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70화
신의 영역.
나는 말 없이 창을 휘두르고 있는 장신의 사내에게 다가가 호리병을 내밀었다.
“오…… 좋군, 좋아.”
땀을 뻘뻘 흘리던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가 건넨 호리병을 받았다.
“그래. 오랜만에 나를 찾아온 이유는 있겠지?”
“예. 뭐, 그냥 궁금해서요.”
잔을 꺼내 내밀자 그가 잔에 술을 담아 주었다.
“그래. 뭐가 궁금한데.”
“당신이 죽인 나비 여제 찬드라.”
그 말에 그가 잠시 멈칫했다.
“망할.”
그리고는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데이비. 보통은 그런 걸 두고 오지랖이라고 한다. 그녀를 죽여. 그리고, 그 까마귀 가면인지 뭔지도.”
“사실 그게 제일 편하긴 하죠. 그런데 나는 똑같이 뒷맛이 찜찜하긴 싫어서요.”
내 물음에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데이비. 지도자는 평생에 걸쳐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후회를 남기면 안 된다. 머리가 흔들리는 순간 백성들이 흔들리게 되는 법이니까.”
“그런데 정작 아재는 굉장히 후회하시는 거 같던데.”
“맞다.”
그는 애써 숨기지 않았다.
“내 평생에 그녀에 대한 일은 영원히 남아서 씁쓸한 일로 남지.”
“왜요?”
원초적인 질문이었다. 단순히 아스트레아가 동정심 때문에 그녀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한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그들의 도움을 무시했거든. 현실적으론 그게 맞았지만. 그녀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는 만큼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가 열반주를 호리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우리 옛날이야기나 합시다. 솔직히 해준 적 없잖아요. 이번 이야기.”
“그렇지. 꺼내고 싶진 않았으니.”
그가 쓰게 웃었다.
“기대는 하지 마라. 나는 그 당시에 있었던 상황을 잘 모르니까. 다만, 그녀가 멸망시킨 왕국과 그녀에 대해선 조금 알고 있다.”
“그런데 후회를 합니까? 애초에 아재하고 크게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때로는 초면 사이에서도 평생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다. 그녀가 죽어가면서 보인 눈은 내겐 그런 것이었다.”
그가 쓰게 웃었다.
그리고, 이어서 해주는 그의 이야기는 생각 이상으로 안타까웠다.
* * *
눈빛이 검게 흐려진 찬드라가 멍하니 있자 까마귀 가면의 노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다시 찾아오지.”
“기다려요.”
그를 붙잡은 건 찬드라였다.
“당신.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죠?”
“때가 되면 알게 될걸세.”
“그건 대답이 되지 않아요.”
지이이잉…….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인의 까마귀 가면의 주변에 광입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움직이면 쏘겠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당장 말해요. 내가 모르는 게 뭔지.”
협박을 하듯 그녀가 압박을 가하자 그는 말없이 가면 너머로 그녀를 응시했다.
“듣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있나?”
“그건 내가 판단해요.”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까마귀 가면은 한숨을 내쉬며 가면에 손을 뻗었다.
“하면, 당신께 지금 일어나는 일의 진실을 알려드리지요.”
갑작스레 변해버린 존대에 찬드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까마귀 가면이 가면을 벗자 눈을 부릅 뜰 수밖에 없었다.
검은 후드와 가면을 천천히 벗어 내린 그의 얼굴을 본 찬드라의 얼굴에는 혼란과 경악만이 가득 찼다.
-여제님!! 오늘은 과일이 창 싱싱합니다!
세계수의 묘목을 지키는 그녀에게 찾아와 과일 한 바구니를 건네주던 작은 엘프 소년.
그 소년의 환한 미소를 왜 잊고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핀, 핀이니? 너, 정말 핀이었던 거니?”
지옥 같은 재앙이 찾아오기 전 그녀는 과거 팔라디아에서 거대한 숲을 지키는 수호자였다.
수많은 생명체를 사랑했고, 많은 권속들을 거둬들여 그곳에서 살게 해준 존재이기도 했다.
당연 숲을 좋아하는 엘프가 그녀를 가장 많이 따랐고.
얼굴이 많이 변했다고 해도 그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역시. 얼굴을 보면 기억하시는군요.”
종족 태생 상 거의 늙지 않음에도 초로하게 늙어버린 엘프.
