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4화
“부어라! 마셔라!”
아주 신이 난 듯 술을 퍼마시고 있는 유리아와 점순이, 그리고 그런 둘 사이에 끼여 앉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치킨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륀느까지.
반면 한켠에 앉아 음료수만 홀짝이고 있는 에반젤린은 묘하게 아쉬운 얼굴로 소주잔을 구경한다.
“아하하하하!”
가장 신이 난 것은 에반젤린의 동료 스트리머이자 선배 스트리머, [절제] 박승현이었다.
물론, 신이 난 것처럼 보일 뿐 사실 그의 속은 될 대로 되라 식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에반젤린의 레어에 초대되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그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양반들은 또라이들이지만 그렇기에 이상하리만치 편한 느낌을 주었다.
“흐어어어!!”
그런 분위기 속에서 부어라 마셔라를 해댔으니 무리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
승현은 결국 꽐라가 되고 말았다.
“으으…….”
“자자. 괜찮아요. 세상에 절반은 여자잖아요? 언젠가 좋은 사람 만날 거랍니다.”
“그래. 인간, 뭐…… 나도 아는 건 별로 없지만 적어도 인간은 인간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나름대로 위로를 해보지만 사실 큰 효과는 없으리라.
그가 반쯤 장난으로 레이나에게 호감을 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저씨. 힘내요.”
음료수를 홀짝이며 과자를 으적으적 씹어먹던 에반젤린이 씁쓸하게 웃으며 응원해주자 승현이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에린아 역시 너밖에 없다!”
그가 꺼이꺼이 울며 에반젤린에게 안기려 들자 그녀가 질색하며 그대로 발길질로 승현을 걷어차듯 밀어냈다.
“술 냄새나요. 저리 가요.”
“꺼흐으으…….”
“저기 인간.”
그때 가만히 상황을 보던 점순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왜요.”
“그……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거야?”
“네?”
“아니 뭐…… 난 인간이 아니기도 하고. 세상 빛을 본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기억으론 대충 알고 있지만.”
나비 여제 찬드라의 기억은 있으나 그녀는 나비 여제가 아니었다.
본인의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뒤 그녀에게 찬드라의 기억은 조금 괴리감이 돌 수밖에 없었다.
“으헤헤…… 저도 몰라요.”
하지만 절제가 멀쩡한 상태도 아니고 이꼴이어서야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취중에 흘러나오는 말이 의외의 진리를 품을 경우도 존재한다.
“그냥……”
“그냥?”
“그냥 괴롭네요. 알면 더 힘들어지는 그런 거요.”
그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사랑 이야기라도 나온 덕분일까.
평소에 그런 일에 관심이 있던 에반젤린이 눈을 반짝였다.
“어째서요? 사랑하면 행복한 거 아닌가요?”
“글쎄. 왜 그럴까.”
헛웃음을 지운 채 그가 잔에 소주를 꽐꽐 부었다.
그리고는 홀짝 들이킨 뒤 생각나는 대로 지껄여댔다.
“딜레마 아닐까? 좋아하는데 더 뭔가 해줄 수가 없는 게 괴롭고. 사랑하는데 받지 못하면 괴롭고.”
괴로운 일투성이인데.
“그럼 왜 그런 괴로운 걸 하는 거예요?”
“글쎄. 그건 왜 그럴까.”
“아까부터 자꾸 같은 말만 하잖아요.”
에반젤린이 입을 툭 내밀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니?”
“아…….”
술에 취한 그의 한마디엔 참 깊은 철학이 담겨있었다.
우우웅…….
그때 승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엄마네.”
그가 피식 웃으며 취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사랑하는 아들입니다아~ 아…… 어? 아니 취하긴~ 나 안 취했다. 흐흐흐흐.”
낄낄거리며 말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엉. 걱정 마. 어차피 해외에 분쟁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엉, 그래 푹 쉬어. 나 오늘 여기서 하루 자고 갈게. 엉? 방송? 오늘 휴방이야. 그래 걱정 마. 아유 걱정 마세요. 사모님.”
평소엔 잘 보이지 않는 애교까지 피워가며 통화하던 그가 연락을 끊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누구?”
“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어무니.”
잔뜩 취한 채로 그가 낄낄거렸다.
“늦는다고 걱정하셨나 보네요.”
“아뇨. 우리 어무니는 내가 밖에서 노숙해도 걱정 안 하시는 강심장이시거든.”
낄낄거리던 그가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그냥. 해외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일어났다고 해서. 전화하셨답니다. 뉴스에 뜨고 난리라네요.”
“해외에서요?”
