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64화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들고 있는 에반젤린이 훌쩍거렸다.
나비 여제의 섬에서 끌려온 이후 에반젤린은 그야말로 눈물이 쏙 빠져나갈 때까지 혼이 났다.
어찌나 혼이 났는지 눈물로 인해 에반젤린의 눈이 퉁퉁 부어있을 정도였다.
물론 반항기라면 이렇게 혼이 나는 것 자체에 굉장히 반감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이 납치되었는데 고작 이런 일로 혼이나 내냐고.
하지만 현재 에반젤린은 그런 것에 반항이나 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 주된 이유는 눈앞에 놓인 체중계 때문이었다.
고작 며칠 사이에 몸무게가 눈에 띄게 늘었다. 혼나는 도중에 어디 한번 올라가 보라며 지금 꼴이 어떤지나 보라고 화를 내던 페르세르크의 말 때문이었다.
단순히 몸무게가 느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대룡의 체중에 변화가 생긴다는 건 단순한 문제를 넘어선 무언가의 위험신호였다.
그날 에반젤린은 그토록 사랑하는 엄마인 페르세르크가 그렇게 화를 내는 걸 처음 보았다.
게을러진 마음과 계속해서 뒤틀린 생활 그 모든 것이 아직 완전한 성장조차 하지 못한 그녀를 서서히 비틀어버렸다.
애초에 하루에 치킨 10마리를 먹어치워도 1그램조차 찌지 않는 것이 고대룡인데 그 불문율이 박살 나버린 것이다.
반항기고 뭐고 자신의 식습관으로 인해 살이 쪘다는 사실은 그녀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반항이고 뭐고 생각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실제로는 변화가 있었다.
그제야 에반젤린은 자신의 몸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엔 차이가 없지만, 그녀의 눈엔 뱃살이 나온듯한 착각마저 강하게 들었다.
“에반젤린.”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그녀를 부르자 에반젤린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어…… 엄마.”
그녀의 앞에 나타난 건 일리나였다.
그녀는 말없이 다가와 에반젤린의 팔을 내려주고는 그녀의 앞에 앉아 뺨을 쓸어내렸다.
“많이 힘드니?”
“…….”
“에이리아가 열심히 만들어 준건 단순히 네가 귀찮아지라고 그런 게 아니야.”
“…….”
“고대룡은 인간과 달라. 그래서 우리도 고대룡의 태생이나 그 성장 방식에 대해선 잘 몰라.”
그렇기에 데이비는 정말 많은 방면으로 연구했다. 그녀의 성장에 어떤 것이 도움이 되는지를 말이다.
“에이리아가 만든 건 그런 것들이야. 네가 성장하면서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들.”
그녀가 완전한 성년식을 치렀다면 수백 년 동안 이런 생활방식을 보인다고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는 성년식을 치르지 못했다.
“그동안 거의 운동도 하지 않았지?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야. 데이비는 데이비 방식대로 네 몸의 힘이 올바르게 순환하도록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준 거야.”
이쯤 되니 아무리 반항기라도 할말이 있을 리가 없다.
“죄송해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울먹이는 그녀를 일리나는 말없이 안아주었다.
“네 몸이 아프면 가장 슬퍼하는 건 우리라는걸 잊지 말아 주겠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일리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흐끅…… 흐윽…….”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끌어안아 주며 일리나는 말없이 다독여 줄 뿐이었다.
그동안 전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반항기가. 아주 조금 누그러들고 있었다.
일리나도 데이비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에반젤린의 정신은 조금씩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 * *
일리나와 페르세르크가 떠나고 마음을 정리한 에반젤린은 큰 결단을 내렸다.
“여러분 오늘부터 방송시간은 6시간만 할거에요.”
간단한 한마디가 가져다준 파급은 너무도 거대했다.
그동안 방송시간이 꽤 늘어 8시간이고 12시간이고 방송하던 그녀가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
[????]
[방장 갑자기 왜 이래. 우리가 뭘 잘못했어?]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알잖아요. 그동안 너무 방송만 한 거. 그래서 살이 쪘다구요.”
[????]
[입으로 주작을 발사하네?]
[대체 어디가 살이 쪘다는 거임?]
[아니 적당히 살집이 있어야 더 예뻐지는 거임.]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당연히 시청자들의 화학반응은 거세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크게 불을 지펴야 할 에반젤린 방송의 악질 회장님 둘은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였다.
띠링!
[사자자리 님께서 5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그 인간이 지금까지 참은 것도 용하다. 고대룡은 인간과 다름.
짧은 한마디.
