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68화
밤하늘, 달밤이 비치는 어두운 바다 위는 어두컴컴하기 그지없다.
유일하게 비치는 빛이라곤 찬드라의 날개와 그녀가 주변에 흩뿌린 빛의 가루들. 그리고 아틀라스 함대가 비추고 있는 빛과 폭발하면서 생긴 화재의 빛이 전부였다.
싸늘하게 요동치는 파도 속에서 두 마리의 환수왕과 추가로 참전한 사신수의 힘에 의해 찬드라의 소환체들은 힘을 채 쓰지도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나비 여제 찬드라는 마치 허상 같은 것을 현실처럼 만들어내 공격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비현실을 현실로 적용시키는 베르단데와 매우 흡사한 힘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 탓일까.
폭주한 그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엔 사실상 베르단데의 힘만큼 제격인 게 없다는 소리였다.
무형의 에너지들이 서로 형태를 갖추고 충돌한다.
비명을 내지르며 필사적으로 싸우는 찬드라와 다르게 베르단데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이 이상 폭주하면 구할 것도 못 구하겠구나.”
촤르르르륵!!!
한숨을 내쉰 베르단데가 결정을 내린 듯 가죽표지의 책을 허공에 띄웠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 유영하며 스스로 펼쳐진 책은 마치 스스로 어떤 페이지를 찾아가듯 빠르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어딘가에서 책장이 멈췄을 때.
그녀는 나머지 손을 이용해 마치 책에서 무언가를 뽑아내듯 끌어내 허공에 흩뿌렸다.
[잠들어라.]
콰창!!!
그녀의 한마디와 함께 현실이 비현실로 끌려들어 간다.
극대규모의 환각에 노출된 찬드라는 격하게 저항하려 했지만 오래가지 않아 끝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후 추욱 늘어진 그녀에게 다가간 베르단데는 조용히 그녀의 몸에 자신의 힘을 밀어 넣었고, 그녀를 허공에 띄운 채로 천천히 내게 내려왔다.
그리고는 미묘하게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찬드라를 내게 던졌다.
“폭주는 잠재웠어. 특수한 계약을 통해서 그녀의 심층의식에 깊게 깔린 게 있는 모양이야.”
“심층의식?”
“그게 뭔지는 계약을 나눈 본인들만 알겠지만. 어쨌든, 당분간은 폭주하지 않게 묶어놨으니 알아서 처리해.”
그녀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말에 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된다고?”
“세계의 규율 자체라도 건드리지 않는 이상 나는 불가능하다는 게 입장이야.”
그녀가 가죽표지의 책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힘은 나에 비하면 약하기 그지없지만, 그건 온전한 힘이 아니기 때문이야. 아마 모종의 이유로 힘을 거의 다 잃었겠지.”
“온전한 경우에는?”
“글쎄.”
베르단데는 비록 태생부터 심연의 공주는 아니라지만 엄연히 심연의 힘을 얻은 상위 심연의 공주였다.
그런 그녀가 저리 말할 정도라는 것에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후우웅!! 쿠우웅!!
말없이 서 있자 저 멀리서 주작 불닭이가 주둥이에 기절한 해병 명명을 물고 빠르게 착지했다.
“흐업!”
뒤이어 베헤모스의 촉수가 물속에 빠진 이들을 거칠게 항모의 활주로 위에 올려놓는 모습을 보며 함장 비스타가 앓는 소리를 냈다.
“심적으로 굉장히 지치는 밤이로군…… 아군인 걸 알면서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오.”
환수왕은 생김새부터가 무시무시하게 생긴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아무리 아군이라 한들 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섬은 원래 약속대로 편한 대로 챙기세요. 그전에, 부하 중에 세뇌된 자들이 있는 거 같습니다.”
“끄응…… 증거가 있소?”
“찬드라가 공격했을 때. 제가 다 쳐냈는데도 불구하고 폭발이 일어났어요.”
언뜻 보면 내가 다 막지 못해서 찬드라의 공격이 호위함에 내리꽂힌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공격을 완전히 차단했고, 폭발은 엄연히 호위함 내부에서 일어났다.
“그렇군. 어쩐지 교전 초기에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었소.”
실제로 교전을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위함 측에서 발포를 한 사실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내부에서 큰 사고가 벌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겁니다. 아마 이상한 점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듣던 중 다행이구려.”
나는 기절한 찬드라를 귀찮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베르단데.”
“왜 불러?”
“나랑 작업 하나만 하자.”