“뭐. 듣기로는 각성자로 보이는 무리가 정부 부처를 습격했다는데. 뭐 해외 분쟁이야 하루 이틀인가. 자 적셔!”
그의 외침에 륀느와 유리아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 * *
나를 따라오는 소녀의 이름은 슈네리아 레켄, 레켄 공작가의 장녀였다.
“그래서. 그 공작가의 아가씨가 왜 습격을 당했는데.”
“나차 제국이 저희 나라를 점령한 뒤에 가장 먼저 한 일은 귀족들을 숙청하는 일이었어요. 그리고. 끝까지 저항했던 제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 대상이셨죠.”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만 보아야 했다는 모양이었다.
타닥…… 탁…….
날이 어두워졌다.
밸런스가 무너진 힘을 억제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나는 무리하게 이동하기보다는 하루 정도 쉬어서 힘을 다시 억누르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나는 레이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를 통해 들었다.
“저는 살아남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어요. 공작가의 자산 절반 이상을 제국에 상납했고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했죠.”
동생들만큼은 살려야 했기에 임시 가주가 된 슈네리아는 공작가의 자산을 아낌없이 털어놓았을 것이다.
“처음으로 나차 제국의 귀족들에게 뇌물을 먹였어요. 자국민에게 매국노라 손가락질당했지만 어쩔 수 없었죠.”
그녀가 자조 섞인 미소를 보였다.
“당신도 제가 더럽나요?”
“더럽냐고? 나는 살면서 뇌물을 실시간으로 받아먹고 있는 존재야.”
담담하게 대답한 나는 모닥불에 꽂아놓은 고기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먹어라. 내일부터 바쁘게 움직일 거니까.”
“당신은…… 정말 성격이 유한 분이네요.”
“웃기고 있네.”
피식 웃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지않았다면 저를 데리고 오시지도 않았겠지요. 강한 힘을 가지고 계시죠? 제가 보기엔 강하다는 정도만 알 수 있지만. 절대 평범한 분은 아니에요.”
“그래서?”
“본래 같았다면 저를 위협해서 정보만 얻고 떠나셔도 문제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데리고 가시잖아요?”
“널 위한 게 아니야.”
“그렇죠.”
그녀는 귀족가의 장녀라는 체면도 잊은 채 고기를 뜯어 먹었다.
“당신이 그런 선택을 내린 건 그분을 위해서가 아닌가요?”
레이나. 그녀를 위해서.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는 그분께 감사를 표하고 싶어 하죠. 당신은 그런 저를 그분께 데려가고 싶어 하시는 거고요.”
“…….”
“제가 감사를 표하게 하고 싶은 거죠? 그분을 위해서.”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자.”
스스로에 대한 여유가 없기 때문일까. 계속해서 그녀에게 쌀쌀맞게 말하고 있는 내 꼬라지가 영 우습게 느껴졌다.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던가요?”
“동생들 살리려고 뇌물 먹였다고.”
“저는 제 동생을 살리려고 뇌물을 먹였다고 한 적이 없는데요.”
“그거나 그거나.”
“쿠쿡…… 역시 좋은 분 맞네요. 나차 제국은 갑작스레 거대해진 탓에 오히려 부패가 덜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자비는 받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왜 황제가 널 죽이려 들었지?”
“방해가 됐으니까요.”
성녀 후보가 된 슈네리아도 거슬리지만, 그녀의 행동이 황제의 분노를 샀던 모양이었다.
“분쟁지역엔 아직 나차 제국에 굴복하지 않은 독립군들이 있어요. 저는 그들에게 물적 지원을 몰래 해주고 있지요. 황제는 그 사실을 알아냈죠. 증거는 없지만 거슬렸을 거예요.”
그래서 산적으로 위장시킨 정규특수부대를 파견했다.
문제는 다 성공한 판에 레이나라는 고춧가루가 흩뿌려졌다는 사실이었다.
“황제는 아마 제가 살아있다는 걸 아는 이상 또다시 죽이려 들 거에요.”
“황제는 죽었어.”
물론, 그 황제가 내 손에 죽은 이상 이 나라는 빠르게 무너질 뿐이다.
“그럴 리가요.”
“내가 죽였거든.”
내 말이 농담으로 들린 것일까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농담 마세요. 그 괴물은 그렇게 쉽게 죽을 괴물이 아니에요.”
“마치 잘 아는듯한 태도네?”
“한때 그의 8번째 후궁으로 들어갈 뻔했으니까요. 조사는 해봤어요.”
후궁? 그 노인의?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딱히 여성 편력이 짙어 보이는 사내는 아니었다.