골수 악질 회장인 그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에반젤린이 그동안 얼마나 방송에만 매달리면서 자신을 등한시했는지 알법했다.
“자. 회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이상 말은 안 할게요. 오늘은 간단하게 그림 좀 그릴 거에요. 배고프긴 한데 참아야 하니까.”
그때였다.
덜컹!
갑작스레 방문이 열리며 익숙하면서도 이곳에 왜 있는지 모를 인물 두 명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미식연구회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륀느와 유리아였다.
“유리아 언니. 륀느. 여긴 무슨 일이에요?”
“에린. 같이 먹을 것을 륀느가 권고해.”
순식간에 방안에 가득 차는 치킨의 고소한 향이 그녀를 자극한다.
유리아가 손에 든 것은 치킨 박스였다.
그새 이 사고뭉치 두 사람이 하인스 영지의 게이트를 타고 이곳으로 넘어와 버린 것이었다.
“으윽…….”
[???떴닼ㅋㅋㅋ]
[저 두 사람 또 나타남ㅋㅋㅋㅋ]
[살아있었네.]
[그때 그 난리를 치더니 또ㅋㅋㅋㅋ]
“으으…… 안 돼요! 오늘부터 치킨은 금지에요!”
에반젤린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소리쳤다.
이에 유리아와 륀느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전에 서로 배신하며 싸웠던 둘이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스스럼없는 모습이었다.
“흐음……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우리끼리 먹는 수밖에요.”
무려 반반 치킨이다!
에반젤린은 그새 고이는 침을 애써 닦았다.
성년을 치르고 나면 치킨을 얼마나 먹건 그게 무슨 상관일까.
튼튼한 몸이라 지금도 한두 마리 가지곤 티도 나지 않을 테지만 몸무게를 보고 경악한 지금은 자중할 필요가 있었다.
“와…… 정말 이 맛은 입안에서 살살 녹네요. 이렇게 된 이상 미식연구회의 특수한 조미료들을 뿌려서 먹어도 괜찮을 거 같군요.”
유리아가 치킨을 뜯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자 에반젤린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아득…… 빠득.
[ㅋㅋㅋ 방장 이가는 거 보소 ㅋㅋㅋ]
[와 저 악질들 ㅋㅋㅋ 다이어트 선언했는데 눈앞에서 치킨 뜯는 거 보소 ㅋㅋㅋ저건 백 퍼 고의다 ㅋㅋㅋㅋ]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반젤린이 짜증스레 밖으로 나갔다가 특수한 채소로 만들어진 달달한 샐러드가 닫긴 접시를 가져오자 륀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에반젤린. 매우 미식 데이터가 낮다고 평가해.”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더니 고소한 간장 치킨을 한 손에 쥐고 마치 비행기 놀이를 하듯 이리저리 흔들며 다가왔다.
“오…… 오지 말아요!”
“한 입만 먹으면 풍부한 미각 데이터를 확보 가능. 아…… 아아 치킨이 증발 중. 륀느의 입속으로 증발 중!”
“아 쫌!!”
격분한 그녀가 씩씩거리며 샐러드를 입에 넣자 륀느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는 에반젤린의 앞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며 치킨을 뼈 채로 우물우물 씹어먹어 버렸다.
“…….”
에반젤린의 분노가 일정 수치까지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아…… 아쉽네요. 그래요. 듣자 하니 그동안 너무 몸 관리를 안 해서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했죠? 그래서 당분간 식단관리도 해야 하고. 쿡쿡 이런 안타까워서 어떻게 해요.”
아드득…… 빠드득.
“그럼 이것도 못 먹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다른 봉지에서 포장마차용 떡볶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콜라를 그녀에게 들이민다.
“어유 채소만 먹으면 기별이나 가겠어요? 여기 콜라 한잔 쭉 들이…….”
“저리 가라구요!”
군침을 자극하는 떡볶이를 보며 에반젤린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당연히 채팅창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엘프는 채식주의자 아니었냐곸ㅋㅋㅋㅋㅋ]
[세상에 진짜 저 또라이 ㅋㅋㅋ 다이어트하는 사람 앞에섴ㅋㅋ]
“어머나. 저는 가리지 않는데요?”
놀리듯 유리아가 떡볶이를 쏙 입안에 밀어 넣으며 야시시하게 혀로 입술을 훑었다.
배가 고파진다.
당장 먹고 싶다!
[와씨 눈갱.]
[아니 먹방 타임도 아닌데 여기서 먹방을 시전하네?]
[아니 근데 진짜 개 잘 놀린다 ㅋㅋㅋ]
눈앞에서 맛있는 걸 너만 못 먹는구나 라는 표정을 짓는 둘을 보며 에반젤린은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이 둘. 자신을 놀리러 온 게 분명하구나 하고 말이다.
