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73화
영혼의 강은 혼이 모여드는 곳이며 윤회를 위해 이동하고 회복하는 곳이기도 하다.
찬드라의 혼은 자아를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다.
본래라면 그 색조차 검게 탁해졌어야 정상일 정도로 그녀는 무너져 있었다.
그렇게 무너져서 수천 년을 존재해 온 것이다.
윤회도 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그녀가 원혼조차 되지 않고 이렇게 있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선 사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이는 젊은 엘프 소년이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수천 년 동안 저희가 희생해 가며 지킨 것이 드디어 빛을 보았군요.
“미친놈. 살면서 많은 영혼을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요.”
검은 정장을 입은 저승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찬드라의 권속들은 미친놈들이었다.
찬드라는 레온에 의해 영혼의 계약으로 묶여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가 환생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레온의 혼도 그녀를 따라 환생하고, 또다시 악연이 지속되는 것이다.
윤회의 시스템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권속들은 적어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끔 필사적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버텨 왔다.
오랜시간 혼이 부유하면서 생기는 풍화와 마모는 그들이 대신 짊어짐으로써.
400명이 넘던 권속의 혼 중에 남은 것은 고작 1~200여 명.
그들의 상태도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이제 여제님은…….”
“됐고. 얼른 들어가기나 하세요. 나 바쁜 거 안 보입니까?”
귀찮은 신파극도 한두 번이지 지금은 관심 없습니다.
퀭해진 얼굴로 저승이가 손사래를 치자 엘프 소년 핀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그렇죠! 빌어먹을 일거리가 멈추질 않습니다! 망할!”
격노하는 저승이를 보며 엘프 소년 핀은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향후 여제님의 혼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여운 분이십니다.
“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합니다. 망할 데이비 그 인간이 말해 놨으니 어련히 믿고 가세요, 좀.”
한숨을 내쉰 저승이가 그들의 영혼을 강에 담가 버렸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아…… 이게 아니지.”
중요한 건 이 빌어먹을 일은 그가 아닌 우치가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망할 도사 우치는 구미호 비연에게 잡혀버렸고, 당분간 제대로 일을 하기 힘든 상황이니 별수가 없었다.
“사표 써야 하나…….”
물론, 사표를 수리해 줄지는 의문이지만.
* * *
악몽이 몽환세계로 빚어낸 찰흙에서 찬드라의 영혼과 융합되어 만들어진 이름이 사라진 그녀는 찬드라의 혼이 빠져나가며 완전히 독립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 찬드라의 혼과 융합되었을 때 얻은 자아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인간이 미운데. 그녀는 인간을 미워할 건덕지가 없다.
현재 그녀는 참 마음이 싱숭생숭할 수밖에 없었다.
“하…….”
자신이 찬드라라고 하기엔 뭔가 아닌 거 같고, 맞다고 하기엔 또 애매한 이 오묘한 감각은 그녀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지금껏 인간을 미워했는데 ‘짜잔~ 사실은 그게 다 거짓이었습니다!’라고 한다면 누가 혼란스럽지 않을까.
이제 와서 자신이 인간이 밉냐고 누군가가 물어온다면 이렇게 대답할 순 있었다.
닥치라고.
“점순. 계속되는 고민은 의미없다고 륀느가 냉정하게 평가.”
“닥쳐요, 누가 점순이라는 거야!!”
격노한 그녀가 씩씩거린다.
정말 아름다운 외모에 뇌쇄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누가 그녀에게 점순이 같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지어준단 말인가.
“난 점순이가 아니니까 한 번만 더 부르면 재미없을 줄 알아요.”
“흐음…… 하지만 점순 양은 점순 양 아닌가요?”
“그런 이름 싫어요!”
점순이라니, 살다 살다 별의별 일이 다 있지만 이런 이름은 그녀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럼 원하는 이름을 말하면 되지 않을까요?”
노트에 정체 모를 수기를 남기며 유리아가 물어왔다.
그녀의 말대로 이름이야 자기가 정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자아정체성 확립도 채 되지 않은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름을 짓는 것이 절대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얼떨결에 정리된 이 상황에서 그녀는 부웅 뜬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녀는 물었다.
자신을 어쩔 생각이냐고.
그 질문에 데이비는 참 간결하게도 답해주었다.
-너 알아서 하세요. 이제 죽고 싶은 거 아니잖아.
그의 말대로 찬드라의 혼이 융합 해제 된 이후 죽고 싶다는 충동은 사실상 거의 사라졌다. 인간에 대한 분노도 ‘그땐 그랬지.’라는 느낌이 강하게 남을 뿐 강박증으로까지 남지는 않았다.
