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3화
마치 누군가가 부추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만 과거 포식의 권능이 폭주했을 때처럼 무언가가 강제로 나를 억제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내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게끔 만드는 것으로 사실 프리아 여신의 따귀가 아니었다면 전혀 인지하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가장 이질적인 것은 너무 자연스럽다는 점이었다.
“이거…….”
한번 인지하니 받아들이는 게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만약 그녀가 그때 말리지 않았다면 나는 과연 그곳에서 무슨 짓을 했을까.
애초에 황제를 그렇게 죽여서 얻을 이득이 많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일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뭐야. 혼자냐?”
“아니, 유부남이야.”
어느새 다가온 산적들을 보며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이런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지금 이럴 게 아니라 여신이 언급한 대로 홀로 남겨진 레이나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그녀의 상태가 뭔가 이상이 생겼다면 지금 그녀를 찾아 보호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위치를…….
“두목, 저거 지금 말장난하는 거 맞지요.”
“별로 돈도 안 될 거 같아서 그냥 보낼까 생각해봤는데. 역시 안 되겠다. 어이 너…….”
“메가로드리아.”
쿵!!!
내 부름과 동시에 대기가 뒤흔들린다.
나를 향해 무언가 말하려던 이들은 이내 하늘이 찢어지며 무거운 공기가 자신들을 짓누르자 그대로 경직된 채 주춤거렸다.
“저…… 저게 무슨…….”
그리고, 이내 내 뒤 하늘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멍한 얼굴을 했다.
하늘이 찢어지며 검은 안개가 퍼져 나오고, 그 안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의 위압을 내뿜는 흑룡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겐 너무도 이질적이며 두려운 광경이 아닐까.
“으…… 으아아악!!”
“젠장!! 거대한 와이번이다!!”
“도망쳐!!”
와이번이라는 생명체가 보통 갑자기 나타나 마차의 말을 습격하는 거대한 몬스터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사실 공포의 대상임은 틀림없다.
이 세상엔 드래곤이 없는 것일까.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존재인 와이번이라며 혼비백산하는 그들을 보며 메가로드리아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감히 나를 두고 그깟 날파리를 비교하는 것이냐?]
아무리 환수왕 중 가장 현명하다 해도 메가로드리아는 일단 맹수라 할 수 있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이들을 보며 메가로드리아가 입에 브레스를 충전한다.
저 브레스가 내리꽂히면 산적들은 물론 이 일대 전체가 날아가리라.
“그만.”
내 중얼거림이 들리지 않은 것일까.
녀석은 더욱 강하게 브레스를 충전했다.
“그만!!”
본래라면 강제로 그 마나의 흐름을 끊었을 테지만 지금 나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격정적인 그 외침에 메가로드리아가 흠칫 놀라더니 브레스를 지워버리고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계약자?]
“미안하다. 메기. 미안한데…… 일단 말 좀 들어주라.”
내 중얼거림에 뭔가 심상찮음을 깨달은 녀석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와 몸을 낮췄다.
[이유 없이 나를 부르진 않았을 테지. 그래. 어딜 가려는 것이냐.]
매번 탈것 취급하지 말라더니 스스로 몸을 낮추는 꼴이라니.
“일단 날아올라. 레이나를 찾아야겠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계약자가 뻔뻔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자괴감이 좀 일어서.”
힘이 빠진듯한 내 목소리가 너무 이질적인지 녀석은 의아해하면서도 결국 나를 태우고 날아올랐다.
물론, 어마어마한 체격을 지닌 메가로드리아가 숲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근처 영지의 창공을 날아오른 일로 인해 엄청난 소문이 퍼져나갔지만 그건 내 알바가 아니었다.
* * *
나차 제국이 있는 이 대륙의 크기는 그리 넓은 편이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메가로드리아를 타고 레이나를 찾아 날아오른 것까진 좋았으나 그녀에 대한 어떤 단서도 없는 지금 유일한 단서는 내가 그녀들을 먼저 보냈을 때 사용한 차원통로의 경로를 역탐지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잡히는 장소는 무수히 많았고.
이미 그녀는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대부분의 장소에서 그녀를 발견할 수 없었다.
[미련한 짓이다. 중간에서 방해한 여신에게 직접 물어봐라. 계약자.]
애초에 차원에 간섭해서 그녀를 빼돌릴 수 있는 건 여신뿐인 만큼 지금으로선 여신이 그녀의 위치를 알 테지만 그때 일 이후로 여신은 나와의 어떤 소통도 거부하고 있다.