새하얀 귀를 뾰족하게 늘어뜨린 사내는 찬드라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노인의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날. 배신자 인간 레온을 포함하여. 수많은 인간들이 저희 숲을 유린했을 때. 당신의 곁에서 죽어간 핀입니다. 그 당시엔 젊은 엘프였지만. 저는 당신처럼 온전하게 부활하지 못했기에 이렇게 모습이 변해버렸습니다.”
그 한마디에 찬드라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아…… 아아아…….”
그녀에게 죽은 권속들은 죄책감의 덩어리였다.
그녀가 레온이라는 인간을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그 재앙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핀…… 핀!!”
찬드라는 결국 눈물을 흩뿌리며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끌어안았다.
좀 전까지 보이던 경계심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후였다.
“후우…… 여제님.”
“핀…… 미안해. 내가 인간을 믿어서…… 믿는 바람에 너희들을…….”
“죄송합니다. 여제님. 제 모습을 보면 죄책감을 느끼실까 일부러 다른 이의 연기를 했습니다. 한데 왜 또 인간을 믿으시는 겁니까.”
그 질문에 찬드라가 흠칫 놀랐다.
“왜 원수가 이 세상에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당신은 인간에게 여지를 주는 겁니까.”
그의 싸늘한 타박에 찬드라는 대못이 가슴에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끝까지 그녀를 지키려다 죽어간 이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아직도 그녀의 귀에 생생했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기억 일부가 떠오르며 그녀는 괴로움에 몸서리를 쳤다.
그들은 죽어서도 성불하지 못하고 혼이 되어 그녀의 곁을 지키려다 바스러져 갔다.
“많은 권속들이 당신의 곁에서 죽어갔습니다. 혼이 되어서도 마모되어 부서져 내렸지요. 저 또한 그렇습니다. 갈 곳을 잃은 영혼이 된 당신을 지키려고요.”
“…….”
“그런데 왜 우리를 또 배신하는 겁니까. 여제님. 우리보다 인간이 더 좋으셨습니까?”
그 질문에 찬드라는 엉엉 울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정말…….”
“여제님. 너무 원통합니다. 인간이 미워죽을 거 같습니다.”
그가 찬드라를 끌어안은 채 말했다.
“그렇기에 저는 꼭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제 욕심을 용서해주세요.”
그가 눈물기 서린 얼굴로 말했다.
“모든 일의 원흉, 레온 발 알시드. 이 세상에 레온의 혼을 지닌 인간이 있습니다. 또 그때 숲을 찢어발긴 그 빌어먹을 인간 병사들의 혼도 다수 환생해 있습니다.”
그 말에 찬드라가 딱딱하게 굳었다.
“관계없는 인간들을 죽이라 말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숲을 그 꼴로 만들고 우리 모두를 죽인 그놈들의 환생만큼이라도. 제발.”
애원하는 까마귀 가면의 노인, 핀의 절규에 찬드라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얼마든지 그래 줄게! 그러니까…….”
“잠을 자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도 저는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도 죽어간 이들의 비명이 귓가에 울려 퍼집니다.”
그의 말에 찬드라의 얼굴에 독기가 서렸다. 그때 당시 가장 분노했던 건 다름 아닌 그녀였으니 말이다.
이전엔 죽음을 바랐고, 그저 인간이 밉고 멸망시켜야 할 존재라고 말하던 때와 달랐다.
주는 죽음이었고 객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증오 미움이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바뀌었다.
주가 복수가 되었고, 객이 죽음이 된 것이다.
“여제님. 저희가 이 세상에서 다시 눈을 뜬 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이 환생한 건 언제지?”
“제가 발견한 레온의 혼을 가진 인간은 못 해도 30년은 이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본 그는 여전히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을 먹으며 호의호식하고 있더군요.”
“…….”
그녀의 손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자신들을 그렇게 지옥의 구덩이에 몰아넣고.
죽어도 죽지 못한 존재로 만든 주제에. 본인들은 잘 먹고 환생해서 멀쩡히 살고 있다고?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검은 기류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빛의 수호자였던 그녀가 검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네가 그 카페라는 곳에 폭발을 일으킨 그것도…….”
“본래는 여제님이 인간을 경계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인간 중 하나가 저희가 찾던 빌어먹을 환생체더군요.”
핀의 대답에 찬드라는 섬뜩함을 느꼈다.