* * *
마치 심연 속으로 끌려들어 간 것처럼 깊은 잠에 빠져있던 나비 여제 찬드라가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반긴 것은 아이들이 쓰는 모빌이 눈앞에 알짱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시야 바로 위에 매달린 채 잔잔한 노래를 틀고 있는 모빌에는 코끼리 사자, 등등 여러 동물이 앙증맞게 매달려있었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머리를 일으킨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꼴이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대신 그녀의 심기를 상당히 거스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두 쌍의 눈동자.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보듯 바라보고 있는 두 존재를 보며 찬드라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깨어나셨네요.”
환하게 웃는 이는 엘프였다.
그녀의 고향에서도 정말 보기 힘든 종족. 숲의 종족이며, 그녀가 잃었던 이들 중에서도 엘프가 다수 존재했었다.
“엘프?”
“네~ 무려 하이 엘프이지요.”
장난스런 말투는 전혀 닮지 않았다.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본 찬드라는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시선에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생김새는 어린 인간이다.
길게 두 갈래로 늘어뜨린 로우테일 형태의 머리 스타일을 한 소녀는 아무리 봐도 인간처럼 생겼지만, 인간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녀는 자신의 팔을 마치 기계 장치처럼 열어젖히고는 무언가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과 흡사하지만, 인간이 아니다.
정확히 찬드라의 시선에 비친 무표정의 소녀는 그녀가 아는 인간들의 욕심의 끝인 호문쿨루스나 골렘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저런 말도 안 되는 기술력이 집약된 듯 보이는 골렘은 그녀의 생에서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하긴…… 이 세상은 쇳덩이가 홀로 굴러다녔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엘프가 그녀에게 작은 찻잔을 내밀었다.
“한잔 쭉 들이키시겠어요? 몸에 좋은 차랍니다. 맛도 보장할게요.”
전혀 악의 없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권하는 그 모습에 찬드라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입에 한 모금 머금었다.
“세상에…….”
한입 머금기가 무섭게 눈을 크게 뜬 그녀는 누가 훔쳐갈세라 차를 후루룩 들이켰고 눈앞의 엘프를 바라보았다.
“더 줄까요?”
“……부탁…… 할게요. 그런데 여긴 어디죠? 이 기괴한 방은 뭐고…….”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이 어린아이들이 쓰는 모빌이라는 게 참 미묘하기 그지없었다.
찬드라의 그런 질문에 엘프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은공의 별장이에요. 걱정 마세요. 여긴 당신을 해칠 이가 아무도 없으니.”
“…….”
은공이 누굴 말하는 건지.
분명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온 것까지만 기억이 나던 그녀였기에 상황이 정리되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나비 여제 찬드라. 극도의 폭주상태에 진입. 큰 피해를 일으켰다고 명시.”
그때 무표정하게 있던 작은 골렘 소녀가 입을 열었고 찬드라가 눈꼬리를 꿈틀거렸다.
“내가…… 폭주했다는 건가요?”
“데이비 님이 제압. 하지만 확실하지 않기에 보호 및 감시가 필요하다 분석.”
데이비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찬드라는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렸다.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의식을 잃은 이후 그가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모양이었다.
“뭐. 너무 딱딱하게 말하진 말아요. 말이 감시이지 사실 저희가 자원한 거니까요.”
“미식 연구회의 회원 가능성을 높게 평가.”
륀느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분명 무표정인데. 이상하게 즐거워 보였다.
“날…… 왜 살려둔 거죠?”
“그거야 저희도 모르죠. 참 통성명이라도 해야겠네요. 반가워요. 유리아 헬리샤나라고 해요. 부족하지만 미식연구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륀느. 생체 골렘. 세피로스. 미식연구회의 부회장이라 보고.”
엘프와 골렘이라는 이 기이한 조합에 이 정체불명의 방을 보며 그녀는 머리가 아파짐을 느꼈다.
“머리가 아프신가요? 이상하다.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모빌까지 사서 설치했는데…….”
“모빌로 효과를 보는 건 뮤우뿐이라고 해석. 륀느가 유리아의 멍청함을 낮게 평가.”
륀느의 말에 유리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팔을 개방하여 내부의 부품을 손질하고 있는 륀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으며 손에 든 차를 륀느의 팔에 부어버렸다.
“으가가가가가!”
하필 무방비 상태에 있던 륀느는 평온한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반드시 복수할 것을 륀느가 경고해.”
감전이 된 것처럼 부들부들 떨며 쓰러지는 륀느를 뒤로한 채 유리아가 손뼉을 쳤다.
“자. 그럼 방해꾼은 처리했으니 우리 심도 있는 면접을 좀 볼까요?”
“며…… 면접이요?”
“응? 아니었나요? 미식연구회에 들어오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는데?”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멍하니 유리아를 보던 찬드라는 유리아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자 얼떨결에 끌려나갔다.