결국, 분노가 임계점을 돌파해버린 그녀가 으득으득 이를 갈다가 눈을 번뜩였다.
순식간에 자색으로 변하며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에 흉흉한 피어가 감돌기 시작했고 이내 그녀의 작은 입에 오색의 구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어?!”
그것을 본 유리아가 당황한 듯 벌떡 일어나기가 무섭게 지이잉!!! 콰아앙!!
에반젤린의 입에서 소형 브레스가 구체처럼 날아가 둘을 날려버렸다.
보통 방송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지만 애초에 인간이 아닌 고대룡인 에반젤린에게 이런 해프닝은 새로울 것도 없었다.
“후우…… 방해꾼은 치웠으니 다시 방송할게요.”
아드득 빠드득 -
이를 갈며 에반젤린이 흉포하게 중얼거렸다.
“당분간 방송에서 먹는 이야기 금지에요.”
전투적으로 샐러드를 씹으며 에반젤린이 으르렁거렸다.
그때였다.
[방장. 근데 방장 언니들 일하는 카페에 테러 벌어진 건 알고 있음? 왜 이렇게 느긋함? 두 사람 다친 건 아니지?]
의외의 도네이션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뭔 소리에요. 언니들은 조금 전에 퇴근했는데?”
레이나와 초단이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비록 지금은 잠시 데이비를 따라 티오니스로 간다고 했지만, 딱히 두 사람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던 그녀였다.
[???? 이걸 몰라? 지금 뉴스에 카페 테러 사건만 처도 바로 나오는데.]
그 말에 에반젤린이 눈을 부릅뜨며 인터넷 창을 켰고 빠르게 카페 테러사건을 검색했다.
그러자 관련 뉴스가 주르르 뜨기 시작했다.
위치는 놀라울 정도로 이곳과 가까웠다.
아마 초단이가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분명 이곳에 갔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가게가 박살 난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분명 초단이 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는데.”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에반젤린이 중얼거렸다.
[범인이 누군지는 안 밝혀졌는데. 목격자 말로는 카페 안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더니 폭발했다고 함. 그 방장 언니 중에 레이나? 하여튼 그 사람이 장막으로 인명은 보호했다고 하는 데 가게는 싹 다 불탔다고 함.]
그 말에 몇몇 시청자들이 불안함을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방장, 아니지?]
[안 그럴 거지? 우리는 방장을 믿어 제발…….]
하지만 기대는 철저히 배신을 당한다.
“잘 들어요. 여러분, 기대를 하니까 배신을 당하는 거예요.”
[안돼!!]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무친련! 무친련!]
[이렇게 방종 각을 본다고?]
[아니 이 인간들아 분위기 좀 타라. 지금이 방송할 때냐?]
그렇게 말하며 대뜸 방송을 꺼버린 에반젤린의 눈이 세로로 찢어진 채 더욱 짙은 피어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녀는 방을 나서지 못했다.
방문 앞을 지키고 있는 유리아와 륀느 때문이었다.
“비켜요. 언니.”
“안 돼요.”
“에반젤린이 혹여라도 사건을 듣고 탈주하지 못하게 륀느가 경비.”
과거 암흑신관 때엔 그녀의 힘이 폭주하는 걸 막기 위해 그냥 두었지만, 그 외의 문제에서 에반젤린이 위험에 처하는 걸 데이비가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치킨을 오물거리며 그녀가 말한다.
나비가 폭발했다.
에반젤린은 본능적으로 이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인간을 증오하는 걸 숨기지 않고 드러냈던 그 여자.
나비 여제.
말과 행동이 조금 다른 그녀였다.
물론 에반젤린은 아직 몰랐다.
“읍!! 으으으읍!!”
전신을 포박당한 채 의자에 묶여 발버둥 치는 나비 여제. 찬드라와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데이비를 말이다.
모든 일에는 변수가 존재한다.
그런 만큼 데이비라는 존재는 이미 현시점에선 최고의 변수나 다름없었다.
“니들이 무슨 계획을 짜건 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그건 내 알바가 아니야. 사연 없는 무덤 없다고 악인들도 까놓고 파헤쳐보면 참 안타까운 놈들도 많거든.”
담담하게 말하는 데이비의 손이 움직였다.
스르릉…….
동시에 나비 여제 찬드라의 목에 붉은 검이 겨누어졌다.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마냥 성격대로 하자니 영 느낌이 좋지 않단 말이야.”
그녀의 저력이 어떠하건 그건 데이비에게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