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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193화 (1,193/1,559)

제 1193화

무언가가 있다는 감각은 분명히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말없이 놈이 있던 장소를 내려다보던 나는 천천히 땅에 손을 짚은 뒤 정령 마나를 끌어올렸다.

동시에 대지에 각인된 최근의 기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헛것을 봤나?”

완전 기억 때문에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참 묘한 상황이었다.

분명 관련이 있어 보였는데.

회랑의 영웅들도 이름만 들어봤을 뿐 자세하게 아는 이가 없으며 프리아 여신은 침묵으로 일관하니 남은 존재를 찾아야만 했다.

“아, 하나 있구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을 기억해낸 나는 망설임 없이 경계를 그어 내렸다.

그러자 부드럽게 잘려 나가는 공간 너머로 무언가가 보였다.

“네놈은 워프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차원까지 멋대로 찢고 다니는구나.”

“이게 더 편합니다.”

신격을 얻은 뒤로 차원을 주기적으로 넘나드는 것에 더욱 익숙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세계수 [알]이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 자신의 공간에서 동물들을 쓰다듬으며 신목의 성지를 돌보던 중 내 방문에 조금 호기심이 동한 듯 보였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예까지 찾아왔지? 외곽에 살고 있는 그 사고뭉치들을 보러 왔느냐?”

외곽의 사고뭉치.

누굴 말하는 건지 모를 수가 없다. 심연의 공주 베르단데와 그녀의 양아들, 그리고 이실디나 스쿨드같은 존재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사고뭉치라고 하는 것을 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는 듯 보였다.

“혹시 레인보우 슬라임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내 질문에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더욱 짙어졌다.

“호오…… 오랜만에 듣는 명칭이구나. 그래. 레인보우 슬라임이라…….”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보는 이로 하여금 1년 동안 운이 좋게 해준다지?”

“직접 본적은 없으신가 보네요.”

“아니 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당한 발언을 내뱉었다.

“진짜 본적이 있어요?”

“정확히는 꽤 오래전 일이지. 딱 한 번, 성지의 아이 중 하나가 숲에서 오색이 찬란한 슬라임을 만났다고 하더구나.”

뭔가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듯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엔 그저 일반 슬라임인 줄 알았다고 하더구나. 알다시피 일반적으로 슬라임은 해가 되는 녀석들과 아닌 녀석들로 나뉘지. 마침 신목의 성지에는 대부분 해가 되지 않는 슬라임들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무심결에 지나치려 했다가 멈춘 거지. 색이 너무 신기했거든. 마치 오색으로 반짝거리는 듯한 빛깔이었으니까.”

신목의 세계수라도 레인보우 슬라임을 보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놈이 행운을 불러다 주는 건 확실하지만 그 대가가 없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이미 선례가 있다면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뭘 어째. 전설대로 이상하리만치 녀석이 1년 동안 운이 좋았다 정도였지. 물론 불행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그 아이는 정말 운이 좋은 1년을 보냈다고 하더구나.”

그녀가 해준 이야기는 그게 끝이었다.

“그게 끝입니까? 알다시피…….”

“네가 묻고 싶은 게 뭔지는 안다. 어떻게 일개 생명체가 흐름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행운을 부여하는지, 그게 묻고 싶은 거지?”

“예.”

그녀는 어깨를 으쓱인 뒤 뒤편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정원의 나뭇가지 하나가 스르륵 길어지더니 사과가 달린 가지 끝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똑!

“하나 먹거라.”

“괜찮아요.”

“거 먹으래도. 오랜만에 와놓고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으면 내 위신에 금이 간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대 세계수가 다루든 신목의 성지와 다르게 현재 신목의 성지는 굉장히 우호적인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투덜대긴 해도 현 세계수가 나와 동맹관계에 있으니 말이다.

애초에 그들의 외교권을 내가 가지고 있지만 그건 사실 엘프들에게 있어서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은 필요 이상의 외부 접촉을 꺼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 그러시다면야.”

아삭한 식감과 상쾌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결론부터 말해주랴?”

“그러면 좋죠.”

