자 녀석이 겁에 질려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얌전히 있어 임마.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 주는 거잖아.”
“으으으으!!”
데이비의 품에서 빠져나와 레이나에게 가려던 악몽이 울먹거리며 레이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저…… 저도 갈 수 있을까요?”
“음?”
“제가 안고 이동할게요.”
그녀의 말에 데이비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악몽을 놓아주었다.
후다닥 달려가 레이나의 품에 안겨버리는 악몽을 보며 그가 말했다.
“그래.”
* * *
[제가 막을 테니 움직이세요. 당신은 죽어선 안 됩니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저를 대신해 복수해주세요.]
저항군들의 목숨을 담보삼아 몇 번이고 목숨을 건졌던가.
“흐윽!!”
눈을 감은 채 잠들어있던 레이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잠에서 깼다.
어두컴컴한 방안에는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손에 닿는 것은 잠들 때마다 안고 자는 커다란 곰 인형이 전부일 정도로 고요했다.
“또, 그 꿈.”
악몽을 프리아 여신에게 데려다준 이후 지구로 돌아온 레이나는 온몸에 흐르는 식은땀으로 인해 체온이 빠르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하인스 영지에 있을 때보다는 지구에 있는게 확실히 증상이 낮았다.
지구는 그녀에게 객지였으니 말이다.
반대로 하인스 영지는 집과 같은 편안함을 그녀에게 주는 장소였다.
그것이 원인이었다.
그녀가 편해질수록 과거의 기억이 죄책감이 되어 그녀를 옭아맸다.
한 손으로 눈을 감싸 쥔 채 짧게 숨을 고른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야에 담긴 지구의 어두운 밤하늘을 보며 그녀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세뇌했다.
아직 나는 괴롭다. 고통받고 있다. 그러니 죄책감을 느낄 단계가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 세뇌였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녀를 괴롭게 만드는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옅어진다면 상관없었다.
“내가 편히 쉬는 건 원치 않는구나.”
그녀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손이어야 할 텐데. 꿈을 꾼 직후여서 그런지 손바닥에 시뻘건 피가 묻어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는 토끼형 잠옷을 입은 채 창문을 열고 몸을 살짝 기대어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았다.
[스스로를 몰아붙이다 못해 곪았구나.]
악몽을 데려다준 이후 프리아 여신이 그녀를 보았을 때 처음 했던 말이었다.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옭아매다 보니 그게 곪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편히 쉬질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왜 데이비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느냐고 묻는 듯한 프리아 여신의 시선에 레이나는 마치 발가벗겨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결국 그곳에서 도망쳐버렸다.
“후우…… 괜찮아. 다 해결됐잖아.”
짧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방안에 비치된 찬장에서 포도주를 한 병을 꺼냈다.
홀로 와인을 홀짝이고 있는 꼴이 퍽 우습지만, 그녀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알싸하게 톡 쏘는 와인의 맛에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침대에 다시 누웠다.
안 그래도 바쁜 데이비에게 이런 어린애의 어리광 같은 것을 부탁할 순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 강제로 그녀를 은퇴시키고 하인스 영지에 정착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바란 것이었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해 그녀를 구원해 주었다.
그런데 이제 몸과 마음이 편해지니 잠들어있던 죄책감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한다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스스로 외롭고 고통스러울 땐 죄책감을 느낄 새가 없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어떤 병이나 마법적인 증상이 아니라 그녀의 정신적인 문제인 만큼 악몽이 해결해주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쓰게 웃으며 그녀는 인형을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결국, 그녀는 밤잠을 몇 번이고 설치며 오래전 과거 자신을 대신해 죽어갔던 이들의 이름을 되뇌고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 * *
날이 밝은 직후 레이나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악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악몽은 프리아 여신의 곁에 두었다.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악몽은 레이나의 품에 파고들어 마지 빠져나가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저기…… 악몽, 왜 여기 있는 거야?”
레이나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품 안에 파고드는 악몽을 향해 조심스레 묻자 녀석이 해맑게 웃으며 검은 매직 같은 펜을 꺼내 들었다.
손짓발짓으로 무언가 말하려 하는데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똑똑.
