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63화
데이비가 떠난 이후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레이나와 초단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카페 알바를 하는 자신들을 보며 벙찐 표정을 짓는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뭐로 드릴까요?”
“저…… 괜찮으세요?”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레이나에게 물었다.
“뭘 말인가요 손님.”
이에 레이나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하자 스트리머 절제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지금 에반젤린이 사라졌는데…….”
“손님. 일하는 도중에 잡담은 자제 부탁드릴게요.”
생글 웃으며 레이나가 짧게 선을 긋자 그가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지금 잡담으로 보여요? 애가 갑자기 사라졌다잖아요.”
“하아…… 손님, 아니 승현 씨? 그 문제는 승현 씨가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요.”
사장이 얼른 끝내라는 수신호를 보내자 레이나가 잠깐 카운터에서 빠져나와 그에게 다가갔다.
“애가 잘못되면 어쩌려고요. 걱정도 안 돼요? 아 물론 에반젤린 강한 건 아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이 갔어요.”
“…….”
그 한마디에 절제, 아니 승현의 표정이 벙쩠다.
“그 언니들이 같이 갔고.”
“…….”
“에반젤린에게 평소 얼마나 많은 보호 마법이 걸려있는지 모르죠?”
만약 악의적인 행동으로 에반젤린을 갑자기 납치한 것이라면 지금 그녀가 어떤 꼴을 당하고 있을지 걱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걱정이 안 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 이상 확실한 수단도 없으니 그저 기다리면 될 뿐이에요.”
“하지만 상대는 소리 없이 에반젤린을 납치한 존재인데요. 만약 정말로 위험하면 그들도…….”
“승현 씨.”
“네. 누님.”
“그 사람은 누가 헤치고 싶어도 해칠 수가 없는 인간이에요.”
“…….”
믿음이 서린 한마디지만 너무 현실적이라 할 말이 없어진 그였다.
* * *
-사라라라라라락!!!
푸른 비늘을 지닌 2미터는 되어 보이는 도마뱀들이 입을 쩍 벌린다.
순식간에 입에 모여든 에너지는 하나의 태양 응집체가 되었고 이내 고열의 광선을 방출해냈다.
콰아아앙!!!!
엄청난 에너지가 바닥을 훑으며 일리나를 향해 맹렬하게 날아들자 그녀는 칼디라스를 검집째로 들어 올려 광선을 가볍게 후려쳐 궤도를 꺾어버렸다.
단순히 물리력으로, 신묘한 검술 실력으로 같은 현상이 아니었다.
일리나가 가진 시공격검은 공간 자체에 간섭하는 검술로, 실제로 데이비를 제외하고 인간 중에 유일하게 차원을 찢고 열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그녀였다.
그녀가 한 행동 자체는 간단했다.
짧게 그어버리는 것으로 공간 자체를 자르진 않았지만, 살짝 왜곡시키는 수준.
그녀의 수준이나 재능이 얼마나 경이적인지 알만한 수준이었다.
당연히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나비 여제는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번 죽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두 번째 삶을 부여받았고,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전해지는 힘을 십분 활용하여 과거 자신이 기거했던 섬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이며 언제든 배신하는 존재.
따라서 나비 여제인 그녀의 적이다.
그렇다곤 해도 일단 자신이 손을 잡으려 하는 에반젤린의 가족이라고 하니 죽일 생각까진 없었다.
겁을 주거나 무력화 시켜서 섬 밖으로 쫓아내는 정도로만 생각하려 했건만.
현실은 달랐다.
“저 사람들 대체 뭐죠?!”
“꺅! 안돼!”
비명을 내지르며 에반젤린이 머리를 부여잡고 와들와들 떨었다.
“엄마가 화내면 진짜 무섭단 말이에요!”
정작 에반젤린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콰아앙!!
거대한 체격을 지닌 와이번이 맥을 못 추고 추락하는 것을 본 나비 여제는 에반젤린을 진정시켰다.
“진정해요. 저들이 강한 건 알겠는데 이 내성은 숨겨져 있어요. 특수한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섬을 가라앉히지 않는 이상 이곳은 절대 알 수 없으니까요.”
“저…… 정말요?”
눈을 크게 뜨며 재차 확인하는 에반젤린을 보며 나비 여제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왜 저들이 저렇게 화를 낸 거죠?”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곤 하지만 나비 여제는 인간에 대해 잘 알았다.
그렇기에 저들의 저런 행동은 조금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행동이었다.
대체 이 아이가 무슨 짓을 했길래 저런 모습들을 보인단 말인가.
“그게…….”
어서 말해보라는 듯 나비 여제는 에반젤린을 다독였고 이에 에린은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처음으로 지구로 와 자취를 시작했고. 자취를 하다 보니 누가 간섭할 일이 없어서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
그리고, 그러다 보니 상당히 귀찮음이라는 감정을 많이 느낀 점이라는 것을 말이다.