그녀가 내게 그렇게 말한 것은 이미 늦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지금이기에, 바꿀 수 있는 시기이기에 그런 것일 테지.
어찌 보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이대로 찾는다.”
고집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녀가 거대한 흐름에 지장이 생길 것을 감안하며 내 문제를 짚어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받은 상황이었다.
“태초신이라는 존재도 참 피곤한 자리야.”
[무슨 헛소리냐.]
“나는 그딴 건 머리통이 깨져도 하기 싫다고.”
물론, 그럴 수도 없겠지만.
[젠장! 언제까지 날아다녀야 하는 것이냐!!]
메가로드리아의 등장은 대륙 곳곳에 알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녀석의 덩치가 보통 크던가.
다행히 내가 찾아가는 곳은 영지 내부라기보다는 대부분 인적이 드문 평야나 숲지인 터라 귀찮은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신기한 점은 이놈의 대륙은 정말로 산적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여기도 없으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하니까 그만 돌아가 봐.”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뭘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넌 내 계약자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너를 지지할 거라는 걸 잊지 마라.]
녀석의 지지는 상당한 도움이 되어주었다.
“고맙다.”
메가로드리아가 거대한 포효를 흘린 뒤 허공으로 사라지자 나는 마지막으로 차원통로가 이어졌던 장소를 탐색했다.
이곳에는 제발 흔적이 있으면 좋겠는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일면 다른 생각이 들었다.
만약 레이나에게 조금이라도 잘못된 일이 생겼다면. 이 차원을 통째로 부숴버리고 말 것이다.
단순히 내가 변한 것을 제외하고도 이 차원은 이상하리만치 기존의 차원과는 달랐다.
이윽고 흔적을 따라 도착한 장소에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파괴된 마차. 수많은 시신들. 그리고…….
“…….”
본능적으로 경계하게 되는 익숙하면서도 어두운 기류가 남아있다.
“레이나!”
본능적으로 이곳에 남은 흔적이 레이나의 것임을 눈치챈 나는 황급히 뛰어들어가 시신들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다행히 레이나의 시신은 없었다.
애초에 그녀를 다치게 할 존재가 있을까 싶지만, 여신이 말했던 그녀를 빨리 찾으라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버려진 시신들의 사인은 깔끔한 관통, 혹은 절단상이었다.
레이나의 주특기인 기검을 사용한 공격과 흡사하지만, 놈들의 몸에 남아있는 이 검은 것들은 무엇인가.
죽은 이들의 환부에 난 흔적들은 하나같이 검게 변질되어있었다.
오염 같은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색채를 잃고 탁해진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아는 레이나에게 이런 힘 따위는 없었다.
그 말인 즉…….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건데.”
나는 반사적으로 정령의 힘을 끌어올렸다.
“노아스.”
무언가의 힘에 의해 정령들이 숨어버렸지만, 정령왕의 힘으로 다시 끌어내리라.
내 부름에 바닥이 일렁이며 손바닥만 한 작은 거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오랜만이군. 계약자.]
“정령계는 괜찮냐고 묻고 싶다만 그보다 먼저 해줘야 할 게 있다.”
내 말에 주변을 둘러본 노아스는 눈치가 빠르게 움직였다.
[기억을 읽고자 하는가?]
“부탁할게.”
[좋다.]
신력이든 용언이든 방법은 많지만, 정령왕의 힘으로 보는 것이 가장 힘의 방출도 적거니와 주변 환경에 영향을 적게 준다.
지금 나는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나도 모르게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높았다.
최대한 힘을 억제하면서 지금 내가 느낌 이질감의 기준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작은 거인 노아스의 양팔이 움직인다.
고작해야 사람의 손바닥만 한 사이즈로 현신한 노아스지만 정령왕은 정령왕.
녀석의 손짓에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숨어있던 대지의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노아스를 통해 내게 전해주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
비명을 내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는 레이나의 모습에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괴롭게 하려고 데려온 게 아니었다. 그녀가 괜히 절제 박승현의 일로 마음을 쓰는 게 안타까워서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이건만.
제국의 문제가 아니라 나로 인해 그녀가 고통을 받는다는 상황이 쉬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무엇이 되었건 그녀를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으리라.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새하얀 기검들이 일제히 검붉은 색으로 탁하게 변질되는 것을 보면 그녀의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 알 수 있었다.