“레이나 언니. 안에 있어요?”
그때 초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레이나는 악몽을 품에 안은 채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후…… 여기 있었네.”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이비가 모습을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놀란 레이나가 질문을 하자 악몽이 레이나의 품에 더욱 파고들며 혀를 쏙 내밀었다.
“어젯밤에. 프리아 여신의 얼굴에 낙서를 하고 도망친 모양이더라.”
데이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창조신의 얼굴에 낙서하고 도망칠 간이 큰 존재가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아니 존재하기는 할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눈앞에 그런 악동이 존재한다.
악몽이며 장난이 심한 악동. 그녀에게 있어서 프리아 여신은 장난칠 대상밖에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데이비의 설명에 레이나는 잠시 벙찐 표정으로 악몽을 내려다보았다.
좀 전 악몽이 손짓발짓으로 설명하던 게 그것이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여신이 대뜸 찾아와서 저 녀석 데려오라고 아주 난리도 아니더라.”
애초에 악몽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선 여신이 곁에 있어야 했다.
프리아 여신이 악몽에게서 필요한 힘을 정제해내 끌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제된 힘은 기억의 괴리로 고통받는 몇몇 인간들을 구할 유일한 진통제이기도 했다.
문제는 장난기가 가득한 악몽에게 있어서 그곳에서의 삶은 몇 시간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루했다는 사실이었다.
“야. 조금만 기다려달라니까.”
데이비가 악몽을 향해 투덜거리듯 말하자 녀석이 혀를 다시 쏙 내밀었다.
“이게 진짜.”
“그만 해요. 아직 어린애잖아요. 제가 잘 다독여볼게요.”
레이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루해도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어? 부탁할게.”
“그래도 넌 잘 따르는 거 같으니 부탁 좀 할게.”
“네. 금방 돌려보낼게요.”
나름대로 악몽 녀석을 배려해준 건지 데이비가 떠나가자 레이나는 말없이 악몽을 품에 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
녀석은 레이나의 품에 계속 있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왔다.
그러니 아주 잠깐이라도 그렇게 두면 되리라.
“이틀만 끝나면 얼마든지 곁에 있게 해줄게.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줘.”
그 말에 악몽은 조금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처음 프리아 여신의 곁에서 도망치지 않고 악몽을 다독여주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악몽은 레이나의 품에 안긴 채 곤히 잠들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레이나는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피로가 몰려온다.
잠들면 또 그 끔찍한 꿈을 꿀 텐데.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몰려드는 수마를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악몽이 그녀를 잠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게 잠들었고.
그렇게 잠든 그녀는 하인스 영지에서 악몽을 꾸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악몽이 아닌 새파란 들판 위에 서 있는 꿈을 꿀 수 있었다.
귀여운 동물 복장을 한 악몽 녀석이 크왕! 하며 그녀를 위협하듯 하지만 오히려 귀여운 따름이다.
딴에는 악몽이랍시고 만든 꿈이지만.
레이나에게 있어서 악몽이 곁에서 잠들며 만들어준 꿈은 오랜만에 죄책감을 모두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 * *
고요한 섬에 추락하여 형태를 만든 거대한 찰흙은 본래 다른 미완성품처럼 금방 흩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악몽을 깨물면서 피를 머금어버린 녀석은 일정한 힘을 얻었고, 그 힘을 이용해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도약을 시도했다.
이면세계를 넘어 중간계에 안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서 이면세계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만들다 만 찰흙 덩어리가 마나와 세상에 넓게 퍼진 생명력. 그리고 신력을 먹어치우며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 것.
악몽도 데이비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서서히 태동하며 그 덩치를 더욱더 크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어떤 형체를 만들어냈다.
거대한 나비의 날개를 가진 하늘빛 단발의 미녀는 달에 비치는 바다를 내려다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그녀의 손뼉에 맞추듯 주변에 환한 불꽃놀이 같은 빛이 나타났고, 자신의 움직임에 만족한 그것은 곧 어디론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나비 날개를 지닌 여인의 등장은 시작에 불과했다.
악몽이 만들어낸 예상치 못한 변수. 비틀린 [악몽] 그 자체가 처음으로 나타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