“아무 일 없었다.”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가 팔짱을 꼈다.

“예?”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다. 처음 나 또한 너와 같은 생각이었지. 하지만, 뭐.”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그게 다야.”

“그게 가능합니까? 그런 생명체가 있다고요?”

“레인보우 슬라임은 대상의 행운을 불러다 주지. 그렇다면 그 대상이 지니고 있던 불행은 어디로 가는가. 참 고민 많이 해봤지만…….”

말을 끊은 세계수 [알]이 침묵한다.

“사람이 가장 빡치는 순간이 언제인지 압니까? 말하다 마는 겁니다.”

한 손에 새카만 화염을 피워올리고 미소 지어주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없다.”

“예?”

“정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네 걱정은 확실히 합리적이지만 세상엔 아직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지. 쯧쯧 신격을 얻고 주신의 권능까지 가지고 있는 녀석이 뭐가 그리 걱정이 많은 건지…….”

“그럼 혹시 새카맣고 노란 눈동자 같은 걸 가진 검은 슬라임에 대해선 모릅니까?”

“다크 슬라임?”

“아뇨 그거랑은 좀 달라요.”

그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구나.”

그녀는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는 듯 침묵했다.

애초에 나는 우려였고, 그녀는 레인보우 슬라임의 사례를 직접 보았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거 보니 레인보우 슬라임을 보았나 보구나. 그래. 누가 보았느냐?”

“…….”

“……본 게 아니구나. 네놈 성격상 보였으면 잡았을 테지.”

그녀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래. 누구야.”

“에반젤린입니다.”

“허어…… 그 아이에게…… 그래 어떻든?”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에반젤린의 곁에 딱 붙어서 떨어지려 하질 않네요. 하나도 아니고 일고여덟이면 좀…….”

내 말에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내게 말했다.

“중요한 일이 있다.”

“뭔데요.”

덩달아 분위기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그거, 내게도 하나 분양해주거라. 나도 그 행운 맛 좀 보게.”

“어이가 없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습니까.”

“네 이놈! 그냥 좀 주면 되지 치졸하게 그래야겠느냐!”

“아니 나는 뭐 땅 파서 장사하시는 줄 아시나.”

* * *

결국 걱정은 기우일 뿐 아무런 일이 없다는 것만 확실해진 상황에서 유일하게 데이비의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그때 흘낏 본 그 검은 무언가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말이다.

반면 제 아빠의 이런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반젤린은 아주 신이나 있었다.

“오케이 콜!”

절제 박승현은 승리를 확신하고 소리쳤다.

“풀하우스다 이년아. 봤지? 별것도 아닌 게! 하하하하!”

그동안 당한 게 많았던 그는 에반젤린과 포커 게임을 하며 화끈하게 칩을 베팅했다.

절제는 에반젤린에게 있어서 선배 스트리머이며 그녀와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유일한 스트리머이기도 했다.

그가 에반젤린의 가능성을 미뤄보고 유입을 시킨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일까.

다른 이들과의 방송콘텐츠에서 상당히 소극적인 대처를 보여주는 것과 다르게 절제와 에반젤린은 나이 차이를 넘어 굉장히 서로 잘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절제의 비웃음에 조용히 침묵하던 에반젤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미안해요. 내가 더 높은 풀하우스네?”

“……이건 사기야!!”

캠 화면 너머로 보이는 그의 얼굴에 경악이 서린다.

“야! 치사하게 사기치는 게 어딨냐!”

[응 절제 또코박~]

[또 코인 박았죠?]

[풉 ㅋ]

[풉ㅋ]

에반젤린과 절제의 시청자는 성향이 많이 비슷한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절제의 시청자 일부가 에반젤린에게 유입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절제의 입장에선 제 시청자를 일부 빼앗긴 꼴이지만 최근에 와서는 국제적으로 노는 에반젤린 덕분에 절제의 시청자 수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키보드에 샷건을 치며 격분하는 절제의 풀하우스는 하트였다.

하지만 에반젤린의 풀하우스는 똑같은 하트에 그보다 숫자가 좀 더 높은 쪽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유착관계 해명해!”