엘프 소년 핀은 특수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와 비슷한 특질능력자로 인간의 혼의 본연의 색을 구분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틀림없으리라.
그 어떤 세상에서도 완전히 동일한 본인이 아니고선 색이 모두 다르니까.
“그는 죽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복수보다 여제님께서 인간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누그러뜨리는 걸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폭주시켰습니다.”
자신은 그녀의 수호령. 그러니 불완전한 그녀의 의지를 자극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는 듯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선택이었습니다. 제발. 제게 또다시 여제님을 폭주시키게 두지 말아 주십시오.”
“미안해…… 미안해 핀.”
그녀의 얼굴에 독기가 서렸다.
독특한 인간과 계약을 했지만 그걸 떠나 다시 고개를 든 복수심은 그녀를 빠르게 잠식했다.
“여제님. 나는 당신의 편입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희의 원통함을 끊어주십시오.
모든 비극의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숲에 밀려 들어와 죽어가던 인간, 레온 발 알시드라는 한 인간을 구하고, 그와 친해지고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진 사태.
그를 사랑했기에 모든 것을 내어주고 영혼의 계약까지 맺었건만, 최후에 최후. 레온 발 알시드는 자신의 왕국에서 자신의 입지를 늘리기 위해 숲을 공격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찾아와 계약을 이용해 그녀를 무력화시켰고, 그녀를 지키려던 수많은 권속들을 병사와 기사를 이용해 베어버렸다.
이후 미쳐버린 그녀는 끝내 레온을 죽였고, 그가 있던 왕국을 한차례 멸망시켜버렸다.
정작 숲의 권속들은 죽어서도 혼이 되어 제대로 환생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고통받고 무너져 내렸는데.
정작 그런 일을 저지른 인간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라니.
분노로 인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윽고 그녀가 섬뜩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구야.”
그녀가 말했다.
“레온의 환생. 그게 누구냐고.”
그 질문에 핀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나라의 통치권자라고 하더군요. 왕족이었던 레온이 또다시 왕과 같은 권위를 지니다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비틀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인간을 모두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용서해선 안 됩니다.”
“핀. 나는 널 믿어. 네가 거짓말을 하진 않은 거겠지.”
“죄송합니다. 여제님.”
“이틀은 내가 끝맺을게. 데이비라는 그 인간이 널 찾고 있어.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였다지만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가 손을 파르르 떨기 시작하더니 황급히 까마귀 가면을 다시 썼다.
“그러니까 이 일은 내가 마무리 지을 테니 너는 이곳을 벗어나. 이번엔 그의 영혼을 영원히 환상에 처박아버릴 테니까.”
“여제님.”
“다 끝나면 우리도 대가를 치르자. 그리고 편히 쉬는 거야.”
“여제님의 뜻대로.”
* * *
-다 끝나면 우리도 대가를 치르자. 그리고 편히 쉬는 거야.
-여제님의 뜻대로.
신력으로 감싸 위장한 도청장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레이나가 창을 빼 들었고 륀느가 가드를 올린 채 허공에 쉭! 쉬쉭! 하며 섀도복싱을 하기 시작했다.
웃긴 일이었다.
“이놈 이거, 주둥아리가 아주 예술이네.”
도청장치를 들으면서 나는 피식 웃음을 던졌다.
“정말로…… 한국의 대통령이 그 레온인지 뭔지 하는 인간의 환생이야?”
애초에 그렇게 물어본들 대답이 들려올 리 없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물었다.
절절할 정도로 감정이 묻어나는 슬픔 과거. 그리고 그 복수를 이루지 못해 죽어서도 환생하지 못하고 떠도는 그 모습은 정말 안타까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전생일 뿐이야. 기억 못 하는 다른 사람이라고, 그런데 이제와서 그녀의 타깃이 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레온이 개자식 같아?”
“그럼 아니야? 사랑한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갔잖아. 내가 나서서 복수한다는 건 오지랖에 가깝지만 절대 좋은 소리는 안 나와.”
그녀의 말대로 레온 발 알시드라는 놈은 중증 미친놈이 맞았다.
“좋아. 그럼 우리도 레온 발 알시드를 잡으러 가보자.”
“뭐? 대통령을 암살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놀란 일리나의 외침에 나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제의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은 깡그리 무시한 채.
“따라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