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95화
모습을 변화시킨 레인보우 슬라임은 이내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나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훑듯 자신의 몸과 나를 비교한 녀석은 이내 양 검지로 제 입꼬리를 슬쩍슬쩍 끌어올리고는 표정을 만들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듯 입꼬리를 기괴하게 비틀어보기도 하더니 녀석은 끝내 이상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 미소를 레이나에게 보여주었다.
“아…… 아아아?!”
당연히 이런 행동을 할수록 당황하는 건 레이나였다.
레인보우 슬라임이 주인으로 인식한 이를 상대로 이런 모습으로 변한다는 게 뭘 뜻하는지 그녀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었다.
가장 믿고 가장 사랑하는 것.
어떻게 알아내는 건지는 모르지만 레인보우 슬라임은 대상에게 가장 편안하고 좋아하는 대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하필 나라니.
그녀의 입장, 나의 입장을 생각하면 지금 상황이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이 이성으로써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지만 말이다.
“아니에요! 아니라고! 이건 진짜 오해에요!!”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진짜로…… 아닌데…….”
그녀의 새하얀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 무슨 뜻인지 아니까. 그래도 고맙네.”
어떻게든 그녀의 손을 들어주기 위해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배려지 다른 것들이 아니었다.
“그…… 그게…….”
하지만 내 선택은 그녀에게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더욱 얼굴을 붉히는 모습은 마치 배려가 아니고 다 이해해, 라며 놀리는듯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그녀가 나를 이성으로 보는 게 아닌 가족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진실과는 별개로 어? 설마? 라는 생각이 드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눈치가 없는 슬라임의 행동은 참으로 직관적으로 일편단심이었다.
슈릅…….
스르륵 다가온 레인보우 슬라임 놈이 내 모습을 한 채로 당황하는 그녀를 끌어안더니 그녀의 뺨을 슬쩍 핥았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에게 애교를 피우는 듯한 행동인 만큼 그것에 대해 뭐라 할 건덕지는 없었지만, 이 슬라임의 모습이 현재 내 모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굉장히 미묘한 광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윽…….”
결국 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레이나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슬라임을 품에 안고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이들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만 보았다.
* * *
에반젤린의 운이 갑작스레 좋아진 뒤로 괜스레 걱정되어 무리하게 데이비를 찾아왔던 절제 박승현은 생각지도 못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다되었습니다.”
“아…… 네. 가, 감사합니다.”
“더 필요한 건 있으신가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평범한 인간으로 살면서 이렇게 시중을 받아볼 일이 얼마나 존재할까.
“저…… 그런데 왜 이런걸…….”
“저하께서 명하신 일이세요. 부담 느끼지 마시고 즐겨주시면 감사드립니다.”
토인족 수인 소녀는 귀를 쫑긋거리며 탄탄한 그의 등을 가볍게 마사지했다.
“귀족분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향료에요. 몸에 발라두면 흡수가 되면서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게 된답니다. 꽤 좋은 고급품이에요.”
“아…… 그런 귀한 걸 제게 써도 괜찮은지…….”
“승현 님께서는 에반젤린 아가씨의 둘도 없는 친구분이시니까요. 접대에 있어서 그 어떤 불편함도 끼칠 순 없어요.”
‘아…… 어머니. 아들 출세했습니다.’
살면서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상류사회의 삶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이윽고 수인족 시녀들이 물러가고 노령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는 하인스의 시종장 베르닐이라고합니다. 아가씨의 별장에 오실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아…… 저야말로…….”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마주 인사하자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닿는다.
박승현은 자신이 너무 줏대가 없었나 라는 생각이 들어 움찔거렸지만 이내 그는 표정을 거두며 허허 웃어 보였다.
“실례합니다. 생긴 게 이래서 원체 노려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 아닙니다! 정말 괜찮아요.”
“식사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드시지요.”
“아…… 저, 지금 제가 옷이 이 지경이라…….”
“괜찮습니다. 티오니스의 예법은 티오니스에서만 적용되는 법. 아가씨의 친우분께 강요할 이유는 없지요. 가시지요.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의 말에 박승현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안내를 받아 걸었다.
그가 안내를 받은 곳은 커다란 문이었다.
“여긴…….”
“하인스 영지로 통하는 문입니다. 저하께서 지구에 이어붙인 문과 비슷한 것이지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단한 건 알겠네요.