조리해 먹는 것조차 귀찮아진 에반젤린이니 당연히 수련도 게을리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그녀의 입맛을 확 사로잡은 치킨의 존재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려울까.
인간이란 참 간사한 것이다.
스스로 벌기 시작하고 주머니가 풍족해지니 씀씀이가 커지고 헤퍼지기 시작한다.
혼자 지내다 보니 귀찮은 건 다 하지 않게 되고 편한 것만 찾게 된다.
게을러질 대로 게을러진 에반젤린은 자취하는 아이의 잘못된 표본을 그대로 밟아버렸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비 여제는 표정을 찌푸렸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손수 만든 것들을 냅두고 그렇게 살았다고요?”
“하, 하지만 치킨이 얼마나 맛있는지 당신은 몰라요!”
“그냥 나가 이년아.”
한숨을 푸욱 내쉬며 나비 여제가 에반젤린을 끌어내려 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고작 인간이 아닌 용족이라는 이유로 인간에게 노출될 위험을 감수하면서 동맹을 제의하려 했던 자신이 미워질 지경이었다.
“시…… 싫어! 살려줘!”
울먹거리며 나비 여제에게 매달리는 그녀를 에반젤린은 그야말로 처절했다.
“아…… 아빠도 그렇지만 엄마가 화내면 정말로 무섭단 말이에요!”
“후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에게 했던 제안은 그냥 철회할게요.”
알싸한 두통 때문인지 인상을 찡그리며 나비 여제가 손을 휙휙 저었다.
“하…… 일단 상황부터 정리해야겠네요. 이들이 더는 진입하지 못하게…….”
그렇게 말하려던 그녀는 문득 섬의 정경을 비추는 창에 세 사람의 모습이 모두 사라진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읏?!”
에반젤린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세 사람의 움직임을 놓쳐버린 것이다.
이에 황급히 손을 휘저어 섬 전역을 수색해보았지만, 그녀가 수색한 곳에 세 사람은 없었다.
아니.
있을 리가 없는 곳에서 감지 되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세 사람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에반젤린과 나비 여제가 있는 홀의 문 바로 밖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언제 이곳까지 도달했는지 믿을 수가 없었던 나비 여제는 본능에 몸을 맡기듯 우선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녀가 허공을 열어 도망치려던 그 순간.
“아…… 안됐어요!”
“놔, 놔요! 드레스가 찢어지니까!”
“못 놔요! 나도 데려가!”
“싫어요! 당신은 그냥 여기 남으시던가!”
“매정하게 이렇게 배신할 거예요?! 인류가 당신을 배신했다더니 당신도 결국 똑같네요!”
“미안하지만 아직 우린 한배를 탄 입장이 아니죠.”
순식간에 달려들어 매달리는 에반젤린의 뺨을 밀어내면서도 나비 여제는 과격한 수단을 쓰지 않았다.
“제발! 지금 잡히면 나 혼난단 말이에요…….”
“그래서요?”
“도…… 도와줘요.”
“…….”
절박하게 요청하는 그녀를 보며 나비 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를 잡아 같이 이동하려던 찰나였다.
쩌엉!!!
갑자기 문이 박살이 나며 날아든 무언가를 쳐낸 나비 여제는 인상을 무섭게 찡그리며 팔을 움켜쥐었다.
“도망치긴 어딜 도망쳐.”
“……인간.”
나비 여제가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성을 이렇게 뚫고 들어올 정도의 인간.
그녀가 아는 한에선 단 한 명뿐이다.
하지만 눈앞에 인간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전력을 보유했고. 지금 상태로 저 인간과 충돌하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좋은 말로 할 때 에반젤린을 이쪽으로 보내.”
“보내줄 테니까 얘 좀 떼줄래요?!”
그녀의 짜증스러운 외침에 데이비와 뒤따라온 두 여인의 시선이 에반젤린에게 향했다.
그러자 에반젤린이 흠칫 놀라며 나비 여제의 뒤로 숨으려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빨리 안 돌아가요?!”
“시…… 싫어요! 우린 이제 한솥밥을 먹는 동맹이잖아요!”
물귀신 작전이 따로 없었다.
“누, 누가 동맹이라는 거에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당장 저리 가세요!!”
납치한 아이를 부모에게 돌려보내려 하는 유괴범과 돌아가지 않으려 떼를 쓰는 아이.
황당한 라인업이 아닐 수 없지만, 엄연히 현실이었다.
“아니 됐고, 좀 돌아가라고!”
결국 폭발한 나비 여제가 그녀를 잡아 밀고는 강풍을 일으켜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폴리모프를 일부 해제하면서까지 끈질기게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이 황당한 상황 속에서 페르세르크가 한숨을 내쉰다.
“후…….”
그 한숨 속에 비친 무시무시한 분위기 때문일까.