마치 새하얀 천사가 타락하여 타천사가 되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령들의 기억을 통해서도 그녀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레이나와 연결된 모든 것이 단절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노아스. 여기 시신들 전부 묻어. 흔적 하나 남지 않게.”
[그렇게 하지.]
이후 녀석이 땅속으로 사라지자 나는 웅크렸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는 말했다.
“죽기 싫으면 나와.”
내 서늘한 목소리가 수풀 저편에 꽂혔다.
하지만 수풀 너머에선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거기 셋. 내가 지금 인내심이 많지 않아서 거칠게 나갈 수 있으니 빨리 나와.”
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지금 가장 위험한 것이 내가 가진 힘들이다.
대적자로서의 힘. 마왕의 위. 붉은 공허의 왕. 포식의 군주. 데스 로드의 위계.
여신의 권능과 태초의 포식자까지.
닥치는 대로 집어삼킨 힘들은 내 감정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번 밸런스가 무너진 힘을 인지하고 나니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웃는 낯짝으로 이 많은 힘들을 억누르고 제어해왔는지 체감이 될 정도였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스스로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면서도 나는 곧 모습을 드러내는 세 명의 젊은 남녀를 바라보았다.
젊은 소년 하나와 그보다 어린 소녀 하나, 나이가 좀 더 있어 보이는 소녀 하나.
닮은꼴을 보아하니 남매이리라.
“당신은…….”
물론, 초면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레이나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은 레이나가 산적의 탈을 쓴 것으로 추정되는 놈들을 상대로 지켜주고 있던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부서진 마차의 주인.
중간에 레이나가 소리치는 바람에 도망치긴 했지만 아마 신경이 쓰여서 다시 돌아온 것이리라.
“아가씨 조심하십시오! 저자는 위험한 냄새가 납니다!”
그때 추가로 합류한 듯 보이는 사내 세 명이 나와 그들 사이 앞을 막아섰다.
일제히 검을 빼 들고 경계하는 그들을 보며 내가 조용히 물었다.
“여기 있던 여자. 어디로 갔지?”
섬뜩한 투기가 억눌려진 내 물음에 그들이 움찔거렸다.
“그건…….”
“너희를 구하고 있었다. 틀렸나?”
“당신이 그걸 어떻게!”
“질문은 내가 해.”
쿠웅!!!
억누르고 있던 힘이 밸런스가 무너진 채로 한차례 크게 진동했다.
“흐끅!!”
가장 어려 보이는 소녀가 그대로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호위로 보이는 사내들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나머지는 그대로 굳어버린 듯 침묵했다.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는다. 지금까지 잘해왔던 일이다.
여신과 다시 접신해보려 했을 때 그녀가 내게 한 말은 한결같았다.
타나토스가 왜 그렇게 됐는지 생각해보라고?
웃기지 말라 그래라.
넬타리드건 타나토스건 그들이 시작부터 악신이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다.
즉, 여신이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건, 지금 내 행보는 타나토스가 심연의 신으로서 완전히 타락하는 과정과 비슷한 점이 많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신격을 얻을 수 없는 일개 생명체가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힘을 얻었다.
욕심이 있는 생명체이기에 현재를 유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갈구한다.
그게 타락의 근원일까.
그런 내 심성을 대변하듯 마왕의 힘인 마기가 가장 흉포하게 날뛰었다.
가장 막내 힘이었던 주제에 짬이 좀 찼다 이거지.
‘까불지 마라.’
나는 멋대로 날뛰며 흉포성을 드러내는 마기를 사령 마나를 찍어 눌러버렸다.
그리고 혼란스러워하는 원소 마나를 신성력과 섞어 안정화 시킨 뒤 나머지 힘들도 모조리 제어했다.
포식의 권능으로 먹어치웠던 덕에 온전히 내게 가장 알맞게 변환된 힘들이다.
이것도 제어하지 못했다면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을 리도 없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경계하면서도 두려움이 가득해 보이는 그들과 다르게 필사적으로 밸런스가 무너진 힘들을 제어하는 데에 집중한 나는 다시금 잠잠해진 힘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온전히 다시 내 것으로 만들려면 며칠은 계속해서 신경 써야 할 듯싶었다.
그동안 최대한 자제해야 하는 것은 아마 살생이 아닐까.
충동은 한 놈만 남기고 다 죽여버리거나 위협해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그게 시작일뿐 계속해서 그런 일이 반복되면 내 스스로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변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약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레이나의 변화에 영향을 준 것이라면.’
