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2화
에반젤린 방송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는 알하자드에게 최근 생긴 즐길 거리는 다름 아닌 에반젤린의 방송을 보는 것이었다.
역시 그는 칼을 들고 악질의 머리를 쳐내는 것보다 에린의 방송을 보는데 더 재미있었다. 자청해서 매니저 역할을 역임하기를 잘했다.
친한 친구의 소중한 딸이 하는 방송.
그녀의 방송은 이렇다 할 자극 요소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조금 다른 상식이나 톡톡 튀는 매력은 괜히 그녀의 구독자가 백만 단위가 아님을 알려주곤 한다.
물론 간혹 선을 넘는 발언이 자주 나오긴 하지만 말이다.
“흐음…… 나는 잘 나오는데.”
그는 흥미롭다는 듯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왕자님.”
“왜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안토니오. 몸이 안 좋은 것이라면 주치의에게 말해서…….”
“아닙니다. 왕자님, 다만, 보통 게임에 500만 원 이상을 박으면 뭐든 나오는 법입니다…….”
안토니오의 반박에 알하자드가 조용히 침묵했다.
“그렇군요.”
“에반젤린 아가씨는 그 10분의 1 정도만 사용했지요.”
“흐음…….”
“왕자님. 보통 500만 원 박고 못 먹는 사람은 왕자님 뿐일 겁니다.”
한동안 알하자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얼마 가지 않아 조용히 말했다.
“이 회사 어디라고 했죠?”
* * *
“와! 이벤트!”
뛸 듯이 기뻐하며 에반젤린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결국 못 뽑아서 추가 과금을 고민했던 그녀였다.
결과적으로 추가 과금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지만 지금도 신 캐릭터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도박은 절대 배우지 말라고 한 거구나.
그녀는 아빠나 엄마가 했던 말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기회라니.
얼마 전 그녀의 돈을 쪽쪽 빨아먹은 가챠형 게임에서 페이백 이벤트를 진행한 것이다.
“와. 내가 이 게임을 오래 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지른 돈을 100퍼센트 페이백해주는 건 처음 봐요! 게다가 뭐 두 배 확률 업?”
에반젤린은 뛸 듯이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레딧이 드디어 미쳤네 ㅋㅋㅋ]
[와. 이걸 페이백해준다고?]
[방장…… 그래봐야 나오지 않을 놈은 안 나와…….]
“흥, 이번엔 꼭 나올 것에요.”
자신만만하게 그녀가 마우스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첫 10연속 뽑기를 시작했다.
보라색 이펙트.
“뭐, 확률이 2배라곤 해도 6퍼니까 한 번에 될 거라곤 생각 안 했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연뽑.
그리고 약 10분 후.
에반젤린은 왼팔에 얼굴을 파묻은 채 책상에 엎드려 오른손으로 테이블을 쾅쾅 내리쳤다.
[힘내 방장…….]
“흐윽…… 흑,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데에…….”
그녀의 화면에는 결국 그녀가 뽑은 캐릭터가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띠링!
사자자리 님께서 5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어떻게 페이백 받은 거 다 쓰고도 모자라서 추가 과금까지 하고는 못 뽑을 수가 있냐. 정말 에반젤린은 전설이다.
띠링!
사자자리 님께서 밴 당하셨습니다.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밴 버튼을 눌러버린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게임 안 좋은 게임이에요. 이거.”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녀는 새로 뽑은 캐릭터를 이리저리 세팅했다.
“에이. 그만두자,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녀를 괴롭히던 게임도 중요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만족스레 방송을 조정했다.
“한 시간 뒤에 다시 켤게요. 그동안 대기모드 해놓을 거예요.”
[?? 갑자기?]
[어디가 방장.]
시청자들의 물음표가 빠르게 올라오자 그녀는 음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기만자에게 복수를 하러 갈 거예요. 아빠가 그렇게 가르쳐줬어요.”
운이 없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 운을 가지고 놀리는 놈을 처단하는 방법을 연구할 따름이다.
그녀가 늘 하던 그림까지 포기하면서 선택한 것은 바로 복수였다.