애써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숨긴 채 그는 쭈뼛쭈뼛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볼 수 있었다.
으리으리한 분위기에 고풍스러운 복도에서 느낀 그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술판을 말이다.
“하하하하하! 1등은 제겁니다!”
자신만만하게 손에 든 카드를 훌렁훌렁 흔들면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 중동의 왕자.
“으음…… 어렵군요. 둘 다 표정 관리가 너무 잘되시니…….”
안경을 고쳐 쓰며 앓는 소리를 내는 문자 그대로의 마법사 하나.
그리고.
그런 그에게 카드를 내밀고 눈썹을 까딱이고 있는 청년이 보인다.
한 명은 티오니스의 대표이자 사실상 지구에서 알려진 인류 최강의 괴물.
한 명은 티오니스 마탑의 천재 마법사라 하였던가.
일전 에반젤린의 깜짝파티 당시에 초대된 그와 인사를 나눈적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명은 중동의 석유 왕자라 불리며 지구에서 등재된 최대 부호 랭킹에 드는 사람이다.
하나하나가 박승현과는 가히 비교하기 어려운 대단한 인물들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 외에도 일본에서 넘어온 예언 능력을 지닌 각성자나 미국의 영웅, 프로게이머, 대체 어디서 맛난 것일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왔었다.
하지만 단연코 눈앞의 이들만큼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이들은 없었다.
자연스레 주눅이 드는 인물진을 보며 박승현은 자신이 왜 이곳에 또 초대되었는지 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음? 왔군요. 데이비.”
“아, 그러네요. 어서 와요. 같이 한게임 하실래요?”
“아…… 그게…….”
“아, 식사부터 하는 게 좋겠네요.”
식사. 이렇게 고급스러운 곳에서 저런 인물들이 모이면 과연 어떤 것을 먹을까. 랍스타? 킹크랩? 푸아그라? 캐비어? 아니 티오니스에서도 거위 간이나 철갑상어 알을 먹는가?
머릿속으로 빈약한 상상력을 동원해보지만 비싼 음식이 어떤 게 있는지 그의 머릿속으론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있자 잠시 알하자드가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내가 이겼으니 오늘은 이걸로 먹읍시다.”
“음…… 뭐 좋아요. 그럽시다.”
“저도 괜찮습니다.”
저들끼리 정하는 걸 보며 괜히 따돌려지는 느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박승현은 데이비의 친구가 아닌 애매한 위치였기에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말이다.
그때 데이비가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박승현 씨?”
“예…… 예?”
“짜장면 좋아해요?”
그의 웃음에 박승현은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네?”
머릿속에 떠오르던 수많은 선택지는 한순간에 증발 되어버렸다.
* * *
이런 분위기를 예상한 건 아니었는데.
처음 에반젤린의 별장에 초대된 이후로 그는 마치 귀족들이 파티를 즐길법한 분위기를 보며 이곳은 역시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르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사람들 모두의 표정이 조급함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제는 은퇴를 준비하는 프로게이머 시우가 있는 건 조금 의외이긴 했지만 하나하나 보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도 분명했다.
실제로 그는 신성 그룹의 공주님이라 불리는 현아를 보면서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그래서 굉장히 그에겐 어려운 곳이며 이곳에 오는 것도 큰마음을 먹고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두면 맛없어져요. 어서 들어요.”
젓가락을 도로로록 비비며 여유롭게 말하는 데이비의 모습에 이전의 귀족 같은, 세계 최고의 사내 같은 면모보다는 소탈함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혹시 간짜장을 좋아하시나? 아니면, 짬뽕?”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저 짜장면 좋아해요.”
“전 간짜장을 더 좋아하는데 어쩔 수가 없네요. 승리자가 하필 저 양반이라.”
“하하. 꼬우면 이기면 됩니다.”
느긋하게 말하는 알하자드.
아쉬움을 토로하며 신기한 듯 짜장면을 후루룹 먹고 있는 율리스.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박승현은 한가지 확신이 들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소탈하다.
그리고, 눈치가 빠른 그는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빡빡하고 상류 인간 같은 면모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겉보기와 본 성격이 다르다는 것처럼.
조금 얹힐 것 같던 식사가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아. 콜라도 좀 드세요. 이 집이 맛있더라.”