그대로 굳어버린 에반젤린이 바싹 얼어붙자 나비 여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에반젤린을 그들에게 날려 보내고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증오스러운 인간들이지만 그들을 처단하는 건 지금이 아니었다.
파창!!!
이내 그녀는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균열 속으로 몸을 던져 도망쳐버렸다.
그런 그녀를 데이비는 애써 쫓지 않았다.
대신 홀로 남겨져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에반젤린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에린.”
“…….”
흠칫 놀라며 슬금슬금 물러나는 그녀를 보며 데이비가 다가갔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
“걱정했다. 다친 덴 없고?”
혼낸다니 뭐니 했지만, 일단은 자신은 납치되어온 게 아니던가.
에반젤린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아빠의 말에 뭔가 속에서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울먹거리기 시작한 그녀가 그에게 매달렸다.
“흑…… 아빠…… 잘못…… 잘못했어요…….”
엉엉 울며 잘못했다 말하는 그녀를 보며 데이비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무사하니 됐다. 편식한 건 조금 잘못이긴 하지만. 그건 신경을 못 써준 내 잘못도 있을 거야.”
이상한데. 방금까지 작정하고 혼을 낼 것처럼 굴더니 왜 이렇게 따뜻하게 말하는 것일까.
에반젤린은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조용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용서하마.”
그의 말에 에반젤린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런데 저 둘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더라.”
데이비가 고개를 까딱이며 팔짱을 끼고 있는 일리나와 싱긋 웃고 있는 페르세르크를 가리켰다.
“어…… 엄마.”
“잘못한건 아는 모양이네?”
그 한마디는 지옥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 * *
공간을 찢고 도망친 나비 여제가 도달한 곳은 얼마 전 인간들을 확인하기 위해 들렸던 작은 도시의 카페가 있는 건물이었다.
그때 정신이 아찔해지게 만드는 아이들을 만난 이후로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와버린 꼴이었다.
“후우…… 우선 힘을 되찾아야 해.”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움직였다.
자신이 살았던 고향과 다른 이 세상에도 인간은 존재했다.
인간은 어딜 가나 존재하는구나.
그렇기에 인간들을 볼 때마다 배신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를 부득부득 갈며 그녀가 움직였다.
섬으로 당장 돌아가는 건 힘들다. 아니 자칫하면 섬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요원해질 수도 있었다.
고작 세 명의 인간에게 섬을 점령당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 말이다.
힘만 온전했다면.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던 찰나.
그녀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새까만 로브에 까마귀 가면을 뒤집어쓴 장신의 인물이었다.
“당신은 뭐지?”
“네 조력자.”
그 한마디에 나비 여제는 경계심을 숨기지 못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직시했다.
“아직 힘이 온전하지 못할 테지.”
그는 품 안에서 어떤 팔찌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걸 쓰면 힘을 온전히 찾을 수 있을 거다.”
갈라지는 목소리에 그녀는 천천히 그 팔찌에 손을 뻗었다.
“당신 뭔가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인데.”
“설마. 그럴 리가.”
클클 웃는 그 말투를 보며 나비 여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좋아요. 힘만 되찾으면 복수는 어렵지 않으니.”
나비 여제는 자신이 왜 부활했고, 자신의 힘의 근원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건 뭐죠?”
“뭐긴. 나는 네 복수를 도와줄 뿐이야. 어때 참 간단하지?”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건요?”
의심을 거두지 않은 그녀의 질문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건 개인 사…….”
서걱!!
말을 하던 중 그는 자신의 소매가 잘려나간 것을 보고 움찔했다.
“이런. 손속이 거친 아가씨로군. 내면에 잠재된 분노가 너무 짙어, 그런 주제에 끝까지 손을 쓰지 않는 안일함까지.”
“닥쳐요.”
“인간을 미워하잖아. 복수를 하고 싶으면 확실히 해야지.”
그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저 멀리서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가스폭발이었다.
검은 연기가 치솟는 걸 보며 그가 양팔을 펼쳤다.
“이렇게 말이야. 어때. 이제 나와 손을 잡겠나?”
“…….”
“자네는 아직 잘 모르는 듯한데. 몇 가지만 서비스로 알려주지. 자네와 나는 결국 같아. 그리고. 우리의 본질은 파괴에 있네.”
마치 나비 여제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듯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몸을 돌렸다.
“다음에 또 찾아오지.”
“당신도 인간을…… 파멸시킬 건가요?”
“음? 아니. 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네. 다만. 나도 나름대로 계획이 있는지라.”
껄껄 웃으며 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비 여제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이내 몸을 돌려버렸다.
이전에 그녀가 들렸던 카페가 있는 곳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하지만 그녀는 끝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인간들을 확인하기 위해 갔었던 그 괜찮은 커피를 내던 카페에서 시뻘건 화마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녀는 말없이 불타는 카페를 보다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팔찌를 부숴버렸다.
“마음에 안 드네요.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