* * *
“아하하하하학…….”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던 그림 스트리머 [절제], 박승현은 오랜만에 느끼는 흡족함에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그동안 이토록 통쾌했던 적이 있던가.
[절제쉑 인성…….]
[인성 흉측하기가 짐승 새끼가 따로 없네요.]
[인정한다.]
“인정은 무슨 인정 빌런들아.”
본래 그는 꽤 곱상한 방송인이었다.
좋게 말하면 굉장히 선을 잘 지키고 욕 한 번 하지 않는 정중한 인물이었고, 나쁜 말로 하면 흔히 불리는 꼰대 기질이 있었다.
그 탓에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에는 별로 내성이 없던 그였지만 최근 에반젤린과 관련되면 그녀를 괴롭히는 데에 아주 재미가 들린 참이었다.
“이상하게 에반젤린은 톡톡 튀는 맛이 있어서 괴롭히기 좋단 말이지.”
사실 뽑기 기만도 그러했다.
그도 한방에 나올 줄 몰랐지만 한 번에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거, 에반젤린이 그렇게 뽑고 싶어 하던 그거구나! 이걸로 놀리면 끝내주겠구나!
얼씨구나 하며 그는 에반젤린의 방송을 도방했고, 그녀가 그간 모아온 꾸깃꾸깃한 용돈을 모조리 탕진하며 괴로워하는 걸 보며 쐐기를 박아넣었다.
“아니 내가 웬만해선 누구 괴롭히거나 욕하고 이런 거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근데 걔는 진짜 천부적이라니까?”
[ㅋㅋㅋㅋ 인정한다.]
[공주님 진짜 괴롭히는 맛 좋음 ㅋㅋㅋ]
[선 넘는 순간 티오니스식 납치당해도 이상하진 않은데 목숨 걸고 괴롭히게 됨 ㅋㅋㅋ]
절제의 방송 시청자 중엔 에반젤린 방송의 애청자들도 제법 있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에 공감하는 이는 자주 있었다.
[그런데 절제쉑, 그러다가 언제 한번 업보 크게 청산하는 거 아님?]
“에이. 뭐 나도 선은 지키지.”
[이번엔 선을 넘었잖아.]
“설마…… 이거 살짝 놀렸다고 나 잡아가겠어?”
쿵!!
“으악! 깜짝이야!”
그때였다.
그의 뒤편에서 쿵!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뒤편에 있던 로봇 피규어 하나가 떨어진 것이다.
“아이고, 이 귀한걸…… 아니 이게 왜 멋대로 떨어져?”
당황한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휴, 저 메카 덕후 쉑.]
[제 몸보다 메카가 더 귀하지 아주 그냥.]
“여러분들도 각기 다 취미가 있잖아. 난 프라모델이나 로봇 피규어 모으는 게 취미라고.”
그는 자신의 취미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떨어진 로봇 피규어를 다시 올려다 놓았다.
그때였다.
[미친! 뒤뒤!!]
갑작스런 시청자들의 소란에 손사래를 치며 그가 낄낄 웃었다.
“응, 안 속아.”
[아니 미친놈아 뒤 보라고!]
“뒤에 뭐, 뒤에 뭐 귀신이라도 있나 보지? 미안한데 난 그런 거 무서워할 나이가 아니라서.”
그에게 귀신은 조금 떨떠름하긴 해도 시청자들의 저런 장난질에 놀아날 정도로 새가슴도 아니었다.
하지만.
[미친놈아!! 귀신이 아니고 에나벨!!]
그 말에 그가 그대로 미소를 지우며 굳어버렸다. 머리가 이해하기도 전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는게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
“…….”
고장 난 문처럼 뻑뻑하게 고개를 돌린 그가 식은땀을 흘렸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그의 뒤편엔 유색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이상할 정도로 섬뜩한 표정으로 고개만 꺾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에나벨이 보였다.
툭…….
그의 머리 위에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이에 그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보았다.
[같이 놀자.]