데이비가 콜라를 내밀자 그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왜요, 부담돼요?”
“사실…… 좀 그렇습니다.”
“흐음…… 거봐요 내가 이걸로 안 된다고 했잖아.”
“흐음. 괜히 부담을 느끼지 않게 소박한 방법을 택한 건데 어렵네요.”
알하자드의 미소에 박승현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럼 원하는 거 직접 뽑아볼래요?”
“예?”
“그걸로 배 안 차잖아요. 그러니까 게임 한판을 해서 이기는 사람 말 듣기죠.”
그가 카드를 내밀었다.
“블랙잭이죠, 순서대로 점수를 누적해서 10판 후에 가장 높은 사람 말대로 가는 겁니다.”
그의 말에 절제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 사람들. 자신이 편하게 있게 해주려고 이러고 있다는 것을.
‘그래. 사나이 박승현, 여기서 그만 쫄자.’
그는 데이비가 내미는 카드를 받아들였다.
“제가 섞을까요?”
마침 운하냐는 자신이 좋은 편이니 잠깐 같이 어울리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 * *
그 후 박승현은 특유의 운을 이용해 닥치는 대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아……젠장 이게 버스트해버리네…….”
“저는 점수가 너무 낮네요. 그냥 지를 걸 그랬나…….”
반대로 알하자드와 데이비. 그리고 율리스라는 마법사는 놀라울 정도로 셋 모두 운이 너무 없었다.
전생에 나라라도 팔아먹었는지 어떻게 저렇게 운이 없을 수가 있을까.
사람이 친해지는 데엔 게임만 한 게 없다고 했던가.
승현은 생각 이상으로 소탈한 세 사람과 어느새 말을 나눌 정도로 친해져 있었다.
그래 세계 최강이고 중동의 왕자고 뭐고 같은 사람이구나 싶은 느낌이 들었다.
“저…… 사실 제가 온 이유는 에반젤린과 레이나 누님…….”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가 말을 하기가 무섭게 데이비의 분위기가 변한다.
“에반젤린? 레이나?”
동시에 율리스와 알하자드 또한 숨길 수 없는 관록과 카리스마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숨이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데이비가 물었다.
“에반젤린에 대해 왜 묻습니까?”
질문은 정중했다. 하지만 말투는 달랐다.
“설마. 그 아이에게 다른 생각을 품었다든지…….”
“크흠!”
뭔가 불편한지 율리스가 헛기침을 했다.
“괜찮아요. 율리스. 윈리는 당신이 좋아서 당신과 결혼한 건데 그걸로 내가 꾸중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뭐…… 내가 그걸로 뭐라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데이비. 당신은 그러면 안 돼요. 결혼식 당일 저는 죽을뻔했습니다.”
“그러게 누가 소중한 동생 데리고 속도위반하랬나…… 그리고 사람 쉽게 안 죽습니다.”
간단하게 오가는 말인데, 한마디 들을 때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진정하자. 자신은 이상한 말이나 하러 온 게 아니다.
그는 애써 정신을 다잡고는 말했다.
“예. 에반젤린이 그 슬라임 덕분에 운이 굉장히 좋아진 거 같아서요.”
“그렇죠. 부러워서 나도 하나 곁에 두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괜찮은 거 맞습니까?”
박승현의 질문에 데이비는 잠시 침묵했다.
그걸 왜 묻냐. 그걸 네가 신경을 쓸 이유가 있냐. 오지랖을 왜 부리냐.
여러 예상 대답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박승현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귀여운 동생 같은 아이인데 괜히 잘못되면 찜찜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작 뭔 일이 있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는 주제에.
그런 생각을 애써 억누르던 찰나.
잠시 고민하던 데이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별일 없을 거랍니다. 운이 좋은 건 그 슬라임이 특별한 모양이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그렇다면 다행인 일이다.
본래 용건은 허무하게 끝나버린 셈이지만 오히려 잘된 셈이었다.
“에반젤린을 잘 돌봐줘서 매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데이비가 빙그레 웃었다.
“고마워요.”
“아…… 아뇨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혹시 원하는 거 있어요?”
그 질문에 승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명은 세계 최강의 성자. 한 명은 중동의 최고 부자. 한 명은 저명한 젊은 마법사.
무엇을 해달라고 하면 이뤄줄 능력이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에 그는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