레온의 폭주 이후 그녀에 대한 기록은 세상 어디에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는 극소수였고, 그중 대부분은 거래 명목상 입을 다물었다.
괜한 혼란은 한국 측에서도 달갑지 않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물적 피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였다.
베르단데가 침식한 허수 공간에서 일어난 파괴는 모조리 가짜였으니 말이다.
그 탓에 그녀가 한순간에 청와대를 습격해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뭐하시는데요.”
머리가 알싸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명목상 그녀와 같은 연구회 인원인 륀느와 유리아를 게슴츠레 노려보았다.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해서요. 이 폭발적인 맛을 모두에게 보여줄 생각이랍니다.”
유리아는 만족스러운 듯 커다란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어디서요?”
“어디긴요. 다이어트하느라 바쁜 우리 귀여운 에린 아가씨 방송이지.”
* * *
“자, 완성!”
에반젤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의 눈앞에는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그려 놓은 예쁘장하게 생긴 캐릭터가 있었다.
“이 캐릭터는 왜 남자라고 적혀 있어요? 아무리 봐도 인체 비율상 여잔데?”
-아. 요즘 트렌드 못 따라가네.
-방장 차별 발언 논란…….
“아니. 그게 아니라……. 봐요, 여기 이렇게. 인체 비율만 보면 이건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 더 맞는 체격이라구요.”
에반젤린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격하게 항변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런 여자를 그려 놓고 남자라고 우기는 식의 캐릭터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분야였다.
다만 돈을 벌기 위해 찍어내는 가챠형 게임 캐릭터에 항변해 봐야 바뀌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구나…….”
-뭔소리임 방장.
“여러분들은 이 캐릭터보다 가슴둘레가 크잖아요. 그런데 남자네?”
-이걸 또 광역딜을 박네 ;;
-와, 우린 살쪘다 이거지.
-시청자 가슴에 대못을 아무렇지도 않게 박아버리네. 무친련 무친련.
“아…… 아니 내가 그럴 의도로 말한 게 아니고…….”
당황한 그녀가 우물쭈물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됐어요, 됐어. 여러분들하고 말하면 내가 머리가 아파.”
그녀는 정말로 두통이 온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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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 그런데 왜케 표정이 안 좋음?
에반젤린의 안색이 누가 봐도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한 시청자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말을 시작으로 다수의 외국계 시청자들도 자국어로 된 채팅을 빠르게 올리기 시작했다.
“아…… 별거 아니에요. 요즘 다이어트하느라…….”
-다이어트치고는 안색이 너무 나쁜데?
-ㅇㅇ 그러다가 몸 작살나는 거 아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조금 예민해진 거지.”
우울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겉보기엔 차이가 없지만 사실 에반젤린의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인간이 아닌 고대룡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가 예민해진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빠득…….
갑자기 에반젤린이 이를 빠득 깨물자 시청자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이 뭔가를 잘못했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안해요. 여러분. 원래 여러분들한테 이런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
띠링! 사수자리님께서 5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모든 이의 의문을 대변하듯 질문이 날아들자 에반젤린은 한숨을 내쉰 채 대답했다.
“악질이 둘 있어서요.”
악질. 그 단어에 사람들은 시청자 중에 악질 시청자가 있는가 의문을 표했지만 곧 그 범인이 누구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덜컹!
갑자기 스튜디오 문이 열리더니 시청자들에게도 익숙한 인물이 둘, 그리고 처음 보는 이가 하나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쯧…….”
에반젤린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진다.
“어머나. 방송 중이었네요. 미안해요.”
“미안하면 나가요.”
에반젤린이 퉁명스레 쏘아붙이지만 침입자 유리아 헬리샤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안 돼요. 몸 상태가 안 좋을지도 몰라서 건강식을 챙겨 왔는데요.”
그렇게 말하며 유리아는 품에 든 상자를 허락도 받지 않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뚜껑을 열고는 무언가를 쑥! 하고 꺼내들었다.
“앗!!”
그것을 본 에반젤린의 표정에 절망이 깃든다.
“한입 먹고 해요. 일부러 열심히 만들어 왔어요.”
“이……이이익!!”
이 악질은 자신이 다이어트 중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러고 있다.
정말 마음 같아선 본체로 현신해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와씨 개 맛있어 보이네…….
-엘프좌 이걸 이렇게 쳐들어와서 위 테러를 일으킨다고?
-와나……. 미친 야식 안 먹었는데.
-정신나갈거같애 정신나갈거같애 정신나갈거같애 정신나갈거같애 정신나갈거같애 정신나갈거같애 정신나갈거같애 정신나갈거같애
“슈우우웅~”
채팅의 뜨거운 반응도 무시한 채 유리아는 한 손에 뼈가 잡히는, 흔히 말하는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 양념 고기를 그녀의 앞에서 움직여댔다.