아마, 문제없는 인질로 삼기 위함이리라.
물론 그것을 제외하고도 눈앞의 슈네리아는 참 예쁘장한 소녀였다.
옅은 헤이즐넛 빛이 감도는 긴 머리카락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서양권보다는 동양권이 적절히 섞인 모습이었다.
이기적인 외모라고 할까.
예쁜 건 사실이지만 흑심이 동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페르세르크의 곁에 있다 보면 자연스레 눈이 높아지게 될 수밖에.
“예전에 독립투사분 한 분이 제국의 열병식 때 암살을 시도한 적이 있어요. 황제의 심장에 검을 꽂았죠. 어떻게 됐을 거 같아요?”
“죽었겠지. 별다른 힘은 없는 노인이었으니.”
“아뇨. 다음날 그는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냈어요. 그 때문에 그의 별명이 붙었죠. 신수의 축복을 받은 불사의 왕이라고.”
리치는 아니었는데. 한번 죽었다?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자 그녀는 황제가 어떤 괴물인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황제에겐 7명의 호위가 있어요. 물론 그들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하나같이 굉장한 무력을 지닌 마스터급 존재라는 말은 들었어요.”
그건 알바가 아니었다. 그 당시 만난 호위도 별다른 건 없었으니 말이다.
“왜 도와달라고 하진 않지?”
내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보기에 나는 강해 보였다면서.”
“네. 맞아요. 가늠할 순 없지만, 집행관들에게 저항할 힘은 가지고 계셔 보이네요.”
“그럼 부탁해봐. 제국을 무너뜨려 줄지 누가 알아?”
“아하하하!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댄 그녀가 씁쓸하게 말했다.
“제국의 병력은 70만이에요. 그리고 그들 중 2만이 특수장비로 무장하고 있죠. 요즘 세상은 단일무력으론 절대 집단을 이길 수 없어요. 전략병기로 취급되던 마스터급 존재도 옛말이죠.”
“그래 보일 수도 있겠지.”
“그래 보일 수도 있는게 아니에요. 다만 조금 이상한 점은 있었어요.”
“이상한 점?”
“네. 나차 제국의 황제. 아브조르바 델레맹코 프라시아스 나차……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시 없을 현군이었고, 성군이었다고 해요. 전쟁을 극도로 싫어하며 누군가를 짓뭉개는 것도 극도로 싫어하는.”
그런 것치고는 누굴 죽이는 데에 거리낌이 없던데.
그래. 일반적인 케이스는 그렇겠지.
“그럼 그녀를 만나면 그녀에겐 도와달라 할 건가?”
“아뇨. 감사를 표하는 것과 별개로 저는 구분을 다른 세계로 도망치게 할 생각이에요. 황제의 병력을 죽였으니 그분에게 지명수배가 걸렸을 테니까요.”
고마움과 별개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 모습에 나는 괜히 호감이 갔다.
괜히 도와주고 싶게.
나는 고민하다 아공간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냈다.
에반젤린에게 주던 보팔레빗의 호출석이었다.
“이거 받아.”
“뭔가요?”
“나중에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걸 손에 쥐고 말해.”
[나타나서 나를 지켜라.]
“후훗. 무슨 전설의 신수님이라도 나오시려나요?”
“글쎄.”
“신수 하니까 생각난 건데 얼마 전부터 대륙 각지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해요. 와이번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검은 용. 그 존재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면 남는 게 없다고 하죠.”
그런 적 없는데?
“그 때문에 여기저기 소문이 많아요. 그런 강대한 존재가 나타나면 끝장이라고 말이에요. 아 걱정 말아요. 아무리 그래도 당신도 그런 존재는 무섭겠죠?”
메가로드리아가?
그 흑룡이?
그 검은 닭둘기가?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무섭겠네.”
그놈이 덤벼들었을 때 벌어질 상황이 말이다.
“자라. 내일부터 움직일 테니.”
“불침번은…….”
“됐다. 밤새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 봐주마.”
“그럴 순 없어요. 민폐는…….”
“그럴 거면 따라오질 말았어야지.”
“…….”
내 한마디에 그녀는 조용히 침낭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갔다.
대귀족가의 장녀가 이런 일에 얼마나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힘을 억제하고 밸런스를 맞추며 날밤을 지새웠고, 아무 일 없이 조용히 하루가 지났다.
이후 그녀의 수하에게 양도받은 말을 타고 평야를 지났을 무렵 끔찍한 냄새가 진동하는 전쟁이 벌어지는 평야에 도착했을 때. 나는 레이나의 조금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