그리고는 뭐라 항변할 새도 없이 미리 준비된 식탁에 앉았다.
“자 우선 이것들 좀 먹어봐요.”
멍하니 식탁에 앉은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요하고 아늑한 집이었다.
대체 이곳은 뭐 하는 곳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수많은 음식들이 놓였다.
“우리 미식연구회에서 지구의 식재료를 연구해서 만든 신작들이에요. 한번 들어봐요.”
맞은편에 앉아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멍하니 있던 찬드라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가장 가까이서 고소한 향을 풍기는 도넛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한입 베어 문 뒤 눈을 크게 떴다.
“어떤가요?”
“마…… 맛있네요!”
놀란 그녀의 외침에 유리아는 매우 만족한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역시 맛잘알이시네요.”
“맛…… 잘알? 그게 뭐죠?”
“맛을 잘 안다고요. 어때요. 우리 미식연구회에 들어오지 않을래요? 지금은 비록 멤버가 넷뿐이지만 당신만 들어오면 다섯이 되는 거예요.”
갑작스런 제의에 그녀는 도넛을 우물거렸다.
그러니까 저 미식연구회에 들어가면 이렇게 맛있는 걸 연구하고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그녀가 흠칫 놀라며 도넛을 내려놓았다.
“미안하지만 거절하겠어요. 나는 인간과 공존할 수 없어요. 그들을 멸할 수 없다면 내가 죽는 것 이외엔.”
“흐음…… 어차피 은공이 아니면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있나요?”
“…….”
그녀는 스스로 죽지 못하며 스스로 죽음을 유도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녀를 죽일 수 있는 강자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인간에 대한 복수심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던 그녀에게 데이비는 그녀를 죽여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 사실을 자세하게 알리진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은공은 당신을 통해서 그 까마귀 가면인지 뭔지를 잡을 때까지 당신을 해방시켜 줄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빌어먹을 까마귀 가면!
왜 괜히 나타나서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일까.
어차피 당장 죽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녀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만 견딘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자 그녀는 자신이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섬뜩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유리아가 작은 상자에서 고이 포장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갈색을 띠고 있는 떡 같은 그것은 찬드라의 후각에 매우 익숙한 향을 풍겼다.
이윽고 유리아가 그것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자 찬드라는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유리아의 손끝을 따랐다.
마치 개박하에 환장해 정신을 못 차리고 고개를 돌려대는 페르세르크의 애완묘 참다랑어 녀석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이건 지구에서 구한 꿀에 특수한 소재를 섞어서 만든 거예요. 나비의 날개를 지니고 계시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 꿀을 좋아하시는군요?”
유리아의 예민한 귀에 찬드라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때요? 사인만 하면 이걸 줄 텐데.”
“그…… 그…….”
“어머, 싫다면 어쩔 수 없고요. 제법 마음이 잘 맞을 것 같아서 당분간만 미식연구회 회원으로서 당신에게 맛난 것들을 권하고 싶었을 뿐이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유리아가 쓰러진 륀느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찬드라가 벌떡 일어나 그녀의 옷깃을 잡았다.
“자…… 잠깐만요.”
그녀는 나비 여제라 불리는 존재였다.
그녀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꿀은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 자, 잠깐이라면.”
“어머 환영해요.”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는 유리아를 보며 찬드라는 극심한 자괴감에 휩싸였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싶은 마음에 씁쓸한 마음만 앞섰다.
“자. 선물이에요. 당신을 위해 회장인 제가 만든 거랍니다. 자 그럼 여기 가입 계약서에 이름 쓰시고.”
그녀가 내민 종이 서류를 보며 찬드라는 멍하니 자신의 이름을 서류에 썼다.
가입신청서라 쓰인 종이를 바라보던 찰나 유리아가 빙그레 웃는 걸 보았다.
“후훗. 정말 쉽네요.”
키득거리며 그녀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팔랑 소리가 나며 아래쪽에 겹쳐진 또 다른 한 장의 종이가 흘러내렸다.
“이…… 이건?!”
“지구에 이런 말이 있어요. 찬드라 양. 낙장불입이라고.”
“데이비 님이 늘 하던 말이 있다고 보고해. 이름 함부로 쓰면 안된다는 거 안 배웠냐.”
쓰러져있었다는 게 거짓말이라는 듯 륀느가 너무도 멀쩡하게 걸어 나오며 말을 걸어오자 찬드라의 표정이 구겨졌다.
“은공도 참 이런 쉬운 걸 못해서 고민하시네요.”
유리아가 숨긴 이중서류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막대한 흑마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마나 계약서였다.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사인해버린 것이었다.
그 종이의 내용은 참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이…… 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