현 상황을 절대 악화시켜선 곤란했다.
“검 내려.”
싸늘한 경고에도 그들은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저들을 통해 어떤 정보를 얻어볼까 했지만 생각해보면 저들도 레이나가 어디로 갔는지 알길은 없을 것이다.
이에 내가 그들을 뒤로한 채 떠나가려던 찰나.
남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던 소녀 하나가 소리쳤다.
“잠시만요! 당신은 그분을 찾고 계신 건가요?!”
“…….”
“저희도 그래요! 저희의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니까요! 보아하니 그분과 관련이 있는 분 같은데 저희와 함께해요. 저희가 정보를 제공해드릴 테니 당신도 저희를 도와주세요.”
“왜?”
내 물음에 소녀는 긴장한 얼굴로 침을 꼴깍 삼켰다.
“감사 인사도 못 드렸어요. 비록 무서워서 도망치긴 했지만. 그분이 아니었으면 저희가 죽었을 거예요.”
그녀의 외침에 나는 억누르던 힘을 완전히 잠재우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자 머리가 다시 맑아지며 판단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내가 말했다.
“레이나는 어디로 향했지?”
“그분의 이름이 레이나 님이셨군요…… 이분들이 조금 전까지 주변 흔적을 조사하셨어요. 말콤. 아는 대로 말씀해주세요.”
“예? 아. 예 아가씨. 그분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만…… 무래도 이곳에서 북쪽으로 향한 듯싶습니다.”
“북쪽이라면…….”
“예, 분쟁지역이지요.”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빨리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요!”
“뭔데.”
“지금 분쟁지역으로 가시는 건가요?!”
“그래.”
내 대답에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안 돼요! 분쟁지역에 아무런 준비 없이 간다면 반드시 사고에 휘말리게 될거에요!”
그녀의 외침에 나는 짜증이 일었다.
분쟁지역이고 나발이고 인간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게 무슨 상관…….
생각하던 내가 또 멈칫했다.
아, 또 이러네.
여긴 참 빌어먹게도 이상한 세상이다. 나는 최대한 충동을 억누르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 건가?”
“저는 이래 봬도 나차 제국에 합병되기 전 일국의 대귀족가 자제였어요. 어느 정도 힘은 남아있는 가문이니 충분히 도울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분쟁지역에 내가 들어가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도와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나에 대해 뭘 믿고?”
“걱정하고 계시잖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그녀의 눈동자에 익숙한 무언가가 보였다.
“너…… 성녀 후보였구나.”
아직 성흔은 없으나 신의 기적이나 은총을 하사받은 인간.
앨리스 대주교나 리나 성녀가 과거 은총을 받았다면 눈앞의 그녀나 해골주제에 신성력을 쓰는 전대 성녀 이오는 기적을 받은 케이스였다.
“그래서. 따라가게 해달라고?”
“강하시죠? 척 보면 알 수 있어요. 저도 따라가게 해주세요.”
“누님!!”
놀란 소년이 외치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 아니면 그분을 찾을 수 없어. 누나는 걱정 마.”
제 동생들을 다독인 그녀가 호위 병력들에게 말했다.
“제가 있으면 분쟁지역에서 자잘한 문제는 다 해결할 수 있어요, 저도 따라가게 해주세요.”
그녀의 제안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가도 왜 하필 분쟁지역으로 가서는…….
최대한 살생을 억제하고 힘을 억누르는 게 도움이 된다면 지금 분쟁지역으로 가서 냅다 때려 부수는 건 최하책이다.
이용할 수 있다면…….
생각을 정리한 나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스릉…….
동시에 허공에서 소환된 붉은 검이 손에 쥐어진다.
“아가씨!!”
놀란 호위 병력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내 검이 움직였다.
서걱!!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무언가가 잘려나간다.
눈을 질끈 감은 소녀는 이내 자신의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깨달았는지 천천히 눈을 떴다.
“무…… 무슨…….”
쿵!!!
이윽고 그들이 발견한 것은 소리 없이 다가온 검은 오우거 한 마리가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채 쓰러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블랙 오우거가 어느새…….”
“그걸 한번에 베어버렸다고?”
단순히 느낀 위압을 넘어 실제로 무력을 본 탓일까 두려움에 경악까지 서린 표정이었다.
“따라와.”
이윽고 나는 내면을 추스르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지금 머리가 좀 아파서 배려가 힘들다.”
이 차원의 알 수 없는 변화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부드럽게 대해주려야 대해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