그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무시한 채 컴퓨터는 그의 칩을 빼앗아 에반젤린에게 양도할 뿐이었다.

“흥. 아저씨 운이 나쁜 걸 누굴 탓해요.”

“네가 할 말이냐? 뽑기에 용돈 다 꼴아박고 폭사한 주제에.”

“조용히 안에요? 뽀찌 안주는 수가 있어요.”

“아이구 제 입이 방정이죠. 공주님.”

자본주의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는 그였다.

묘하게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는 화면에 보이는 에반젤린의 캠을 노려보았다.

눈이 확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의 어깨 위에 보이는 오색의 슬라임.

그도 에반젤린의 레어에 가본 바가 있었기에 오색의 슬라임이 가져다주는 행운이 어떤 건지 들은 바 있었다.

처음엔 그런 전설이니 그냥 좋은 징조거니 했건만.

이렇게 눈에 띌 정도로 에반젤린의 운이 좋아질 거라곤 생각지 못한 그였다.

‘떴다!’

박승현은 복잡한 생각을 접어두고 눈을 번뜩였다. 저 얄미운 꼬맹이에게 연패를 벌써 몇 번을 했던가.

에반젤린보다 나은 점이라면 극강의 운빨이라 자부하던 절제에게 있어서 이 같은 연패는 그야말로 치욕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이번엔 반드시 그녀를 이겨야 했다.

‘어차피 마지막에 선 놈이 이긴 놈이야. 올인을 유도한다.’

그는 흘낏 에반젤린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패를 숨기고 있기 때문에 뻐꾸기 놈들이 가서 일러바칠 걱정도 없었다.

“하프!”

그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에반젤린 또한 받는다.

“받고 더 얹어요!”

그녀 또한 계속되는 연승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연신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자금과 그녀의 자금을 확인한 뒤 그대로 올인을 유도했다.

“이런, 올인이네? 쫄리면 뒈지시던가.”

“하! 웃기지 마요. 나 절대 안 물러나.

절제가 아는 에반젤린은 생각 이상으로 자존심이 강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는 대로 그녀를 살살 꼬드겨 돈을 박게 만들었다.

기본 자금이 훨씬 많았던 절제인 만큼 당장 에반젤린에게 올인을 박게 만들 수 있는 자금 정도는 있었다.

[뭔데 분위기가 이래.]

[절제쉑 뭐 큰 거 잡았나 보네]

시청자들은 누가 이길지를 놓고 벌써 포인트 도박판이 벌어진 참이었다.

긴장감이 앞서는 순간 둘 다 올인을 건 시점에서 그가 먼저 패를 깠다.

“자! 내 껀 이거다!”

[와우]

[미친놈 운을 얼마나 박은 거야.]

[절제쉑 운 좋은 거 알아줘야 함]

[이건 진짜 로티플 아닌 이상 무조건 절제 승리네…….]

사람들은 그가 내놓은 최상위 패를 보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 나왔다 하면 난리가 나는 극악의 확률을 지닌 카드가 아닌 이상 방법이 없었다.

이에 절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도발했고, 조용히 침묵하던 에반젤린은 묵묵히 카드를 깠다.

“헤헤.”

헤픈 웃음과 함께.

“…….”

[?????]

[???뭐임?]

[미침?]

[아니 저게 진짜 나왔다고?]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끼며 그대로 의자에 몸을 맡겨 추욱 늘어졌다.

아무리 운이 좀 좋아졌기로서니 이건 아니지.

같은 시각.

에반젤린의 레어에서 동글동글하고 검은 색체를 지닌 무언가가 퉁퉁 튕기듯 동굴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데이비가 보았던 그것이었다.

별문제는 없었다고 했지만 검은 형체는 마치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동굴 내부를 제집처럼 튕겨 다닐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뛰어다녔을까.

녀석은 곧 레인보우 슬라임의 알이 있는 곳으로 오더니 이내 물속으로 들어갔고, 알 중 하나를 날름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퉤! 하고 내뱉었고 그렇게 내뱉어진 알은 다른 알과 다르게 천천히 꿈틀거리며 미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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