그 한마디에 그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처참한 그의 비명과 함께 캠이 거세게 흔들렸고, 쓰러진 캠 너머로 버둥거리며 에나벨에게 질질 끌려가는 절제의 발버둥만이 보였다.
* * *
정신을 잃은 그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흔들의자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에나벨의 모습이었다.
아까의 섬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아름다운 엘프의 모습.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고개를 든 그의 눈앞에 귀여운 인상의 예쁜 소녀가 의자에 앉아 팔을 이용해 턱을 괴고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에…… 에린?”
“아저씨. 이렇게 직접 보는 거 처음이죠?”
“여긴 어떻게…… 알고?”
“아저씨 방송 보면 거기 위치를 모를 수가 없겠던데.”
거짓말이다.
그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이…… 이거 풀어줄래?”
“그거요?”
에반젤린이 흘끗 시선을 돌렸다.
그를 포박하고 있는 새까만 밧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계속 묶여있으면 절대 좋은 꼴은 못 본다는 걸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아저씨.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녀가 공허한 얼굴로 질문을 했다.
방송 중에 제압당하고 이게 무슨 꼴인지.
순간 그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돌렸다.
좀 전까지 그가 하던 방송은 잠시 일시 정지 상태에 놓여있었다.
망했다.
이대로 있으면 내일 반드시 추문이 돌게 된다.
에반젤린이 예쁜 소녀인 건 사실이지만 그는 잊지 않았다. 에반젤린은 저렇게 보여도 아직 어린아이라는 것을 말이다.
간혹 시청자 중 악질들이 우결 같은 어이없는 물타기를 시전하지만 절제를 제외하고도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동료 스트리머들은 절대 그녀를 두고 일정 선을 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찾아왔고 방송이 동시에 멈췄다?
의도가 없어도 오해의 여지는 다분했다.
그러니 일단은 에반젤린을 다독여서 그녀를 진정시켜야 했다.
‘안 그러면 시청자 이전에 티오니스 성자가 내 머리통을 뽑아갈 거야.’
딸 사랑이 지극한 그 인간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찌 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한 그였다.
그때 가만히 앉아있던 에반젤린이 다시 물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 물음에 절제 박승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조심스레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에나벨.”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가 에나벨을 부른다.
그러자 에나벨이 고개를 까딱였고 선반에 놓인 로봇 프라모델들이 둥둥 떠올랐다.
“자, 잠깐만 에린아! 우선 진정하고 저거 내려놓자. 응?”
“아저씨.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녀의 공허한 질문에 절제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열심히 모은 용돈을 모조리 탕진하고 무과금이 되어버린 그녀에게 기만질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던가.
그런 생각이 든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 오빠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이것 좀…….”
“그럼 저도 복수해도 되는 거죠?”
“뭘 하려고…….”
“아빠가 정말로 나쁜 인간들에게 복수하고 싶을 때 이걸 주라고 했어요.”
에반젤린의 손에 시꺼먼 무언가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검은 구체처럼 생긴 에너지 구체였다.
“그…… 그게 뭔데?”
“아빠가 이 저주를 보고 모근 박멸 저주라고 했어요.”
단호한 한마디에 그가 입을 쩍 벌렸다.
“서…… 설마 지금 나를 대머리로 만들겠다. 뭐 그런 건 아니겠지?”
그 질문에 에반젤린이 공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왜 아니라고 생각해요?”
동시에 파랗게 질린 절제, 박승현의 비명이 집안에서 짙게 울려 퍼졌다.
다음날 절제의 방송에는 어떤 글이 올라왔다.
-개인 사정으로 일주일간 휴방합니다. 나중에 봐요.
반면 에반젤린은 매우 만족한 얼굴로 헤실거리며 다시 방송에 복귀했다.
“자! 그림 그릴 거예요. 조만간 다른 스트리머분들하고 행사장에서 그림 콘텐츠를 진행해야 하니까 그때까지 부지런히 연습해야 해요. 혹시 신청할 그림 있어요?”
[절제 휴방 냈던데 뭔 짓을 한 거야…….]
“네? 전 모르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