그럴수록 에반젤린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진다.
-위 테러 멈춰!
-멈춰!
매니저 : 안토니오. 오늘 저녁엔 저런 고기로 부탁합니다.
띠링!
사자자리님께서 1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저 집 고기 구울 줄 아네. 고기는 저렇게 먹어야 제맛이지. 마음 같아선 직접 사냥 나가서 구워 먹고 싶지만…….
“나가요!!”
결국 격분한 에반젤린이 소리치자 유리아는 상처받은 듯 슬픈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힝…….”
“힝은 무슨 힝이에요! 어른이 애처럼 힝이 뭐예요!”
화가 날 대로 난 에반젤린이 악 소리를 지르자 유리아가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힝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 힝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존댓말하면 어른스러운 거냐곸ㅋㅋㅋ
에반젤린의 고통은 시청자들에겐 즐거움이 된다.
유리아가 방송에 가끔씩 침입하면서도 사람들에게 굉장하게 인기를 끄는 이유는 사실 그 때문이었다.
그녀만 나타나면 에반젤린의 복장이 뒤집어지는 건 일상 다반사였으니까.
에반젤린이 폭발 직전까지 몰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유리아는 저 뒤편으로 가서 무언가 주섬주섬 세팅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에반젤린의 방송을 위한 방은 평수가 제법 크다.
그래서 그녀가 방송을 하고 뒤에서 불판을 열어 고기를 구워 먹어도 훤히 보일 정도로 그 크기가 클 수밖에 없었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고기가 구워지고 그 냄새가 에반젤린을 더욱 자극했다.
아득……. 빠득…….
이를 갈면서도 에반젤린은 필사적으로 참았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관심은 벌써 뒤편에 놓인 먹자판으로 향했다.
-와……. 진짜 쌈 싸 먹는 거 보소. 저건 무슨 조미료임? 과일 같은데.
-와 맛잘알 저걸 넣어먹네.
-그런데 뉴페이스도 있네.
평소엔 륀느와 유리아만이 방송에 난입했다.
둘은 툭하면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일이 터지면 사실 최고의 화학 반응을 보여주는 캐미를 보여줬던 만큼 더욱 인기가 많았다.
-그러네? 저 사람은 누구임? 진짜 이 방송은 눈이 호강하네.
“아…… 점순…….”
“점순이 아니야!!!”
심드렁하게 에반젤린이 대답하려던 찰나 고기를 보며 침을 꼴깍 삼키던 점순이가 비명을 내질렀다.
“점순이 맞잖아요.”
-ㅋㅋㅋㅋㅋㅋ 점순잌ㅋㅋㅋㅋ
-아니 이름이 대체 왴ㅋㅋ
-아니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데? 왜 이름이 점순잌ㅋㅋ
사람들의 웃음에 그녀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아직 이름을 안 정했어요! 곧 정할 거니까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요!”
빨개진 얼굴로 격하게 소리친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방송이 시작된다.
뒤에선 침입자들의 먹방이. 앞에선 에반젤린의 그림방송이 이어지는 와중에 시청자들은 시선을 어디다 두는 게 좋을지 점점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 탓일까.
채팅창의 상당량이 뒤편에 있는 먹방으로 향해버리자 끝내 에반젤린의 인내심이 폭발하고 말았다.
“나가!! 나가라고요!”
격분한 그녀가 조금 전 유리아가 놓고 간 소금통을 휙! 하고 던져버렸다.
동시에 그녀가 던진 소금통의 뚜껑이 열리며 그 안의 내용물이 정체불명의 갈색 소스에 쏟아져 내렸다.
부글부글.
동시에 소스가 맹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고. 륀느와 유리아 그리고 점순이 셋 모두의 표정이 퍼렇게 질렸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에반젤린을 제외한 셋 모두가 소리쳤다.
“엎드려!!!!!!”
콰아아아앙!!!!
* * *
“푸하하하하하하하!!”
에반젤린의 방송을 보던 스트리머 절제. 박승현은 여전히 레전드 사건을 터뜨리는 에린의 방송을 보며 장장 30분 동안 배를 잡고 방 안을 뒹굴며 웃어댔다.
“아하하하하학! 아학! 대체 크흐흐흐흐!! 어떻게 소스에 소금이 들어갔다고 폭발을 일으켜 으하하하하학!!”
그리고, 그 모습을 방송에 송출시킨 탓에 스파이 짓을 하던 파랑새들이 그대로 에반젤린에게 고자질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유튜브엔 또 하나 상당한 조회 수를 끄는 황당한 영상이 업로드 되었다.
매니저인 왕자 알하자드 대신 편집 일을 해주는 그의 비서 안토니오는 편집에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